瞞天過海 (만천과해, mántiānguòhǎi)

瞞天過海(만천과해)

瞒天过海(mán tiān guò hǎi)


三十六計(삼십육계) 勝戰計(승전계) 제1계. 하늘을 속여 바다를 건너다.

☞ Deceive the heavens to cross the ocean


“만천과해”계책은 원래 “진룡천자(眞龍天子)”라 일컬었던 당 태종을 속여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대해를 건너게 한 고사에서 나왔다. 명나라 때 쓰여진 백과사전인 <영락대전(永樂大典)>이 그 출전이다.

당나라 태종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동쪽의 고구려를 침공하려고 할 때의 일이었다. 바닷가에 이르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 했는데, 워낙 내륙에서 자란 당태종인지라 처음 보는 바다의 모습에 위축되어 배로서 바다를 건너는 것은 무리라 하여 군사를 돌리려 했었다. 그런데 마침 군사를 돌리려는 당태종 앞에 일대의 토호를 자처한 노인이 나타나 30만 군대를 위한 양식을 마련했다며 당태종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었다. 당태종으로서도 아무래도 지방의 권력과도 친해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그 초대에 응해 먹고 마시며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당태종이 일어나 보니 어느새 망망대해에 와 있는 것이었다. 바로 전날 노인의 집이라 초대된 연회장이 배 위였던 것이고, 노인은 막 당태종의 휘하로 들어와 있던 설인귀가 분장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당태종이 바다에 겁을 먹어 군대를 되돌릴 것 같자 노인으로 분장하여 당태종이 자신도 모른 새 배에 오르도록 하고는 당태종이 잠든 사이 배를 출발시켜버린 것이다. 말 그대로 천자, 즉 황제를 속여 바다를 건너는 것. 그래서 만천과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춘추시대 진문공의 일화가 있다. 진문공은 공자시절 중이라 불리웠었는데, 아버지인 진헌공의 정실로서 해제를 낳아 그를 왕으로 올리고자 하는 여희의 음모로 이오와 더불어 65살 다시 진나라로 돌아와 즉위하기까지 열국을 떠돌며 망명생활을 해야 했었다. 그 가운데 특히 제나라에서의 7년이 유독 사무쳤었는데, 아마도 그 시절이 오랜 망명기간 가운데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던 때문이었다.

당시 제나라의 군주는 춘추오패의 첫머리로 꼽는 제환공이었다. - 중이의 동생인 이오를 진의 목공과 함께 진의 왕으로 올린 것도 바로 이 환공이었다. - 제환공은 중이의 인품을 높이 사서 그에게 자신의 딸 제강과 수레 20승, 말 18필을 주어 후대했는데, 이미 형인 신생이 죽고, 다시 여희와 해제가 죽자 이오가 진혜공이 되어서는 적나라에 망명해 있던 그를 죽이려 하는 등, 참으로 바람잘 날 없던 삶이라, 더구나 당시 중이의 나이는 50을 넘어 있었다. 지금이야 50이면 한창 나이이지만 당시로서는 이미 죽을 날을 잡아 놓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중이로서도 이래도 편안히 남은 생을 보내자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 중이는 혼자몸이 아니었다. 그를 쫓아 그에게 일신을 의탁한 아홉 명의 신하가 있었다. 그들로서는 중이가 한시라도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 일을 도모하여 뜻을 이루어야 할 터인데 저렇게 당장의 편안함에 길들여져 큰 뜻을 잊은 채 허송세월만 하고 있으니 이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더구나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중이의 동생인 이오 - 즉 진혜공의 학정과 무능으로 말미암아 크게 어지러운 상황이었던데다, 제환공이 죽고 제나라의 내정 또한 혼란하여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으니 더욱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이는 그런 신하들의 마음을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을 찾아가도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쫓겨날 뿐, 결국 몇 번을 그렇게 중이를 만나지도 뫃가고 쫓겨나게 되자 신하들은 아예 사냥을 빌미로 중이를 밖으로 불러내서 그를 납치하려는 계획까지 세우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뜻하지 않게 제환공의 딸이기도 한 중이의 부인 제강이 끼어들었다.

시녀들을 통해 호언 등의 계획을 들은 제강은 은밀히 호언을 찾아가 진의 내정이 어렵고 혼란스러워 모든 대부와 백성들이 중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처럼 안락함에 빠져 움직이려 하지 않으니 그것은 장부의 도리가 아니라며 자신이 나서서 돕겠노라 말했다. 자신이 공자 중이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만들 터이니, 그때 몰래 중이를 업어 마차에 실어 목적한 곳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제환공의 딸다운 배포라 할 터인데, 이전부터도 제강은 몇 번이고 중이로 하여금 진나라의 공자로서 자신을 자각하여 진으로 돌아가 큰 뜻을 펼칠 것을 권하고 했었다. 그럴 경우 제강 자신이 버려질 수 있음을 알면서도 한 여자로서보다는 진나라 공자 중이의 처로서, 제환공의 딸이자 제나라의 공주로서 처신을 선택한 것이었다. 참으로 독심장부라고나 할까?

아무튼 호언 등과 그렇게 약속하고 돌아온 제강은 중이를 만나자 먼저 그 신하들이 중이를 모시고 다른 나라로 가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음을 알고 있다며 중이더러 자신을 버릴 것이냐고 다그쳤다. 당연히 금시초문인 중이는 펄쩍 뛰었다. 그는 그때까지도 사랑스런 제강과 제나라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겨우 마음이 놓이는 표정을 지어 보인 제강은 마치 다짐이라도 하려는 듯 중이에게 함께 술을 마시며 밤을 지새자고 제안했다. 그야말로 중이가 떠날 것을 걱정하다가 겨우 마음을 놓이게 된 처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중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호언 등이 몰고 있는 마차 안이었다. 제나라의 국경도 예전에 넘어 있었고 다시 돌아가려 해도 이미 제나라를 떠나온 신하들은 다시 제나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고, 아마 돌아간다고 해도 예전과 같은 생활은 누리지 못할 것이었다. 잠시 술에 취해 잠든 사이 일은 이렇게 완전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제강의 손으로 하늘을 가려 바다를 건너는 계책에 당한 것이니, 중이도 마침내 제나라에서의 생활에 대한 미련을 모두 접고 신하들이 이끄는 대로 자신의 운명이 가리키는 대로 따르게 되었다.

그렇게 중이는 제나라를 떠나 조나라로 갔다가 다시 송나라로, 송나라에서 또 초나라로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 마침내 진혜공에 이은 진회공의 신의없음과 포악함에 질려버린 진목공의 후원을 받아 그로부터 군사를 빌려 진나라로 돌아가 동생의 아들이기도 한 회공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바로 춘추오패에서 빠지지 않는 세 자리 가운데 하나인 진문공이다. 주왕실의 반란을 진압하고 천토의 회맹으로써 춘추시대의 두번째 패자가 되니, 불과 십 여 년의 짧은 치세지만 이때 진나라는 명실상부한 중원의 패자로서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가히 대단한 능력이라 하겠는데, 거기에는 여자로서의 자신을 희생한 제강의 현숙하면서도 치밀한 노력이 있었다. 진문공 또한 패자였으니 태종과 같이 이것도 만천과해라 하겠다.

그로부터 파생된 뜻은, 위장수단을 사용하여 공개적으로 가짜의 상을 만들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경계심을 풀게 하고, 없는 듯 하면서 있고, 가짜인 듯 하면서 진짜인 듯 만들어 문제되는 것들을 피하고 난관을 극복함으로써 상대방이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승리해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뜻한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 평상시 습관처럼 보이면 의심을 품지 않는 법이다. 은밀한 계략과 공개적인 형식은 서로 상반되지 않고, 반대로 음모는 밖으로 드러난 공개적인 행위 속에 감추어져 있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역]에서 태음이 바로 태양인 이치와 같다.

36계의 제1계인 만천과해는 승전계(勝戰計)에 속한다. 아군의 형세가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을 때 말을 타고 적을 압도하는 작전인 것이다.

흔히 '兵法'이라 하면, 소수의 아군으로 다수의 적군을 이기는 '신비한' 술책 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병법의 기본은 어디까지나 '다수의 아군으로 소수의 적군을 압박하여' 이기는 것이다. 손자병법에서도, 謨攻(모공)편에 이르길, "...그러므로 전쟁의 원칙은 병력이 적군의 10배일 때에는 적을 포위하고, 5배일 때에는 적을 공격하며, 2배일 때에는 계략을 써서 적을 분산시키며, 병력이 적과 비슷할 때에는 전력을 다하여 싸워야 하며, 병력이 적군보다 적을 때에는 적과 부딪치지 말고 싸움터에서 벗어나야 하며,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전투를 피하여야 한다..." 라고 하고 있다.

삼십육계의 구조도 위에 얘기한 손자병법 모공편의 문구에 따라 이루어져 있다. 적보다 우세할 때의 '승전계', 적과 세력이 비슷할 때의 '적전계', 적을 공격하기 위한 '공전계', 공방이 혼란할 때의 '혼전계', 다른 아군과 합세하여 싸울 때의 '병전계', 그리고 아군이 불리할 때의 '패전계' 와 같다.

삼십육계 원문에는 '만천과해'에 대한 짤막한 해설이 붙어 있다.

"아군의 수비가 안전하다고 생각되면 자칫 경계심이 흩어지기 쉽다. 또한 사람은 흔히 보아온 것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지 않게 된다. 그러한 약점에 계략을 찔러넣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헛점을 찌르는 계략은 대수롭지 않게 눈에 뜨이는 곳에 깃들게 하는 것이다. 꼭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備周則意怠,常見則不疑.陰在陽之內,不在陽之對.太陽,太陰.]"

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적을 방심하게 하고, 그것에 적이 익숙해졌을 때, 그 틈을 찌르는 계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만천과해와 관련하여 많이 드는 예는 삼국지의 태사자 예이다.

북해 태수 공융(孔融)이 황건적에게 포위되었을 때였다. 공융에게 평소 은혜를 입은 태사자의 모친은 공융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태사자에게 도우러 가라고 한다. 이에 태사자는 밤을 틈타 황건적의 포위망을 지나 공융에게로 간다. 공융은 유비에게 원군을 부탁하고자 하고, 이 임무를 태사자에게 부탁한다. 태사자(太史慈)는 포위망을 돌파하여 원병을 청하러 가야하나, 적의 포위망이 워낙 튼튼하여 쉽게 돌파하지 못한다.

그는 활과 과녁을 두 기사에게 들리고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성안에 있는 군사나 성밖에 있는 적병들이 이를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 그러나 태사자는 태연히 말을 끌고 성 가까이에 있는 언덕에 과녁을 세우고 활쏘기 연습을 시작했다. 이윽고 연습이 끝나자 그는 다시 성안으로 돌아왔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이렇게 활쏘기 연습을 거듭했다. 그러자 성밖에 있는 적병들 중에는 그것을 구경하는 자도 있고, 드러누워 낮잠을 자는 자도 있었다. 그는 변함없이 이렇게 활쏘기를 계속하여, 사흘째가 되자 황건적들은 이제 그에게 아무런 관심조차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때를 틈타 태사자는 갑자기 말 위에 올라 채찍을 휘두르며 비호처럼 적의 포위망을 뚫었다. 적들이 속았구나 하고 손을 쓰려 했을 때 그는 이미 멀리 가버린 후였다. 태사자는 말을 채찍질하여 황건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 유비에게 구원을 청하게 된다. [三國志(正史) 吳志 태사자전]

분명히 뜻풀이만으로 보자면 태사자의 예는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勝戰計' 즉, 아군이 '우세할 때' 쓰는 계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적을 방심하게 하고 그 틈을 찌른다'는 점에서는 타당하지만, 그보다 이전의 '승전계'라는 전제를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또다른 예로는 삼국시대 오나라 손책의 예를 들 수 있다.

삼국 시대 오나라의 손책(孫策)이 수일을 연하여 회계성을 쳤으나 성은 좀처럼 깨어지지 않았다. 성벽은 높고 해자는 또한 넓고 깊었다. 손책이 무리를 모아 놓고 성 칠 일을 의논하니, 군중에 함께 따라와 있던 그의 숙부 손정(孫靜)이 계책을 말했다.

"성이 원체 견고하고 왕랑이 또한 죽기로써 지키는 터이라, 이대로 쳐서는 깨뜨리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이제 회계땅의 전량(錢糧)이 태반이나 사독에 있고, 그곳이 여기서 불과 수십 리니, 먼저 그곳을 점거하는 것이 어떨까? 이것이 이른바 '공기무비(攻其無備)요 출기불의(出其不意)'라, 그 방비 없음을 치고, 예상치 못한 때에 나아간다는 것이 아니겠느냐."

손책은 크게 기뻐하였다.
"숙부님의 묘계로 족히 적을 깨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즉시 각문에 영을 내려 불을 밝히며 기호(旗號)를 많이 세워 의병(擬兵)을 삼게 하고, 밤을 이용하여 에움을 푼 다음 사독으로 가기로 했다.

그때 한 장수가 말했다.
"주공께서 대군을 거두시어 떠나는 것을 알게 되면, 적이 필연코 성을 나와 뒤를 쫓을 것이니 기병(奇兵)을 쓰시는 것이 마땅할까 합니다."

"내 이미 준비를 하여 놓았네. 회계성은 오늘밤 안으로 우리 장중에 들어오게 될 걸세."

손책의 군마가 물러갔다는 첩보를 받은 회계성의 장수 왕랑은 무리들과 함께 성루로 올라갔다. 성밖을 두루 살펴보니, 성 아래에 연기와 불이 함께 일어나며 무수한 정기(旌旗)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왕랑이 마음에 의심하기를 마지않을 때, 부장 주흔이 말했다.
"손책이 겁을 집어먹고 군사를 거두어 달아나는가 봅니다. 그래서 정기를 휘날려 우리를 의심케 하는 것이니, 지금 곧 군사를 내시어 뒤를 치도록 하십시오."

이때 한 장수가 말했다.
"손책이 이번에 간 것이 혹시 사독을 치기 위함이나 아닐까요. 일군을 따로 뽑아 뒤를 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랑은 드디어 뜻을 정하였다.
"사독은 곧 우리의 둔량처(屯糧處)이니 아무래도 방비를 엄히 해야만 하겠소."

왕랑의 군사는 남으로 사독을 향해 급히 뒤를 쫓아 20여 리를 갔다. 때는 초경이 가까운데, 갑자기 밀림속에서 북소리가 크게 울리며 횃불이 일시에 일어났다. 왕랑의 군사들이 깜짝 놀라 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려 할 때, 한 장수가 창을 빗겨 잡고 말을 내달아 나오니 그는 바로 손책이었다. 이 싸움에서 왕랑은 크게 패하여 마침내 성을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는데, 이는 바로 상대를 속여 그 약점을 누르고 때를 보아 기습하여 전승을 거둔 예이다.

또다른 예로는 전국시대 초기, 魏文侯(위문후)가 중산국을 정벌하기 위해 元帥(원수)로 삼은 '악양'의 사례가 있다.

위나라는 晉(진)나라가 나뉜 삼국(위, 조, 한) 중의 하나이다. 이때 晉의 동쪽에 中山國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는 진나라에 계속 조공을 바치고 있었는데 진이 삼국으로 나뉜 후로는 어느 나라를 섬겨야 할지 몰라서 아무 곳에도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중산국의 위치는 서쪽의 조나라와 가깝고 남쪽의 위나라와는 꽤 먼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나라가 중산국을 차지하면 위나라는 북쪽으로부터 상당한 압력을 받을 것이 뻔했다.

중산국을 치기로 마음먹은 위문후는 누구를 원수로 삼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 때, 책황이 악양을 천거한다. 하지만 다른 신하들은 악양의 아들인 악서가 중산국에서 벼슬을 삼고 있다는 이유로 악양을 원수로 삼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위문후가 악양을 불러 물어보니, 악양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어찌 公事를 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한다. 이에 위문후는 악양을 원수로 삼아 중산국을 치게 한다.

악양의 병법은 탁월하여 중산국의 병사들을 계속 이겨나가, 마침내 중산국의 수도인 중산성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중산국의 임금인 희굴은 악양의 아들인 악서를 내세워서 '항복하기 위해서는 임금과 신하가 상의할 시간이 필요하니 한달간의 말미를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악양이 승낙하자 희굴은 악양이 아들인 악서의 처지를 걱정하여 공격을 미루는 것으로 생각했다. 한달이 지나도 뾰족한 계책이 서지 않자 희굴은 또 악서를 보내 다시 한달의 여유를 얻어낸다. 이렇게 악양은 악서에게 세 달의 여유를 주었다.

그러자 중산국은 물론 위나라의 병사들까지도 '악양은 아들을 걱정하여 중산국을 치지 않을 것이다'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또한 조정에서는 일조에 원수가 된 악양을 시기하는 대신들이 위문후에게 악양을 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문후는 악양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때때로 사자를 보내 악양을 위로하고, 악양이 돌아오면 하사하기 위하여 도성 안에 좋은 집까지 마련해 두었다.

한 편, 악양은 약속한 3개월이 지나도 중산국이 항복을 하지 않자 병사들에게 총공격을 준비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병사들은 또다시 한달의 여유를 줄 것이 뻔한데 뭐하러 준비를 하느냐며 불만을 터뜨린다. 그러자 악양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중산국을 치러 온 것은 그 임금이 무도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중산국을 위나라에 영원히 편입시켜야 한다. 우리가 처음에 힘으로 중산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나, 그렇게 하면 백성들은 상처를 입고 우리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산국은 결코 위나라 땅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기다려 온 것은 백성들을 구하고 그들을 위나라의 백성으로 삼기 위함인 것이다."

사태가 급해진 중산국에서는 악서를 인질로 삼으려 하나 악양은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너는 참으로 불초한 자식이다. 벼슬을 살면서도 그 나라를 위해 계책을 세우지 못했고, 적과 싸워 이기지도 못했으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또 나라가 망하게 되었으면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화평을 청하도록 권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해야 하거늘, 그런 것도 못하고 부끄럽지 않느냐! 너 같은 놈을 살려두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죽여야겠다!"

악양은 이렇게 말하며 스스로 활을 들어 악서를 쏘려 했다. 그러자 악서는 황급히 숨어 들어갔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희굴은 악서를 죽여 그 시체로 국을 끓여 악양에게 보낸다. 악양이 충격을 받은 틈을 타서 공격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악양은 오히려 악서의 머리를 보고 꾸짖으며 국을 다 먹었다. 그러고는 중산국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 임금이 국을 보내주어 잘 먹었다. 중산성을 함락하는 즉시 내 너희 임금에게 직접 감사하리라. 너는 임금에게 돌아가 우리 군중에도 국을 끓이는 가마솥이 있음을 알려라!"

이후 악양은 중산국을 완전히 점령하고, 중산국 임금은 자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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