借刀殺人(차도살인)
借刀杀人(jièdāoshārén)
借 빌 차,빌릴 차 | 刀 칼 도 | 殺 죽일 살,감할 살, 빠를 쇄, 맴 도는 모양 설, 윗사람 죽일 시 | 人 사람 인 |
三十六計(삼십육계) 勝戰計(승전계) 제3계. 칼을 빌려 사람을 죽인다는 뜻으로, 남을 이용(利用)하여 사람을 해(害)치는 수단(手段)을 이르는 말.
To kill somebody by another's hand; to make use of one person to get rid of another.
To Get others to do one’s dirty work
比喻自己不露面而是借助或利用别人去害人。
Showing posts with label 三十六計:勝戰計.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三十六計:勝戰計. Show all posts
趁火打劫 (진화타겁, chènhuǒdǎjié)
趁火打劫(진화타겁)
三十六計 勝戰計 第五計. 불난 틈을 타서 도적질을 하다. 다른 사람이 위험하거나 위급한 틈을 타서 남의 권익을 침범하다.
불난 집에 들어가 도둑질하다. 쉽게 말하자면 '불난 집에 도둑 든다'는 얘기다. 적의 재난과 내분, 외환 등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재빨리 쳐들어가서 승리를 주우라는 이야기이다.
원문의 풀이글은 다음과 같다.
"적이 당한 재난이 클때, 그것을 기회로 삼아 형세에 편승하여 승리를 거둔다. 그것이 강함(剛)으로 부드러움(柔)을 끊는다는 것이다.[敵之害大,就勢取利,剛決柔也.]"
예를 살펴보자.
초한지를 보면 촉으로 쫓겨간 유방이 한신을 앞세우고 진창으로 밀고 나와 순식간에 관중을 점령해 버린다. 물론 이는 三秦王(삼진왕)들과 항우의 방심이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항우가 제나라의 반란을 제압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제나가의 반란이 없었다면 항우가 단번에 유방을 제압해 버렸을 것이다.
항우는 秦을 무너뜨린 후 논공행상을 통해 용감히 싸운 장수들을 왕으로 임명했는데, 그 이전에 정치적으로 병사들을 모으고 외교적으로 힘을 기울였던 원래의 왕들은 모두 폐하여졌다. 이에 불만을 품은 제나라의 전영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 그쪽에 항우가 가 있던 사이에, 유방이 슬그머니 관중을 차지해 버린 것이다. 그 이후에 항우가 유방을 토벌하려 하자 유방은 항우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자신은 고향이 그리워 나왔을 뿐이지, 서초패왕과 다툴 생각이 없다. 오히려 제나라 쪽이 위험하니 그 쪽에나 신경을 쓰라'는 내용이었다. 항우는 그 말을 믿고 제나라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사이에 유방은 야금야금 세력을 넓혀갔던 것이다.
또한 유방이 항우를 최종적으로 이기는 데에는 한신의 힘이 컸다. 한신은 유방의 휘하군이 아니라 별동대로서 활약했다. 항우가 유방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사이에 한신이 항우가 없는 곳에서 세력을 키워 마침내는 항우와 유방보다도 큰 세력을 이루게 된다.
역사에서 가장 흔히 살펴볼 수 있는 예는 '적의 군주나 장수가 죽어서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에 쳐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그에 못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적이 喪을 당했을 때 공격하는 것은 仁義에 어긋납니다' 라며 말리는 신하들의 모습이다. 그만큼 성공한 예도 많고, 실패한 예도 많다.
三國志演義에 등장하는 일화를 하나 살펴보자.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서주에서 살해당하자, 조조는 병사들을 거느리고 서주를 짓밟는다. 그 틈을 타서 승냥이 여포가 연주를 함락시키고 복양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조는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하지만 서전에서 여포에게 패하고, 거기에 복양에서 여포의 계략에 빠져 목숨을 잃을 뻔한다. 겨우 살아난 조조는 복수를 꾀한다.
"하찮은 놈의 계략에 빠졌구나. 내 반드시 복수해 주리라."
곽가가 말한다. "어서 계책을 펴소서."
"지금은 놈들의 계책을 역이용해야겠다. 내가 화상을 입고 火毒(화독)이 퍼져 오경 때 이미 죽었다고 거짓말을 퍼뜨려라. 여포는 반드시 군사를 이끌고 공격해 올 것이다. 우리는 마릉산 속에 숨어 있다가 그들을 치면 여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군사들에게 상복을 입히고 發喪(발상)준비를 하도록 하며 조조가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소식을 들은 여포는 즉시 공격해 들어왔으나 미리 대비하고 있던 조조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겨우 복양으로 돌아갔다.
이는 진화타겁을 역으로 이용한 예이다. 위에서도 얘기했듯이,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喪을 기화로 공격하거나 이를 역으로 이용하는 계략이 부지기수였다.
三國志演義에서 喪을 이용한 계략이라 하면, 다음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도망치게 했다'는 이야기.
오장원에서 대치하고 있던 魏와 蜀. 제갈량이 계속 싸움을 걸어도 절대로 싸우지 않던 사마의는 어느 날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제갈량이 죽었음을 예감한다. 그리고 촉군이 물러가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는 제갈량이 죽었다고 확신하고 병사들을 이끌고 추격에 나선다. 하지만 후미의 사륜거에 제갈량이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크게 놀라 도로 달아난다. 후에 제갈량이 생전에 만들어 놓은 나무인형이었음을 알고는 제갈량의 재주에 감탄해 마지 않는다.
趁火打劫 (chènhuǒdǎjié)
趁 좇을 진 | 火 불 화,화반 화 | 打 다스 타 | 劫 빼앗을 겁,겁 겁 |
三十六計 勝戰計 第五計. 불난 틈을 타서 도적질을 하다. 다른 사람이 위험하거나 위급한 틈을 타서 남의 권익을 침범하다.
불난 집에 들어가 도둑질하다. 쉽게 말하자면 '불난 집에 도둑 든다'는 얘기다. 적의 재난과 내분, 외환 등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재빨리 쳐들어가서 승리를 주우라는 이야기이다.
원문의 풀이글은 다음과 같다.
"적이 당한 재난이 클때, 그것을 기회로 삼아 형세에 편승하여 승리를 거둔다. 그것이 강함(剛)으로 부드러움(柔)을 끊는다는 것이다.[敵之害大,就勢取利,剛決柔也.]"
예를 살펴보자.
초한지를 보면 촉으로 쫓겨간 유방이 한신을 앞세우고 진창으로 밀고 나와 순식간에 관중을 점령해 버린다. 물론 이는 三秦王(삼진왕)들과 항우의 방심이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항우가 제나라의 반란을 제압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제나가의 반란이 없었다면 항우가 단번에 유방을 제압해 버렸을 것이다.
항우는 秦을 무너뜨린 후 논공행상을 통해 용감히 싸운 장수들을 왕으로 임명했는데, 그 이전에 정치적으로 병사들을 모으고 외교적으로 힘을 기울였던 원래의 왕들은 모두 폐하여졌다. 이에 불만을 품은 제나라의 전영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 그쪽에 항우가 가 있던 사이에, 유방이 슬그머니 관중을 차지해 버린 것이다. 그 이후에 항우가 유방을 토벌하려 하자 유방은 항우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자신은 고향이 그리워 나왔을 뿐이지, 서초패왕과 다툴 생각이 없다. 오히려 제나라 쪽이 위험하니 그 쪽에나 신경을 쓰라'는 내용이었다. 항우는 그 말을 믿고 제나라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사이에 유방은 야금야금 세력을 넓혀갔던 것이다.
또한 유방이 항우를 최종적으로 이기는 데에는 한신의 힘이 컸다. 한신은 유방의 휘하군이 아니라 별동대로서 활약했다. 항우가 유방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사이에 한신이 항우가 없는 곳에서 세력을 키워 마침내는 항우와 유방보다도 큰 세력을 이루게 된다.
역사에서 가장 흔히 살펴볼 수 있는 예는 '적의 군주나 장수가 죽어서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에 쳐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그에 못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적이 喪을 당했을 때 공격하는 것은 仁義에 어긋납니다' 라며 말리는 신하들의 모습이다. 그만큼 성공한 예도 많고, 실패한 예도 많다.
三國志演義에 등장하는 일화를 하나 살펴보자.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서주에서 살해당하자, 조조는 병사들을 거느리고 서주를 짓밟는다. 그 틈을 타서 승냥이 여포가 연주를 함락시키고 복양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조는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하지만 서전에서 여포에게 패하고, 거기에 복양에서 여포의 계략에 빠져 목숨을 잃을 뻔한다. 겨우 살아난 조조는 복수를 꾀한다.
"하찮은 놈의 계략에 빠졌구나. 내 반드시 복수해 주리라."
곽가가 말한다. "어서 계책을 펴소서."
"지금은 놈들의 계책을 역이용해야겠다. 내가 화상을 입고 火毒(화독)이 퍼져 오경 때 이미 죽었다고 거짓말을 퍼뜨려라. 여포는 반드시 군사를 이끌고 공격해 올 것이다. 우리는 마릉산 속에 숨어 있다가 그들을 치면 여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군사들에게 상복을 입히고 發喪(발상)준비를 하도록 하며 조조가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소식을 들은 여포는 즉시 공격해 들어왔으나 미리 대비하고 있던 조조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겨우 복양으로 돌아갔다.
이는 진화타겁을 역으로 이용한 예이다. 위에서도 얘기했듯이,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喪을 기화로 공격하거나 이를 역으로 이용하는 계략이 부지기수였다.
三國志演義에서 喪을 이용한 계략이라 하면, 다음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도망치게 했다'는 이야기.
오장원에서 대치하고 있던 魏와 蜀. 제갈량이 계속 싸움을 걸어도 절대로 싸우지 않던 사마의는 어느 날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제갈량이 죽었음을 예감한다. 그리고 촉군이 물러가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는 제갈량이 죽었다고 확신하고 병사들을 이끌고 추격에 나선다. 하지만 후미의 사륜거에 제갈량이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크게 놀라 도로 달아난다. 후에 제갈량이 생전에 만들어 놓은 나무인형이었음을 알고는 제갈량의 재주에 감탄해 마지 않는다.
圍魏救趙 (위위구조, wéiwèijiùzhào)
圍魏救趙(위위구조)
围魏救赵(wéi wèi jiù zhào)
圍 에워쌀 위,나라 국 | 魏 성씨 위,빼어날 외 | 救 구원할 구 | 趙 나라 조,찌를 조 |
위(魏)나라를 포위하여 조(趙)나라를 구원하다. 적의 후방 근거지를 포위 공격해서 공격해 온 적이 스스로 물러가게 하는 전술로 三十六計(삼십육계) 勝戰計(승전계) 제2계이기도 하다.
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하다. 《사기·손자오기열전(史記·孫子吳起列傳)》에서, 위나라가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 공격하자, 제(齊)나라가 위나라의 수도를 공격하여 위나라의 군대로 하여금 철군하게 함으로써 조나라를 구원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삼십육계 원문에는 다음과 같은 해설이 붙어있다.
"모여있는 적보다는 분산되어 있는 적을 쳐야 유리하고, 적의 강점보다는 적의 약점을 공격해야 한다.[共敵不如分敵,敵陽不如敵陰.]"
사례를 간략하게 살펴보자면 이야기는 이렇다.
戰國時代. 孫子(손자)라 불리운 孫武(손무)의 후손이며, 또한 그 자신도 孫子(손자)로 불리우는 손빈의 이야기이다. 손빈은 동문수학하던 방연의 초청으로 위나라에 오나, 그 재능을 시기한 방연의 계략에 빠져 다리를 잘리는 형벌을 받게 된다. 이후 제나라로 도망쳐 오게 된다.
한편 위나라의 위혜왕은 방연에게 '조나라에 빼앗긴 中山땅을 되찾아 오라'고 명한다. 이에 방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산은 위나라에서는 멀고 조나라와 가까우니, 차라리 가까운 조나라 땅을 그만큼 빼앗는 것이 낫습니다. 가까운 한단 땅을 빼앗도록 하겠습니다."
마침내 방연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한단 땅을 포위했다. 그러자 조나라 왕은 제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위나라 군사가 우리나라로 쳐들어 왔습니다. 우리나라를 도와주시면 중산 땅을 바치겠습니다."
이에 제위왕은 손빈을 대장으로 삼으려 하나, 손빈이 사양하여 전기를 대장으로 삼고 손빈을 군사로 삼았다. 전기가 군사를 거느리고 한단 땅으로 속히 출진하려 하자, 손빈이 만류했다.
"우리가 지금 한단 땅에 가 보아야, 이미 함락된 뒤일 것이오. 그러니 우리는 군사를 거느리고 조나라에 들어서며, 위나라 양릉 땅을 치러 간다는 소문을 내야 하오. 그러면 방연은 양릉을 지키기 위해 돌아올 것이오. 우리는 그 때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을 치면 되오."
이에 전기는 군사를 거느리고 출진했다.
한단성의 군사들은 제나라의 구원병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제나라 군사는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방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방연이 막 항복문서를 받는데 세작(첩자)이 들어와 아뢴다.
"제나라 장수 전기가 우리나라 양릉 땅을 치러 가는 중입니다."
"만일 양릉 땅을 잃으면 수도가 위태로워진다. 속히 돌아가야겠구나."
이에 방연은 황급히 양릉 땅으로 출발했다.
위나라 군사가 계릉 땅 20리 밖에 이르렀을 때 제나라 군사와 만났다. 손빈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므로 위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이것이 바로 '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한다'는 '圍魏救趙' 이다.
관련한자
참조어
孫龐鬪智(손방투지) |
史記, 사기, 史記:孫子吳起列傳, 사기:손자오기열전, 三十六計, 삼십육계, 三十六計:勝戰計, 삼십육계:승전계
围魏救赵(wéi wèi jiù zhào)
圍 에워쌀 위,나라 국 | 魏 성씨 위,빼어날 외 | 救 구원할 구 | 趙 나라 조,찌를 조 |
위(魏)나라를 포위하여 조(趙)나라를 구원하다. 적의 후방 근거지를 포위 공격해서 공격해 온 적이 스스로 물러가게 하는 전술로 三十六計(삼십육계) 勝戰計(승전계) 제2계이기도 하다.
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하다. 《사기·손자오기열전(史記·孫子吳起列傳)》에서, 위나라가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 공격하자, 제(齊)나라가 위나라의 수도를 공격하여 위나라의 군대로 하여금 철군하게 함으로써 조나라를 구원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삼십육계 원문에는 다음과 같은 해설이 붙어있다.
"모여있는 적보다는 분산되어 있는 적을 쳐야 유리하고, 적의 강점보다는 적의 약점을 공격해야 한다.[共敵不如分敵,敵陽不如敵陰.]"
사례를 간략하게 살펴보자면 이야기는 이렇다.
戰國時代. 孫子(손자)라 불리운 孫武(손무)의 후손이며, 또한 그 자신도 孫子(손자)로 불리우는 손빈의 이야기이다. 손빈은 동문수학하던 방연의 초청으로 위나라에 오나, 그 재능을 시기한 방연의 계략에 빠져 다리를 잘리는 형벌을 받게 된다. 이후 제나라로 도망쳐 오게 된다.
한편 위나라의 위혜왕은 방연에게 '조나라에 빼앗긴 中山땅을 되찾아 오라'고 명한다. 이에 방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산은 위나라에서는 멀고 조나라와 가까우니, 차라리 가까운 조나라 땅을 그만큼 빼앗는 것이 낫습니다. 가까운 한단 땅을 빼앗도록 하겠습니다."
마침내 방연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한단 땅을 포위했다. 그러자 조나라 왕은 제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위나라 군사가 우리나라로 쳐들어 왔습니다. 우리나라를 도와주시면 중산 땅을 바치겠습니다."
이에 제위왕은 손빈을 대장으로 삼으려 하나, 손빈이 사양하여 전기를 대장으로 삼고 손빈을 군사로 삼았다. 전기가 군사를 거느리고 한단 땅으로 속히 출진하려 하자, 손빈이 만류했다.
"우리가 지금 한단 땅에 가 보아야, 이미 함락된 뒤일 것이오. 그러니 우리는 군사를 거느리고 조나라에 들어서며, 위나라 양릉 땅을 치러 간다는 소문을 내야 하오. 그러면 방연은 양릉을 지키기 위해 돌아올 것이오. 우리는 그 때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을 치면 되오."
이에 전기는 군사를 거느리고 출진했다.
한단성의 군사들은 제나라의 구원병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제나라 군사는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방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방연이 막 항복문서를 받는데 세작(첩자)이 들어와 아뢴다.
"제나라 장수 전기가 우리나라 양릉 땅을 치러 가는 중입니다."
"만일 양릉 땅을 잃으면 수도가 위태로워진다. 속히 돌아가야겠구나."
이에 방연은 황급히 양릉 땅으로 출발했다.
위나라 군사가 계릉 땅 20리 밖에 이르렀을 때 제나라 군사와 만났다. 손빈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므로 위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이것이 바로 '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한다'는 '圍魏救趙' 이다.
관련한자
참조어
孫龐鬪智(손방투지) |
史記, 사기, 史記:孫子吳起列傳, 사기:손자오기열전, 三十六計, 삼십육계, 三十六計:勝戰計, 삼십육계:승전계
聲東擊西 (성동격서, shēngdōngjīxī)
聲東擊西(성동격서)
声东击西(shēngdōngjīxī)
聲 소리 성 | 東 동녘 동 | 擊 칠 격 | 西 서녘 서 |
三十六計 勝戰計 第六計. 동쪽에 소리내고 서쪽을 친다. 상대편에게 그럴듯한 속임수를 써서 공격하는 것을 이르는 말.
to make a feint to the east and attack in the west
원문의 해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적의 정세판단이 흩어져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게 되면 고여있던 물이 점차 불어나 넘쳐흐르는 상태가 되어 막지 못한다.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이익을 챙길 따름이다.[敵志亂萃,不虞,坤下兌上之象,利其不自主而取之.]"
'동쪽에서 소리를 지르고 서쪽을 친다'라는 뜻으로, 동쪽을 쳐들어가는 듯하면서 상대를 교란시켜 실제로는 서쪽을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통전(通典)》 병전(兵典)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중국 한(漢)나라의 유방(劉邦:BC 247?∼BC 195)과 초(楚)나라의 항우(項羽:BC 232∼BC 202)가 서로 싸우던 중 위(魏)나라의 왕 표(豹)가 항우에게 항복하였다. 유방은, 항우와 표가 양쪽에서 쳐들어오는 위험에 처하자 한신(韓信:?∼BC 196)에게 적을 공격하게 하였다.
위나라의 왕인 표는 백직(柏直)을 대장으로 하여 황허강[黃河]의 동쪽 포판(蒲坂)에 진을 치고 한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오지 못하게 하였다. 한신은 포판을 쳐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으나, 병사들에게 낮에는 큰 소리로 훈련하도록 하고 밤에는 불을 밝혀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표시를 나타내게 하였다. 백직은 이러한 한나라 군대의 작전을 보고 어리석다며 비웃었다. 한신은 비밀리에 한나라 군대를 이끌고 하양에 다다라 뗏목으로 황허강을 건너서 매우 빠르게 전진하여 위나라 왕 표의 후방 본거지(本據地)인 안이[安邑]를 점령하고 표를 사로잡았다.
병법(兵法)의 한 가지로, 한쪽을 공격할 듯하면서 약삭빠르게 상대편을 속여서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 다른쪽으로 쳐들어가 적을 무찌르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또 다른 예로 三國志(正史) 曺操傳(조조전)에 등장하는 예를 살펴보자.
하북의 강자, 원소는 조조를 치기 위해 군사를 몰아 조조의 본거지인 허도(허창)로 향했다. 그리고는 선발대를 황하 건너로 보내 백마를 포위하여 공격하고 있었다. 이에 조조는 병력을 이끌고 백마를 구원하러 가고자 했다. 이 때 조조의 병력은 원소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그 때 조조의 모사 중 한사람인 순유가 건의한다.
"적은 수가 많으니 우선 분산시키지 않으면 부수기 힘듭니다. 먼저 서쪽의 연진으로 향해서, 황하를 건너 적의 배후로 우회하는 듯한 태세를 보여야 합니다. 그러면 원소는 반드시 서쪽으로 군을 이동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그 틈에 재빨리 백마로 급행해서 불시에 무찔러야 합니다."
조조는 바로 이 '성동격서'의 전략을 택했고, 그 선택은 적중했다. 원소는 급히 군사를 나누어 서쪽으로 보냈고, 조조는 원소의 분할된 군대를 섬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예를 하나 살펴보자.
유비가 吳로부터 형주를 얻어 안주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익주를 다스리고 있던 유장은 한중의 장로(오두미교의 교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에 유장은 동족인 유비에게 구원을 청하게 되고, 유비는 방통의 조언을 받아들여 유장을 치고자 마음먹는다.
이후 방통의 계략에 따라 익주의 성들을 하나둘 장악해 나간다. 하지만 방통이 낙봉파에서 죽게 되고, 기세가 꺾인 유비는 제갈량에게 원군을 보내달라 한다. 이에 제갈량은 관우에게 형주를 맡기고 스스로 나선다. 이때 조운, 장비도 함께 나서게 된다.
기세 좋게 전진해 나가던 장비였으나 巴郡(파군)에서 발이 멈추고 만다. 파군을 지키는 노장 엄안에게 발이 묶여 앞으로 나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아무리 싸움을 걸어도 엄안이 싸움에 임하지 않자 장비는 초조해졌다. 그 때 부하 장수 한 사람이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 파군을 지나갈 수 있는 샛길을 발견한다. 이에 장비는 그 날 밤으로 바로 군사들을 이끌고 샛길로 지나갈 계획을 세운다.
"오늘 밤 이경에 밥을 지어먹고 삼경에 달이 밝은 틈을 이용하여 영채를 거두고 모두 출발한다. 사람은 입에 함매를 물고 말방울은 모두 떼어낸 뒤 조용히 가야 할 것이다. 내가 직접 앞에서 길을 열 것이니, 너희들은 조용히 따라오도록 하라."
하지만 엄안이 파견한 염탐꾼들이 이 소식을 알고 즉각 엄안에게 보고했다. 엄안은 즉시 병사들에게 싸움에 나설 준비를 시킨다.
밤이 되고, 삼경이 지나 장비는 조용히 군사들을 이끌고 전진했다. 엄안은 장비와 병사들의 이동을 확인한 후 병사들을 움직어 기습을 가했다. 하지만 그 순간 뒤에서 큰소리가 나며 한 무리의 군사들이 덮쳐왔다.
"늙은 놈아, 달아나지 말라! 내 너를 만나기를 고대했는데, 마침 잘 만났구나!"
엄안은 깜짝 놀라 돌아보았는데 그 곳에는 앞에 지나갔을 터인 장비가 있었다. 먼저 지나간 장비는 가짜였던 것이다. 샛길로 가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뒤에 대기하고 있다가 엄안이 나오자 공격한 것이다. 장비가 엄안을 잡기 위해 계책을 세운 것이었다. 엄안은 장비에게 붙잡히고 만다.
"너희들은 의리도 없이 우리 주군(유장)을 침략하고 있다! 그러니 斷頭將軍(단두장군 : 머리 잘린 장군)은 있을 지언정 어찌 降將軍(항장군 : 항복한 장군)이 있으리오!"
하지만 엄안은 붙잡히고 나서도 오히려 당당한 태도를 보여 장비는 그에게 감탄하게 된다. 그래서 장비는 엄안의 목숨을 살려주고, 엄안은 장비의 恩義(은의)에 감복하여 항복한다.
이 역시 샛길로 가는 척하면서 적을 꾀어내어 공격하는 '성동격서'의 예라 할 것이다.
여기의 장비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이 부분에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재편한 모종강은 총평에 이렇게 쓰고 있다.
"장비는 평생 속시원한 일을 몇 번 했다. 督郵(독우)를 매질하고, 呂布(여포)에게 욕을 하고, 長坂橋(장판교)에서 호통을 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용기는 嚴顔(엄안)을 사로잡은 지혜만 못했다. 또한 엄안을 사로잡은 지혜는 엄안을 살려준 현명함만 못하다."
술 좋아하고, 성격 급하고, 머리 나쁜 모습으로 흔히 묘사되는 장비이지만, 正史(정사)에 의하면 장비는 知勇(지용)를 겸비한 名將(명장)이었다고 한다. 연의에서는 후반부에서나 제갈량에게 감화되어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 식으로 간간히 계략을 쓰는 모습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장비가 쓴 계략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출전
三十六計(삼십육계) 勝戰計(승전계) 第六計(제6계) | 통전(通典) 병전(兵典) |
관련 한자어
참조어
明修棧道 暗渡陳倉(명수잔도 암도진창)
明修栈道 暗渡陈仓 (míngxiūzhàndào, àndùchéncāng)
明 밝을 명 | 修 닦을 수,길 수 | 棧 우리 잔 | 道 길 도 |
暗 어두울 암,햇빛 침침할 암 | 渡 건널 도 | 陳 늘어놓을 진 | 倉 창고 창 |
1. 한군(漢軍)이 겉으로는 잔도를 내는 체하면서 몰래 군사를 되돌려 초군(楚軍)의 진창(陳倉)을 기습하다. 2. 성동격서(聲東擊西)하다. 가상(假象)으로 적을 미혹시켜 목적을 달성하다.
To pretend to advance along one path while secretly going along another; to do one thing under cover of another
調虎離山(조호이산)
调虎离山(diàohǔlíshān)
調 고를 조 | 虎 호랑이 호 | 離 떠날 이 | 山 메 산 |
범을 산으로부터 유인해 내다. 적을 유리한 장소나 진지로부터 유인해 내어 그 허점을 이용하여 공략하다.
声东击西(shēngdōngjīxī)
聲 소리 성 | 東 동녘 동 | 擊 칠 격 | 西 서녘 서 |
三十六計 勝戰計 第六計. 동쪽에 소리내고 서쪽을 친다. 상대편에게 그럴듯한 속임수를 써서 공격하는 것을 이르는 말.
to make a feint to the east and attack in the west
원문의 해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적의 정세판단이 흩어져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게 되면 고여있던 물이 점차 불어나 넘쳐흐르는 상태가 되어 막지 못한다.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이익을 챙길 따름이다.[敵志亂萃,不虞,坤下兌上之象,利其不自主而取之.]"
'동쪽에서 소리를 지르고 서쪽을 친다'라는 뜻으로, 동쪽을 쳐들어가는 듯하면서 상대를 교란시켜 실제로는 서쪽을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통전(通典)》 병전(兵典)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중국 한(漢)나라의 유방(劉邦:BC 247?∼BC 195)과 초(楚)나라의 항우(項羽:BC 232∼BC 202)가 서로 싸우던 중 위(魏)나라의 왕 표(豹)가 항우에게 항복하였다. 유방은, 항우와 표가 양쪽에서 쳐들어오는 위험에 처하자 한신(韓信:?∼BC 196)에게 적을 공격하게 하였다.
위나라의 왕인 표는 백직(柏直)을 대장으로 하여 황허강[黃河]의 동쪽 포판(蒲坂)에 진을 치고 한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오지 못하게 하였다. 한신은 포판을 쳐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으나, 병사들에게 낮에는 큰 소리로 훈련하도록 하고 밤에는 불을 밝혀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표시를 나타내게 하였다. 백직은 이러한 한나라 군대의 작전을 보고 어리석다며 비웃었다. 한신은 비밀리에 한나라 군대를 이끌고 하양에 다다라 뗏목으로 황허강을 건너서 매우 빠르게 전진하여 위나라 왕 표의 후방 본거지(本據地)인 안이[安邑]를 점령하고 표를 사로잡았다.
병법(兵法)의 한 가지로, 한쪽을 공격할 듯하면서 약삭빠르게 상대편을 속여서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 다른쪽으로 쳐들어가 적을 무찌르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또 다른 예로 三國志(正史) 曺操傳(조조전)에 등장하는 예를 살펴보자.
하북의 강자, 원소는 조조를 치기 위해 군사를 몰아 조조의 본거지인 허도(허창)로 향했다. 그리고는 선발대를 황하 건너로 보내 백마를 포위하여 공격하고 있었다. 이에 조조는 병력을 이끌고 백마를 구원하러 가고자 했다. 이 때 조조의 병력은 원소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그 때 조조의 모사 중 한사람인 순유가 건의한다.
"적은 수가 많으니 우선 분산시키지 않으면 부수기 힘듭니다. 먼저 서쪽의 연진으로 향해서, 황하를 건너 적의 배후로 우회하는 듯한 태세를 보여야 합니다. 그러면 원소는 반드시 서쪽으로 군을 이동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그 틈에 재빨리 백마로 급행해서 불시에 무찔러야 합니다."
조조는 바로 이 '성동격서'의 전략을 택했고, 그 선택은 적중했다. 원소는 급히 군사를 나누어 서쪽으로 보냈고, 조조는 원소의 분할된 군대를 섬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예를 하나 살펴보자.
유비가 吳로부터 형주를 얻어 안주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익주를 다스리고 있던 유장은 한중의 장로(오두미교의 교주)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에 유장은 동족인 유비에게 구원을 청하게 되고, 유비는 방통의 조언을 받아들여 유장을 치고자 마음먹는다.
이후 방통의 계략에 따라 익주의 성들을 하나둘 장악해 나간다. 하지만 방통이 낙봉파에서 죽게 되고, 기세가 꺾인 유비는 제갈량에게 원군을 보내달라 한다. 이에 제갈량은 관우에게 형주를 맡기고 스스로 나선다. 이때 조운, 장비도 함께 나서게 된다.
기세 좋게 전진해 나가던 장비였으나 巴郡(파군)에서 발이 멈추고 만다. 파군을 지키는 노장 엄안에게 발이 묶여 앞으로 나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아무리 싸움을 걸어도 엄안이 싸움에 임하지 않자 장비는 초조해졌다. 그 때 부하 장수 한 사람이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 파군을 지나갈 수 있는 샛길을 발견한다. 이에 장비는 그 날 밤으로 바로 군사들을 이끌고 샛길로 지나갈 계획을 세운다.
"오늘 밤 이경에 밥을 지어먹고 삼경에 달이 밝은 틈을 이용하여 영채를 거두고 모두 출발한다. 사람은 입에 함매를 물고 말방울은 모두 떼어낸 뒤 조용히 가야 할 것이다. 내가 직접 앞에서 길을 열 것이니, 너희들은 조용히 따라오도록 하라."
하지만 엄안이 파견한 염탐꾼들이 이 소식을 알고 즉각 엄안에게 보고했다. 엄안은 즉시 병사들에게 싸움에 나설 준비를 시킨다.
밤이 되고, 삼경이 지나 장비는 조용히 군사들을 이끌고 전진했다. 엄안은 장비와 병사들의 이동을 확인한 후 병사들을 움직어 기습을 가했다. 하지만 그 순간 뒤에서 큰소리가 나며 한 무리의 군사들이 덮쳐왔다.
"늙은 놈아, 달아나지 말라! 내 너를 만나기를 고대했는데, 마침 잘 만났구나!"
엄안은 깜짝 놀라 돌아보았는데 그 곳에는 앞에 지나갔을 터인 장비가 있었다. 먼저 지나간 장비는 가짜였던 것이다. 샛길로 가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뒤에 대기하고 있다가 엄안이 나오자 공격한 것이다. 장비가 엄안을 잡기 위해 계책을 세운 것이었다. 엄안은 장비에게 붙잡히고 만다.
"너희들은 의리도 없이 우리 주군(유장)을 침략하고 있다! 그러니 斷頭將軍(단두장군 : 머리 잘린 장군)은 있을 지언정 어찌 降將軍(항장군 : 항복한 장군)이 있으리오!"
하지만 엄안은 붙잡히고 나서도 오히려 당당한 태도를 보여 장비는 그에게 감탄하게 된다. 그래서 장비는 엄안의 목숨을 살려주고, 엄안은 장비의 恩義(은의)에 감복하여 항복한다.
이 역시 샛길로 가는 척하면서 적을 꾀어내어 공격하는 '성동격서'의 예라 할 것이다.
여기의 장비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이 부분에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재편한 모종강은 총평에 이렇게 쓰고 있다.
"장비는 평생 속시원한 일을 몇 번 했다. 督郵(독우)를 매질하고, 呂布(여포)에게 욕을 하고, 長坂橋(장판교)에서 호통을 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용기는 嚴顔(엄안)을 사로잡은 지혜만 못했다. 또한 엄안을 사로잡은 지혜는 엄안을 살려준 현명함만 못하다."
술 좋아하고, 성격 급하고, 머리 나쁜 모습으로 흔히 묘사되는 장비이지만, 正史(정사)에 의하면 장비는 知勇(지용)를 겸비한 名將(명장)이었다고 한다. 연의에서는 후반부에서나 제갈량에게 감화되어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 식으로 간간히 계략을 쓰는 모습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장비가 쓴 계략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출전
三十六計(삼십육계) 勝戰計(승전계) 第六計(제6계) | 통전(通典) 병전(兵典) |
관련 한자어
참조어
明修棧道 暗渡陳倉(명수잔도 암도진창)
明修栈道 暗渡陈仓 (míngxiūzhàndào, àndùchéncāng)
明 밝을 명 | 修 닦을 수,길 수 | 棧 우리 잔 | 道 길 도 |
暗 어두울 암,햇빛 침침할 암 | 渡 건널 도 | 陳 늘어놓을 진 | 倉 창고 창 |
1. 한군(漢軍)이 겉으로는 잔도를 내는 체하면서 몰래 군사를 되돌려 초군(楚軍)의 진창(陳倉)을 기습하다. 2. 성동격서(聲東擊西)하다. 가상(假象)으로 적을 미혹시켜 목적을 달성하다.
To pretend to advance along one path while secretly going along another; to do one thing under cover of another
調虎離山(조호이산)
调虎离山(diàohǔlíshān)
調 고를 조 | 虎 호랑이 호 | 離 떠날 이 | 山 메 산 |
범을 산으로부터 유인해 내다. 적을 유리한 장소나 진지로부터 유인해 내어 그 허점을 이용하여 공략하다.
瞞天過海 (만천과해, mántiānguòhǎi)
瞞天過海(만천과해)
瞒天过海(mán tiān guò hǎi)
三十六計(삼십육계) 勝戰計(승전계) 제1계. 하늘을 속여 바다를 건너다.
☞ Deceive the heavens to cross the ocean
“만천과해”계책은 원래 “진룡천자(眞龍天子)”라 일컬었던 당 태종을 속여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대해를 건너게 한 고사에서 나왔다. 명나라 때 쓰여진 백과사전인 <영락대전(永樂大典)>이 그 출전이다.
당나라 태종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동쪽의 고구려를 침공하려고 할 때의 일이었다. 바닷가에 이르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 했는데, 워낙 내륙에서 자란 당태종인지라 처음 보는 바다의 모습에 위축되어 배로서 바다를 건너는 것은 무리라 하여 군사를 돌리려 했었다. 그런데 마침 군사를 돌리려는 당태종 앞에 일대의 토호를 자처한 노인이 나타나 30만 군대를 위한 양식을 마련했다며 당태종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었다. 당태종으로서도 아무래도 지방의 권력과도 친해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그 초대에 응해 먹고 마시며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당태종이 일어나 보니 어느새 망망대해에 와 있는 것이었다. 바로 전날 노인의 집이라 초대된 연회장이 배 위였던 것이고, 노인은 막 당태종의 휘하로 들어와 있던 설인귀가 분장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당태종이 바다에 겁을 먹어 군대를 되돌릴 것 같자 노인으로 분장하여 당태종이 자신도 모른 새 배에 오르도록 하고는 당태종이 잠든 사이 배를 출발시켜버린 것이다. 말 그대로 천자, 즉 황제를 속여 바다를 건너는 것. 그래서 만천과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춘추시대 진문공의 일화가 있다. 진문공은 공자시절 중이라 불리웠었는데, 아버지인 진헌공의 정실로서 해제를 낳아 그를 왕으로 올리고자 하는 여희의 음모로 이오와 더불어 65살 다시 진나라로 돌아와 즉위하기까지 열국을 떠돌며 망명생활을 해야 했었다. 그 가운데 특히 제나라에서의 7년이 유독 사무쳤었는데, 아마도 그 시절이 오랜 망명기간 가운데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던 때문이었다.
당시 제나라의 군주는 춘추오패의 첫머리로 꼽는 제환공이었다. - 중이의 동생인 이오를 진의 목공과 함께 진의 왕으로 올린 것도 바로 이 환공이었다. - 제환공은 중이의 인품을 높이 사서 그에게 자신의 딸 제강과 수레 20승, 말 18필을 주어 후대했는데, 이미 형인 신생이 죽고, 다시 여희와 해제가 죽자 이오가 진혜공이 되어서는 적나라에 망명해 있던 그를 죽이려 하는 등, 참으로 바람잘 날 없던 삶이라, 더구나 당시 중이의 나이는 50을 넘어 있었다. 지금이야 50이면 한창 나이이지만 당시로서는 이미 죽을 날을 잡아 놓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중이로서도 이래도 편안히 남은 생을 보내자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 중이는 혼자몸이 아니었다. 그를 쫓아 그에게 일신을 의탁한 아홉 명의 신하가 있었다. 그들로서는 중이가 한시라도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 일을 도모하여 뜻을 이루어야 할 터인데 저렇게 당장의 편안함에 길들여져 큰 뜻을 잊은 채 허송세월만 하고 있으니 이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더구나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중이의 동생인 이오 - 즉 진혜공의 학정과 무능으로 말미암아 크게 어지러운 상황이었던데다, 제환공이 죽고 제나라의 내정 또한 혼란하여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으니 더욱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이는 그런 신하들의 마음을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을 찾아가도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쫓겨날 뿐, 결국 몇 번을 그렇게 중이를 만나지도 뫃가고 쫓겨나게 되자 신하들은 아예 사냥을 빌미로 중이를 밖으로 불러내서 그를 납치하려는 계획까지 세우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뜻하지 않게 제환공의 딸이기도 한 중이의 부인 제강이 끼어들었다.
시녀들을 통해 호언 등의 계획을 들은 제강은 은밀히 호언을 찾아가 진의 내정이 어렵고 혼란스러워 모든 대부와 백성들이 중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처럼 안락함에 빠져 움직이려 하지 않으니 그것은 장부의 도리가 아니라며 자신이 나서서 돕겠노라 말했다. 자신이 공자 중이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만들 터이니, 그때 몰래 중이를 업어 마차에 실어 목적한 곳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제환공의 딸다운 배포라 할 터인데, 이전부터도 제강은 몇 번이고 중이로 하여금 진나라의 공자로서 자신을 자각하여 진으로 돌아가 큰 뜻을 펼칠 것을 권하고 했었다. 그럴 경우 제강 자신이 버려질 수 있음을 알면서도 한 여자로서보다는 진나라 공자 중이의 처로서, 제환공의 딸이자 제나라의 공주로서 처신을 선택한 것이었다. 참으로 독심장부라고나 할까?
아무튼 호언 등과 그렇게 약속하고 돌아온 제강은 중이를 만나자 먼저 그 신하들이 중이를 모시고 다른 나라로 가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음을 알고 있다며 중이더러 자신을 버릴 것이냐고 다그쳤다. 당연히 금시초문인 중이는 펄쩍 뛰었다. 그는 그때까지도 사랑스런 제강과 제나라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겨우 마음이 놓이는 표정을 지어 보인 제강은 마치 다짐이라도 하려는 듯 중이에게 함께 술을 마시며 밤을 지새자고 제안했다. 그야말로 중이가 떠날 것을 걱정하다가 겨우 마음을 놓이게 된 처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중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호언 등이 몰고 있는 마차 안이었다. 제나라의 국경도 예전에 넘어 있었고 다시 돌아가려 해도 이미 제나라를 떠나온 신하들은 다시 제나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고, 아마 돌아간다고 해도 예전과 같은 생활은 누리지 못할 것이었다. 잠시 술에 취해 잠든 사이 일은 이렇게 완전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제강의 손으로 하늘을 가려 바다를 건너는 계책에 당한 것이니, 중이도 마침내 제나라에서의 생활에 대한 미련을 모두 접고 신하들이 이끄는 대로 자신의 운명이 가리키는 대로 따르게 되었다.
그렇게 중이는 제나라를 떠나 조나라로 갔다가 다시 송나라로, 송나라에서 또 초나라로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 마침내 진혜공에 이은 진회공의 신의없음과 포악함에 질려버린 진목공의 후원을 받아 그로부터 군사를 빌려 진나라로 돌아가 동생의 아들이기도 한 회공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바로 춘추오패에서 빠지지 않는 세 자리 가운데 하나인 진문공이다. 주왕실의 반란을 진압하고 천토의 회맹으로써 춘추시대의 두번째 패자가 되니, 불과 십 여 년의 짧은 치세지만 이때 진나라는 명실상부한 중원의 패자로서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가히 대단한 능력이라 하겠는데, 거기에는 여자로서의 자신을 희생한 제강의 현숙하면서도 치밀한 노력이 있었다. 진문공 또한 패자였으니 태종과 같이 이것도 만천과해라 하겠다.
그로부터 파생된 뜻은, 위장수단을 사용하여 공개적으로 가짜의 상을 만들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경계심을 풀게 하고, 없는 듯 하면서 있고, 가짜인 듯 하면서 진짜인 듯 만들어 문제되는 것들을 피하고 난관을 극복함으로써 상대방이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승리해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뜻한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 평상시 습관처럼 보이면 의심을 품지 않는 법이다. 은밀한 계략과 공개적인 형식은 서로 상반되지 않고, 반대로 음모는 밖으로 드러난 공개적인 행위 속에 감추어져 있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역]에서 태음이 바로 태양인 이치와 같다.
36계의 제1계인 만천과해는 승전계(勝戰計)에 속한다. 아군의 형세가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을 때 말을 타고 적을 압도하는 작전인 것이다.
흔히 '兵法'이라 하면, 소수의 아군으로 다수의 적군을 이기는 '신비한' 술책 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병법의 기본은 어디까지나 '다수의 아군으로 소수의 적군을 압박하여' 이기는 것이다. 손자병법에서도, 謨攻(모공)편에 이르길, "...그러므로 전쟁의 원칙은 병력이 적군의 10배일 때에는 적을 포위하고, 5배일 때에는 적을 공격하며, 2배일 때에는 계략을 써서 적을 분산시키며, 병력이 적과 비슷할 때에는 전력을 다하여 싸워야 하며, 병력이 적군보다 적을 때에는 적과 부딪치지 말고 싸움터에서 벗어나야 하며,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전투를 피하여야 한다..." 라고 하고 있다.
삼십육계의 구조도 위에 얘기한 손자병법 모공편의 문구에 따라 이루어져 있다. 적보다 우세할 때의 '승전계', 적과 세력이 비슷할 때의 '적전계', 적을 공격하기 위한 '공전계', 공방이 혼란할 때의 '혼전계', 다른 아군과 합세하여 싸울 때의 '병전계', 그리고 아군이 불리할 때의 '패전계' 와 같다.
삼십육계 원문에는 '만천과해'에 대한 짤막한 해설이 붙어 있다.
"아군의 수비가 안전하다고 생각되면 자칫 경계심이 흩어지기 쉽다. 또한 사람은 흔히 보아온 것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지 않게 된다. 그러한 약점에 계략을 찔러넣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헛점을 찌르는 계략은 대수롭지 않게 눈에 뜨이는 곳에 깃들게 하는 것이다. 꼭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備周則意怠,常見則不疑.陰在陽之內,不在陽之對.太陽,太陰.]"
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적을 방심하게 하고, 그것에 적이 익숙해졌을 때, 그 틈을 찌르는 계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만천과해와 관련하여 많이 드는 예는 삼국지의 태사자 예이다.
북해 태수 공융(孔融)이 황건적에게 포위되었을 때였다. 공융에게 평소 은혜를 입은 태사자의 모친은 공융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태사자에게 도우러 가라고 한다. 이에 태사자는 밤을 틈타 황건적의 포위망을 지나 공융에게로 간다. 공융은 유비에게 원군을 부탁하고자 하고, 이 임무를 태사자에게 부탁한다. 태사자(太史慈)는 포위망을 돌파하여 원병을 청하러 가야하나, 적의 포위망이 워낙 튼튼하여 쉽게 돌파하지 못한다.
그는 활과 과녁을 두 기사에게 들리고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성안에 있는 군사나 성밖에 있는 적병들이 이를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 그러나 태사자는 태연히 말을 끌고 성 가까이에 있는 언덕에 과녁을 세우고 활쏘기 연습을 시작했다. 이윽고 연습이 끝나자 그는 다시 성안으로 돌아왔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이렇게 활쏘기 연습을 거듭했다. 그러자 성밖에 있는 적병들 중에는 그것을 구경하는 자도 있고, 드러누워 낮잠을 자는 자도 있었다. 그는 변함없이 이렇게 활쏘기를 계속하여, 사흘째가 되자 황건적들은 이제 그에게 아무런 관심조차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때를 틈타 태사자는 갑자기 말 위에 올라 채찍을 휘두르며 비호처럼 적의 포위망을 뚫었다. 적들이 속았구나 하고 손을 쓰려 했을 때 그는 이미 멀리 가버린 후였다. 태사자는 말을 채찍질하여 황건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 유비에게 구원을 청하게 된다. [三國志(正史) 吳志 태사자전]
분명히 뜻풀이만으로 보자면 태사자의 예는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勝戰計' 즉, 아군이 '우세할 때' 쓰는 계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적을 방심하게 하고 그 틈을 찌른다'는 점에서는 타당하지만, 그보다 이전의 '승전계'라는 전제를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또다른 예로는 삼국시대 오나라 손책의 예를 들 수 있다.
삼국 시대 오나라의 손책(孫策)이 수일을 연하여 회계성을 쳤으나 성은 좀처럼 깨어지지 않았다. 성벽은 높고 해자는 또한 넓고 깊었다. 손책이 무리를 모아 놓고 성 칠 일을 의논하니, 군중에 함께 따라와 있던 그의 숙부 손정(孫靜)이 계책을 말했다.
"성이 원체 견고하고 왕랑이 또한 죽기로써 지키는 터이라, 이대로 쳐서는 깨뜨리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이제 회계땅의 전량(錢糧)이 태반이나 사독에 있고, 그곳이 여기서 불과 수십 리니, 먼저 그곳을 점거하는 것이 어떨까? 이것이 이른바 '공기무비(攻其無備)요 출기불의(出其不意)'라, 그 방비 없음을 치고, 예상치 못한 때에 나아간다는 것이 아니겠느냐."
손책은 크게 기뻐하였다.
"숙부님의 묘계로 족히 적을 깨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즉시 각문에 영을 내려 불을 밝히며 기호(旗號)를 많이 세워 의병(擬兵)을 삼게 하고, 밤을 이용하여 에움을 푼 다음 사독으로 가기로 했다.
그때 한 장수가 말했다.
"주공께서 대군을 거두시어 떠나는 것을 알게 되면, 적이 필연코 성을 나와 뒤를 쫓을 것이니 기병(奇兵)을 쓰시는 것이 마땅할까 합니다."
"내 이미 준비를 하여 놓았네. 회계성은 오늘밤 안으로 우리 장중에 들어오게 될 걸세."
손책의 군마가 물러갔다는 첩보를 받은 회계성의 장수 왕랑은 무리들과 함께 성루로 올라갔다. 성밖을 두루 살펴보니, 성 아래에 연기와 불이 함께 일어나며 무수한 정기(旌旗)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왕랑이 마음에 의심하기를 마지않을 때, 부장 주흔이 말했다.
"손책이 겁을 집어먹고 군사를 거두어 달아나는가 봅니다. 그래서 정기를 휘날려 우리를 의심케 하는 것이니, 지금 곧 군사를 내시어 뒤를 치도록 하십시오."
이때 한 장수가 말했다.
"손책이 이번에 간 것이 혹시 사독을 치기 위함이나 아닐까요. 일군을 따로 뽑아 뒤를 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랑은 드디어 뜻을 정하였다.
"사독은 곧 우리의 둔량처(屯糧處)이니 아무래도 방비를 엄히 해야만 하겠소."
왕랑의 군사는 남으로 사독을 향해 급히 뒤를 쫓아 20여 리를 갔다. 때는 초경이 가까운데, 갑자기 밀림속에서 북소리가 크게 울리며 횃불이 일시에 일어났다. 왕랑의 군사들이 깜짝 놀라 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려 할 때, 한 장수가 창을 빗겨 잡고 말을 내달아 나오니 그는 바로 손책이었다. 이 싸움에서 왕랑은 크게 패하여 마침내 성을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는데, 이는 바로 상대를 속여 그 약점을 누르고 때를 보아 기습하여 전승을 거둔 예이다.
또다른 예로는 전국시대 초기, 魏文侯(위문후)가 중산국을 정벌하기 위해 元帥(원수)로 삼은 '악양'의 사례가 있다.
위나라는 晉(진)나라가 나뉜 삼국(위, 조, 한) 중의 하나이다. 이때 晉의 동쪽에 中山國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는 진나라에 계속 조공을 바치고 있었는데 진이 삼국으로 나뉜 후로는 어느 나라를 섬겨야 할지 몰라서 아무 곳에도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중산국의 위치는 서쪽의 조나라와 가깝고 남쪽의 위나라와는 꽤 먼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나라가 중산국을 차지하면 위나라는 북쪽으로부터 상당한 압력을 받을 것이 뻔했다.
중산국을 치기로 마음먹은 위문후는 누구를 원수로 삼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 때, 책황이 악양을 천거한다. 하지만 다른 신하들은 악양의 아들인 악서가 중산국에서 벼슬을 삼고 있다는 이유로 악양을 원수로 삼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위문후가 악양을 불러 물어보니, 악양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어찌 公事를 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한다. 이에 위문후는 악양을 원수로 삼아 중산국을 치게 한다.
악양의 병법은 탁월하여 중산국의 병사들을 계속 이겨나가, 마침내 중산국의 수도인 중산성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중산국의 임금인 희굴은 악양의 아들인 악서를 내세워서 '항복하기 위해서는 임금과 신하가 상의할 시간이 필요하니 한달간의 말미를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악양이 승낙하자 희굴은 악양이 아들인 악서의 처지를 걱정하여 공격을 미루는 것으로 생각했다. 한달이 지나도 뾰족한 계책이 서지 않자 희굴은 또 악서를 보내 다시 한달의 여유를 얻어낸다. 이렇게 악양은 악서에게 세 달의 여유를 주었다.
그러자 중산국은 물론 위나라의 병사들까지도 '악양은 아들을 걱정하여 중산국을 치지 않을 것이다'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또한 조정에서는 일조에 원수가 된 악양을 시기하는 대신들이 위문후에게 악양을 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문후는 악양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때때로 사자를 보내 악양을 위로하고, 악양이 돌아오면 하사하기 위하여 도성 안에 좋은 집까지 마련해 두었다.
한 편, 악양은 약속한 3개월이 지나도 중산국이 항복을 하지 않자 병사들에게 총공격을 준비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병사들은 또다시 한달의 여유를 줄 것이 뻔한데 뭐하러 준비를 하느냐며 불만을 터뜨린다. 그러자 악양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중산국을 치러 온 것은 그 임금이 무도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중산국을 위나라에 영원히 편입시켜야 한다. 우리가 처음에 힘으로 중산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나, 그렇게 하면 백성들은 상처를 입고 우리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산국은 결코 위나라 땅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기다려 온 것은 백성들을 구하고 그들을 위나라의 백성으로 삼기 위함인 것이다."
사태가 급해진 중산국에서는 악서를 인질로 삼으려 하나 악양은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너는 참으로 불초한 자식이다. 벼슬을 살면서도 그 나라를 위해 계책을 세우지 못했고, 적과 싸워 이기지도 못했으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또 나라가 망하게 되었으면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화평을 청하도록 권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해야 하거늘, 그런 것도 못하고 부끄럽지 않느냐! 너 같은 놈을 살려두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죽여야겠다!"
악양은 이렇게 말하며 스스로 활을 들어 악서를 쏘려 했다. 그러자 악서는 황급히 숨어 들어갔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희굴은 악서를 죽여 그 시체로 국을 끓여 악양에게 보낸다. 악양이 충격을 받은 틈을 타서 공격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악양은 오히려 악서의 머리를 보고 꾸짖으며 국을 다 먹었다. 그러고는 중산국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 임금이 국을 보내주어 잘 먹었다. 중산성을 함락하는 즉시 내 너희 임금에게 직접 감사하리라. 너는 임금에게 돌아가 우리 군중에도 국을 끓이는 가마솥이 있음을 알려라!"
이후 악양은 중산국을 완전히 점령하고, 중산국 임금은 자살한다.
永樂大典(영락대전) | 三十六計(삼십육계) | 三國志(Sānguózhì) |
瞒天过海(mán tiān guò hǎi)
三十六計(삼십육계) 勝戰計(승전계) 제1계. 하늘을 속여 바다를 건너다.
☞ Deceive the heavens to cross the ocean
“만천과해”계책은 원래 “진룡천자(眞龍天子)”라 일컬었던 당 태종을 속여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대해를 건너게 한 고사에서 나왔다. 명나라 때 쓰여진 백과사전인 <영락대전(永樂大典)>이 그 출전이다.
당나라 태종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동쪽의 고구려를 침공하려고 할 때의 일이었다. 바닷가에 이르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 했는데, 워낙 내륙에서 자란 당태종인지라 처음 보는 바다의 모습에 위축되어 배로서 바다를 건너는 것은 무리라 하여 군사를 돌리려 했었다. 그런데 마침 군사를 돌리려는 당태종 앞에 일대의 토호를 자처한 노인이 나타나 30만 군대를 위한 양식을 마련했다며 당태종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었다. 당태종으로서도 아무래도 지방의 권력과도 친해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그 초대에 응해 먹고 마시며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당태종이 일어나 보니 어느새 망망대해에 와 있는 것이었다. 바로 전날 노인의 집이라 초대된 연회장이 배 위였던 것이고, 노인은 막 당태종의 휘하로 들어와 있던 설인귀가 분장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당태종이 바다에 겁을 먹어 군대를 되돌릴 것 같자 노인으로 분장하여 당태종이 자신도 모른 새 배에 오르도록 하고는 당태종이 잠든 사이 배를 출발시켜버린 것이다. 말 그대로 천자, 즉 황제를 속여 바다를 건너는 것. 그래서 만천과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춘추시대 진문공의 일화가 있다. 진문공은 공자시절 중이라 불리웠었는데, 아버지인 진헌공의 정실로서 해제를 낳아 그를 왕으로 올리고자 하는 여희의 음모로 이오와 더불어 65살 다시 진나라로 돌아와 즉위하기까지 열국을 떠돌며 망명생활을 해야 했었다. 그 가운데 특히 제나라에서의 7년이 유독 사무쳤었는데, 아마도 그 시절이 오랜 망명기간 가운데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던 때문이었다.
당시 제나라의 군주는 춘추오패의 첫머리로 꼽는 제환공이었다. - 중이의 동생인 이오를 진의 목공과 함께 진의 왕으로 올린 것도 바로 이 환공이었다. - 제환공은 중이의 인품을 높이 사서 그에게 자신의 딸 제강과 수레 20승, 말 18필을 주어 후대했는데, 이미 형인 신생이 죽고, 다시 여희와 해제가 죽자 이오가 진혜공이 되어서는 적나라에 망명해 있던 그를 죽이려 하는 등, 참으로 바람잘 날 없던 삶이라, 더구나 당시 중이의 나이는 50을 넘어 있었다. 지금이야 50이면 한창 나이이지만 당시로서는 이미 죽을 날을 잡아 놓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중이로서도 이래도 편안히 남은 생을 보내자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 중이는 혼자몸이 아니었다. 그를 쫓아 그에게 일신을 의탁한 아홉 명의 신하가 있었다. 그들로서는 중이가 한시라도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 일을 도모하여 뜻을 이루어야 할 터인데 저렇게 당장의 편안함에 길들여져 큰 뜻을 잊은 채 허송세월만 하고 있으니 이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더구나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중이의 동생인 이오 - 즉 진혜공의 학정과 무능으로 말미암아 크게 어지러운 상황이었던데다, 제환공이 죽고 제나라의 내정 또한 혼란하여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으니 더욱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이는 그런 신하들의 마음을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을 찾아가도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쫓겨날 뿐, 결국 몇 번을 그렇게 중이를 만나지도 뫃가고 쫓겨나게 되자 신하들은 아예 사냥을 빌미로 중이를 밖으로 불러내서 그를 납치하려는 계획까지 세우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뜻하지 않게 제환공의 딸이기도 한 중이의 부인 제강이 끼어들었다.
시녀들을 통해 호언 등의 계획을 들은 제강은 은밀히 호언을 찾아가 진의 내정이 어렵고 혼란스러워 모든 대부와 백성들이 중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처럼 안락함에 빠져 움직이려 하지 않으니 그것은 장부의 도리가 아니라며 자신이 나서서 돕겠노라 말했다. 자신이 공자 중이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만들 터이니, 그때 몰래 중이를 업어 마차에 실어 목적한 곳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제환공의 딸다운 배포라 할 터인데, 이전부터도 제강은 몇 번이고 중이로 하여금 진나라의 공자로서 자신을 자각하여 진으로 돌아가 큰 뜻을 펼칠 것을 권하고 했었다. 그럴 경우 제강 자신이 버려질 수 있음을 알면서도 한 여자로서보다는 진나라 공자 중이의 처로서, 제환공의 딸이자 제나라의 공주로서 처신을 선택한 것이었다. 참으로 독심장부라고나 할까?
아무튼 호언 등과 그렇게 약속하고 돌아온 제강은 중이를 만나자 먼저 그 신하들이 중이를 모시고 다른 나라로 가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음을 알고 있다며 중이더러 자신을 버릴 것이냐고 다그쳤다. 당연히 금시초문인 중이는 펄쩍 뛰었다. 그는 그때까지도 사랑스런 제강과 제나라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겨우 마음이 놓이는 표정을 지어 보인 제강은 마치 다짐이라도 하려는 듯 중이에게 함께 술을 마시며 밤을 지새자고 제안했다. 그야말로 중이가 떠날 것을 걱정하다가 겨우 마음을 놓이게 된 처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중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호언 등이 몰고 있는 마차 안이었다. 제나라의 국경도 예전에 넘어 있었고 다시 돌아가려 해도 이미 제나라를 떠나온 신하들은 다시 제나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고, 아마 돌아간다고 해도 예전과 같은 생활은 누리지 못할 것이었다. 잠시 술에 취해 잠든 사이 일은 이렇게 완전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제강의 손으로 하늘을 가려 바다를 건너는 계책에 당한 것이니, 중이도 마침내 제나라에서의 생활에 대한 미련을 모두 접고 신하들이 이끄는 대로 자신의 운명이 가리키는 대로 따르게 되었다.
그렇게 중이는 제나라를 떠나 조나라로 갔다가 다시 송나라로, 송나라에서 또 초나라로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 마침내 진혜공에 이은 진회공의 신의없음과 포악함에 질려버린 진목공의 후원을 받아 그로부터 군사를 빌려 진나라로 돌아가 동생의 아들이기도 한 회공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바로 춘추오패에서 빠지지 않는 세 자리 가운데 하나인 진문공이다. 주왕실의 반란을 진압하고 천토의 회맹으로써 춘추시대의 두번째 패자가 되니, 불과 십 여 년의 짧은 치세지만 이때 진나라는 명실상부한 중원의 패자로서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가히 대단한 능력이라 하겠는데, 거기에는 여자로서의 자신을 희생한 제강의 현숙하면서도 치밀한 노력이 있었다. 진문공 또한 패자였으니 태종과 같이 이것도 만천과해라 하겠다.
그로부터 파생된 뜻은, 위장수단을 사용하여 공개적으로 가짜의 상을 만들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경계심을 풀게 하고, 없는 듯 하면서 있고, 가짜인 듯 하면서 진짜인 듯 만들어 문제되는 것들을 피하고 난관을 극복함으로써 상대방이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승리해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뜻한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 평상시 습관처럼 보이면 의심을 품지 않는 법이다. 은밀한 계략과 공개적인 형식은 서로 상반되지 않고, 반대로 음모는 밖으로 드러난 공개적인 행위 속에 감추어져 있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역]에서 태음이 바로 태양인 이치와 같다.
36계의 제1계인 만천과해는 승전계(勝戰計)에 속한다. 아군의 형세가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을 때 말을 타고 적을 압도하는 작전인 것이다.
흔히 '兵法'이라 하면, 소수의 아군으로 다수의 적군을 이기는 '신비한' 술책 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병법의 기본은 어디까지나 '다수의 아군으로 소수의 적군을 압박하여' 이기는 것이다. 손자병법에서도, 謨攻(모공)편에 이르길, "...그러므로 전쟁의 원칙은 병력이 적군의 10배일 때에는 적을 포위하고, 5배일 때에는 적을 공격하며, 2배일 때에는 계략을 써서 적을 분산시키며, 병력이 적과 비슷할 때에는 전력을 다하여 싸워야 하며, 병력이 적군보다 적을 때에는 적과 부딪치지 말고 싸움터에서 벗어나야 하며,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전투를 피하여야 한다..." 라고 하고 있다.
삼십육계의 구조도 위에 얘기한 손자병법 모공편의 문구에 따라 이루어져 있다. 적보다 우세할 때의 '승전계', 적과 세력이 비슷할 때의 '적전계', 적을 공격하기 위한 '공전계', 공방이 혼란할 때의 '혼전계', 다른 아군과 합세하여 싸울 때의 '병전계', 그리고 아군이 불리할 때의 '패전계' 와 같다.
삼십육계 원문에는 '만천과해'에 대한 짤막한 해설이 붙어 있다.
"아군의 수비가 안전하다고 생각되면 자칫 경계심이 흩어지기 쉽다. 또한 사람은 흔히 보아온 것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지 않게 된다. 그러한 약점에 계략을 찔러넣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헛점을 찌르는 계략은 대수롭지 않게 눈에 뜨이는 곳에 깃들게 하는 것이다. 꼭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備周則意怠,常見則不疑.陰在陽之內,不在陽之對.太陽,太陰.]"
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적을 방심하게 하고, 그것에 적이 익숙해졌을 때, 그 틈을 찌르는 계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만천과해와 관련하여 많이 드는 예는 삼국지의 태사자 예이다.
북해 태수 공융(孔融)이 황건적에게 포위되었을 때였다. 공융에게 평소 은혜를 입은 태사자의 모친은 공융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태사자에게 도우러 가라고 한다. 이에 태사자는 밤을 틈타 황건적의 포위망을 지나 공융에게로 간다. 공융은 유비에게 원군을 부탁하고자 하고, 이 임무를 태사자에게 부탁한다. 태사자(太史慈)는 포위망을 돌파하여 원병을 청하러 가야하나, 적의 포위망이 워낙 튼튼하여 쉽게 돌파하지 못한다.
그는 활과 과녁을 두 기사에게 들리고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성안에 있는 군사나 성밖에 있는 적병들이 이를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 그러나 태사자는 태연히 말을 끌고 성 가까이에 있는 언덕에 과녁을 세우고 활쏘기 연습을 시작했다. 이윽고 연습이 끝나자 그는 다시 성안으로 돌아왔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이렇게 활쏘기 연습을 거듭했다. 그러자 성밖에 있는 적병들 중에는 그것을 구경하는 자도 있고, 드러누워 낮잠을 자는 자도 있었다. 그는 변함없이 이렇게 활쏘기를 계속하여, 사흘째가 되자 황건적들은 이제 그에게 아무런 관심조차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때를 틈타 태사자는 갑자기 말 위에 올라 채찍을 휘두르며 비호처럼 적의 포위망을 뚫었다. 적들이 속았구나 하고 손을 쓰려 했을 때 그는 이미 멀리 가버린 후였다. 태사자는 말을 채찍질하여 황건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 유비에게 구원을 청하게 된다. [三國志(正史) 吳志 태사자전]
분명히 뜻풀이만으로 보자면 태사자의 예는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勝戰計' 즉, 아군이 '우세할 때' 쓰는 계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적을 방심하게 하고 그 틈을 찌른다'는 점에서는 타당하지만, 그보다 이전의 '승전계'라는 전제를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또다른 예로는 삼국시대 오나라 손책의 예를 들 수 있다.
삼국 시대 오나라의 손책(孫策)이 수일을 연하여 회계성을 쳤으나 성은 좀처럼 깨어지지 않았다. 성벽은 높고 해자는 또한 넓고 깊었다. 손책이 무리를 모아 놓고 성 칠 일을 의논하니, 군중에 함께 따라와 있던 그의 숙부 손정(孫靜)이 계책을 말했다.
"성이 원체 견고하고 왕랑이 또한 죽기로써 지키는 터이라, 이대로 쳐서는 깨뜨리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이제 회계땅의 전량(錢糧)이 태반이나 사독에 있고, 그곳이 여기서 불과 수십 리니, 먼저 그곳을 점거하는 것이 어떨까? 이것이 이른바 '공기무비(攻其無備)요 출기불의(出其不意)'라, 그 방비 없음을 치고, 예상치 못한 때에 나아간다는 것이 아니겠느냐."
손책은 크게 기뻐하였다.
"숙부님의 묘계로 족히 적을 깨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즉시 각문에 영을 내려 불을 밝히며 기호(旗號)를 많이 세워 의병(擬兵)을 삼게 하고, 밤을 이용하여 에움을 푼 다음 사독으로 가기로 했다.
그때 한 장수가 말했다.
"주공께서 대군을 거두시어 떠나는 것을 알게 되면, 적이 필연코 성을 나와 뒤를 쫓을 것이니 기병(奇兵)을 쓰시는 것이 마땅할까 합니다."
"내 이미 준비를 하여 놓았네. 회계성은 오늘밤 안으로 우리 장중에 들어오게 될 걸세."
손책의 군마가 물러갔다는 첩보를 받은 회계성의 장수 왕랑은 무리들과 함께 성루로 올라갔다. 성밖을 두루 살펴보니, 성 아래에 연기와 불이 함께 일어나며 무수한 정기(旌旗)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왕랑이 마음에 의심하기를 마지않을 때, 부장 주흔이 말했다.
"손책이 겁을 집어먹고 군사를 거두어 달아나는가 봅니다. 그래서 정기를 휘날려 우리를 의심케 하는 것이니, 지금 곧 군사를 내시어 뒤를 치도록 하십시오."
이때 한 장수가 말했다.
"손책이 이번에 간 것이 혹시 사독을 치기 위함이나 아닐까요. 일군을 따로 뽑아 뒤를 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랑은 드디어 뜻을 정하였다.
"사독은 곧 우리의 둔량처(屯糧處)이니 아무래도 방비를 엄히 해야만 하겠소."
왕랑의 군사는 남으로 사독을 향해 급히 뒤를 쫓아 20여 리를 갔다. 때는 초경이 가까운데, 갑자기 밀림속에서 북소리가 크게 울리며 횃불이 일시에 일어났다. 왕랑의 군사들이 깜짝 놀라 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려 할 때, 한 장수가 창을 빗겨 잡고 말을 내달아 나오니 그는 바로 손책이었다. 이 싸움에서 왕랑은 크게 패하여 마침내 성을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는데, 이는 바로 상대를 속여 그 약점을 누르고 때를 보아 기습하여 전승을 거둔 예이다.
또다른 예로는 전국시대 초기, 魏文侯(위문후)가 중산국을 정벌하기 위해 元帥(원수)로 삼은 '악양'의 사례가 있다.
위나라는 晉(진)나라가 나뉜 삼국(위, 조, 한) 중의 하나이다. 이때 晉의 동쪽에 中山國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는 진나라에 계속 조공을 바치고 있었는데 진이 삼국으로 나뉜 후로는 어느 나라를 섬겨야 할지 몰라서 아무 곳에도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중산국의 위치는 서쪽의 조나라와 가깝고 남쪽의 위나라와는 꽤 먼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나라가 중산국을 차지하면 위나라는 북쪽으로부터 상당한 압력을 받을 것이 뻔했다.
중산국을 치기로 마음먹은 위문후는 누구를 원수로 삼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 때, 책황이 악양을 천거한다. 하지만 다른 신하들은 악양의 아들인 악서가 중산국에서 벼슬을 삼고 있다는 이유로 악양을 원수로 삼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위문후가 악양을 불러 물어보니, 악양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어찌 公事를 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한다. 이에 위문후는 악양을 원수로 삼아 중산국을 치게 한다.
악양의 병법은 탁월하여 중산국의 병사들을 계속 이겨나가, 마침내 중산국의 수도인 중산성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중산국의 임금인 희굴은 악양의 아들인 악서를 내세워서 '항복하기 위해서는 임금과 신하가 상의할 시간이 필요하니 한달간의 말미를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악양이 승낙하자 희굴은 악양이 아들인 악서의 처지를 걱정하여 공격을 미루는 것으로 생각했다. 한달이 지나도 뾰족한 계책이 서지 않자 희굴은 또 악서를 보내 다시 한달의 여유를 얻어낸다. 이렇게 악양은 악서에게 세 달의 여유를 주었다.
그러자 중산국은 물론 위나라의 병사들까지도 '악양은 아들을 걱정하여 중산국을 치지 않을 것이다'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또한 조정에서는 일조에 원수가 된 악양을 시기하는 대신들이 위문후에게 악양을 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문후는 악양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때때로 사자를 보내 악양을 위로하고, 악양이 돌아오면 하사하기 위하여 도성 안에 좋은 집까지 마련해 두었다.
한 편, 악양은 약속한 3개월이 지나도 중산국이 항복을 하지 않자 병사들에게 총공격을 준비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병사들은 또다시 한달의 여유를 줄 것이 뻔한데 뭐하러 준비를 하느냐며 불만을 터뜨린다. 그러자 악양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중산국을 치러 온 것은 그 임금이 무도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중산국을 위나라에 영원히 편입시켜야 한다. 우리가 처음에 힘으로 중산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나, 그렇게 하면 백성들은 상처를 입고 우리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산국은 결코 위나라 땅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기다려 온 것은 백성들을 구하고 그들을 위나라의 백성으로 삼기 위함인 것이다."
사태가 급해진 중산국에서는 악서를 인질로 삼으려 하나 악양은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너는 참으로 불초한 자식이다. 벼슬을 살면서도 그 나라를 위해 계책을 세우지 못했고, 적과 싸워 이기지도 못했으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또 나라가 망하게 되었으면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화평을 청하도록 권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해야 하거늘, 그런 것도 못하고 부끄럽지 않느냐! 너 같은 놈을 살려두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죽여야겠다!"
악양은 이렇게 말하며 스스로 활을 들어 악서를 쏘려 했다. 그러자 악서는 황급히 숨어 들어갔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희굴은 악서를 죽여 그 시체로 국을 끓여 악양에게 보낸다. 악양이 충격을 받은 틈을 타서 공격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악양은 오히려 악서의 머리를 보고 꾸짖으며 국을 다 먹었다. 그러고는 중산국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 임금이 국을 보내주어 잘 먹었다. 중산성을 함락하는 즉시 내 너희 임금에게 직접 감사하리라. 너는 임금에게 돌아가 우리 군중에도 국을 끓이는 가마솥이 있음을 알려라!"
이후 악양은 중산국을 완전히 점령하고, 중산국 임금은 자살한다.
永樂大典(영락대전) | 三十六計(삼십육계) | 三國志(Sānguózhì) |
Subscribe to:
Posts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