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襄之仁(송양지인)
송나라 양공(襄公)의 어짊이란 말로 쓸데없는 인정이나 필요없는 동정을 비유하여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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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六計走爲上策 (삼십육계주위상책)
三十六計走爲上策(삼십육계주위상책)
三十六计,走为上策(sānshíliùjì, zǒuwéishàngcè)
三 석 삼 | 十 열 십 | 六 여섯 륙 | 計 꾀 계 | 走 달아날 주 | 爲 할 위 | 上 위 상 | 策 계책 책 |
서른여섯 가지 계책 가운데 도망가는 것이 제일 좋은 계책이라는 뜻으로, 상황이 불리할 때는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라는 뜻.
송(宋) 나라 사마광(司馬光:1019~1086)이 지은 《자치통감(資治通鑑)》 141권에 나오는 말이다. 중국 남북조시대 제(齊)나라 제5대 황제 명제(明帝) 때 일어난 일이다. 명제는 고제(高帝)의 사촌 형제인데, 고제의 증손(제3, 4대 황제)들을 죽이고 황제위를 빼앗았다. 그는 황제에 즉위한 이후 반란과 보복이 두려워 자기를 반대한 형제와 조카 14명을 살해한 것은 물론 자기 주위 사람들마저도 자신에게 반대하면 여지없이 죽였다. 그뿐만 아니라 와병 중에도 왕족을 10여 명이나 죽였다. 명제의 가차없는 살해 행위에 회계(會稽) 지방 태수(太守) 왕경칙(王敬則)은 개국 공신인데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 먼저 군사를 일으켰다. 왕경칙은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건강(建康:지금의 난징)을 향해 진격하였는데, 도중에 명제의 학정(虐政)에 불만을 가진 농민들이 가세하여 군사가 10만 명으로 늘어났다. 왕경칙은 출정한 지 10여 일 만에 건강과 흥성성(興盛城)을 함락하는 등 그의 기세는 파죽지세였다.
이때 병석에 누워 있던 명제 대신에 정사를 돌보고 있던 태자 소보권(蕭寶卷)은 건강과 흥성성의 함락 소식을 듣자 피난 준비를 서둘렀다. 소보권의 피난 소식을 들은 왕경칙은 “단(檀) 장군의 36가지 계책 가운데 도망치는 것이 제일 상책이니 너희 부자는 어서 도망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檀公三十六策 走爲上策 計汝父子唯有走耳].”라고 자신 있게 충고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당당한 왕경칙도 결국 제나라 군사에게 포위되어 참수당하였다.
승산 없는 싸움은 피하는 것이 병법의 기본이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는 말이 있듯이 상황이 불리하면 일단 후퇴하였다가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 지혜로운 군사적인 전술이다. 삼십육계주위상책도 전세가 매우 불리하면 일단 작전상 후퇴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책이라는 뜻이다. 단 장군은 남북조시대 남조 최초의 왕조인 송(宋) 무제(武帝)의 건국을 도운 명장 단도제(檀道濟)로, 북위(北魏)와 싸울 때 전세가 불리하면 잘 도망쳤다고 한다. 동의어는 삼십육계주위상계(三十六計走爲上計)이다.
관련 한자어
유의어
三十六計走爲上計(삼십육계주위상계) | 三十六計走爲上策(삼십육계주위상책) | 走爲上(주위상) | 走爲上計(주위상계) |
走爲上策(주위상책) |
三十六计,走为上策(sānshíliùjì, zǒuwéishàngcè)
三 석 삼 | 十 열 십 | 六 여섯 륙 | 計 꾀 계 | 走 달아날 주 | 爲 할 위 | 上 위 상 | 策 계책 책 |
서른여섯 가지 계책 가운데 도망가는 것이 제일 좋은 계책이라는 뜻으로, 상황이 불리할 때는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라는 뜻.
송(宋) 나라 사마광(司馬光:1019~1086)이 지은 《자치통감(資治通鑑)》 141권에 나오는 말이다. 중국 남북조시대 제(齊)나라 제5대 황제 명제(明帝) 때 일어난 일이다. 명제는 고제(高帝)의 사촌 형제인데, 고제의 증손(제3, 4대 황제)들을 죽이고 황제위를 빼앗았다. 그는 황제에 즉위한 이후 반란과 보복이 두려워 자기를 반대한 형제와 조카 14명을 살해한 것은 물론 자기 주위 사람들마저도 자신에게 반대하면 여지없이 죽였다. 그뿐만 아니라 와병 중에도 왕족을 10여 명이나 죽였다. 명제의 가차없는 살해 행위에 회계(會稽) 지방 태수(太守) 왕경칙(王敬則)은 개국 공신인데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 먼저 군사를 일으켰다. 왕경칙은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건강(建康:지금의 난징)을 향해 진격하였는데, 도중에 명제의 학정(虐政)에 불만을 가진 농민들이 가세하여 군사가 10만 명으로 늘어났다. 왕경칙은 출정한 지 10여 일 만에 건강과 흥성성(興盛城)을 함락하는 등 그의 기세는 파죽지세였다.
이때 병석에 누워 있던 명제 대신에 정사를 돌보고 있던 태자 소보권(蕭寶卷)은 건강과 흥성성의 함락 소식을 듣자 피난 준비를 서둘렀다. 소보권의 피난 소식을 들은 왕경칙은 “단(檀) 장군의 36가지 계책 가운데 도망치는 것이 제일 상책이니 너희 부자는 어서 도망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檀公三十六策 走爲上策 計汝父子唯有走耳].”라고 자신 있게 충고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당당한 왕경칙도 결국 제나라 군사에게 포위되어 참수당하였다.
승산 없는 싸움은 피하는 것이 병법의 기본이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는 말이 있듯이 상황이 불리하면 일단 후퇴하였다가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 지혜로운 군사적인 전술이다. 삼십육계주위상책도 전세가 매우 불리하면 일단 작전상 후퇴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책이라는 뜻이다. 단 장군은 남북조시대 남조 최초의 왕조인 송(宋) 무제(武帝)의 건국을 도운 명장 단도제(檀道濟)로, 북위(北魏)와 싸울 때 전세가 불리하면 잘 도망쳤다고 한다. 동의어는 삼십육계주위상계(三十六計走爲上計)이다.
관련 한자어
유의어
三十六計走爲上計(삼십육계주위상계) | 三十六計走爲上策(삼십육계주위상책) | 走爲上(주위상) | 走爲上計(주위상계) |
走爲上策(주위상책) |
孔子穿珠 (공자천주, Kǒngzǐchuānzhū)
孔子穿珠(공자천주)
孔子穿珠(Kǒngzǐchuānzhū)
孔 구멍 공 | 子 아들 자 | 穿 꿸 천 | 珠 구슬 주 |
공자가 구슬을 꿴다는 뜻으로,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모르는 것을 묻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말.
이 고사는 송(宋)나라의 목암선경(睦庵善卿)이 편찬한 《조정사원(祖庭事苑)》에 나온다. 공자(孔子)가 진(陳)나라를 지나갈 때 이런 일이 있었다. 공자는 전에 어떤 사람에게 진기한 구슬을 얻었는데, 이 구슬의 구멍이 아홉구비나 되었다. 그는 이것을 실로 꿰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다 써 보았지만 성공할 수 없었다. 문득 바느질을 하는 아낙네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꿸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가까이 있던 뽕밭에서 뽕잎을 따고 있던 아낙네에게 그 방법을 물었다. 공자의 이야기를 듣고난 그 아낙은 이렇게 말했다.
"찬찬히 꿀[蜜]을 두고 생각해 보세요." 공자는 그 아낙의 말대로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잠시 후 그녀의 말의 의미를 깨닫고 "그렇지" 하고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는 나무 아래에 왔다갔다 하는 개미를 한 마리 붙잡아 그 허리에 실을 묶고는 개미를 구슬의 한쪽 구멍에 밀어넣고, 반대편 구멍에는 꿀을 발라 놓았다. 그 개미는 꿀 냄새를 맡고 이쪽 구멍에서 저쪽 구멍으로 나왔다. 이리하여 구슬에 실을 꿸 수 있게 되었다.
공자는 배우는 일에 있어서는 나이의 많고 적음이나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자의 이와 같은 언행을 두고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고도 한다. 그가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三人行必有我師]"라고 하여 세 사람이 어떤 일을 같이 할 때에는 선악간(善惡間)에 반드시 스승으로서 배울 만한 사람이 있는 법이라 하였다.
관련 한자어
참조어
不恥下問(불치하문) | 三人行必有我師(삼인행필유아사) |
孔子穿珠(Kǒngzǐchuānzhū)
孔 구멍 공 | 子 아들 자 | 穿 꿸 천 | 珠 구슬 주 |
공자가 구슬을 꿴다는 뜻으로,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모르는 것을 묻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말.
이 고사는 송(宋)나라의 목암선경(睦庵善卿)이 편찬한 《조정사원(祖庭事苑)》에 나온다. 공자(孔子)가 진(陳)나라를 지나갈 때 이런 일이 있었다. 공자는 전에 어떤 사람에게 진기한 구슬을 얻었는데, 이 구슬의 구멍이 아홉구비나 되었다. 그는 이것을 실로 꿰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다 써 보았지만 성공할 수 없었다. 문득 바느질을 하는 아낙네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꿸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가까이 있던 뽕밭에서 뽕잎을 따고 있던 아낙네에게 그 방법을 물었다. 공자의 이야기를 듣고난 그 아낙은 이렇게 말했다.
"찬찬히 꿀[蜜]을 두고 생각해 보세요." 공자는 그 아낙의 말대로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잠시 후 그녀의 말의 의미를 깨닫고 "그렇지" 하고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는 나무 아래에 왔다갔다 하는 개미를 한 마리 붙잡아 그 허리에 실을 묶고는 개미를 구슬의 한쪽 구멍에 밀어넣고, 반대편 구멍에는 꿀을 발라 놓았다. 그 개미는 꿀 냄새를 맡고 이쪽 구멍에서 저쪽 구멍으로 나왔다. 이리하여 구슬에 실을 꿸 수 있게 되었다.
공자는 배우는 일에 있어서는 나이의 많고 적음이나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자의 이와 같은 언행을 두고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고도 한다. 그가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三人行必有我師]"라고 하여 세 사람이 어떤 일을 같이 할 때에는 선악간(善惡間)에 반드시 스승으로서 배울 만한 사람이 있는 법이라 하였다.
관련 한자어
참조어
不恥下問(불치하문) | 三人行必有我師(삼인행필유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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