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螳螂窺蟬 (당랑규선, tánglángkuīchán)

螳螂窺蟬(당랑규선)

螳螂窥蝉(táng láng kuī chán)

螳 사마귀 당 | 螂 사마귀 랑 | 窺 엿볼 규 | 蟬 매미 선 |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려고 엿본다는 말로, 눈 앞의 이익에 어두워 뒤에 따를 걱정거리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


전한(前漢) 때 유향(劉向)이 지은 《설원(說苑)》정간(正諫)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랑포선(螳螂捕蟬)이라고도 한다. 《장자(莊子)》 산목편(山木篇)에 나오는 당랑박선(螳螂搏蟬)이나,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오는 당랑재후(螳螂在後)라는 말이 모두 같은 뜻이다.

춘추시대 말기 오왕(吳王) 부차(夫差)는 월나라 공략에 성공한 후 자만에 빠져 간신 백비의 중상을 믿고 상국(相國:재상) 오자서(伍子胥)를 죽였으며, 월(越)나라에서 보내 온 미인 서시(西施)와 유락 생활에 탐닉하였다. 월의 구천이 와신상담 재기를 노린다는 것을 아는 중신들이 간하여도 막무가내였다.

어느 날 아침 태자 우(友)는 젖은 옷을 입고 활을 든 채 부차를 만났다. “너는 아침부터 무엇을 그리 허둥대느냐?” 부차가 묻자, 우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침에 정원에 갔더니 높은 나뭇가지에 매미가 앉아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 뒤를 보니 사마귀 한 마리가 매미를 잡아먹으려고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홀연 참새[黃雀] 한 마리가 날아와서 그 사마귀를 먹으려고 노리는데, 사마귀는 통 기미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참새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습니다. 그런데 그만 활 쏘는 데 정신이 팔려 웅덩이 속으로 빠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옷을 이렇게 적신 것입니다. 천하에는 이런 예가 부지기수입니다. 이를테면 제나라는 까닭없이 노나라를 쳐서 그 땅을 손에 넣고 기뻐했지만, 우리 오나라에게 그 배후를 공격받고 대패했듯이 말입니다.”

부차는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너는 오자서가 못다한 충고를 할 셈이냐? 이제 그런 소리는 신물이 난다.”

충심에서 우러난 간언을 듣지 않은 부차는 결국 월나라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고, 그 자신은 자결하였다.

장자는 이 일화를 ‘모든 사물은 본래 서로 해를 끼치는 것이며, 이(利)와 해(害)는 서로가 서로를 불러들이는 것’이라는 비유로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 소탐대실(小貪大失)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출전]
說苑(설원) : 正諫 |


黃雀 ①꾀꼬리. 黃鶯兒(황앵아). ②참새. 依人雀(의인작). 賓雀(빈작).


관련 한자어

유의어

螳螂窺蟬(당랑규선) | 螳螂搏蟬(당랑박선, táng láng bó chán) | 螳螂捕蟬(당랑포선, táng láng bǔ chán) | 螳螂在後(당랑재후) |


說苑(설원) : 正諫 |

綠林 (녹림, lùlín)

綠林(녹림)

绿林(lùlín)

綠 푸를 록 | 林 수풀 림


도둑의 별칭.


이 말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전한(前漢) 말기에 대사마(大司馬) 왕망(王莽)이 왕위를 찬탈하여 천자(天子)가 되고, 국호를 신(新)이라 고친 다음 모든 제도를 개혁하였다. 그러나 개혁정책이 너무 급격하여 혼란만 빚었고, 백성은 극도의 생활고에 빠져 새 왕조를 원망하게 되었다. AD 14년(천봉 4) 왕광(王匡) ·왕봉(王鳳) 일당이 이들 난민을 모아 녹림산(綠林山)에서 반기를 들었는데, 그 무리가 수백 명이었다. 그러자 관군에 쫓긴 마무(馬武) ·왕상(王常) ·성단(成丹) 등이 몰려와 함께 녹림산에 근거지를 차리고 마을을 공략하였는데, 이들의 세력이 몇 달 사이에 8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 후 이들은 형주자사(荊州刺使)가 이끈 관군 2만명과 싸워 크게 이기고, 세력이 커져 5만명이 되었을 때 유수(劉秀:光武帝)와 유현(劉玄)이 군사를 일으키자 이들과 합류하여 왕망을 위협하는 큰 세력을 이루었다. 녹림은 원래 산 이름이지만, 왕광의 무리가 굶주린 백성을 모아 이 곳을 근거지로 도둑질을 하였기 때문에 이 후부터 도둑의 소굴을 녹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수호지(水滸誌)》와 당(唐)나라 이섭(李涉)이 지은 우도시(遇盜詩)에도 도둑을 가리켜 녹림의 호객이라 하였다.

九牛一毛 (구우일모)

九牛一毛(구우일모)

九 아홉 구 | 牛 소 우 | 一 한 일 | 毛 털 모 |


아홉 마리의 소 가운데서 뽑은 털 하나. 수에도 들지 않을 만큼 하찮은 것을 형용하는 데 쓰는 말이다.


前漢(전한) 武帝(무제) 때 5천의 군사를 이끌고 흉노 토벌에 나섰던 李陵(이릉)장군은 열 배가 넘는 적을 맞아 10여 일을 싸웠으나 끝내 패하고 말았다. 이듬해 무제는 전사한 줄만 알고 있던 이릉이 흉노에게 투항해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진노한 그는 이릉 일족을 참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신하 중 누구 하나 이릉을 변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만 司馬遷(사마천)만이 대담 솔직하게 이릉의 무고함을 直言(직언)했다.

『이릉은 적은 수의 군사로 적의 수만 병력을 맞아 용감하게 싸웠지만 援軍(원군)은 오지 않고 내부에서 적과 내통한 자가 있어 패한 겁니다. 이릉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흉노에게 투항한 것도 필시 훗날을 노린 苦肉策(고육책)일 것입니다』

사마천의 말에 더욱 격노한 무제는 그를 옥에 가두고 생식기를 자르는 형벌인 宮刑(궁형)에 처했다.

사마천은 친구 任安(임안)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에 당시의 참담했던 심경을 이렇게 썼다.

『내가 사형을 당했다해도 그것은 「아홉 마리 소 가운데에서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과 같을 뿐(九牛亡一毛)」이니 땅강아지나 개미 따위와 내가 뭣이 다를까』

사마천이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참으며 목숨을 부지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史記(사기)」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기」를 끝내지 않고 두 눈을 감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滄海一滴(창해일적) | 大海一滴(대해일적) | 大海一粟(대해일속) | 九牛一毛(구우일모) | 滄海一粟(창해일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