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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虎謀皮 (여호모피)

與虎謀皮(여호모피)

与虎谋皮[yǔhǔmóupí]

與 더불 여 | 虎 범 호 | 謀 꾀할 모 | 皮 가죽 피 |

호랑이에게 가죽을 내어 놓으라고 꾀다라는 뜻으로, 근본적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을 이르는 말

Ask a tiger for its skin.


원래는 여호모피(與狐謀皮:여우와 여우 가죽을 구할 일을 도모하다)였으나, 나중에 여우[狐]가 호랑이[虎]로 바뀌었다. 중국 춘추시대에 노(魯)나라 정공(定公)이 공자(孔子)를 사도(司徒) 벼슬에 앉히려고 하였다. 정공은 그 전에 좌구명(左丘明)을 불러, 삼환(三桓)과 그 일에 대하여 의논하려고 하는데 어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삼환은 환공(桓公)의 손자인 계손씨(季孫氏)와 숙손씨(叔孫氏), 맹손씨(孟孫氏) 세 사람을 일컫는데, 이들은 당시 노나라의 실권자들로서 공자와는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좌구명은 삼환은 공자와 정치적 이해가 상충하므로 반대할 것이라면서 다음과 같은 우화를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갖옷과 맛난 음식을 좋아하는 주(周)나라 사람이 천금의 값어치가 있는 갖옷을 만들기 위하여 여우들에게 찾아가서는 그 가죽을 달라고 하고, 맛난 음식을 먹기 위하여 양들을 찾아가 그 고기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우들은 줄줄이 깊은 산 속으로 도망가버렸고, 양들은 울창한 숲 속으로 숨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주나라 사람은 10년 동안 갖옷을 한 벌도 만들지 못하고 5년 동안 양고기를 구경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왜 그런 것이겠습니까? 그가 의논할 대상을 잘못 찾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군주께서 공구(孔丘:공자)를 사도로 삼으려 하시면서 삼환을 불러 그 일에 대하여 의논하는 것은 여우와 그 가죽을 얻을 일을 의논하고 양과 그 고기를 얻을 일을 의논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정공은 좌구명의 말을 듣고는 삼환을 불러 의논하지 않고 공자를 사도로 임명하였다.

與狐謀皮라는 말은 후에 與虎謀皮로 바뀌었으며, 與虎謀皮는 호랑이에게 가죽을 요구하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유래하여 여호모피는 호랑이에게 제 가죽을 달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요구하는 일이 상대방의 이해와 상충하여 이루어질 수 없음 또는 이해가 상충하는 상대방이 도와줄 리가 없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태평어람:부자 《太平御览》卷二0八引《符子》
태평어람:직관부(職官部)·사도 하(司徒下)

欲为千金之裘而与狐谋其皮,欲具少牢之珍而与羊谋其羞,言未卒,狐相率逃于重丘之下,羊相呼藏于深林之中。 (욕위천금지구이여호모기피, 욕구소뢰지진이여양모기수, 언미졸, 호상솔도우중구지하, 양상호장우심림지중.)

천금짜리 옷이 탐나 여우에게 가죽 얘기를 하고, 제삿상에 바칠 고기로 양을 뻔뻔히 얘기하고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여우를 데리고 언덕 아래로 내려가니, 양들이 산속으로 숨어버리더라.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與虎謨皮(여호모피) | 與虎謀皮(여호모피) | 與狐謨皮(여호모피) | 與狐謀皮(여호모피) | 與羊謨肉(여양모육) |

與狐謨皮 (여호모피)

與狐謨皮(여호모피)

與 더불 여, 줄 여 | 狐 여우 호, 범 호 | 謀 꾀할 모 | 皮 가죽 피 |

여우하고 여우의 모피(毛皮)를 벗길 모의(謀議)를 한다는 뜻으로, 이해(利害)가 상충하는 사람하고 의논(議論)하면 결코 이루어지지 않음을 비유(比喩ㆍ譬喩)해 이르는 말


태평어람(太平御覽) 권208에는 마치 이솝 우화(寓話)와도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주(周)나라 때, 어떤 사나이가 천금(千金)의 가치가 있는 따뜻한 가죽 이불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는 여우 가죽으로 이불을 만들면 가볍고 따뜻하다는 말을 듣고, 곧장 들판으로 나가 여우들과 이 가죽 문제를 상의하였다[與狐謀其皮]. 자신들의 가죽을 빌려달라는 말을 듣자마자 여우들은 깜짝 놀라서 모두 깊은 산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얼마 후, 그는 맛좋은 제물(祭物)을 만들어 귀신의 보살핌을 받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에 그는 곧 양들을 찾아가 이 문제를 상의하며, 그들에게 고기를 요구하였다.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양들은 모두 숲속으로 들어가 숨어 버렸다.


출전

태평어람:부자 《太平御览》卷二0八引《符子》

欲为千金之裘而与狐谋其皮,欲具少牢之珍而与羊谋其羞,言未卒,狐相率逃于重丘之下,羊相呼藏于深林之中。 (욕위천금지구이여호모기피, 욕구소뢰지진이여양모기수, 언미졸, 호상솔도우중구지하, 양상호장우심림지중.)

천금짜리 옷이 탐나 여우에게 가죽 얘기를 하고, 제삿상에 바칠 고기로 양을 뻔뻔히 얘기하고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여우를 데리고 언덕 아래로 내려가니, 양들이 산속으로 숨어버리더라.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與虎謨皮(여호모피) | 與虎謀皮(여호모피) | 與狐謨皮(여호모피) | 與狐謀皮(여호모피) | 與羊謨肉(여양모육) |

女必從夫 (여필종부)

女必從夫(여필종부)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말.

予取先與 (여취선여)

予取先與(여취선여)

予 나 여 | 取 취할 취 | 先 먼저 선 | 與 줄 여 |

얻으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는 뜻


전국책(戰國策) 위책(魏策)의 이야기.

진(晋)나라에 지백(知伯)이라는 귀족이 있었다. 그는 또 다른 귀족인 위환자(魏桓子)에게 영토를 강요하였다. 위환자는 후에 위나라의 선조(先祖)가 된 사람인데, 그도 당시에 다른 사람들의 영토를 차지하려 하였으므로, 지백의 요구를 받아 들일 수 없었다. 이에 임장(任章)이라는 사람이 위환자에게 지백의 요구대로 땅을 떼어 주도록 권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백에게 땅을 떼어준다면, 지백은 자신을 대단한 인물이라고 자만하여 적을 얕보게 될 것입니다. 이웃 나라들도 이러한 피해를 입게 될까봐 단결하여 공동으로 지백을 상대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지백은 오래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주서(周書)에서는 상대를 물리치려면 반드시 먼저 그를 키워주고, 상대에게서 무언가를 얻으려면 반드시 그에게 미리 무언가를 주어야 한다[將欲取之, 必故予之]라고 했습니다.

위환자는 임장의 말대로 하였다. 지백은 과연 교만과 횡포, 그리고 탐욕 때문에 살신지화(殺身之禍)를 불렀다.


출전

전국책(戰國策) 위책(魏策)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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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松之盛 (여송지성)

如松之盛(여송지성)

如 같을 여 | 松 솔 송 | 之 갈 지 | 盛 성할 성 |

솔 나무같이 푸르러 성(盛)함은 군자(君子)의 절개(節槪ㆍ節介)를 말한 것임

[출전]
千字文(천자문)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似蘭斯馨如松之盛(사란사형여송지성) |

如魚得水 (여어득수)

如魚得水(여어득수)

如 같을 여, 말 이을 이 | 魚 고기 어 | 得 얻을 득 | 水 물 수 |

물고기가 물을 얻음과 같다는 뜻으로, 빈궁(貧窮)한 사람이 활로를 찾게 됨을 비유(比喩ㆍ譬喩)해 이르는 말

Like fish getting water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제갈량(諸葛亮)전에는 유비(劉備)가 제갈량을 얻었을 때의 심정을 기록한 대목이 있다. 동한(東漢) 말기, 천하가 대란(大亂)에 휩싸이자, 각 세력들과 다투던 유비는 인재(人才)를 찾고 있었다. 그는 제갈량이라는 인재가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터라, 직접 세 차례나 그를 찾아가 자신을 도와 천하를 도모하기를 청하였다.

제갈량의 도움으로 유비는 촉한(蜀漢)을 건국하고, 조조, 손권과 삼국정립(三國鼎立)의 국면을 형성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을 매우 존경하였으며, 제갈량 또한 유비의 대우에 깊은 감사를 느끼고 그에게 충성을 다했다. 유비는 중대한 일들에 대하여 제갈량에게 자문을 구하였는데, 관우와 장비는 유비의 제갈량에 대한 태도에 불만이었다.

이에 유비는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제갈량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으니[孤之有孔明, 猶魚之有水也], 자네들은 다시 이런 말을 하지 않도록 하게."

如魚得水(Like fish getting water)란 수어지교(水魚之交), 수어지친(水魚之親)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마음에 맞는 사람을 얻거나 자신에게 매우 적합한 환경을 얻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출전

三國志(삼국지)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水魚之交(수어지교) | 水魚之親(수어지친) |

與時俱進 (여시구진)

與時俱進(여시구진)

1910년대 쓴 '중국이론학사'에 등장한 말로 '시대 조류에 맞춰 나가자'는 뜻

與世推移 (여세추이, yǔshìtuīyí)

與世推移(여세추이)

与世推移(yǔshìtuīyí)

與 더불 여 | 世 인간 세 | 推 옮길 추 | 移 옮길 이 |


세상의 변화에 맞추어 함께 변화해간다는 뜻으로 중국 전국시대 초(楚)의 굴원[屈原]이 지은 ‘어부사(漁父辭)’에서 비롯된 말이다.

廬山眞面目 (여산진면목, Lúshānzhēnmiànmù)

廬山眞面目(여산진면목)

庐山真面目(Lúshānzhēnmiànmù)

廬 오두막집 려 | 山 메 산 | 眞 참 진 | 面 얼굴 면 | 目 눈 목 |


'여산의 참모습'이라는 뜻으로, 너무도 깊고 유원하여 그 참모습을 파악하기 어려움을 비유하는 말이다. 중국 송(宋)나라 때 소식(蘇軾)이 지은 《제서림벽(題西林壁)》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소식은 호를 동파거사(東坡居士)라 하여, 소동파(蘇東坡)라고도 부른다. 여산(루산)을 유람하면서 모두 7수의 시를 지었는데, 《제서림벽》도 그 가운데 한 수이다. 《제서림벽》이라는 제목은 '서림사(西林寺) 담장에 쓴 제시(題詩)'라는 뜻이다. 동진(東晉) 시대에 세워진 서림사는 여산의 북서쪽 기슭에 있는 유명한 고찰이다. 《제서림벽》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橫看成嶺側成峰(횡간성령측성봉)
遠近高低各不同(원근고저각부동)
不識廬山眞面目(불식여산진면목)
只綠身在此山中(지연신재차산중)

가로로 보면 고개, 세로로 보면 봉우리
원근고저에 따라 모습이 제각각일세.
여산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
단지 이 몸이 산 속에 있기 때문이지.

간결한 7언절구로 쓰여진 이 시는 송나라 때 유행한 설리시(說理詩)에 속한다. 곧, 삼면이 물로 싸여 있고 만학천암(萬壑千巖)이 안개에 휩싸여 그 참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여산의 모습을 통하여 도(道)나 진리의 전모(全貌)를 체득하기 어려움을 말하는 것으로도 풀이된다. 여기서 유래하여 여산진면목은 깊고 유원하여 그 참모습을 파악하기 어려움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출전: 題西林壁(제서림벽)


관련 한자어

동의어

庐山真面(Lúshānzhēnmiàn) |

참조어

不识庐山真面目(bùshíLúshānzhēnmiànmù) 숲 속에 있는 사람은 숲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다. |

有眼不识泰山(yǒuyǎnbùshíTàishān) 눈이 있어도 태산을 알아보지 못하다. 견식이 부족해 신분·지위·능력 등이 대단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다. 어른을 몰라보다. |


관련 한시

題西林壁(제서림벽) |


제서림벽, 소식

題西林壁, 蘇軾

如反掌 (여반장)

如反掌(여반장)

이여반장(易如反掌)의 준말. 손바닥을 뒤치는 것처럼 아주 쉽다는 말. 맹자(孟子)에서 유래.


관련 한자어

유의어

타수가득(唾手可得) 쉽게 얻을 수 있는 일 또는 힘들이지 않고 쉽게 성사시킬 수 있는 일 등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쉽다는 뜻의 여반장(如反掌) 또는 이여반장(易如反掌)과 같은 의미이다.

與民同樂 (여민동락)

與民同樂(여민동락)

與 더불 여 | 民 백성 민 | 同 같을 동 | 樂 즐거울 락 |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하다'라는 뜻으로, 백성과 동고동락하는 통치자의 자세를 비유하는 말이다. 《맹자(孟子)》에서 유래되었다.

맹자는 인의(人義)와 덕(德)으로써 다스리는 왕도(王道)정치를 주창하였는데, 그 바탕에는 백성을 정치적 행위의 주체로 보는 민본(民本) 사상이 깔려 있다. 맹자는 양(梁)나라 혜왕(惠王)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왕께서 음악을 연주하시는데 백성들이 종과 북, 피리 소리를 듣고는 골머리를 앓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우리 왕은 음악을 즐기면서 어찌하여 우리를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여 부자(父子)가 만나지 못하고, 형제와 처자가 뿔뿔이 흩어지게 하는가"라고 불평하며, 또 왕께서 사냥을 하시는데 백성들이 그 행차하는 거마(車馬) 소리와 화려한 깃발을 보고는 골머리를 앓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우리 왕은 사냥을 즐기면서 어찌하여 우리를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여 부자(父子)가 만나지 못하고, 형제와 처자가 뿔뿔이 흩어지게 하는가"라고 원망한다면, 이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此無他, 不與民同樂也].

지금 왕께서 음악을 연주하시는데 백성들이 종과 북, 피리 소리를 듣고는 모두들 기뻐하는 빛을 띠며 "우리 왕께서 질병 없이 건강하신가 보다, 어찌 저리 북을 잘 치실까"라고 하며, 왕께서 사냥을 하시는데 백성들이 거마 소리와 화려한 깃발을 보고 모두들 기뻐하는 빛을 띠며 "왕께서 질병 없이 건강하신가 보다, 어찌 저리 사냥을 잘 하실까"라고 한다면, 이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하기 때문입니다[此無他, 與民同樂也]."

곧, 왕이 백성들에게는 고통을 주면서 자기만 즐긴다면 백성들이 반발하겠지만,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한다면 왕이 즐기는 것을 함께 기뻐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 고사(故事)는 《맹자》의 '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 하편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여민동락은 항상 백성을 중심으로 하는 통치자의 이상적인 자세를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여민해락(與民偕樂)도 같은 뜻이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與民同樂(여민동락) | 與民偕樂(여민해락) |

如狼牧羊 (여랑목양)

如狼牧羊(여랑목양)

如 같을 여 | 狼 이리 랑,낭 | 牧 칠 목 | 羊 양 양 |

이리에게 양을 기르게 한다는 뜻으로, 탐관오리(貪官汚吏)가 백성을 착취(搾取)함을 비유한 말.

Like a wolf shepherding sheep. To rule the people oppressively. Oppression of the people by bad officials.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지방의 할거 세력들과 대상인들은 대대적으로 토지를 점령하여, 정치적, 경제적으로 매우 큰 힘을 가진 세력집단이 되었다. 한무제는 중앙집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지방호족과 대상인들의 세력을 억제하는 정책을 채용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지방 할거세력과 호족, 대상인들의 저항을 야기하게 되었다.

그 당시, 정양(定襄) 태수를 지내는 의종(義縱)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본시 도적출신이었으나, 왕태후의 총애를 받은 누님의 덕택으로 현령이 되었다. 그는 법을 올바르게 적용하여 다스릴 뿐, 신분의 귀천(貴賤)은 따지지 않았다. 한번은 태후(太后)의 외손(外孫)인 수성군(修成君)의 아들을 체포하여 심문한 적이 있었는데, 천자는 이를 알고 의종을 유능하다고 여겨, 하내(河內)의 도위로 자리를 옮기게 하였다. 의종은 부임하자 곧 그 곳의 호족(豪族)인 양씨(穰氏) 일가를 멸망시켰는데,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이곳 사람들은 두려워서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게 되었다[河內道不拾遺].

한편, 제남(濟南)의 도위(都尉)를 지내며 종실(宗室)과 호족(豪族)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영성(寧成)은 중형을 받고 고향에 머물고 있었다. 그 즈음 천자가 그를 태수로 임명하려고 하자, 어사대부 공손홍이 진언하였다.

˝신이 산동의 말단 관리로 있을 때, 영성은 제남의 도위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마치 이리가 양을 치는 것과 같았습니다[其治如狼牧羊]. 영성에게 백성을 다스리게 해서는 안됩니다.˝

천자는 영성을 함곡관의 도위로 임명하였다. 영성이 도위로 근무한지 1년쯤 지나자, 관(關)을 출입하는 관리들에게서 이런 말이 나돌았다.

˝어린 호랑이에게 젖을 먹이는 호랑이를 건드릴지언정 영성의 노여움을 사면 안 된다.˝

의종은 하내에서 남양의 태수를 자리를 옮기게 되었는데, 의종은 영성(寧成)이 은퇴하여 그곳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종이 남양에 부임하기 위해 관(關)에 도착하자, 영성은 그곳에 나와 겸손하게 그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의종은 거만하게 굴며 그에게 답례조차 하지 않았다. 의종은 남양의 태수로 부임하자, 제일 먼저 영성의 무고한 일가를 심문하고 그 일족을 모두 죽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관리들과 사람들은 모두 집안에 틀어박혀 함부로 나돌아다니지 않았다.

얼마 후, 흉노 원정으로 정양군의 관리들과 백성들이 혼란에 빠지게 되자, 천자는 의종을 정양의 태수로 임명하고 혼란을 막도록 하였다. 의종은 정양군에 부임하자마자, 정양군내의 호족이나 할거세력들의 반항을 평정한 후, 2백여 명의 범죄자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아울러, 사적(私的)으로 감옥에 드나들며 죄인들을 면회한 사람들에게 죄수 탈옥을 도왔다는 죄를 적용하여 전원 체포하여, ´이 자들은 사형에 해당하는 자를 탈옥시키려고 꾀하였다´라고 논고하여 그 날 중으로 4백여 명을 모조리 죽였다. 그 후 군내의 백성들은 춥지 않아도 벌벌 떨었으며, 교활한 자들은 관리에게 협력하여 이 일을 도왔다[其後郡中不寒而慄, 猾民佐吏爲治]. 후에, 의종은 나랏일을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기시(棄市)의 형에 처하여졌다.

出典
史記(사기) 권122 혹리열전(酷吏列傳).

餘桃啗君 (여도담군)

餘桃啗君(여도담군)

餘 남을 여 | 桃 복숭아 도 | 啗 먹일 담 | 君 임금 군 |

먹다 남은 복숭아를 임금에게 먹인다는 뜻으로, 처음에는 좋게 보여 사랑 받던 것이 나중에는 도리어 화근(禍根)이 됨을 이르는 말


한비자(韓非子) 세난(說難)편의 이야기.

춘추시기, 위(衛)나라에 미자하(彌子瑕)라는 미소년이 있어 영공(靈公)의 총애를 받았다.

미자하(彌子瑕)는 어느 날 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허락도 없이 왕 전용 수레를 타고 황궁을 빠져 나왔다. 당시 위나라의 법에는 함부로 왕의 수레를 탄 사람은 발목을 자르는 월형에 처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국왕은 용서하였다.

"그는 효자여서 어머니를 위하여 발을 잘리는 형벌도 잊어버렸구나."

그 후, 어느 날 미자하는 국왕과 함께 과수원을 거닐다가, 그 맛이 너무 좋아서 먹다만 복숭아 반쪽을 왕에게 줬다. 이에 왕은 칭찬하였다.

"반쪽 복숭아를 먹으면서도 나를 끔찍하게 생각하는구나. 자신이 먹을 단맛을 잊고서 나를 주다니."

하지만 세월이 흘러 미자하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왕은 미자하의 모든 행동이 눈에 거슬리기만 하였다. 결국 왕은 그를 꾸짖으며, 처벌했다.

"이놈은 언젠가 몰래 내 수레를 탔고, 또 먹다가 남은 복숭아를 나에게 먹였다."

餘桃啖君이란 사랑과 미움, 기쁨과 분노가 늘 변함을 비유한 말이다.


출전

한비자(韓非子) 세난(說難)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여도지죄(餘桃之罪) | 餘桃啗君(여도담군) | 이여도담군(以餘桃啗君) |



중요도·활용도

중요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