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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而不實 (화이부실)

華而不實(화이부실)

華 꽃 화, 빛날 화 | 而 말이을 이, 능히 능 | 不 아닐 부, 아닐 불 | 實 열매 실, 이를 지 |

꽃만 피고, 열매가 없다는 뜻으로, 언행(言行)이 일치(一致)하지 않음을 비유(比喩ㆍ譬喩)해 이르는 말

Flowery but bears no fruit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5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기록되어 있다.

중국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대부(大夫) 양처보(陽處父)가 위(衛)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노(魯)나라의 영읍(寗邑)을 지나가게 되었다. 양처보는 그 곳의 한 객점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객점의 주인 영은 양처보의 인물됨에 반하여 그와 함께 갈 것을 결심하였다. 양처보의 동의를 얻은 후, 영은 아내에게 작별을 고하고 그와 함께 떠났다. 그런데 영은 온(溫) 땅에 이르자 생각을 바꾸어 집으로 돌아왔다.

영의 아내는 매우 이상하게 여겨 다시 돌아온 이유를 물었다. 이에 영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양처보는 성격이 지나치게 강경하고 편집적인 인물이오. 게다가 겉만 번지르르하고 실속은 없으며, 쉽게 남을 불쾌하게 만들어 원망을 많이 사고 있소.[且華而不實,怨之所聚也]. 그를 따라갔다가는 이익을 얻기도 전에 재앙을 당할 것이 두려워 그냥 돌아온 것이오."

양처보는 이로부터 1년 뒤에 조성자(趙成子)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이 고사는 《좌씨전》의 '문공(文公) 5년'조에 실려 있다.

또 한(漢)나라의 왕충(王充)이 지은 《논형(論衡)》에는 "무릇 사람은 문(文:형식)과 질(質:실질)로 이루어지는데, 사물은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실질적이지 못한 것이 있고, 실질적이지만 화려하지는 못한 것이 있다(夫人有文質乃成, 物有華而不實, 有實而不華者)"라는 구절이 있다. 역시 내실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 유래하여 화이부실은 화려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식물처럼 겉모습만 번지르르하고 실속이 없는 경우를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우리나라 속담 가운데 '빛 좋은 개살구'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이다.


출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

知難而退 (지난이퇴)

知難而退(지난이퇴)

知 알 지 | 難 어려울 난, 우거질 나 | 而 말 이을 이, 능히 능 | 退 물러날 퇴 |

형세(形勢)가 불리한 것을 알면 물러서야 함


춘추좌전(春秋左傳) 선공(宣公) 12년조에는 사정이 좋음을 보고 진격(進擊)하고,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물러난다는 것은 용병의 바른 원칙이다. [見可而進, 知難而退, 軍之善政也]라는 대목이 있다.

춘추시기, 정(鄭)나라는 패권(覇權)을 다투던 진(晉)나라와 초(楚)나라 사이에 위치하였는데, 정나라는 먼저 진나라에 의지하였다. 그러자 초나라는 군사를 동원하여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정나라는 자국(自國)의 안전을 위하여 진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먼데 있는 물로는 불을 끌 수 없듯 진나라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으므로, 정나라는 초나라에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진나라의 군대를 통솔하던 환자(桓子)는 정나라를 구원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여겼으며, 당시 초나라의 국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에 진나라로서도 승산이 없었다. 이에 그는 철군하려 하였으나, 지휘에 따르지 않던 부하들은 초나라 군사와 교전을 하여 크게 패하고 말았다.

知難而退란 형세가 불리한 것을 알면 마땅히 물러서야 함 을 뜻한다.


출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

除舊布新 (제구포신)

除舊布新(제구포신)

除 덜 제 | 舊 예 구 | 布 베풀 포 | 新 새 신 |

묵은 것을 버리고 새것을 베푸는 일.



제구포신은 ‘춘추좌전’에 나오는 말로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로운 것을 펼쳐낸다’는 뜻이다. 춘추좌전의 기록을 보면, 소공(昭公) 17년 겨울 하늘에 혜성이 나타나자 노나라의 대부(大夫) 신수(申須)가 이를 제구포신의 징조로 해석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혜성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불길함의 상징으로 여겨져왔는데 오히려 이를 변혁의 징조로 본 것이다.

[출전]
春秋左氏傳(춘추좌씨전)

爾虞我詐 (이우아사)

이우아사(爾虞我詐)

爾 너,어조사 이 | 虞 염려할 우 | 我 나 아 | 詐 속일 사

서로 의심(疑心)하거나 서로 속임을 뜻하는 말


초나라 군대는 오랜 공격으로 병사들이 지쳤고, 군량도 바닥이 난 터에, 오래 끌어 보아야 좋은 것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철군을 하지는 않았다. 또한 포위 당한 채 오랜 공격을 받아온 송나라 군대 역시 병사들은 지쳐있었고, 식량도 이미 다 소모되고 없었다. 외부의 원조가 없이는 얼마 지탱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순순히 항복할 수는 없었다. 두 나라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형편이 되었다.

이 때, 초나라 신숙시(申叔時)가 초왕에게 계책을 말했다.

"병사들에게 이 근처에 집을 짓고 밭을 일구며 장기전을 준비하는 척하게 한다면, 송나라는 반드시 항복할 것입니다(築室反耕者, 宋必聽命)."

초 장왕이 계책대로 실시하자, 과연 송나라 사람들은 크게 놀랬다. 이에 화원은 밤을 틈타 성을 빠져 나와 초나라 공자 반(反)의 막사로 숨어 들어가 그를 깨워 일으키고 말했다.

"우리는 지금 자식을 양식과 바꾸어 먹고 사람의 뼈를 쪼개 밥을 짓고 있소. 우리는 죽어도 항복하지 않을 것이지만, 당신네들이 30리만 물러난다면, 그때는 하자는 대로 하겠오."

몹시 놀란 공자 반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초왕에게 고하여 군대를 30리 뒤로 물러나게 하고, 송나라와 화평을 맺었으며, 화원은 인질이 되었다. 그때 했던 맹약의 내용은 이러했다.

"우리 초나라는 당신 나라를 속이지 않을테니, 당신네 송나라는 우리 초나라를 속이지 말라(我無爾詐, 爾無我虞)."

[출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宣公 15年條


동의어

이사아우(爾詐我虞)

魑魅魍魎 (이매망량, chīmèiwǎngliǎng)

魑魅魍魎(이매망량)

魑魅魍魉(chīmèiwǎngliǎng)

魑 도깨비 리,도깨비 이 | 魅 매혹할 매,도깨비 매,도깨비 미 | 魍 도깨비 망 | 魎 도깨비 량,도깨비 양 |


산 속의 요괴와 물 속의 괴물 등 온갖 도깨비·요괴·귀신·괴물 등을 총칭하는 말로 나쁜 사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이매는 산 속의 요괴, 망량은 물 속의 괴물을 말하는데, 이들이 합쳐져 온갖 도깨비를 지칭하는 하나의 성어(成語)가 되었다. 《좌씨전(左氏傳)》의 '선공(宣公) 3년' 조에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주(周)나라의 대부(大夫) 왕손만(王孫滿)에게 주나라 왕실이 지닌 정(鼎:솥)의 크기와 무게를 물었다는 기록이 있다.

정은 왕권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장왕은 주나라가 정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쇠락하였으므로 자신이 그것을 차지하겠다는 속셈을 품고 있었다. 왕손만은 장왕의 속셈을 간파하고 정의 크기와 무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덕(德)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고 대답하였다. 문정지대소경중(問鼎之大小輕重)이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왕손만은 정의 용도에 대하여 "거기에 온갖 사물을 새겨 놓음으로써 백성들에게 신령스러운 것과 간악한 것을 구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물에 들어가거나 산에 들어가서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피할 수 있고, 이매망량 같은 귀신 도깨비들과 마주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百物而爲之備, 使民知神奸, 故民入川澤山林不逢不若, 魑魅魍魎, 莫能逢之)"라고 하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이매망량은 요괴와 괴물 등 온갖 도깨비를 뜻하는 원래의 의미 외에 그러한 요괴와 괴물처럼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가지각색의 악인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左氏傳(좌씨전):宣公(선공):三年(3년) |


관련 한자어

참조어

問鼎之大小輕重(문정지대소경중) |


좌씨전, 좌씨전:선공

左氏傳, 左氏傳:宣公

食指動 (식지동)

食指動(식지동)

집게손가락이 움직인다는 말로, 식욕을 불러일으키는 것 또는 욕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心腹之患 (심복지환, xīnfùzhīhuàn)

心腹之患(심복지환)

心腹之患(xīnfùzhīhuàn)

心 마음 심 | 腹 배 복 | 之 갈 지 | 患 근심 환 |


'가슴이나 배에 생긴 병'이라는 뜻으로, 쉽게 치료하기 어려운 질병 또는 없애기 어려운 근심이나 병폐를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좌씨전(左氏傳)》과 《후한서(後漢書)》 등에서 유래되었다.


심복지질(心腹之疾) 또는 복심지질(腹心之疾)이라고도 한다. 춘추시대에 오(吳)나라 왕 합려(闔閭)는 월(越)나라 왕 구천(勾踐)과 싸우다 상처를 입어 죽었다. 합려의 아들 부차(夫差)는 군사력을 키워 월나라를 정벌함으로써 아버지의 원한을 갚았다. 부차가 제(齊)나라를 공격하려 할 때, 구천이 신하들을 이끌고 와서 부차와 대신들에게 재물을 바쳤으므로, 오나라 대신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그러나 오자서(伍子胥)만은 월나라의 그러한 행동이 오나라의 경계심을 늦추게 하려는 속셈임을 간파하였다.

오자서는 부차에게 "제나라는 우리에게 쓸모없는 자갈밭과 마찬가지이니 공격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월나라는 우리에게 가슴이나 배에 생긴 질병과 같은 존재입니다(越在我, 心腹之疾也). 월나라가 지금은 겉으로 복종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우리나라를 집어삼킬 계책을 도모하고 있을 것입니다. 왕께서 빨리 월나라를 멸하여 후환을 없애지 않고, 도리어 제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일이 아닙니다"라고 간언하였다.

그러나 부차는 이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오나라는 나중에 월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이 고사는 《좌씨전》의 '애공(哀公) 11년'조(條)에 실려 있다.

또 《후한서》의 〈진번전(陳蕃傳)〉에 "나라 밖에 왜구나 도적이 있는 것은 사지에 든 병과 같지만, 나라 안의 정치가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가슴이나 배에 생긴 병과 같다(寇賊在外, 四支之疾, 內政不理, 心腹之疾也)"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심복지환은 몸 속의 가슴이나 배에 생긴 질병처럼 없애기 어려운 근심거리나 병폐, 환란 등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左氏傳(좌씨전):哀公(애공) 11년 | 後漢書(후한서):陳蕃傳(진번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

心腹之疾(심복지질) | 腹心之疾(복심지질) |

참조어

吴市吹箫(오시취소,Wúshìchuīxiāo) | 掘墓鞭屍(굴묘편시) | 日暮途遠(일모도원) | 心腹之患(심복지환) |


좌씨전, 좌씨전:애공, 후한서, 후한서:진번전, 사기, 사기:오자서열전

左氏傳, 左氏傳:哀公, 後漢書, 後漢書:陳蕃傳, 史記, 史記:伍子胥列傳

城下之盟 (성하지맹)

城下之盟(성하지맹)

城下之盟[chéngxiàzhīméng]

城 재 성 | 下 아래 하 | 之 갈 지 | 盟 맹세 맹 |

수도(首都)의 성 밑까지 적군(敵軍)의 공격(攻擊)을 받아 할 수 없이 강화(講和)를 맹세(盟誓)하고 굳게 약속(約束)한다는 뜻으로, 대단히 굴욕적(屈辱的)인 강화(講和)나 항복(降伏)을 이르는 말


춘추좌전(春秋左傳) 환공 12년조(桓公十二年條)의 이야기.

“그 계책을 따르니 교(絞)의 사람들은 초나라의 인부 30명을 사로잡았다. 이튿날에는 교의 사람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나서서 초나라 인부들을 쫓아 산 속으로 달려갔다. 초나라 군사들이 그 북문을 지키고 산 아래에 숨어 있었으므로 교의 사람들은 대패하여 성 아래에서 맹세하고 돌아갔다[從之 絞人獲三十人 明日絞人爭出 驅楚役徒於山中 楚人坐其北門 而覆諸山下 大敗之 爲城下之盟而還].”

춘추시기, 초(楚)나라 군대가 교(絞)나라를 침공하여 교나라 도읍의 남대문에 이르렀다. 교나라 군사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초나라 군대는 몇 차례 공격을 시도하였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이에 초나라의 장군 굴하(屈瑕)는 무왕(武王)에게 한 가지 계책을 제시하고 즉시 실행에 옮겼다.

이튿날, 초나라는 수십명의 병사들을 나뭇꾼으로 변장시켜 성곽 주변의 산에서 나무를 하는 척하게 하였다. 교나라의 군인들은 그들을 즉시 잡아와, 득의만만해 하였다. 이튿날, 초나라의 같은 작전에 속아 넘어간 교나라 군사들이 그들을 잡으러 성문을 열고 나오자, 미리 매복해있던 초나라 군사들은 교나라 도성을 포위하며, 총공격을 해들어왔다. 교나라는 순식간에 멸망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도성 아래에서 굴욕적인 맹약을 맺고 초나라의 속국이 되고 말았다.


출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

반의어·상대어

|


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問鼎之大小輕重焉 (문정지대소경중언)

問鼎之大小輕重焉(문정지대소경중언)

솥의 무게를 묻는다는 말로 어떤 직위에 있는 인물의 자격을 묻고 퇴임을 압박한다는 말. 줄여서 문정(問鼎) 또는 문정경중(問鼎輕重)이라고도 함.

東道主 (동도주)

동도주(東道主)

東(동녘 동) 道(길 도) 主(주인 주)

동쪽으로 가는 데 길을 안내(案內)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주인(主人) 또는 주인의 역할(役割)을 하는 사람을 비유하는말.

진(晉) 헌공의 아들 중이는 19년 동안 각 나라를 떠돌다가, 정(鄭)나라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정나라는 그에게 극히 비우호적인 대접을 하여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다. 중이는 귀국하여 왕위에 오르자, 복수를 하기 위해 진(秦)나라와 연합하여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때는 기원전 627년 9월.

눈앞에 적들이 밀어닥치자 정 문공(文公)은 겁을 먹고 대신들을 불러모아 대책을 논의하였다. 대부 질지호(佚之狐)가 먼저 의견을 내놓았다.

"나라가 위태롭습니다. 만약 촉지무(燭之武)를 보내어 진(秦)나라 군주를 만나게 한다면, 진나라는 철군할 것 같습니다."

촉지무는 언변(言辯)이 뛰어나고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지만, 여태껏 조정에서 크게 쓰이지 못해 불만이 많았다. 촉지무는 정 문공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맡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정 문공은 계속하여 그를 설득하였다.

"내가 일찍이 그대를 중용하지 않다가, 이제야 다급하게 그대에게 이 일을 맡기고자 하니, 이는 나의 잘못이오."

촉지무는 불만이 다소 풀렸다. 밤이 되자 촉지무는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나가 진나라 진영으로 향했다. 그러나 진나라 병사들이 그를 막자, 촉지무는 성벽에 밧줄로 자신의 몸을 묶은 채 대성통곡하기 시작하였다. 진나라 병사들은 하는 수 없이 그를 진나라 목공에게 데려 갔다.

"너는 왜 그리 울었더냐?"

"저는 정나라의 멸망 때문에 통곡을 하였으며, 진나라에 대해서는 슬픔을 억누를 길이 없습니다. 진(秦)과 진(晉)의 대군이 우리 정나라를 포위하고 공격을 하니 정나라는 망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정나라는 진(秦)나라와 영토가 붙어있지 않습니다.

진(秦)나라는 서쪽에, 정나라는 동쪽에 있으며 그 가운데는 진(晉)나라가 막고 있습니다. 때문에 정나라가 망한 뒤에 영토는 진(晉)나라로 병합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진(晉)나라의 국력은 점차 강대해질 것이고, 진나라는 상대적으로 약해질 것입니다. 진나라는 무엇 때문에 남의 세력은 키워주면서 자신의 힘은 줄이는 것입니까? 만약 저희 정나라를 그대로 두시고 동쪽 진출의 길 안내역으로 삼으시고. 사신(使臣)들의 왕래에 부족한 물자를 공급하게 하신다면, 진(秦)나라 입장에서도 손해됨이 없을 것입니다(若舍鄭以爲東道主, 行李之往來, 供其乏困, 君亦無所害)."

진(秦)나라 목공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를 좋아하며 즉각 군대를 철수하는 한편, 기자(杞子), 봉손(逢孫), 양손(揚孫) 등 사람을 남겨두어 정나라 도읍의 방위를 돕게 하였다. 얼마 후에는 진(晉)나라 군대도 그곳을 떠났다.

[출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僖公 30年條

大義滅親 (대의멸친)

大義滅親(대의멸친)

국가나 사회의 대의를 위해서는 친족도 멸한다는 말로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족에 대한 정같은 것을 버린다는 뜻이다.


때는 춘추시대. 衛(위)나라 公子(공자)인 주우가 임금인 桓公(환공)을 죽이고 스스로 임금자리에 올랐다.

환공과 주우는 이복형제간인데 둘 다 후궁의 소생이었다. 위나라 대부 석작은 충의지사로 이름난 사람으로 일찍이 주우에게 역심이 있음을 알고 아들인 石厚(석후)가 주우와 가까이 지내지 못하도록 했으나 듣지 않았다. 석작은 환공이 왕위에 오르자 은퇴했지만 그가 우려했던 주우의 반역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반역이 성공하자 석후는 아버지인 석작에게 어떻게 하면 주우의 왕위를 굳힐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석작은 周(주)나라 天子(천자)의 허락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허락을 받기 위해서는 주나라 왕실과 친한 진공을 통해서 청원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다.

주우와 석후가 진나라로 떠나자 석작은 陳公(진공)에게 밀사를 보내어 이렇게 말하도록 했다.

『주군을 시해한 이 두사람을 잡아 처치해 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두사람은 위나라 책임자의 입회를 기다려 사형에 처해졌다. 석작은 君臣(군신)의 대의를 이룩하기 위해서 육친의 사사로운 정을 버린 것이다.

대의멸친과 비슷한 뜻을 가진 한자성어로 滅私奉公(멸사봉공)과 先公後私(선공후사)가 있다.

內憂外患 (내우외환)

內憂外患(내우외환)

内忧外患(nèiyōu wàihuàn)。

內 안 내, 들일 납 | 憂 근심 우 | 外 바깥 외 | 患 근심 환 |

내부(內部)에서 일어나는 근심과 외부(外部)로부터 받는 근심이란 뜻으로, 나라 안팎의 여러 가지 어려운 사태(事態)를 이르는 말

1. internal and external troubles 2. trouble from within and without


국어(國語) 진어(晉語)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춘추시대 중엽에 막강한 세력의 초(楚)와 진(晉) 두 나라가 대립한 시대가 있었다. 진나라 여공이 송(宋)나라와 동맹을 맺어 평화가 실현되었으나 수년 후 초나라 공왕(共王)이 정(鄭)나라와 위(衛)나라를 침략하였다. 다음해 진나라와 초나라의 군대가 언릉에서 마주쳤다.

당시에 진나라의 내부에서는 극씨(郤氏)ㆍ낙서(樂書)ㆍ범문자(范文子) 등의 대부(大夫)들이 정치를 좌우할 만큼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초나라와 충돌하기 전에 낙서는 진나라에 항거한 정나라를 치기 위하여 동원령을 내린 후, 스스로 중군(中軍)의 장군이 되고 범문자는 부장(副將)이 되어 전열을 가다듬었지만, 막상 진과 초의 두 군대가 충돌하게 되자 낙서는 초나라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범문자는 이에 반대하여, ‘제후(諸侯)로 있는 사람이 반란하면 이것을 토벌하고, 공격을 당하면 이를 구원하여 나라는 이로써 혼란해진다. 따라서 제후는 어려움의 근본이다’라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한다.
“오직 성인만이 안으로부터의 근심도, 밖으로부터의 재난도 능히 견디지만[唯聖人能外內無患(유성인능외내무환)], 성인이 아닌 우리들에게는 밖으로부터의 재난이 없으면 반드시 안으로부터 일어나는 근심이 있다[自非聖人 外寧必有內憂(자비성인 외녕필유내우)]. 초나라와 정나라는 놓아두고 밖으로부터의 근심을 내버려두지 않겠는가.”


관자(管子) 계(戒)편의 이야기.

춘추시대,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음식을 들지도 않으며 외전(外殿)에서 지내고 있었다. 궁녀들을 관장하는 여관(女官)이 궁녀들에게 임금이 곧 거동하실거라며 외전에 나가서 임금을 모시도록 지시하였다. 궁녀들이 모시겠다고 몰려오자, 환공은 화를 내며 말했다.

"내가 곧 거동하리라는 소리를 누가 하더냐?"

궁녀들의 말을 들은 환공이 곧 여관을 불러 그 까닭을 물었다. 여관의 대답은 이러했다.

"저는 임금께서 내우(內憂)가 있거나 외환(外患)이 있으면 외전에서 주무시고 음식을 들지 않으신다고 들었습니다. 요즘 임금께서 외전에서 지내시는 것은 다른 내우는 없으나, 필시 외환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非有內憂, 必有外患]. 그래서 저는 임금께서 곧 거동하시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속마음을 정확하게 읽어낸 여관에게 환공은 감동하였다.


출전

국어(國語) 진어(晉語) | 관자(管子) 계(戒)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內憂外亂(내우외란) | 近憂遠慮(근우원려) |


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結草報恩 (결초보은)

結草報恩(결초보은)

结草报恩(jiécǎobàoēn)。

結 맺을 결, 상투 계 | 草 풀 초 | 報 갚을 보, 알릴 보 | 恩 은혜 은 |

풀을 묶어서 은혜(恩惠)를 갚는다라는 뜻으로, ①죽어 혼이 되더라도 입은 은혜(恩惠)를 잊지 않고 갚음 ②무슨 짓을 하여서든지 잊지 않고 은혜(恩惠)에 보답(報答)함 ③남의 은혜(恩惠)를 받고도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사람에게 개만도 못하다고 하는 말


춘추시대 진(晉)나라에 魏武(위무)라는 사람이 어느날 위무자가 큰 병으로 몸져눕게 되었다. 아직 제정신일 때 그는 아들 魏顆(위과)에게 일러 말했다.

"내가 죽으면 이 첩을 다른 사람에게 개가를 시켜라."

그러나 위무자가 숨이 넘어갈 지경에 이르자 처음과 달리 유언하였다.

"내가 죽으면 저 여인은 순장을 시켜라."

위무자가 세상을 드디어 떠나자 아들은 아버지의 뒤에 한 유언을 정신이 혼미할 때 한 것이라고 판단하여 정신이 있을 때의 명령(命令)을 따라서 서모(庶母)를 개가시켜 순사(殉死)를 면하게 했다.

그후 진나라(秦)가 위무자의 아들 위과(魏顆)가 장수로 있던 진나라(晉)를 침략하자 위과는 진(秦)의 장수 두회(杜回)와 맞붙어 싸우게 되었다.

위과가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두회가 풀에 걸려 넘어져 위과가 두회를 사로잡아 뜻밖에도 큰 전공을 세울 수가 있었다. 그날밤, 위과의 꿈 속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말을 하는데 그는 서모의 아버지의 망혼이었다.

"나는 그대가 출가시켜 준 여인의 아비요. 그대는 아버님이 옳은 정신일 때의 유언에 따라 내 딸을 출가시켜 주었소. 그 때 이후로 나는 그대에게 보답할 길을 찾았는데 이제야 그 은혜를 갚은 것이오."


출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선공 십오년조(宣公 十五年條)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刻骨難忘(각골난망) | 結草(결초) | 難忘之恩(난망지은) | 難忘之澤(난망지택) | 白骨難忘(백골난망) |

반의어·상대어

|


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 4급 사자성어 |

擧棋不定 (거기부정)

擧棋不定(거기부정)

擧 들 거 | 棋 바둑 기 | 不 아닐 부, 아닐 불 | 定 정할 정, 이마 정 |

바둑을 두는 데 포석(布石)할 자리를 결정(決定)하지 않고 둔다면 한 집도 이기기 어렵다는 뜻으로, 사물(事物)을 명확(明確)한 방침(方針)이나 계획(計劃)을 갖지 않고 대함을 의미(意味)


춘추좌전(春秋左傳) 양공(襄公) 25년조에 나오는 이야기다.

춘추말기, 즉 기원전 548년 위(衛)나라 대부(大夫) 손임보(孫林父)와 영식 등은 위나라 헌공(獻公)을 축출하고, 그의 동생인 상공을 군주로 삼았다. 복귀하려는 계책을 세우던 헌공은 사람을 보내어 영식의 아들인 영희에게 자신을 도와준다면 돌아가서 위나라의 정무(政務)를 그에게 맡기겠다는 말을 전했다. 영희는 매우 기뻐하며 곧 협조하겠다고 응답했다.

대숙문자(大叔文子)가 이 소문을 듣고, 영희의 우유부단한 태도를 걱정하며 말했다.

"군자는 행동함에 그 종말을 생각하고, 그대로 행해도 좋은가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는 군주 보기를 바둑 두는 일 같이도 여기지 않으니, 어찌 화를 면하랴! 바둑 돌을 들고 놓을 곳을 정하지 못하면 상대를 이기지 못하는데[弈者擧棋不定, 不勝其耦], 하물며 군주를 모시는 일에 주관이 없어서야?"

12년 후, 영희는 군주로 복귀한 헌공의 손에 죽었다.

擧棋不定이란 확고한 주관이 없거나 계획이 수시로 바뀜 을 비유한 말이다.


출전

春秋左氏傳(춘추좌씨전) 左傳˙襄公二十五年 |

成語“舉棋不定”出自春秋時期《左傳﹒襄公二十五年》:“弈者舉棋不定,不勝其耦。”
說的是下圍棋而舉棋不定,猶猶豫豫者無法取勝。
這也是現存中國曆史上最早關於圍棋的確切記載。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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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自爲政 (각자위정)

各自爲政(각자위정)

各 각각 각 | 自 스스로 자 | 爲 하 위, 할 위 | 政 정사 정, 칠 정 |

저마다 스스로 정치(政治)를 한다는 뜻으로, 각각(各各)의 사람들이 자기(自己) 마음대로 한다면 전체(全體)와의 조화(調和)나 타인(他人)과의 협력(協力)을 생각하기 어렵게 된다는 뜻


기원전 722년부터 기원전 481년까지를 다룬 역사서 《좌씨전(左氏傳)》 평전(評傳)에 있는 글이다.

좌씨전(左氏傳) 선공(宣公) 2년에 따르면, 춘추시대 송(宋)나라와 진(晉)나라가 서로 협력하였기 때문에 송나라와 초(楚)나라는 사이가 벌어졌다. 이에 초(楚)나라 장왕(莊王)은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동맹국인 정(鄭)나라로 하여금 송나라를 치게 하였다.

정나라 목공(穆公)은 즉시 출병했다. 정나라와의 결전을 하루 앞두고 송나라의 대장 화원(華元)은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식사 때 특별히 양고기를 지급하였다. 군사들은 모두 크게 기뻐하며 맛있게 먹었지만 화원의 마차를 모는 양짐(羊斟)만은 이 양고기를 먹지 못하였다. 한 부장(副將)이 그 까닭을 묻자 화원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마차를 모는 사람에게까지 양고기를 먹일 필요는 없네. 마차부는 전쟁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말일세."

이튿날 양군의 접전이 시작되었다. 화원은 양짐이 모는 마차 위에서 지휘를 하였다. 송나라와 정나라의 군사가 모두 잘 싸워 쉽게 승패가 나지 않자 화원이 양짐에게 명령하였다.

"마차를 적의 병력이 허술한 오른쪽으로 돌려라."

그러나 양짐은 반대로 정나라 병력이 밀집해 있는 왼쪽으로 마차를 몰았다. 당황한 화원이 방향을 바꾸라고 소리치자 양짐은 말했다.

"어제 양고기를 군사들에게 먹인 것은 장군의 판단에 따라 한 일이지만 오늘의 이 일은 나의 생각대로 한 것입니다[疇昔之羊 子爲政 今日之事 我爲政]"

그는 곧바로 정나라 군사가 모여 있는 곳으로 마차를 몰았기 때문에 화원은 결국 정나라 군사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대장이 포로가 된 것을 본 송나라 군사는 전의(戰意)를 잃고 전열(戰列)이 무너졌다. 그 결과 250여 명의 군사가 사로잡히고 사공(司空:토지와 민사를 맡아보는 관원)까지 포로가 되었다. 정나라 군사는 모두 460량의 병거(兵車)를 포획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송나라의 대패는 바로 양짐이 화원의 지휘에 따르지 않고 '각자위정'했기 때문이다.

군자들의 혹평처럼 양짐은 ‘그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나라를 패망하게 하고 백성들을 죽게 만든(以其私憾 敗國殄民)’ 것이다. 융통성이 부족하고 아집이 강하여 전체적인 균형을 생각하지 못해 결국 국가의 대사를 그르치게 만든 것이다.

비단 군사행동에서 뿐만 아니라 국가나 사회의 경영에 있어 전체로서의 조화나 개개의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경영은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다. 사소한 일에서 비롯되었지만 결과가 이렇게 심각한 경우는 늘 존재해 왔던 것이다.


출전

좌씨전(左氏傳)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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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 4급 사자성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