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山再起(동산재기)
東 동녘 동 | 山 뫼 산 | 再 두 재 | 起 일어날 기 |
동산(動産)에서 다시 일어난다는 뜻으로, 은퇴(隱退)한 사람이나 실패(失敗)한 사람이 재기(再起)하여 다시 세상(世上)에 나옴을 뜻함
사안(謝安)은 허난성 진군(陳郡) 양하(陽夏) 태생으로 동진(東晉) 최대의 명문 출신이다. 젊었을 때부터 재능과 식견이 뛰어나 조정에서 불렀으나 매번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당시의 정치(政治) 상황이 출사(出仕)하기에 알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회계군의 동산(東山)에 집을 짓고, 아름다운 그 곳의 산수에 묻혀 왕희지(王羲之)ㆍ지둔(支遁) 등과 어울리며 시를 짓고 술을 마시는 등 풍류를 즐겼다. 양주자사(揚州刺史) 유영(庾永)이 그의 평판을 듣고 몇 번이고 출사를 청하자 마지못해 한 달 남짓 관직에 있었지만 곧 사임하고 돌아와 버렸다. 주위 사람들이 서운하게 여기자 사안은 "지금의 상황으로는 관직에 그대로 머무는 것이 신상에 해로울 것 같다."고 답하며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문벌 세력이 서로 다투고 북쪽에서는 전진(前秦)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나이 40에 이르러, 문벌 세력을 제압한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환온(桓溫)이 청하자, 마침내 그의 휘하에 들어가 이부상서(吏部尙書)의 요직에까지 진급했다. 그러나 환온이 제위를 넘보려 하자 이를 저지하고, 그 공으로 효무제(孝武帝)가 즉위한 후에는 재상(宰相)이 되었다. 당시 북쪽에서는 전진 왕 부견(符堅)이 산시, 쓰촨, 후베이 일대를 장악하고 세력을 뽐내고 있었다. 환온이 죽자, 부견은 100만 대군을 이끌고 동진을 향해 남하하기 시작했다. 사안은 아우 사석(謝石)과 형의 아들 사현(謝玄), 그리고 유뇌지(劉牢之) 등을 앞세워 비수(底水)에서 전진군을 크게 무찔렀다.
동산재기란 이와 같이 사안이 동산에 은거하다가 관계에 나가 크게 성공한 것을 가리키던 말로, 오늘날에는 한번 실패했던 사람이 재기에 성공한 경우에까지 이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출전
晉書(진서) 謝安傳(사안전)
Showing posts with label 東.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東. Show all posts
東道主 (동도주)
동도주(東道主)
東(동녘 동) 道(길 도) 主(주인 주)
동쪽으로 가는 데 길을 안내(案內)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주인(主人) 또는 주인의 역할(役割)을 하는 사람을 비유하는말.
진(晉) 헌공의 아들 중이는 19년 동안 각 나라를 떠돌다가, 정(鄭)나라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정나라는 그에게 극히 비우호적인 대접을 하여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다. 중이는 귀국하여 왕위에 오르자, 복수를 하기 위해 진(秦)나라와 연합하여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때는 기원전 627년 9월.
눈앞에 적들이 밀어닥치자 정 문공(文公)은 겁을 먹고 대신들을 불러모아 대책을 논의하였다. 대부 질지호(佚之狐)가 먼저 의견을 내놓았다.
"나라가 위태롭습니다. 만약 촉지무(燭之武)를 보내어 진(秦)나라 군주를 만나게 한다면, 진나라는 철군할 것 같습니다."
촉지무는 언변(言辯)이 뛰어나고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지만, 여태껏 조정에서 크게 쓰이지 못해 불만이 많았다. 촉지무는 정 문공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맡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정 문공은 계속하여 그를 설득하였다.
"내가 일찍이 그대를 중용하지 않다가, 이제야 다급하게 그대에게 이 일을 맡기고자 하니, 이는 나의 잘못이오."
촉지무는 불만이 다소 풀렸다. 밤이 되자 촉지무는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나가 진나라 진영으로 향했다. 그러나 진나라 병사들이 그를 막자, 촉지무는 성벽에 밧줄로 자신의 몸을 묶은 채 대성통곡하기 시작하였다. 진나라 병사들은 하는 수 없이 그를 진나라 목공에게 데려 갔다.
"너는 왜 그리 울었더냐?"
"저는 정나라의 멸망 때문에 통곡을 하였으며, 진나라에 대해서는 슬픔을 억누를 길이 없습니다. 진(秦)과 진(晉)의 대군이 우리 정나라를 포위하고 공격을 하니 정나라는 망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정나라는 진(秦)나라와 영토가 붙어있지 않습니다.
진(秦)나라는 서쪽에, 정나라는 동쪽에 있으며 그 가운데는 진(晉)나라가 막고 있습니다. 때문에 정나라가 망한 뒤에 영토는 진(晉)나라로 병합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진(晉)나라의 국력은 점차 강대해질 것이고, 진나라는 상대적으로 약해질 것입니다. 진나라는 무엇 때문에 남의 세력은 키워주면서 자신의 힘은 줄이는 것입니까? 만약 저희 정나라를 그대로 두시고 동쪽 진출의 길 안내역으로 삼으시고. 사신(使臣)들의 왕래에 부족한 물자를 공급하게 하신다면, 진(秦)나라 입장에서도 손해됨이 없을 것입니다(若舍鄭以爲東道主, 行李之往來, 供其乏困, 君亦無所害)."
진(秦)나라 목공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를 좋아하며 즉각 군대를 철수하는 한편, 기자(杞子), 봉손(逢孫), 양손(揚孫) 등 사람을 남겨두어 정나라 도읍의 방위를 돕게 하였다. 얼마 후에는 진(晉)나라 군대도 그곳을 떠났다.
[출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僖公 30年條
東(동녘 동) 道(길 도) 主(주인 주)
동쪽으로 가는 데 길을 안내(案內)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주인(主人) 또는 주인의 역할(役割)을 하는 사람을 비유하는말.
진(晉) 헌공의 아들 중이는 19년 동안 각 나라를 떠돌다가, 정(鄭)나라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정나라는 그에게 극히 비우호적인 대접을 하여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다. 중이는 귀국하여 왕위에 오르자, 복수를 하기 위해 진(秦)나라와 연합하여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때는 기원전 627년 9월.
눈앞에 적들이 밀어닥치자 정 문공(文公)은 겁을 먹고 대신들을 불러모아 대책을 논의하였다. 대부 질지호(佚之狐)가 먼저 의견을 내놓았다.
"나라가 위태롭습니다. 만약 촉지무(燭之武)를 보내어 진(秦)나라 군주를 만나게 한다면, 진나라는 철군할 것 같습니다."
촉지무는 언변(言辯)이 뛰어나고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지만, 여태껏 조정에서 크게 쓰이지 못해 불만이 많았다. 촉지무는 정 문공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맡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정 문공은 계속하여 그를 설득하였다.
"내가 일찍이 그대를 중용하지 않다가, 이제야 다급하게 그대에게 이 일을 맡기고자 하니, 이는 나의 잘못이오."
촉지무는 불만이 다소 풀렸다. 밤이 되자 촉지무는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나가 진나라 진영으로 향했다. 그러나 진나라 병사들이 그를 막자, 촉지무는 성벽에 밧줄로 자신의 몸을 묶은 채 대성통곡하기 시작하였다. 진나라 병사들은 하는 수 없이 그를 진나라 목공에게 데려 갔다.
"너는 왜 그리 울었더냐?"
"저는 정나라의 멸망 때문에 통곡을 하였으며, 진나라에 대해서는 슬픔을 억누를 길이 없습니다. 진(秦)과 진(晉)의 대군이 우리 정나라를 포위하고 공격을 하니 정나라는 망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정나라는 진(秦)나라와 영토가 붙어있지 않습니다.
진(秦)나라는 서쪽에, 정나라는 동쪽에 있으며 그 가운데는 진(晉)나라가 막고 있습니다. 때문에 정나라가 망한 뒤에 영토는 진(晉)나라로 병합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진(晉)나라의 국력은 점차 강대해질 것이고, 진나라는 상대적으로 약해질 것입니다. 진나라는 무엇 때문에 남의 세력은 키워주면서 자신의 힘은 줄이는 것입니까? 만약 저희 정나라를 그대로 두시고 동쪽 진출의 길 안내역으로 삼으시고. 사신(使臣)들의 왕래에 부족한 물자를 공급하게 하신다면, 진(秦)나라 입장에서도 손해됨이 없을 것입니다(若舍鄭以爲東道主, 行李之往來, 供其乏困, 君亦無所害)."
진(秦)나라 목공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를 좋아하며 즉각 군대를 철수하는 한편, 기자(杞子), 봉손(逢孫), 양손(揚孫) 등 사람을 남겨두어 정나라 도읍의 방위를 돕게 하였다. 얼마 후에는 진(晉)나라 군대도 그곳을 떠났다.
[출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僖公 30年條
Subscribe to:
Posts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