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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縱七擒 (칠종칠금, qīqínqīzòng)

七縱七擒(칠종칠금)

七擒七纵(qīqínqīzòng)

七 일곱 칠 | 縱 놓을 종 | 七 일곱 칠 | 擒 사로잡을 금 |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풀어준다는 뜻으로, 상대를 마음대로 다룸을 비유하거나 인내를 가지고 상대가 숙여 들어오기를 기다린다는 말.

As the legend goes, in the Three Kingdoms Period, Zhu Geliang arrested Menghuo seven times and set him free seven times, so that Menghuo was sincerely convinced, and never raised a rebellion again. This allusion indicates that somebody. is good at employing the proper strategy to convince others.

传说三国时诸葛亮南征孟获,捉了他七次,又放了他七次,才使孟获心服口服,不再背叛。后用这个典故指善于运用策略,使对方心悦诚服。

集思廣益 (집사광익)

集思廣益(집사광익)

集 모을 집 | 思 생각 사 | 廣 넓을 광 | 益 더할 익 |

생각을 모아 이익을 더한다.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으면 더 큰 효과와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제갈량(諸葛亮)이 쓴 글에서 유래되었다.


제갈량은 신기묘산(神奇妙算)의 지략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나랏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그는 촉나라의 승상이 된 뒤에 '교여군사장사참군연속'이라는 글을 수하들에게 전하여 널리 의견을 구하는 방침을 밝히고 협조를 당부하였다.

"무릇 관직에 참여한 사람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아 나라의 이익을 넓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夫參署者, 集衆思廣忠益也). 조금이라도 미움을 받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의견을 말하기를 멀리하고, 서로 의견이 엇갈리게 될까 걱정하여 말하기를 어려워한다면 큰 손실을 입는 것이다. 의견이 엇갈리는 가운데 얻는 것이 있으니, 병폐를 버리고 주옥을 얻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하기 어렵거늘, 오직 서서(徐庶)만은 하는 일마다 미혹됨이 없었다. 또 동화(童和)도 7년 동안 일하면서 생각이 다른 경우에는 열 번이라도 와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였다. 진실로 서서의 10분의 1이라도 본받고, 동화의 은근함을 본받아 나라에 충성을 다한다면 나의 잘못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 내용은 《삼국지(三國志)》촉지(蜀志)의 동화전(董和傳)과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위기(魏紀)에도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집사광익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아 유익한 점을 취하면 더 큰 효과와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三國志(삼국지)

泣斬馬謖 (읍참마속, qìzhǎnmǎsù)

泣斬馬謖(읍참마속)

泣斩马谡(qìzhǎnmǎsù)

泣 울 읍,바람 빠를 립(입),원활하지 않을 삽 | 斬 벨 참 | 馬 말 마 | 謖 일어날 속 |


눈물을 머금고 마속의 목을 벤다는 뜻으로, 사랑하는 신하(臣下)를 법(法)대로 엄정히 처단(處斷)하여 기강을 바로 세움을 이르는 말.


'울며 마속(馬謖)의 목을 베다'라는 뜻으로 《삼국지(三國志)》의 〈촉지(蜀志)·마속전(馬謖傳)〉에서 유래된 말이다.

촉(蜀)나라의 제갈 량(諸葛亮)은 마속의 재능을 아껴 유비(劉備)의 유언을 저버리면서까지 중용하였다. 그러나 제 1차 북벌(北伐)때 가정(街亭)의 전투 책임자로 임명한 마속(馬謖)이 제갈량의 지시를 어기고 자기의 얕은 생각으로 전투를 하다 참패를 가져왔다. 마속은 우수한 장수요, 제갈량과는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은 마량(馬良)의 아우였지만 제갈량은 한중으로 돌아오자 눈물을 머금고 마속의 목을 벤 뒤(泣斬馬謖) 장병들에게 사과를 한 것이다.

장관이 제갈량을 보고 "앞으로 천하를 평정하려 하는 이때에 마속 같은 유능한 인재를 없앴다는 것은 참으로 아까운 일입니다." 하고 말하자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손무가 싸워 항상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군율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이같이 어지러운 세상에 전쟁을 시작한 처음부터 군율을 무시하게 되면 어떻게 적을 평정할 수 있겠는가?" 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유래하여 읍참마속은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엄정하게 법을 지켜 기강을 바로 세우는 일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유래: 십팔사략(十八史略),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마속전(馬謖傳)


관련 한자어

유의어

一罰百戒(일벌백계) |

참조어

言過其實(언과기실) | 白眉(백미) |


십팔사략, 삼국지, 삼국지:촉지, 삼국지:촉지:마속전

十八史略, 三國誌, 三國誌:蜀志, 三國誌:蜀志:馬謖傳

言過其實 (언과기실, yánguòqíshí)

言過其實(언과기실)

言过其实(yánguòqíshí)

言 말씀 언, 화기애애할 은 | 過 지날 과, 재앙 화 | 其 그 기 | 實 열매 실, 이를 지 |


'말이 실제보다 지나치다'라는 뜻으로, 말만 과장되게 부풀려서 해 놓고는 실행이 부족함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마속(馬謖)과 관련된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마속은 자가 유상(幼常)으로, 그를 포함한 5형제가 모두 재능이 뛰어났다. 그의 형 마량(馬良)은 백미(白眉)라는 고사성어의 주인공이다. 마속도 재주가 남달랐고, 특히 군사 계략을 세우는 데 뛰어나 제갈량(諸葛亮)이 총애하였다.

그러나 유비(劉備)는 마속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유비는 관우(關羽)의 원수를 갚으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화병이 도져 쓰러졌다. 죽음을 앞둔 유비는 제갈량에게 뒷일을 부탁하면서 "마속은 말이 실제보다 지나치니 크게 쓰지 말도록 하고, 그대가 잘 살피시오(馬謖言過其實, 不可大用, 君其察之)"라고 특별히 당부하였다.

유비가 죽은 뒤, 위(魏)나라의 사마의(司馬懿)가 촉나라의 가정(街亭)을 공격하였다. 마속이 가서 가정을 방어하겠다고 자청하자, 제갈량은 그를 보내면서 수비만 하고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군령을 내렸다. 그러나 마속은 적의 꼬임에 넘어가 공격에 나섰다가 역습을 당하여 패주하였다.

제갈량은 마속을 총애하였지만, 군령을 어긴 죄를 물어 참형에 처하였다. '울며 마속을 베다'라는 뜻의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고사성어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이 고사는 《삼국지(三國誌)》의 〈촉지(蜀志)·마량전(馬良傳)〉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언과기실은 말만 부풀려서 번드르르하게 하고는 제대로 실행에 옮기지는 않는 경우를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관련 한자어

유의어

夸大其词(과대기사,kuādàqící) 과장하여 말하다 |

반의어

恰如其分(흡여기분,qiàrúqífèn) 매우 적절하다 |

过犹不及(과유불급,guòyóubùjí) 지나친 것은 모자라는 것과 같다 |

참조어

白眉(백미) | 泣斬馬謖(읍참마속) |


三國誌,三國誌:蜀志,三國誌:蜀志:馬良傳,諸葛亮,馬謖, 삼국지,삼국지:촉지.삼국지:촉지:마량전,제갈량,마속

水火不相容 (수화불상용, shuǐhuǒbùxiāngróng)

水火不相容(수화불상용)

水火不相容(shuǐhuǒbùxiāngróng)

水 물 수 | 火 불 화 | 不 아닐 불 | 相 서로 상 | 容 용납할 용 |


'물과 불은 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두 사물이 서로 화합할 수 없는 경우를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삼국지》의 〈위연전(魏延傳)〉 등에서 유래되었다.


수화불용(水火不容) 또는 유여수화(有如水火)라고도 한다.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얼음과 숯은 서로 어울리지 못한다)도 같은 뜻이다.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장군 위연은 '성격이 오만하여 모두가 그를 피하였다. 오직 장사(長史)인 양의(楊儀)만은 위연을 아랑곳하지 않아서 항상 그와 맞섰다. 위연은 양의의 태도에 대하여 매우 화를 냈는데, 두 사람은 마치 물과 불의 관계와 같았다(延以爲至忿, 有如水火).' 이 고사(故事)는 《삼국지》의 〈촉지(蜀志)·위연전〉에 실려 있다.

또 후한(後漢) 말기에 왕부(王符)가 쓴 《잠부론(潛夫論)》에는 "사악함과 올바름의 차이는 마치 물과 불의 관계와 같아서 근원이 같아질 수 없고, 나란히 성할 수 없는 것이다(邪之與正, 猶水與火, 不同源, 不得幷盛)"라고 하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수화불상용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화목하지 못하고 의견이 달라서 서로 화합할 수 없는 경우를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의 동방삭(東方朔)은 재치와 해학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황제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평생 교활하고 아첨하는 무리들과는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초(楚)나라의 우국시인 굴원(屈原)을 추모하여 〈칠간(七諫)〉이라는 7수의 시를 지었다.

그 가운데 〈자비(自悲)〉라는 시에서 "얼음과 숯은 서로 함께 할 수 없으니, 내 본디 목숨이 길지 못함을 알겠구나(氷炭不可以相竝兮, 吾固知乎命之不長)"라고 노래하였다. 충성스러운 굴원과 아첨배를 서로 화합할 수 없는 얼음과 숯에 비유하여, 아첨을 일삼는 간신들과는 공존할 수 없다는 굴원의 심경을 노래한 구절이다. 여기서 유래하여 빙탄불상용(또는 빙탄불용)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겼다.

[출전]
三國志:卷40:魏延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水火不容(수화불용) | 有如水火(유여수화) | 빙탄불용 |



三國志:卷40:魏延 |

修人事待天命 (수인사대천명)

修人事待天命(수인사대천명)

修 닦을 수 | 人 사람 인 | 事 일 사 | 待 기다릴 대 | 天 하늘 천 | 命 명령할 명 |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는 하늘의 운명에 맡김.

《삼국지(三國志)》에서 유래한 말로, 자기 할 일을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리라는 말이다. 속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와 비슷한 말이다.

중국 삼국시대에 적벽에서 위(魏)나라 조조(曹操:155∼220)가 오(吳)·촉(蜀) 연합군과 전투를 벌인 적벽대전(赤壁大戰) 중에 촉나라의 관우(關羽:?∼219)는 제갈 량(諸葛亮:181∼234)에게 조조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화용도(華容道)에서 포위된 조조를 죽이지 않고 길을 내주어 달아나게 하고 돌아왔다. 그래서 제갈 량은 관우를 참수하려 하였으나 유비(劉備:161∼223)의 간청에 따라 관우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천문을 보니 조조는 아직 죽을 운명이 아니므로 일전에 조조에게 은혜를 입었던 관우로 하여금 그 은혜를 갚으라고 화용도로 보냈다. 내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쓴다 할지라도 목숨은 하늘의 뜻에 달렸으니, 하늘의 명을 기다려 따를 뿐이다[修人事待天命]"라고 하였다.

盡人事待天命은 자기 할 일을 다하고 천명을 기다린다는 수동적 의미, 修人事待天命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모든 도리를 가지고 최선을 다한 후에 천명을 기다린다는 능동적 의미가 있다고 구분짓기도 하나 실제 사용하는 뜻에는 큰 차이가 없음.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修人事待天命(수인사대천명) | 盡人事待天命(진인사대천명) |

水魚之交 (수어지교, shuǐyúzhījiāo)

水魚之交(수어지교)

水鱼之交(shuǐyúzhījiāo)


水 물 수 | 魚 고기 어,물고기 어 | 之 갈 지 | 交 사귈 교 |


물과 물고기의 사귐이란 뜻으로, ①임금과 신하(臣下) 또는 부부(夫婦) 사이처럼 매우 친밀(親密)한 관계(關係)를 이르는 말 ②서로 떨어질 수 없는 친(親)한 사이를 일컫는 말.


원래 물과 고기의 사귐이란 뜻으로, 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잠시도 살 수 없는 것과 같은 관계에 비유한 말이다. 어수지친(魚水之親)이라고도 하는데, 부부 사이나 남녀가 매우 사랑하는 것을 어수지락(魚水之樂)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중국 삼국시대의 유비(劉備)와 제갈 량(諸葛亮)의 사이를 비유한 데서 비롯된다.

삼국 시대 때, 위(魏)나라 조조(曹操)는 강북의 땅을 평정하고 오(吳)나라 손권(孫權)은 강동의 땅에 의거하여 각각 세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촉(蜀)의 유비는 확실한 근거지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유비에게는 관우와 장비 등의 용장은 있었지만 모사(謀士)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때에 제갈공명(諸葛孔明)을 군사로 맞이할 수 있었으니 유비의 기쁨은 대단했다.

제갈공명은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제압해 근거지로 삼을 것, 서쪽은 융(戎)과 화목하고, 남쪽은 월(越)을 회유해 후환을 없앨 것, 정치를 고르게 하여 부국강병의 실을 거둘 것, 손권과 손잡아 조조를 고립시키고, 기회를 보아 조조를 무찌를 것 등을 헌책했다. 유비는 전폭적인 신뢰를 공명에게 쏟고, 군신의 정은 날로 더해 갔다. 관우와 장비는 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신예인데다가 나이 또한 젊은 공명이 더 중요시되고 자신들은 업신여김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공명은 27세로 유비보다 20세나 연하였다.

이것을 알아챈 유비는 관우와 장비를 달래어 말했다. "나에게 공명은 물고기에게 물이 잇는 것과 같다. 두말 없기를 바란다."

孤之有孔明 猶魚之有水也 願諸君勿復言.

[출전]
三國志(Sānguózhì):蜀志(촉지):諸葛亮傳(제갈량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

猶魚有水(유어유수) | 魚水親(어수친) | 魚水之親(어수지친) | 水魚之親(수어지친) | 魚水之交(어수지교) | 水魚(수어) | 君臣水魚(군신수어) |

유의어

芝蘭之交(지란지교) | 鱼水(yúshuǐ) 어수. 물고기와 물처럼 밀접하고 친밀한 관계. | 鱼水情深(어수정심) 물고기와 물처럼 친밀하고 정이 깊다. | 魚水之樂(어수지락) 부부 사이나 남녀가 매우 사랑하는 것. |

참조어

三顧草廬(삼고초려) | 三顧(삼고) | 草廬三顧(초려삼고) | 三顧之禮(삼고지례) |


삼국지:촉지:제갈량전 |

三國志:蜀志:諸葛亮傳 |

司馬昭之心 (사마소지심, SīmǎZhāozhīxīn)

司馬昭之心(사마소지심)

司马昭之心(SīmǎZhāozhīxīn)

司 맡을 사 | 馬 말 마 | 昭 밝을 소 | 之 갈 지 | 心 마음 심 |


'사마소의 마음'이라는 말로, 권력을 빼앗으려는 야심을 비유하거나 그러한 야심이 빤히 드러나 보인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고사성어이다. 《삼국지》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사마소는 위나라의 권신 사마의(司馬懿)의 아들이다. 사마의가 죽은 뒤에 위나라의 실권은 아들 사마사(司馬師)에게 이어졌다. 사마사가 죽은 뒤에 그의 동생인 사마소가 권력을 장악하였는데, 그는 황제인 조모의 권위를 무시하였다.

한번은 조모가 사마소를 진공(晋公)에 봉하고 구석(九錫)을 하사하였으나, 사마소는 이를 비웃으며 받지 않았다. 구석이란 황제가 총애하거나 공로가 있는 신하에게 내리는 9가지 은전으로, 거마(車馬)·의복·악기·주호(朱戶)·납폐(納陛)·호분(虎賁)·궁시(弓矢)·도끼·거창을 말한다. 이를 거절한 것은 곧 황제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요, 그가 황제의 자리를 노리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었다.

분노한 조모는 3명의 근신(近臣)들에게 "사마소의 마음은 길을 가는 사람들도 다 안다(司馬昭之心, 路人皆知). 내 더 이상 참을 수 없으니 사마소를 쳐야겠다"라고 밝혔다. 그런데 근신들 가운데 2명이 즉시 이 사실을 사마소에게 고해 바쳤다. 조모는 위병들을 이끌고 사마소의 거소로 쳐들어갔으나, 결국 사마소의 손에 죽고 말았다.

이후 사마소는 조환을 허수아비 황제로 내세웠고,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司馬炎)은 조환을 몰아낸 뒤 국호를 진(晋)이라 고치고 황제가 되었다. 이 고사는 《삼국지》 〈위서(魏書)〉편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사마소지심은 권력 따위를 탈취하려는 음모와 야심이나 음흉한 심보가 다 드러났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관련 한자어

유의어

司马昭之心, 路人皆知(SīmǎZhāozhīxīn, lùrénjiēzhī)
1.사마소의 야심은 길을 가는 사람조차 모두 다 안다.
2.야심이 분명하여 누구나 다 안다. 야심이 뻔히 들여다보이다. 모르는 사람이 없다. 드러난 음모와 야심.


三國志:卷04:程昱傳孫曉附傳 |

三顧草廬 (삼고초려, sāngùmáolú)

三顧草廬(삼고초려)

三顾茅庐(sāngùmáolú)


三 석 삼 | 顧 돌아볼 고 | 草 풀 초 | 廬 농막집 려,창 자루 로 |


유비(劉備)가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세 번이나 찾아가 군사(軍師)로 초빙(招聘)한 데서 유래(由來)한 말로, ①임금의 두터운 사랑을 입다라는 뜻 ②인재(人材)를 맞기 위(爲)해 참을성 있게 힘씀.


《삼국지(三國志)》의 〈촉지 제갈량전(蜀志 諸葛亮傳)〉에 나오는 말이다. 후한(後漢) 말기 관우(關羽:?~219)·장비(張飛:166?~221)와 의형제를 맺고 무너져 가는 한(漢)나라의 부흥을 위해 애를 쓴 유비는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잡지 못하고 세월을 허송하며 탄식하였다. 유비는 유표(劉彪)에게 몸을 맡기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관우와 장비 같은 용맹무쌍한 장수를 두고도 조조(曹操)에게 여러 차례 당하였다. 유비는 그 이유가 유효 적절한 전술을 발휘할 지혜로운 참모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유능한 참모를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유비는 유표의 부하인 채모의 계략을 피하려다 길을 잃고, 우연히 은사(隱士)인 사마휘(司馬徽)를 만나게 된다. 사마휘에게 유능한 책사를 천거해 달라고 부탁하자 사마휘는 "복룡(伏龍)과 봉추(鳳雛) 가운데 한 사람만 얻어도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대체 복룡은 누구고, 봉추는 누구입니까?" 그러나 사마휘는 말을 흐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 후 제갈 량의 별명이 복룡이란 것을 안 유비는 복룡인 제갈 량을 맞으러 관우·장비와 함께 예물을 싣고 양양(襄陽)에 있는 그의 초가집으로 찾아갔으나 제갈량은 집에 없었다.

며칠 후 또 찾아갔으나 역시 출타하고 없었다. "전번에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이거,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듣자니 그 자는 아직 나이도 젊다던데..." "그까짓 제갈 공명이 뭔데. 형님, 이젠 다시 찾아오지 마십시오." 마침내 동행했던 관우와 장비의 불평이 터지고 말았다. "다음엔 너희들은 따라오지 말아라." 관우와 장비가 극구 만류하는데도 유비는 단념하지 않고 세 번째 방문길에 나섰고, 그 때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 이때 제갈 량은 27세, 유비는 47세였다.

제갈 량은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초가집에서 손수 농사를 지으며 은거하고 있었으나, 유비의 정성에 감복하여 그를 돕기로 결심하였다. 유비는 제갈 량을 얻은 이후 자신과 제갈 량의 사이를 수어지교(水魚之交: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은 사이)라며 기뻐하였다. 훗날 제갈량은 《출사표(出師表)》에서 유비의 지극한 정성에 대하여 "비천한 신을 싫어하지 않고 외람되게도 몸을 낮추어 제 초가집을 세 번씩이나 찾아 주어 당시의 상황을 물으셨습니다. 이 일로 저는 감격하여 선제께서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것을 허락한 것입니다"라고 감사하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삼고지례는 유비가 초가집을 세 번이나 찾아가 제갈 량을 감복시켜 자신을 돕게 하였던 것처럼 유능한 인재를 얻기 위하여 진심으로 예를 갖추어 맞이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줄여서 삼고(三顧)라고도 하고, 삼고지례(三顧之禮) 또는 초려삼고(草廬三顧)라고도 한다.

[출전]
三國志(Sānguózhì):蜀志(촉지):諸葛亮傳(제갈량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

三顧(삼고) | 草廬三顧(초려삼고) | 三顧之禮(삼고지례) |

참조어

猶魚有水(유어유수) | 魚水親(어수친) | 魚水之親(어수지친) | 水魚之親(수어지친) | 魚水之交(어수지교) | 水魚之交(수어지교) | 水魚(수어) | 君臣水魚(군신수어) |


삼국지, 삼국지:촉지, 삼국지:촉지:제갈량전

三國志, 三國志:蜀志, 三國志:蜀志:諸葛亮傳

白眉 (백미, báiméi)

白眉(백미)

白眉(báiméi)

白 흰 백 | 眉 눈썹 미 |

중국(中國) 蜀(촉)나라 馬良(마량)의 5형제(兄弟) 중(中) 흰 눈썹이 섞인 良(양)의 재주가 가장 뛰어나다는 데서 온 말로, 여럿 중(中)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나 물건(物件)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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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미는 흰 눈썹이란 뜻이다. 삼국지(三國志) 촉서(蜀書) 권39에는 마씨(馬氏) 5형제에 관한 기록이 있다.

위ㆍ촉 ㆍ오가 서로 패권을 다툴 무렵, 촉나라에 마량(馬良, 187-222)이라는 자가 있었다. 마량은 양양(襄陽)의 의성(宜城) 출신으로 자(字)는 계상(季常)이다. 그는 제갈량과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은 사이로, 뛰어난 덕성과 지모로 남쪽 변방의 오랑캐들을 평정하는 데 큰 활약을 했다.

마속을 포함하여 마량의 형제는 다섯이었는데 다섯 형제는 모두 자(字)에 상(常)이란 글자가 붙어 있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들 형제를 가리켜 ‘마씨오상(馬氏五常)’이라 일컬었다.

그중 맏이인 마량은 태어날 때부터 눈썹에 흰 털이 섞여 있어 '백미(흰 눈썹)'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들은 모두 재주가 비범하여 명성이 자자했는데, 그 중에서 마량이 가장 뛰어났다. 그 고장사람들은 말하기를 “마씨오상은 모두 뛰어나지만 그 중에서도 흰 눈썹이 가장 훌륭하다[馬氏五常 白眉最良]”라고 하였다.

이 때부터 같은 또래, 같은 계통의 많은 사람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백미라 부르게 되었고, 지금은 사람만이 아니라 뛰어난 작품을 이야기할 때도 백미라 부른다.《삼국지》 촉지 마량전(蜀志馬良傳)에 그 유래가 전한다.

蜀漢馬良(촉한마량)의 字(자)는 季常(계상)이니 兄弟五人(형제오인)이 皆用常爲字(개용상위자)하고 幷有才名(병유재명) 이라. 鄕里爲之諺曰(향리위지언왈)「馬氏五常(마씨오상)에 白眉最長(백미최장)이라」하니 良(량)은 眉中(미중)에 有白眉(유백미)라 故(고)로 以稱之(이칭지)니라.

유비(劉備)는 촉(蜀)땅에 들어와서 마량을 좌장군연(左將軍 )으로 임명하였으며, 제위(帝位)에 즉위한 후에는 그를 시중(侍中)에 등용하였다. 마량은 유비를 수행하여 이릉(夷陵)전투에 참가하였다가 35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유래

三國志(삼국지)


관련 고사성어

유의어

鶴立鷄群(학립계군) | 出衆(출중) | 錐處囊中(추처낭중) | 錐囊(추낭) | 絶倫(절윤) | 壓卷(압권) | 拔群(발군) | 囊中之錐(낭중지추) | 群鷄一鶴(군계일학) | 鷄群一鶴(계군일학) | 鷄群孤鶴(계군고학) |

참조어

言過其實(언과기실) | 泣斬馬謖(읍참마속) |

無信不立 (무신불립)

無信不立(무신불립)

無 없을 무 | 信 믿을 신 | 不 아닐 불 | 立 설 립 |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는 뜻으로 정치나 개인의 관계에서 믿음과 의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믿음이 없으면 살아나갈 수 없다'라는 뜻으로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에 실린 공자(孔子)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자공(子貢)이 정치(政治)에 관해 묻자, 공자는 말했다.

“식량을 풍족하게 하고(足食), 군대를 충분히 하고(足兵), 백성의 믿음을 얻는 일이다(民信)”

자공이 다시 물었다.

“어쩔 수 없이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그러자 공자는 군대를 포기해야 한다고 답했다. 자공이 다시 나머지 두 가지 가운데 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묻자 공자는 식량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예로부터 사람은 다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백성의 믿음이 없이는 (나라가) 서지 못한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여기에서 정치나 개인의 관계에서 믿음과 의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로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는 표현이 쓰이기 시작하였다.

《삼국지(三國志)》에도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학자로 북해(北海) 태수를 지낸 공융(孔融:153∼208)은 조조(曹操:155∼220)의 공격을 받은 서주(徐州) 자사 도겸(陶謙)을 구하기 위해 유비(劉備:161∼223)에게 공손찬(公孫瓚:?∼199)의 군사를 빌려서 도겸을 도와주게 하였다. 공융은 군사를 가지면 유비의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비에게 신의를 잃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그러자 유비는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에 실린 공자(孔子:BC 552∼BC 479)의 말에 따라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성인은 '예부터 내려오면서 누구든지 죽지만 사람은 믿음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고 하였습니다. 저는 군대를 빌릴지라도 이곳으로 꼭 돌아올 것입니다"

이처럼 ‘무신불립(無信不立)’은 믿음과 의리가 없으면 개인이나 국가가 존립하기 어려우므로 신의를 지켜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無信不立(무신불립) |

對症下藥 (대증하약)

對症下藥(대증하약)

對 대할 대 | 症 증세 증, 적취 징 | 下 내릴 하 | 藥 약 약, 뜨거울 삭, 간 맞출 략(약) |

증세(症勢)에 맞게 약을 써야 한다는 뜻으로, 문제(問題)의 핵심(核心)을 바로 보고 대처(對處)해야 함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화타전(華 傳)에는 동한(東漢) 말기 뛰어난 의술로 신의(神醫)라는 칭송을 받았던 화타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한번은 고을의 벼슬아치인 예심(倪尋)과 이연(李延) 두 사람 모두 고열(高熱)과 심한 두통(頭痛)을 앓게 되었다. 다른 의원들이 와서 그들을 살펴 보았으나 효과가 없자, 결국 화타가 초빙되어 왔다. 그는 두 사람의 상태를 살펴 본 후, 각각 다른 처방을 내렸다. 증상이 똑같은 두 사람에게 각기 다른 약을 먹게 하자, 많은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그 이유를 물었다.

화타는 대답하였다.

"예심은 신체 외부에 병은 없으나 잘못 먹어 내부에 배탈이 났으므로 사약(瀉藥)을 먹어야 하고, 이연은 신체 내부에 병은 없으나 외부의 영향으로 감기에 걸린 것이니 발산약(發散藥)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對症下藥(There is a slave for every sore)는 증세에 맞게 약을 써야 한다는 뜻이며, 이는 곧 문제의 핵심을 바로 보고 대처해야함 을 비유한 말이다.

大器晩成 (대기만성)

大器晩成(대기만성)

大 클 대, 큰 대, 클 태, 클 다 | 器 그릇 기 | 晩 늦을 만 | 成 이룰 성 |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①크게 될 인물(人物)은 오랜 공적(功績)을 쌓아 늦게 이루어짐 ②또는, 만년(晩年)이 되어 성공(成功)하는 일을 이름

a late bloomer


노자 41장은 이렇게 말한다.

가장 큰 인물이 道(도)를 들으면 힘써 행하려고 노력한다. 중간쯤의 인물이 도를 들으면 그 도에 대한 믿음과 의심이 반반이다. 가장 못한 인물이 도를 들으면 一笑(일소)에 부치고 만다. 그들의 웃음을 살 정도가 아니면 진정한 도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옛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고 나아가는 도는 물러서는 것 같고 평탄한 도는 험한 것 같다. 최상의 덕은 골짜기와 같고 아주 흰 것은 더러운 것 같고 넓은 덕은 부족한 것 같고 변함없은 덕은 변하는 것 같다. 아주 큰 네모는 구석이 없으며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大器晩成].

三國志(삼국지)에도 大器晩成이 등장한다.

동한(東漢) 말년, 원소(袁紹)의 측근에 崔琰(최염)이라는 식객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무술을 좋아하여, 23세에야 논어 등을 공부하였다. 그는 처음 원소의 부하로 일했으나, 후에는 조조(曹操)의 휘하로 갔다. 최염은 당당한 풍채에 우렁찬 목소리를 갖고 있는 호걸풍의 인물로 인품도 좋아 曹操(조조)도 그를 총애하여 魏(위)나라의 상서(尙書)를 지내며 태자 옹립문제를 해결하여 공정한 관리로 인정받았다.

그런 최염에게 崔林(최림)이라는 사촌동생이 있었다. 최림은 사촌 형과 전혀 딴판이어서 외모도 시원치 않은 데다가 구변도 신통치 못해 출세와는 거리가 먼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일가 친척들도 최림은 눈 밖에 두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최염만은 달랐다.

"큰 종이나 큰 솥은 쉽게 만들어지는게 아니네.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대성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지. 내 아우도 그런 大器晩成형이니까 언젠가는 큰 인물이 될터이니 두고 보게나."

최염의 장담대로 최림은 나중에 크게 출세하여 天子(천자)를 보좌하는 三公(삼공)중의 한사람이 된다.


출전

노자(老子) |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최염(崔琰)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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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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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空城計 (공성계, kōngchéngjì)

空城計(공성계)

空城计(kōngchéngjì)

空 빌 공 | 城 성 성 | 計 꾀 계 |


아군이 열세일 때 방어하지 않는 것처럼 꾸며 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전략.


36계(計) 가운데 敗戰計(패전계) 제32계이다. 빈 성으로 적을 유인해 혼란에 빠뜨리는 계책을 말한다. 아군측에 승산이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공허한 상태를 보여줌으로써 '뭔가 계략을 숨겨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흔히 '없으면서도 있는척' 하여 적의 오판을 유도하는 반면, '없으면서 더욱 없는척' 하여 적으로 하여금 착각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실력이 없으면서도 허세를 부리는 허장성세(虛張聲勢)와 통한다.

36계 원문의 풀이글은 다음과 같다.

"병력이 적을때는 일부러 더욱 적은 것으로 보여, 의심많은 적을 한층 더 의심케 할 수 있다. 병력이 적을 때의 기책으로 효과를 얻는다.[虛者虛之,疑中生疑,剛柔之際,奇而復奇.]"

列國志에도 공성계가 등장한다.

때는 齊(제)에서는 제환공이 치세를 이루고, 晉(진)에서는 진헌공이 다스리고 있을 때였다. 당시 남방의 楚(초)에서는 초문왕이 식나라를 쳐서 식후의 부인을 자신의 부인으로 삼아, 그 사이에서 웅간과 웅운, 두 아들이 있던 때였다. 초문왕은 죽고 큰아들 웅간이 왕위에 올랐으나 웅간은 자신보다 재주와 지혜가 뛰어난 동생 웅운을 경계하여 틈을 보아 죽이려 하고 있었다. 또한 웅운은 웅운대로 자신보다 재주가 뒤처지는 형이 왕위에 있는 것이 불만이어서,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터였다.

그렇게 기회를 노리던 웅운은 사냥터에 나가는 웅간을 습격하여 죽이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이가 바로 楚成王(초성왕)이다. 초성왕의 숙부인 자원은 맹랑한 사람이었다. 형인 초문왕이 죽은 후부터 초나라 왕위를 노리고 있었으며, 또한 초문왕이 데려온 형수 문부인(식부인)을 사모하고 있었다. 이에 자원은 문부인의 환심을 사고자 초성왕의 윤허를 받아 鄭(정)나라로 쳐들어갔다.

정나라는 당시 鄭文公(정문공)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즉시 백관을 소집하여 상의했다. 의견은 분분하여 화평론, 주전론, 농성론 등이 계속 오갔다. 이에 숙첨이 말한다.

"세분 말씀이 다 일리가 있으나,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보건데 초군은 머지않아 물러갈 것입니다."

한참 의논하고 있는데 초군이 이미 코앞까지 당도했다는 파발이 들어왔다.

이에 숙첨은 대담무쌍하게 성문을 활짝 열었다. 백성들은 이전과 다름없이 거리를 왕래하며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에 초군의 선봉인 투어강은 깜짝 놀라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자원을 기다렸다. 보고를 받은 자원이 나아가 살펴보자, 투어강의 보고와는 달리, 성위에는 정기가 정숙하고 무장한 군사들이 숲처럼 늘어서 있었다. 자원이 이를 보고 찬탄한다.

"정나라엔 훌륭한 신하가 세사람 있다더니 그들의 계책은 참으로 측량할 수 없구나. 우선 정나라의 허실부터 탐지한 후에 공격해야겠다."

그러나 다음날, 정나라와 동맹한 제나라에서 구원군이 온다는 첩보가 왔다. 이에 자원은 감히 정성을 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제후가 우리의 돌아갈 길을 끊으면 우리는 앞뒤로 적군 속에 들고 만다. 내 이번에 정나라를 쳐서 정성 대로까지 이르렀은 즉,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는 군사들에게 함매를 물리고 말의 방울들을 모두 떼어버리게 한 후, 조용히 퇴각할 것을 명령했다. 그날 밤, 초군은 소리없이 정성을 떠났다. 그들은 정군의 추격을 당할까 두려워 군막도 걷지 않고 많은 기를 꽂아둔 채로 달아났다.

이렇게 정나라의 숙첨의 공성계에 의해 초군은 계략이 있을까 두려워 공격을 유보하고 있었고, 그 동안 원군이 도착할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이다.

《삼국지(三國志)》 《촉서(蜀書)》 제갈량전(諸葛亮傳)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제갈량이 촉나라 군대를 양평관에 주둔시키고, 대장군 위연(魏延)과 왕평(王平) 등으로 하여금 위(魏)나라 군대를 공격하게 할 때의 일이다. 군대를 모두 다른 곳으로 보냈기 때문에 제갈량이 주둔하고 있는 성에는 병들고 약한 일부의 병사들만 남아 있었다.

이때 위의 대도독 사마의(司馬懿)가 15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성으로 쳐들어 왔다. 이 소식을 들은 제갈량은 군사들로 하여금 성 안의 길목을 지키게 하고, 성문을 활짝 열어둔 채 20여 명의 군사를 백성들로 꾸며 청소를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성 밖에서 눈에 잘 띄는 적루(敵樓)의 난간에 기대앉아 웃음 띤 얼굴로 한가롭게 거문고를 뜯었다.

대군이 몰려와도 아무 일 없는 듯 청소를 하고 있는 백성들과 거문고를 뜯고 있는 제갈량을 본 사마의는 제갈량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몰라 군사를 거두고 물러가 버렸다.

《삼국지연의》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제갈량이 거문고를 뜯어 사마의를 물리쳤다는 탄금주적(彈琴走敵)과 뜻이 같다. 거문고를 울려 적을 쫓아냈다는 뜻이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空城計(공성계) | 空城之計(공성지계) |

開門揖盜 (개문읍도)

開門揖盜(개문읍도)

開 열 개, 평평할 견 | 門 문 문 | 揖 읍할 읍, 모을 집, 모을 즙 | 盜 도둑 도 |

일부러 문을 열어 놓고 도둑을 청한다는 뜻으로, 긴박한 주위 사정을 깨닫지 못하고 감상(感傷)이나 비탄에 빠져 스스로 화를 불러 들인다는 말


삼국지(三國志) 오서(吳書) 손권전(孫權傳)의 이야기다.

후한(後漢) 말, 조정의 통제력이 상실되자, 강동(江東)의 손책(孫策)은 자신의 세력 기반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에 당거의 태수(太守)인 허공(許貢)은 천자 헌제(獻帝)에게 밀서(密書)를 보내 손책을 제거할 것을 건의하고자 하였으나, 상서문이 중도에 손책의 손에 들어가게 되고, 크게 노한 손책은 무력으로 허공을 죽여버렸다. 그 때 허공의 집에 있던 세 명의 식객(食客)은 손책의 무력에서 간신히 탈출하였다.

이들은 허공의 원수를 갚기 위해 손책이 사냥을 즐겨하는 것을 알고 이를 노려 손책을 덮쳤다. 이때 손책은 깊은 상처를 입고 간신히 도망쳤으나 그 후 상처가 악화되어 위독해지자 동생인 손권에게 뒷일을 맡기고 죽었다.

그러나 손권이 형의 죽음을 슬퍼하여 비탄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어 손책의 가신(家臣)인 장소(張劭)가 손권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하였다.

"지금 간사한 무리들이 우리들을 뒤쫓아오고, 이리 같은 놈들이 도처에 숨어 있는데, 부친의 죽음만을 슬퍼하고 대사(大事)를 돌보지 않고 있으니, 이는 문을 열어 도둑을 맞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是猶開門揖盜]. 난세에는 욕심이 많은 늑대가 득실거리는 법입니다. 정신차리십시오!"

손권은 이 충고의 참뜻을 깨달아 그 즉시 상복을 벗어던지고 군대를 순시하러 나섰고, 아버지 손견(孫堅)의 원수 황조(黃祖)를 무찌르고 적벽(赤壁)에서는 유비(劉備)와 연합하여 조조(曹操)의 군대를 격파하여 강남(江南)에서 그의 지위를 굳혔으며,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가 후한(後漢)의 헌제(獻帝)를 협박하여 제위(帝位)를 빼앗아 국호를 위(魏)라 하고 황제를 칭하자, 손권도 제위에 올라 오(吳)·위·촉한(蜀漢)의 삼국시대(三國時代)를 열게 된 주역으로서 역사와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출전

삼국지(三國志) 오서(吳書) 손권전(四七孫權傳)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開門納盜(개문납도) | 開門納賊(개문납적) | 開門而揖盜(개문이읍도) |

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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