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幸災樂禍 (행재낙화)

幸災樂禍(행재낙화)

幸 다행 행 | 災 재앙 재 | 樂 좋아할 요, 즐길 락(낙), 노래 악 | 禍 재앙 화 |

'재앙을 다행으로 여기고 즐거워한다'라는 뜻으로, 남의 불행을 즐기는 이기적인 태도를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중국 춘추시대의 경정(慶鄭)과 자퇴(子頹)와 관련된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좌전(左傳) 희공(僖公) 14년조의 이야기.

경정의 고사에서 유래된 '행재'와 자퇴의 고사에서 유래된 '낙화'가 합쳐진 고사성어이다.

춘추시대, 진(晋)나라에 내란이 발생하자 공자 이오(夷吾)는 진(秦)나라로 도망하였다. 이오는 귀국하기 전에 다섯 성을 진(秦)나라에 감사의 대가로 주기로 하였으나, 진(晋)의 군주, 즉 혜공(惠公)에 즉위하자 생각을 바꾸었다.

기원전 647년, 진(晉)나라 혜공(惠公) 때 큰 흉년이 들었다. 진(秦)나라 진혜왕은 지난 날의 일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대부 백리해(百里奚)의 권유로 진(晋)나라에 양식을 보내 주었다.

이듬해에는 거꾸로 진(秦)나라에 흉년이 들어 진(晉)나라로부터 식량을 사들이고자 하였으나, 진(晉)나라는 지난 해의 고마움을 잊은 듯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大夫)인 경정만은 혜공에게 말하면서, 식량을 팔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은혜를 저버리면 외로운 처지가 될 것이며, 남의 재앙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입니다[背施無親, 幸災不仁]"

그러나 혜공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분노한 진(秦)나라는 결국 군사를 일으켜 진(晉)나라를 공격하였고, 혜공은 포로의 신세가 되었다. 이 고사는 《좌씨전(左氏傳)》의 '희공(僖公) 14년'조에 실려 있으며, '행재'는 여기서 유래되었다.

춘추시대 주(周)나라의 장왕(莊王)은 애첩과의 사이에서 자퇴라는 아들을 얻었다. 장왕이 죽은 뒤에 희왕에 이어 혜왕(惠王)이 왕위에 올랐다. 혜왕 때 대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혜왕을 몰아내고 자퇴를 꼭두각시 왕으로 내세웠다. 음탕하고 어리석은 자퇴는 매일 대신들과 음주가무에 빠져 지냈다.

정(鄭)나라의 려왕이 이 소식을 듣고 괵숙에게 "때를 가리지 않고 슬픔과 즐거움을 나타내면 재앙이 반드시 닥친다고 들었다. 지금 자퇴가 가무를 즐기느라 피곤한 줄을 모르는 것은 재앙을 즐기는 짓이다(哀樂失時, 殃咎必至. 今王子頹歌舞不倦, 樂禍也)"라고 말하였다. 이 고사는 《좌씨전》의 '장공(莊公) 20년'조에 실려 있으며, '낙화'는 여기서 유래되었다.

이 두 가지 고사에서 유래하여 행재낙화는 남의 불행을 함께 슬퍼하기는커녕 즐거워하는 그릇된 행위를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낙화행재(樂禍幸災)라고도 한다.


출전

좌씨전(左氏傳) 희공(僖公) 14년 | 좌씨전(左氏傳) 장공(莊公) 20년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낙화행재(樂禍幸災) | 幸災樂禍(행재낙화) | 幸災樂禍(행재락화) | 幸災樂禍(행재요화) |

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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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鞭長莫及 (편장막급)

鞭長莫及(편장막급)

鞭 채찍 편 | 長 길 장, 어른 장 | 莫 없을 막, 저물 모, 덮을 멱 | 及 미칠 급 |

채찍이 길어도 미치지 못한다는 뜻으로, 돕고 싶지만 능력(能力)이 미치치 못함을 이르는 말


좌전(左傳) 선공(宣公) 15년조의 이야기다.

중국 춘추시대의 초(楚)나라는 여러 제후국 가운데 강대국에 속하였다. 초나라 장왕(莊王)은 신주(申舟)를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는데, 제나라로 가려면 송(宋)나라 땅을 거쳐야만 하였다. 그 무렵에는 사신이 다른 나라의 영토를 지나가려면 미리 그 나라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장왕은 국력이 강함을 믿고 이 절차를 무시하였다.

송나라에서는 이러한 행위가 자신들을 모욕하는 것이라 여기고 송나라 영토에 무단으로 진입한 신주를 붙잡아 죽였다. 초장왕은 이 소식을 듣고 격노하여 기원전 594년 군대를 일으켜 송나라를 공격하였으나, 미리 대비하고 있던 송나라의 저항이 완강하여 전쟁이 길어지게 되었다. 아무래도 군사력이 약한 송나라에서는 대부(大夫) 악영제를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진나라 경공(景公)이 구원병을 보낼 뜻을 내비치자, 대부 백종(伯宗)이 이를 반대하며 경공에게 말했다.

"옛말에 말채찍이 길기는 하지만 말의 배에까지 미칠 수는 없다고 하였습니다[古人有言曰, 雖鞭之長, 不及馬腹]. 지금은 하늘이 초나라를 돕고 있는 때이니 싸워서는 안 됩니다. 비록 우리 진나라가 강하다고는 하지만 하늘을 거스를 수야 있겠습니까"

결국 진나라는 대부 해양(解揚)을 송나라로 보내어 말로만 위로하였을 뿐, 구원병을 보내지는 않았다. 이 고사는 《좌씨전》의 '선공(宣公) 15년'조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鞭長莫及(out of reach)은 역량(능력)이 미치지 못하거나 역량이 있더라도 모든 면을 주도면밀하게 고려하여 대처하기는 어려운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좌씨전(左氏傳)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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魑魅魍魎 (이매망량, chīmèiwǎngliǎng)

魑魅魍魎(이매망량)

魑魅魍魉(chīmèiwǎngliǎng)

魑 도깨비 리,도깨비 이 | 魅 매혹할 매,도깨비 매,도깨비 미 | 魍 도깨비 망 | 魎 도깨비 량,도깨비 양 |


산 속의 요괴와 물 속의 괴물 등 온갖 도깨비·요괴·귀신·괴물 등을 총칭하는 말로 나쁜 사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이매는 산 속의 요괴, 망량은 물 속의 괴물을 말하는데, 이들이 합쳐져 온갖 도깨비를 지칭하는 하나의 성어(成語)가 되었다. 《좌씨전(左氏傳)》의 '선공(宣公) 3년' 조에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주(周)나라의 대부(大夫) 왕손만(王孫滿)에게 주나라 왕실이 지닌 정(鼎:솥)의 크기와 무게를 물었다는 기록이 있다.

정은 왕권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장왕은 주나라가 정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쇠락하였으므로 자신이 그것을 차지하겠다는 속셈을 품고 있었다. 왕손만은 장왕의 속셈을 간파하고 정의 크기와 무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덕(德)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고 대답하였다. 문정지대소경중(問鼎之大小輕重)이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왕손만은 정의 용도에 대하여 "거기에 온갖 사물을 새겨 놓음으로써 백성들에게 신령스러운 것과 간악한 것을 구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물에 들어가거나 산에 들어가서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피할 수 있고, 이매망량 같은 귀신 도깨비들과 마주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百物而爲之備, 使民知神奸, 故民入川澤山林不逢不若, 魑魅魍魎, 莫能逢之)"라고 하였다.

여기서 유래하여 이매망량은 요괴와 괴물 등 온갖 도깨비를 뜻하는 원래의 의미 외에 그러한 요괴와 괴물처럼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가지각색의 악인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左氏傳(좌씨전):宣公(선공):三年(3년) |


관련 한자어

참조어

問鼎之大小輕重(문정지대소경중) |


좌씨전, 좌씨전:선공

左氏傳, 左氏傳:宣公

一國三公 (일국삼공)

一國三公(일국삼공)

一 한 일 | 國 나라 국 | 三 석 삼 | 公 공평할 공 |

한 나라에 삼공이 있다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구구한 의견을 제시하여 누구의 말을 좇아야 할지 모르는 경우(境遇)를 비유(比喩ㆍ譬喩)하는 말


춘추좌전 희공(僖公) 5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중국 춘추시대의 진(晉)나라 군주인 헌공(獻公)은 여희(驪姬)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여희는 자기가 낳은 아들을 헌공의 후계자로 만들기 위하여 태자인 신생(申生)을 모함하였다. 이에 신생은 자살하였고, 헌공의 또 다른 두 아들 중이(重耳)와 이오(夷吾)는 각각 포(蒲) 땅과 굴(屈) 땅으로 피신하였다.

헌공은 대부(大夫)인 사위(士蔿)를 시켜 중이와 이오를 위하여 성을 쌓도록 하였다. 명을 받은 사위는 땔나무를 써서 대충대충 성을 쌓았다. 그의 축성작업에 불만을 품은 이오는 헌공에게 호소하였다. 크게 노한 헌공의 문책에 사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신이 듣기에 상(喪)을 당하지 않고서 슬퍼하면 반드시 근심거리가 닥쳐오고, 전쟁이 없는데도 성을 쌓으면 그 성은 적군에게 이용된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제가 견고하게 쌓아 훗날 적에게 진지로 이용당한다면, 이는 곧 불충(不忠)의 죄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실하게 쌓는다면 이는 임금에 대한 불경(不敬)의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미 불충불경의 죄를 범하였으니 어떻게 해야합니까? 시경에 이르기를 '덕을 생각하면 나라가 안녕하고, 적장자는 성과 같네'라고 하였습니다. 임금께서 덕을 닦고 적장자를 굳건히 하시면 어떤 성이 이보다 튼튼하겠습니까?"

그는 집에 돌아와서 여우가죽 옷 갈래갈래 찢어지듯, 한 나라에 세 임금 있으니, 내 누구를 따라야 할꼬[狐 尨茸, 一國三公, 吾誰適從]라는 시를 읊었다. 여기서 삼공은 헌공과 두 공자, 중이와 이오를 가리키며, 명령을 받들어야 할 윗사람이 많은 것을 여우가죽으로 만든 옷에 여우털이 난잡한 모양에 비유한 것이다.

一國三公이란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구구한 의견을 제시함을 비유한 말이다.


출전

좌씨전(左氏傳) |

欲蓋彌彰 (욕개미창)

欲蓋彌彰(욕개미창)

欲 하고자 할 욕 | 蓋 덮을 개 | 彌 널리 미 | 彰 밝힐 창 |

'덮고자 하면 더욱 드러난다'라는 뜻으로, 잘못을 감추려 할수록 오히려 더욱 드러나게 됨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좌씨전(左氏傳)》에서 유래되었다.

공자는 《춘추》에서 노(魯)나라 소공(昭公) 31년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였는데, 그 가운데 "겨울에 흑굉이 남 땅을 가지고 투항하였다(冬, 黑肱以濫來奔)"라는 구절이 있다. 주나라의 대부 흑굉이 노나라에 항복함으로써 그가 다스리던 남 땅도 노나라의 영토가 된 일을 기록한 것이다. 《좌씨전》은 이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춘추》의 필법에 따르면 원래 흑굉처럼 지위가 낮은 사람과 자잘한 일들은 기록하지 않지만, 이 일이 기록된 것은 노나라의 영토가 변동된 것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름을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와 같으니, 이름이 나더라도 나지 않음만 못한 경우가 있다. 땅을 지니고 군주를 배반한 일에 대하여는 그 사람의 지위가 낮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그 땅과 그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여야 한다. 이는 불의를 행한 기록이 없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런 까닭에 군자는 움직일 때 예를 생각하고, 이익을 위하여 어긋나지 않으며, 의로움에 후회할 행동은 하지 않는 법이다. 어떤 이는 명성을 추구하였으나 기록하지 않고, 어떤 이는 잘못을 덮으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였으니, 이는 불의한 사람을 징벌하기 위함이다[或求名而不得, 或欲蓋而名章, 懲不義也]."

의롭지 않은 일이나 그러한 행위를 한 사람은 흑굉처럼 지위가 낮더라도 후세에 교훈을 삼기 위하여 기록하였다는 말이다. 이 고사는 《좌씨전》의 '소공 31년' 조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욕개미창은 허물은 감출수록 더욱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玩火自焚 (완화자분)

玩火自焚(완화자분)

玩火自焚 [wánhuǒzìfén]

玩 희롱할 완, 가지고 놀 완 | 火 불 화 | 自 스스로 자 | 焚 불사를 분 |

불을 가지고 놀다가 자신을 태워 버린다는 뜻으로, 무모한 일로 남을 해치려다 결국 자신이 해를 입게 됨.

Somebody who plays with fire will get burnt, (fig.) One venturing to do evil is bound to suffer from his own evil.


춘추좌전 은공(隱公) 4년조에는 무력의 위험성을 경고한 기록이 있다.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위(衛)나라 군주인 장공(莊公)의 첩이 아들을 낳자 이름을 주우라고 하였다. 주우는 어려서부터 장공의 총애를 받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 무력으로써 해결하려 했다. 장공이 죽자 환공(桓公)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위(衛)나라의 공자(孔子) 주우는 기원전 719년 환공(桓公)을 죽이고 군주의 자리를 찬탈했다. 주우는 왕위를 찬탈한 후 송(宋)나라와 진(陳)나라, 채(蔡)나라 등과 연합하여 정(鄭)나라를 공격했다.

노(魯)나라 은공(隱公)이 이 소식을 듣고 대부(大夫) 중중(衆仲)에게 주우가 뜻을 이룰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중중은 이렇게 대답(對答)했다.

"주우는 무력만을 믿고 잔인(殘忍)한 짓을 하면서도 태연합니다만, 무력에 의지했다간 국민들이 등을 돌리고 심복들마저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무력이란 불과 같은 것이어서, 단속하지 않으면 장차 자신이 그 불속에서 타게 될 것입니다. [夫兵, 猶火也. 弗 , 將自焚也]"

玩火自焚이란 무모한 일로 남을 해치려다 결국 자신이 해를 입게 됨을 비유한 말로 이러한 노(魯)나라 중중(衆仲)의 말에서 유래(由來)한다.


출전

좌씨전(左氏傳)

食指動 (식지동)

食指動(식지동)

집게손가락이 움직인다는 말로, 식욕을 불러일으키는 것 또는 욕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心腹之患 (심복지환, xīnfùzhīhuàn)

心腹之患(심복지환)

心腹之患(xīnfùzhīhuàn)

心 마음 심 | 腹 배 복 | 之 갈 지 | 患 근심 환 |


'가슴이나 배에 생긴 병'이라는 뜻으로, 쉽게 치료하기 어려운 질병 또는 없애기 어려운 근심이나 병폐를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좌씨전(左氏傳)》과 《후한서(後漢書)》 등에서 유래되었다.


심복지질(心腹之疾) 또는 복심지질(腹心之疾)이라고도 한다. 춘추시대에 오(吳)나라 왕 합려(闔閭)는 월(越)나라 왕 구천(勾踐)과 싸우다 상처를 입어 죽었다. 합려의 아들 부차(夫差)는 군사력을 키워 월나라를 정벌함으로써 아버지의 원한을 갚았다. 부차가 제(齊)나라를 공격하려 할 때, 구천이 신하들을 이끌고 와서 부차와 대신들에게 재물을 바쳤으므로, 오나라 대신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그러나 오자서(伍子胥)만은 월나라의 그러한 행동이 오나라의 경계심을 늦추게 하려는 속셈임을 간파하였다.

오자서는 부차에게 "제나라는 우리에게 쓸모없는 자갈밭과 마찬가지이니 공격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월나라는 우리에게 가슴이나 배에 생긴 질병과 같은 존재입니다(越在我, 心腹之疾也). 월나라가 지금은 겉으로 복종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우리나라를 집어삼킬 계책을 도모하고 있을 것입니다. 왕께서 빨리 월나라를 멸하여 후환을 없애지 않고, 도리어 제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일이 아닙니다"라고 간언하였다.

그러나 부차는 이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오나라는 나중에 월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이 고사는 《좌씨전》의 '애공(哀公) 11년'조(條)에 실려 있다.

또 《후한서》의 〈진번전(陳蕃傳)〉에 "나라 밖에 왜구나 도적이 있는 것은 사지에 든 병과 같지만, 나라 안의 정치가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가슴이나 배에 생긴 병과 같다(寇賊在外, 四支之疾, 內政不理, 心腹之疾也)"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심복지환은 몸 속의 가슴이나 배에 생긴 질병처럼 없애기 어려운 근심거리나 병폐, 환란 등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左氏傳(좌씨전):哀公(애공) 11년 | 後漢書(후한서):陳蕃傳(진번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

心腹之疾(심복지질) | 腹心之疾(복심지질) |

참조어

吴市吹箫(오시취소,Wúshìchuīxiāo) | 掘墓鞭屍(굴묘편시) | 日暮途遠(일모도원) | 心腹之患(심복지환) |


좌씨전, 좌씨전:애공, 후한서, 후한서:진번전, 사기, 사기:오자서열전

左氏傳, 左氏傳:哀公, 後漢書, 後漢書:陳蕃傳, 史記, 史記:伍子胥列傳

問鼎之大小輕重焉 (문정지대소경중언)

問鼎之大小輕重焉(문정지대소경중언)

솥의 무게를 묻는다는 말로 어떤 직위에 있는 인물의 자격을 묻고 퇴임을 압박한다는 말. 줄여서 문정(問鼎) 또는 문정경중(問鼎輕重)이라고도 함.

大義滅親 (대의멸친)

大義滅親(대의멸친)

국가나 사회의 대의를 위해서는 친족도 멸한다는 말로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족에 대한 정같은 것을 버린다는 뜻이다.


때는 춘추시대. 衛(위)나라 公子(공자)인 주우가 임금인 桓公(환공)을 죽이고 스스로 임금자리에 올랐다.

환공과 주우는 이복형제간인데 둘 다 후궁의 소생이었다. 위나라 대부 석작은 충의지사로 이름난 사람으로 일찍이 주우에게 역심이 있음을 알고 아들인 石厚(석후)가 주우와 가까이 지내지 못하도록 했으나 듣지 않았다. 석작은 환공이 왕위에 오르자 은퇴했지만 그가 우려했던 주우의 반역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반역이 성공하자 석후는 아버지인 석작에게 어떻게 하면 주우의 왕위를 굳힐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석작은 周(주)나라 天子(천자)의 허락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허락을 받기 위해서는 주나라 왕실과 친한 진공을 통해서 청원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다.

주우와 석후가 진나라로 떠나자 석작은 陳公(진공)에게 밀사를 보내어 이렇게 말하도록 했다.

『주군을 시해한 이 두사람을 잡아 처치해 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두사람은 위나라 책임자의 입회를 기다려 사형에 처해졌다. 석작은 君臣(군신)의 대의를 이룩하기 위해서 육친의 사사로운 정을 버린 것이다.

대의멸친과 비슷한 뜻을 가진 한자성어로 滅私奉公(멸사봉공)과 先公後私(선공후사)가 있다.

各自爲政 (각자위정)

各自爲政(각자위정)

各 각각 각 | 自 스스로 자 | 爲 하 위, 할 위 | 政 정사 정, 칠 정 |

저마다 스스로 정치(政治)를 한다는 뜻으로, 각각(各各)의 사람들이 자기(自己) 마음대로 한다면 전체(全體)와의 조화(調和)나 타인(他人)과의 협력(協力)을 생각하기 어렵게 된다는 뜻


기원전 722년부터 기원전 481년까지를 다룬 역사서 《좌씨전(左氏傳)》 평전(評傳)에 있는 글이다.

좌씨전(左氏傳) 선공(宣公) 2년에 따르면, 춘추시대 송(宋)나라와 진(晉)나라가 서로 협력하였기 때문에 송나라와 초(楚)나라는 사이가 벌어졌다. 이에 초(楚)나라 장왕(莊王)은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동맹국인 정(鄭)나라로 하여금 송나라를 치게 하였다.

정나라 목공(穆公)은 즉시 출병했다. 정나라와의 결전을 하루 앞두고 송나라의 대장 화원(華元)은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식사 때 특별히 양고기를 지급하였다. 군사들은 모두 크게 기뻐하며 맛있게 먹었지만 화원의 마차를 모는 양짐(羊斟)만은 이 양고기를 먹지 못하였다. 한 부장(副將)이 그 까닭을 묻자 화원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마차를 모는 사람에게까지 양고기를 먹일 필요는 없네. 마차부는 전쟁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말일세."

이튿날 양군의 접전이 시작되었다. 화원은 양짐이 모는 마차 위에서 지휘를 하였다. 송나라와 정나라의 군사가 모두 잘 싸워 쉽게 승패가 나지 않자 화원이 양짐에게 명령하였다.

"마차를 적의 병력이 허술한 오른쪽으로 돌려라."

그러나 양짐은 반대로 정나라 병력이 밀집해 있는 왼쪽으로 마차를 몰았다. 당황한 화원이 방향을 바꾸라고 소리치자 양짐은 말했다.

"어제 양고기를 군사들에게 먹인 것은 장군의 판단에 따라 한 일이지만 오늘의 이 일은 나의 생각대로 한 것입니다[疇昔之羊 子爲政 今日之事 我爲政]"

그는 곧바로 정나라 군사가 모여 있는 곳으로 마차를 몰았기 때문에 화원은 결국 정나라 군사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대장이 포로가 된 것을 본 송나라 군사는 전의(戰意)를 잃고 전열(戰列)이 무너졌다. 그 결과 250여 명의 군사가 사로잡히고 사공(司空:토지와 민사를 맡아보는 관원)까지 포로가 되었다. 정나라 군사는 모두 460량의 병거(兵車)를 포획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송나라의 대패는 바로 양짐이 화원의 지휘에 따르지 않고 '각자위정'했기 때문이다.

군자들의 혹평처럼 양짐은 ‘그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나라를 패망하게 하고 백성들을 죽게 만든(以其私憾 敗國殄民)’ 것이다. 융통성이 부족하고 아집이 강하여 전체적인 균형을 생각하지 못해 결국 국가의 대사를 그르치게 만든 것이다.

비단 군사행동에서 뿐만 아니라 국가나 사회의 경영에 있어 전체로서의 조화나 개개의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경영은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다. 사소한 일에서 비롯되었지만 결과가 이렇게 심각한 경우는 늘 존재해 왔던 것이다.


출전

좌씨전(左氏傳)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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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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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 4급 사자성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