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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松之盛 (여송지성)

如松之盛(여송지성)

如 같을 여 | 松 솔 송 | 之 갈 지 | 盛 성할 성 |

솔 나무같이 푸르러 성(盛)함은 군자(君子)의 절개(節槪ㆍ節介)를 말한 것임

[출전]
千字文(천자문)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似蘭斯馨如松之盛(사란사형여송지성) |

如魚得水 (여어득수)

如魚得水(여어득수)

如 같을 여, 말 이을 이 | 魚 고기 어 | 得 얻을 득 | 水 물 수 |

물고기가 물을 얻음과 같다는 뜻으로, 빈궁(貧窮)한 사람이 활로를 찾게 됨을 비유(比喩ㆍ譬喩)해 이르는 말

Like fish getting water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제갈량(諸葛亮)전에는 유비(劉備)가 제갈량을 얻었을 때의 심정을 기록한 대목이 있다. 동한(東漢) 말기, 천하가 대란(大亂)에 휩싸이자, 각 세력들과 다투던 유비는 인재(人才)를 찾고 있었다. 그는 제갈량이라는 인재가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터라, 직접 세 차례나 그를 찾아가 자신을 도와 천하를 도모하기를 청하였다.

제갈량의 도움으로 유비는 촉한(蜀漢)을 건국하고, 조조, 손권과 삼국정립(三國鼎立)의 국면을 형성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을 매우 존경하였으며, 제갈량 또한 유비의 대우에 깊은 감사를 느끼고 그에게 충성을 다했다. 유비는 중대한 일들에 대하여 제갈량에게 자문을 구하였는데, 관우와 장비는 유비의 제갈량에 대한 태도에 불만이었다.

이에 유비는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제갈량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으니[孤之有孔明, 猶魚之有水也], 자네들은 다시 이런 말을 하지 않도록 하게."

如魚得水(Like fish getting water)란 수어지교(水魚之交), 수어지친(水魚之親)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마음에 맞는 사람을 얻거나 자신에게 매우 적합한 환경을 얻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출전

三國志(삼국지)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水魚之交(수어지교) | 水魚之親(수어지친) |

如反掌 (여반장)

如反掌(여반장)

이여반장(易如反掌)의 준말. 손바닥을 뒤치는 것처럼 아주 쉽다는 말. 맹자(孟子)에서 유래.


관련 한자어

유의어

타수가득(唾手可得) 쉽게 얻을 수 있는 일 또는 힘들이지 않고 쉽게 성사시킬 수 있는 일 등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쉽다는 뜻의 여반장(如反掌) 또는 이여반장(易如反掌)과 같은 의미이다.

如狼牧羊 (여랑목양)

如狼牧羊(여랑목양)

如 같을 여 | 狼 이리 랑,낭 | 牧 칠 목 | 羊 양 양 |

이리에게 양을 기르게 한다는 뜻으로, 탐관오리(貪官汚吏)가 백성을 착취(搾取)함을 비유한 말.

Like a wolf shepherding sheep. To rule the people oppressively. Oppression of the people by bad officials.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지방의 할거 세력들과 대상인들은 대대적으로 토지를 점령하여, 정치적, 경제적으로 매우 큰 힘을 가진 세력집단이 되었다. 한무제는 중앙집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지방호족과 대상인들의 세력을 억제하는 정책을 채용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지방 할거세력과 호족, 대상인들의 저항을 야기하게 되었다.

그 당시, 정양(定襄) 태수를 지내는 의종(義縱)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본시 도적출신이었으나, 왕태후의 총애를 받은 누님의 덕택으로 현령이 되었다. 그는 법을 올바르게 적용하여 다스릴 뿐, 신분의 귀천(貴賤)은 따지지 않았다. 한번은 태후(太后)의 외손(外孫)인 수성군(修成君)의 아들을 체포하여 심문한 적이 있었는데, 천자는 이를 알고 의종을 유능하다고 여겨, 하내(河內)의 도위로 자리를 옮기게 하였다. 의종은 부임하자 곧 그 곳의 호족(豪族)인 양씨(穰氏) 일가를 멸망시켰는데,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이곳 사람들은 두려워서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게 되었다[河內道不拾遺].

한편, 제남(濟南)의 도위(都尉)를 지내며 종실(宗室)과 호족(豪族)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영성(寧成)은 중형을 받고 고향에 머물고 있었다. 그 즈음 천자가 그를 태수로 임명하려고 하자, 어사대부 공손홍이 진언하였다.

˝신이 산동의 말단 관리로 있을 때, 영성은 제남의 도위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마치 이리가 양을 치는 것과 같았습니다[其治如狼牧羊]. 영성에게 백성을 다스리게 해서는 안됩니다.˝

천자는 영성을 함곡관의 도위로 임명하였다. 영성이 도위로 근무한지 1년쯤 지나자, 관(關)을 출입하는 관리들에게서 이런 말이 나돌았다.

˝어린 호랑이에게 젖을 먹이는 호랑이를 건드릴지언정 영성의 노여움을 사면 안 된다.˝

의종은 하내에서 남양의 태수를 자리를 옮기게 되었는데, 의종은 영성(寧成)이 은퇴하여 그곳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종이 남양에 부임하기 위해 관(關)에 도착하자, 영성은 그곳에 나와 겸손하게 그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의종은 거만하게 굴며 그에게 답례조차 하지 않았다. 의종은 남양의 태수로 부임하자, 제일 먼저 영성의 무고한 일가를 심문하고 그 일족을 모두 죽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관리들과 사람들은 모두 집안에 틀어박혀 함부로 나돌아다니지 않았다.

얼마 후, 흉노 원정으로 정양군의 관리들과 백성들이 혼란에 빠지게 되자, 천자는 의종을 정양의 태수로 임명하고 혼란을 막도록 하였다. 의종은 정양군에 부임하자마자, 정양군내의 호족이나 할거세력들의 반항을 평정한 후, 2백여 명의 범죄자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아울러, 사적(私的)으로 감옥에 드나들며 죄인들을 면회한 사람들에게 죄수 탈옥을 도왔다는 죄를 적용하여 전원 체포하여, ´이 자들은 사형에 해당하는 자를 탈옥시키려고 꾀하였다´라고 논고하여 그 날 중으로 4백여 명을 모조리 죽였다. 그 후 군내의 백성들은 춥지 않아도 벌벌 떨었으며, 교활한 자들은 관리에게 협력하여 이 일을 도왔다[其後郡中不寒而慄, 猾民佐吏爲治]. 후에, 의종은 나랏일을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기시(棄市)의 형에 처하여졌다.

出典
史記(사기) 권122 혹리열전(酷吏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