多情多感(다정다감)
애틋한 정도 많고, 느낌이나 생각이 많음.
Showing posts with label 다.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다. Show all posts
多言數窮 (다언삭궁)
多言數窮(다언삭궁)
말이 많으면 자주 곤란(困難)한 처지(處地)에 빠짐
多言數窮 不如守中 (다언삭궁 불여수중)
말이 많으면 곤궁에 처하는 경우가 많으니 가슴에 품고만 있음만 못하다
- 老子 도덕경
참고어
구화지문(口禍之門), 사마난추(駟馬難追), 언비천리(言飛千里), 화종구출(禍從口出)
남아일언 중천금(男兒一言 重千金)
내어불미 거어하미(來語不美 去語何美), 장부일언 천년불개(丈夫一言千年不改)
말이 많으면 자주 곤란(困難)한 처지(處地)에 빠짐
多言數窮 不如守中 (다언삭궁 불여수중)
말이 많으면 곤궁에 처하는 경우가 많으니 가슴에 품고만 있음만 못하다
- 老子 도덕경
참고어
구화지문(口禍之門), 사마난추(駟馬難追), 언비천리(言飛千里), 화종구출(禍從口出)
남아일언 중천금(男兒一言 重千金)
내어불미 거어하미(來語不美 去語何美), 장부일언 천년불개(丈夫一言千年不改)
螳螂窺蟬 (당랑규선, tánglángkuīchán)
螳螂窺蟬(당랑규선)
螳螂窥蝉(táng láng kuī chán)
螳 사마귀 당 | 螂 사마귀 랑 | 窺 엿볼 규 | 蟬 매미 선 |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려고 엿본다는 말로, 눈 앞의 이익에 어두워 뒤에 따를 걱정거리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
전한(前漢) 때 유향(劉向)이 지은 《설원(說苑)》정간(正諫)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랑포선(螳螂捕蟬)이라고도 한다. 《장자(莊子)》 산목편(山木篇)에 나오는 당랑박선(螳螂搏蟬)이나,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오는 당랑재후(螳螂在後)라는 말이 모두 같은 뜻이다.
춘추시대 말기 오왕(吳王) 부차(夫差)는 월나라 공략에 성공한 후 자만에 빠져 간신 백비의 중상을 믿고 상국(相國:재상) 오자서(伍子胥)를 죽였으며, 월(越)나라에서 보내 온 미인 서시(西施)와 유락 생활에 탐닉하였다. 월의 구천이 와신상담 재기를 노린다는 것을 아는 중신들이 간하여도 막무가내였다.
어느 날 아침 태자 우(友)는 젖은 옷을 입고 활을 든 채 부차를 만났다. “너는 아침부터 무엇을 그리 허둥대느냐?” 부차가 묻자, 우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침에 정원에 갔더니 높은 나뭇가지에 매미가 앉아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 뒤를 보니 사마귀 한 마리가 매미를 잡아먹으려고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홀연 참새[黃雀] 한 마리가 날아와서 그 사마귀를 먹으려고 노리는데, 사마귀는 통 기미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참새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습니다. 그런데 그만 활 쏘는 데 정신이 팔려 웅덩이 속으로 빠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옷을 이렇게 적신 것입니다. 천하에는 이런 예가 부지기수입니다. 이를테면 제나라는 까닭없이 노나라를 쳐서 그 땅을 손에 넣고 기뻐했지만, 우리 오나라에게 그 배후를 공격받고 대패했듯이 말입니다.”
부차는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너는 오자서가 못다한 충고를 할 셈이냐? 이제 그런 소리는 신물이 난다.”
충심에서 우러난 간언을 듣지 않은 부차는 결국 월나라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고, 그 자신은 자결하였다.
장자는 이 일화를 ‘모든 사물은 본래 서로 해를 끼치는 것이며, 이(利)와 해(害)는 서로가 서로를 불러들이는 것’이라는 비유로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 소탐대실(小貪大失)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출전]
說苑(설원) : 正諫 |
黃雀 ①꾀꼬리. 黃鶯兒(황앵아). ②참새. 依人雀(의인작). 賓雀(빈작).
관련 한자어
유의어
螳螂窺蟬(당랑규선) | 螳螂搏蟬(당랑박선, táng láng bó chán) | 螳螂捕蟬(당랑포선, táng láng bǔ chán) | 螳螂在後(당랑재후) |
說苑(설원) : 正諫 |
螳螂窥蝉(táng láng kuī chán)
螳 사마귀 당 | 螂 사마귀 랑 | 窺 엿볼 규 | 蟬 매미 선 |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려고 엿본다는 말로, 눈 앞의 이익에 어두워 뒤에 따를 걱정거리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
전한(前漢) 때 유향(劉向)이 지은 《설원(說苑)》정간(正諫)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랑포선(螳螂捕蟬)이라고도 한다. 《장자(莊子)》 산목편(山木篇)에 나오는 당랑박선(螳螂搏蟬)이나,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오는 당랑재후(螳螂在後)라는 말이 모두 같은 뜻이다.
춘추시대 말기 오왕(吳王) 부차(夫差)는 월나라 공략에 성공한 후 자만에 빠져 간신 백비의 중상을 믿고 상국(相國:재상) 오자서(伍子胥)를 죽였으며, 월(越)나라에서 보내 온 미인 서시(西施)와 유락 생활에 탐닉하였다. 월의 구천이 와신상담 재기를 노린다는 것을 아는 중신들이 간하여도 막무가내였다.
어느 날 아침 태자 우(友)는 젖은 옷을 입고 활을 든 채 부차를 만났다. “너는 아침부터 무엇을 그리 허둥대느냐?” 부차가 묻자, 우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침에 정원에 갔더니 높은 나뭇가지에 매미가 앉아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 뒤를 보니 사마귀 한 마리가 매미를 잡아먹으려고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홀연 참새[黃雀] 한 마리가 날아와서 그 사마귀를 먹으려고 노리는데, 사마귀는 통 기미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참새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습니다. 그런데 그만 활 쏘는 데 정신이 팔려 웅덩이 속으로 빠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옷을 이렇게 적신 것입니다. 천하에는 이런 예가 부지기수입니다. 이를테면 제나라는 까닭없이 노나라를 쳐서 그 땅을 손에 넣고 기뻐했지만, 우리 오나라에게 그 배후를 공격받고 대패했듯이 말입니다.”
부차는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너는 오자서가 못다한 충고를 할 셈이냐? 이제 그런 소리는 신물이 난다.”
충심에서 우러난 간언을 듣지 않은 부차는 결국 월나라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고, 그 자신은 자결하였다.
장자는 이 일화를 ‘모든 사물은 본래 서로 해를 끼치는 것이며, 이(利)와 해(害)는 서로가 서로를 불러들이는 것’이라는 비유로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 소탐대실(小貪大失)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출전]
說苑(설원) : 正諫 |
黃雀 ①꾀꼬리. 黃鶯兒(황앵아). ②참새. 依人雀(의인작). 賓雀(빈작).
관련 한자어
유의어
螳螂窺蟬(당랑규선) | 螳螂搏蟬(당랑박선, táng láng bó chán) | 螳螂捕蟬(당랑포선, táng láng bǔ chán) | 螳螂在後(당랑재후) |
說苑(설원) : 正諫 |
多讀多作多商量 (다독다작다상량, duōdúduōzuòduōshāngliang)
多讀多作多商量(다독다작다상량)
多读多作多商量(duōdú duōzuò duōshāngliang)
多 많을 다 | 讀 읽을 독,구절 두 | 多 많을 다 | 作 지을 작 | 多 많을 다 | 商 상의할 상 | 量 헤아릴 량 |
三多(sānduō). 많이 보고[看], 많이 지으며[做], 많이 생각한다[商量]는 뜻으로, 중국(中國)의 구양수(歐陽脩)가 글을 잘 짓는 비결(秘訣)로서 이른 말.
永叔謂為文有三多:看多、做多、商量多也。(後山詩話, 宋 陳師道著)
「三多」與「三上」:歐陽脩說:「為文有三多:看多、做多、商量多也。」意思是:多看書,學習別人的寫作經驗;多練習寫作,在寫作中提升能力;多與別人商量、研究,虛心求教,努力把文章寫得完美。又說:「余平生所作文章,多在『三上』:乃馬上、枕上、廁上也。」意思是:他常常利用外出的路程上、就寢前以及上廁所的時候,把握時間構思文章。
후대에 오며, 많이 읽고[讀], 많이 지으며[作], 많이 생각한다는 말로 바뀌었다. 또한, 혹자는 多聞多讀多想量(다문다독다상량) 또는 多聞多讀多商量(다문다독다상량)이라고도 한다.
참조 한자어
多聞多讀多想量(다문다독다상량) | 多聞多讀多商量(다문다독다상량) |
Tag
後山詩話 | 歐陽修(구양수) | 歐陽永叔(구양영숙) |
多读多作多商量(duōdú duōzuò duōshāngliang)
多 많을 다 | 讀 읽을 독,구절 두 | 多 많을 다 | 作 지을 작 | 多 많을 다 | 商 상의할 상 | 量 헤아릴 량 |
三多(sānduō). 많이 보고[看], 많이 지으며[做], 많이 생각한다[商量]는 뜻으로, 중국(中國)의 구양수(歐陽脩)가 글을 잘 짓는 비결(秘訣)로서 이른 말.
永叔謂為文有三多:看多、做多、商量多也。(後山詩話, 宋 陳師道著)
「三多」與「三上」:歐陽脩說:「為文有三多:看多、做多、商量多也。」意思是:多看書,學習別人的寫作經驗;多練習寫作,在寫作中提升能力;多與別人商量、研究,虛心求教,努力把文章寫得完美。又說:「余平生所作文章,多在『三上』:乃馬上、枕上、廁上也。」意思是:他常常利用外出的路程上、就寢前以及上廁所的時候,把握時間構思文章。
후대에 오며, 많이 읽고[讀], 많이 지으며[作], 많이 생각한다는 말로 바뀌었다. 또한, 혹자는 多聞多讀多想量(다문다독다상량) 또는 多聞多讀多商量(다문다독다상량)이라고도 한다.
참조 한자어
多聞多讀多想量(다문다독다상량) | 多聞多讀多商量(다문다독다상량) |
Tag
後山詩話 | 歐陽修(구양수) | 歐陽永叔(구양영숙) |
多多益善 (다다익선)
多多益善(다다익선)
多多益善[duōduōyìshàn]
多 많을 다 | 多 많을 다 | 益 더할 익, 넘칠 일 | 善 착할 선 |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The more, the better.
사기(史記) 회음후(淮陰侯)열전에는 한신(韓信)에 관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진(秦)나라 말기, 전국 각지에서 진나라에 반항하는 세력들이 봉기하였다. 한신은 먼저 항우(項羽)의 휘하로 들어갔으나 중용(重用)되지 못하자, 다시 유방(劉邦)의 휘하로 옮겼다.
한고조 유방은 宿敵(숙적)인 항우를 무찌르고 천하를 통일하자 지금까지 자기를 위해 몸바쳐 일해 온 사람들이 모두 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韓信(한신)을 누구보다도 강력한 라이벌로 여겼고 자기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방은 論功行賞(논공행상)에서 楚王(초왕)으로 봉했던 한신을 전에 항우의 부하였던 종리매를 숨겨주었다는 구실로 왕위를 박탈하고 淮陰侯(회음후)로 좌천시켜 도읍에 있게 했다.
어느 날 고조는 한신과 여러 장군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고조가 말했다.
『그런데 짐은 대체 어느 정도의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감으로 보이나』
『글쎄요, 폐하께서는 한 십만명쯤은 거느리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 그럼 그대는 얼마나 거느릴 수 있겠는가』
『저는 다다익선으로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臣多多而益善耳]』
한신의 대답에 고조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그대가 어찌하여 짐의 밑에 있단 말인가』
한신이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그 까닭은 이렇습니다. 폐하께서는 군사의 장수는 되실 수 없어도 장수의 장수는 되실 수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신이 폐하를 받들게 된 것입니다』
출전
사기(史記)의 회음후전(淮陰侯傳)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多多益辦(다다익판) |
多多益善[duōduōyìshàn]
多 많을 다 | 多 많을 다 | 益 더할 익, 넘칠 일 | 善 착할 선 |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The more, the better.
사기(史記) 회음후(淮陰侯)열전에는 한신(韓信)에 관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진(秦)나라 말기, 전국 각지에서 진나라에 반항하는 세력들이 봉기하였다. 한신은 먼저 항우(項羽)의 휘하로 들어갔으나 중용(重用)되지 못하자, 다시 유방(劉邦)의 휘하로 옮겼다.
한고조 유방은 宿敵(숙적)인 항우를 무찌르고 천하를 통일하자 지금까지 자기를 위해 몸바쳐 일해 온 사람들이 모두 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韓信(한신)을 누구보다도 강력한 라이벌로 여겼고 자기에게 반기를 들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방은 論功行賞(논공행상)에서 楚王(초왕)으로 봉했던 한신을 전에 항우의 부하였던 종리매를 숨겨주었다는 구실로 왕위를 박탈하고 淮陰侯(회음후)로 좌천시켜 도읍에 있게 했다.
어느 날 고조는 한신과 여러 장군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고조가 말했다.
『그런데 짐은 대체 어느 정도의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감으로 보이나』
『글쎄요, 폐하께서는 한 십만명쯤은 거느리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 그럼 그대는 얼마나 거느릴 수 있겠는가』
『저는 다다익선으로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臣多多而益善耳]』
한신의 대답에 고조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그대가 어찌하여 짐의 밑에 있단 말인가』
한신이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그 까닭은 이렇습니다. 폐하께서는 군사의 장수는 되실 수 없어도 장수의 장수는 되실 수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신이 폐하를 받들게 된 것입니다』
출전
사기(史記)의 회음후전(淮陰侯傳)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多多益辦(다다익판) |
多難興邦 (다난흥방)
多難興邦(다난흥방)
多 많을 다 | 難 어려울 난 | 興 일어날 흥 | 邦 나라 방 |
어려운 일을 많이 겪고나서 나라를 부흥하게 한다는 뜻.
많은 어려운 일을 겪고서야 나라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여러모로 노력해야 큰 일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중국 진(晉)나라 무제(武帝:재위 265∼290)의 아들인 혜제(惠帝:재위 290∼306) 때 진나라는 '팔왕(八王)의 난' 등으로 혼란하였다. 이 시기를 틈타 진나라의 지배를 받은 북방 민족들이 독립하여 나라를 세우고 쳐들어와 회제(懷帝)와 민제(愍帝)가 살해되고, 진나라는 중원에서 양쯔강[揚子江] 이남으로 나라를 옮겨 동진(東晉)이라고 불렀다.
조적(祖逖)과 유곤(劉琨)을 비롯한 장군들은 군사를 이끌고 북방지역 정벌을 하였으며, 좌승상 사마 예(司馬睿)에게 《권진표(勸進表)》를 올리고 제위를 계승하여 나라 일을 맡도록 청하였다. 다음의 《권진표》 가운데 나오는 구절에서 유래한 성어(成語)이다.
"많은 재난이나 어려움은 우리에게 나라를 부흥시키고 공고히하도록 격려해주며, 깊은 근심은 황제로 하여금 정세를 정확하게 보고 새로운 결심을 하게 해준다[或多難以固邦國 或殷憂以啓聖明]."
그뒤 사마 예는 동진의 제1대 황제인 원제(元帝:재위 317∼322)로 즉위하였으며 북벌을 결정하지 못하고 조적과 유곤을 의심하여 유곤을 살해하자, 조적은 그 울분으로 죽었다. 동진은 317년 건업(建業:南京)을 국도로 진왕조를 재건한 뒤 공제(恭帝) 때인 419년에 유유(劉裕)에게 멸망하였다.
이와 같이 수많은 고난이 사람들에게 나라를 부흥시킬 수 있도록 격려한다는 것을 말한다.
多 많을 다 | 難 어려울 난 | 興 일어날 흥 | 邦 나라 방 |
어려운 일을 많이 겪고나서 나라를 부흥하게 한다는 뜻.
많은 어려운 일을 겪고서야 나라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여러모로 노력해야 큰 일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중국 진(晉)나라 무제(武帝:재위 265∼290)의 아들인 혜제(惠帝:재위 290∼306) 때 진나라는 '팔왕(八王)의 난' 등으로 혼란하였다. 이 시기를 틈타 진나라의 지배를 받은 북방 민족들이 독립하여 나라를 세우고 쳐들어와 회제(懷帝)와 민제(愍帝)가 살해되고, 진나라는 중원에서 양쯔강[揚子江] 이남으로 나라를 옮겨 동진(東晉)이라고 불렀다.
조적(祖逖)과 유곤(劉琨)을 비롯한 장군들은 군사를 이끌고 북방지역 정벌을 하였으며, 좌승상 사마 예(司馬睿)에게 《권진표(勸進表)》를 올리고 제위를 계승하여 나라 일을 맡도록 청하였다. 다음의 《권진표》 가운데 나오는 구절에서 유래한 성어(成語)이다.
"많은 재난이나 어려움은 우리에게 나라를 부흥시키고 공고히하도록 격려해주며, 깊은 근심은 황제로 하여금 정세를 정확하게 보고 새로운 결심을 하게 해준다[或多難以固邦國 或殷憂以啓聖明]."
그뒤 사마 예는 동진의 제1대 황제인 원제(元帝:재위 317∼322)로 즉위하였으며 북벌을 결정하지 못하고 조적과 유곤을 의심하여 유곤을 살해하자, 조적은 그 울분으로 죽었다. 동진은 317년 건업(建業:南京)을 국도로 진왕조를 재건한 뒤 공제(恭帝) 때인 419년에 유유(劉裕)에게 멸망하였다.
이와 같이 수많은 고난이 사람들에게 나라를 부흥시킬 수 있도록 격려한다는 것을 말한다.
多岐亡羊 (다기망양)
多岐亡羊(다기망양)
달아난 양을 찾다가 여러 갈래 길에 이르러 길을 잃었다는 뜻으로, ①학문(學問)의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어 진리(眞理)를 찾기 어려움 ②방침(方針)이 많아 할 바를 모르게 됨. 곧 본 뜻이나 목적을 망각하고 지엽적이고 단편적인 것에 집착하게 되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말.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사상가(思想家)로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주장했던 양자(楊子)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어느날, 양자의 이웃집 양 한 마리가 도망쳤다. 이웃집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양자의 집 하인들까지 총동원되어 양을 찾으러 나섰다. 이런 소동을 보고 양자가 물었다.
"양 한 마리를 찾는데 쫓아가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가?"
"워낙 갈림길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게 하인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모두들 기진맥진해 돌아와서 말했다.
"갈림길을 지나면 또 갈림길이어서 양이 어느 길로 도망쳤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단념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 양은 찾았느냐?" "갈림길이 하도 많아서 그냥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양을 못 찾았단 말이냐?"
"예, 갈림길에 또 갈림길이 있는지라 양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통 알 길이 없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양자는 우울한 얼굴로 그날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제자들이 그 까닭을 물어도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제자인 맹손양(孟孫陽)은 스승의 고민을 알지 못하고 선배 제자인 심도자(心都子)에게 양자가 침묵하는 까닭을 물었다.
심도자의 대답은 이랬다.
"큰 길은 갈림길이 많아서 양을 놓쳐 버리고(多岐亡羊) 학문하는 사람은 방법이 많기 때문에 본성을 잃고 마네. 학문이란 원래 근본은 하나였는데 그 끝은 이같이 달라지게 되네. 그러므로 하나인 근본으로 되돌아가게 되면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다는 게 선생님의 생각이시네. 그런데 그렇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하시는 것이라네."
근본을 도외시(度外視)하고 지엽적인 것에 몰두하게 되면 아무런 소득이 없거나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유래: 列子(열자)
관련 한자어
유의어
望洋之歎(망양지탄) |
列子(열자) |
달아난 양을 찾다가 여러 갈래 길에 이르러 길을 잃었다는 뜻으로, ①학문(學問)의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어 진리(眞理)를 찾기 어려움 ②방침(方針)이 많아 할 바를 모르게 됨. 곧 본 뜻이나 목적을 망각하고 지엽적이고 단편적인 것에 집착하게 되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말.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사상가(思想家)로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주장했던 양자(楊子)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어느날, 양자의 이웃집 양 한 마리가 도망쳤다. 이웃집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양자의 집 하인들까지 총동원되어 양을 찾으러 나섰다. 이런 소동을 보고 양자가 물었다.
"양 한 마리를 찾는데 쫓아가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가?"
"워낙 갈림길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게 하인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모두들 기진맥진해 돌아와서 말했다.
"갈림길을 지나면 또 갈림길이어서 양이 어느 길로 도망쳤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단념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 양은 찾았느냐?" "갈림길이 하도 많아서 그냥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양을 못 찾았단 말이냐?"
"예, 갈림길에 또 갈림길이 있는지라 양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통 알 길이 없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양자는 우울한 얼굴로 그날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제자들이 그 까닭을 물어도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제자인 맹손양(孟孫陽)은 스승의 고민을 알지 못하고 선배 제자인 심도자(心都子)에게 양자가 침묵하는 까닭을 물었다.
심도자의 대답은 이랬다.
"큰 길은 갈림길이 많아서 양을 놓쳐 버리고(多岐亡羊) 학문하는 사람은 방법이 많기 때문에 본성을 잃고 마네. 학문이란 원래 근본은 하나였는데 그 끝은 이같이 달라지게 되네. 그러므로 하나인 근본으로 되돌아가게 되면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다는 게 선생님의 생각이시네. 그런데 그렇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하시는 것이라네."
근본을 도외시(度外視)하고 지엽적인 것에 몰두하게 되면 아무런 소득이 없거나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유래: 列子(열자)
관련 한자어
유의어
望洋之歎(망양지탄) |
列子(열자) |
Subscribe to:
Posts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