推敲(퇴고)
推 밀 추, 밀 퇴 | 敲 두드릴 고, 두드릴 교, 두드릴 학 |
미느냐(推) 두드리느냐(敲)라는 뜻으로, 시문을 지을 때 자구(字句)를 여러 번 생각하여 고침. 당(唐)나라 가도(賈道)가 시를 짓는 데 퇴(推)자를 쓸까 고(敲)자를 쓸까 하고 고심한 고사에서 유래
당(唐)나라 시인 가도(賈島)가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문득 좋은 시상(詩想)이 떠올라서 즉시 정리해 보았다. 제목은 '이응(李凝)의 유거(幽居)에 제(題)함'으로 정하고, 다음과 같이 초(草)를 잡았다. 閑居少隣竝(한거소린병) 이웃이 드물어 한적한 집草徑入荒園(초경입황원) 풀이 자란 좁은 길은 거친 뜰로 이어져 있다. 鳥宿池邊樹(조숙지변수) 새는 못 속의 나무에 깃들고 僧敲月下門(승고월하문) 스님이 달 아래 문을 밀친다. 그런데, 결구(結句)를 밀다(推)로 해야 할지, 두드리다(敲)로 해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궁리하며 가다가 자신을 향해 오는 고관의 행차와 부딪혔다. 그 고관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의 한 사람이며 부현지사(副縣知事)인 한유(韓愈)였다. 가도는 먼저 길을 피하지 못한 까닭을 말하고 사괴했다. 역시 대문장자인 한유는 뜻밖에 만난 시인의 말을 듣고 꾸짖는 것은 잊어버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말했다. " 내 생각엔 두드리다가 좋을 듯하네."이후 이들은 둘도 없는 시우(詩友)가 되었다고 한다. 이 고사로 인해 퇴(堆)와 고(鼓) 두 자 모두 문장을 다듬는다는 뜻이 전혀 없는데도 그러한 뜻을 지니게 되었다.
관련 한자어
유의어
潤文(윤문) | 敲推(고퇴) | 改稿(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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半食宰相 (반식재상)
半食宰相(반식재상)
반 반 | 밥 식 | 재상 재 | 서로 상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무능한 재상(대신)을 비꼬아 이르는 말.
당나라 6대 황제인 현종을 도와 당대(唐代) 최성기(最盛期)인 '개원(開元)의 치(治)'를 연 대신은 요숭이었다.
개원2년(713), 현종이 망국의 근원인 사치를 추방하기 위해 문문백관의 소사스럼 비단 관복을 정전(正殿)앞에 쌓아놓고 불사른 일을 비롯, 조세와 부역을 감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형벌 제도를 바로잡아 억울한 죄인을 없애고, 농병(農兵)제도를 모병(募兵)제도로 고친 것도 모두 요승의 진언에 다른 개혁이었다.
이처럼 요승은 백성들의 안녕을 꾀하는 일이 곧 나라 번영의 지름길이라 믿고 늘 이 원칙을 관철하는데 힘썼다. 특히 정무재결(政務裁決)에 있어서의 신속적확(迅速的確)함에는 그 어느 재상도 요승을 따르지 못했는데 당시 황문감(黃門監 : 환관 감독부서의 으뜸 벼슬)인 노회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노회신은 청렴 결백하고 근면한 사람이었으나 휴가중인 요숭의 직무를 10여일간 대행할 때 요숭처럼 신속히 재결하지 못함으로 해서 정무를 크게 정체시키고 말았다. 이때 자신이 요숭에게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체험한 노회신은 이후 매사를 요숭에게 상의한 다음에야 처리하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회신을 가리켜 '자리만 차지하고 회식이나 하는 무능한 대신[半食宰相]'이라고 냉평한다.
당나라 | 唐 | 무능 | 재상
반 반 | 밥 식 | 재상 재 | 서로 상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무능한 재상(대신)을 비꼬아 이르는 말.
당나라 6대 황제인 현종을 도와 당대(唐代) 최성기(最盛期)인 '개원(開元)의 치(治)'를 연 대신은 요숭이었다.
개원2년(713), 현종이 망국의 근원인 사치를 추방하기 위해 문문백관의 소사스럼 비단 관복을 정전(正殿)앞에 쌓아놓고 불사른 일을 비롯, 조세와 부역을 감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형벌 제도를 바로잡아 억울한 죄인을 없애고, 농병(農兵)제도를 모병(募兵)제도로 고친 것도 모두 요승의 진언에 다른 개혁이었다.
이처럼 요승은 백성들의 안녕을 꾀하는 일이 곧 나라 번영의 지름길이라 믿고 늘 이 원칙을 관철하는데 힘썼다. 특히 정무재결(政務裁決)에 있어서의 신속적확(迅速的確)함에는 그 어느 재상도 요승을 따르지 못했는데 당시 황문감(黃門監 : 환관 감독부서의 으뜸 벼슬)인 노회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노회신은 청렴 결백하고 근면한 사람이었으나 휴가중인 요숭의 직무를 10여일간 대행할 때 요숭처럼 신속히 재결하지 못함으로 해서 정무를 크게 정체시키고 말았다. 이때 자신이 요숭에게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체험한 노회신은 이후 매사를 요숭에게 상의한 다음에야 처리하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회신을 가리켜 '자리만 차지하고 회식이나 하는 무능한 대신[半食宰相]'이라고 냉평한다.
당나라 | 唐 | 무능 | 재상
望雲之情 (망운지정)
望雲之情(망운지정)
자녀가 부모를 그리는 정. 당(唐)나라 적인걸(狄仁傑)이 타향에서 산에 올라가 고향쪽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고 부모를 생각했다는 고사에서 유래.
자녀가 부모를 그리는 정. 당(唐)나라 적인걸(狄仁傑)이 타향에서 산에 올라가 고향쪽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고 부모를 생각했다는 고사에서 유래.
馬耳東風 (마이동풍)
馬耳東風 (마이동풍)
말의 귀를 동풍이 스친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흘려 버리는 태도를 비유하는 말. 한국 속담 ‘소 귀에 경 읽기”와 상통하는 말.
馬耳東風이란 말은 唐(당)나라의 대시인 李白(이백)의 「추운 밤에 홀로 잔을 드는 왕십이의 심경에 답하노라(答王十二寒夜獨酌有懷․답왕십이한야독작유회)」라는 장편시 가운데 나오는 말이다. 이 시는 왕십이란 사람이 이백에게「차가운 밤에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느낀 바 있어서(寒夜獨酌有懷․한야독작유회)」란 시를 보내온 데 대해 회답한 시라고 한다.
왕십이란 사람은 자신의 불우한 신세와 쓸쓸한 심경을 시로써 이백에게 호소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백은 썰렁한 밤에 외로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왕십이의 모습을 그리면서 答詩(답시)를 지은 것이다.
이백은 이 시에서 「인생은 허무한 것, 오래 산다 해도 백년을 살지 못한다. 이 허무함을 술로써 씻어버리지 않겠는가」고 권하고 「당신과 같은 고결하고 훌륭한 인물은 지금 세상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고 위로하고 있다.
「지금은 鬪鷄(투계․닭싸움인데 당나라때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서 성행한 놀이)의 기술이 뛰어난 자가 天子(천자)의 귀염을 받아 큰 길을 으스대고 다니고, 오랑캐의 침입을 막는데 하찮은 공을 세운 자들이 대단한 충신인 양 날뛰는 세상이다. 당신이나 내가 어찌 그들의 흉내를 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차라리 햇볕이 들지 않는 북쪽 창에 기대어 시나 읊으세. 그러나 우리의 작품이 아무리 걸작이라 해도 지금 세상에서는 찬 물 한그릇값에도 못미치네」.
시는 이렇게 이어지다가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이런 말을 듣고도 고개를 내저으니 동풍이 말의 귓가를 스치는 것과 다를 바 없네(有如東風射馬耳․유여동풍사마이)」라고 한탄하기도 한다.
말의 귀를 동풍이 스친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흘려 버리는 태도를 비유하는 말. 한국 속담 ‘소 귀에 경 읽기”와 상통하는 말.
馬耳東風이란 말은 唐(당)나라의 대시인 李白(이백)의 「추운 밤에 홀로 잔을 드는 왕십이의 심경에 답하노라(答王十二寒夜獨酌有懷․답왕십이한야독작유회)」라는 장편시 가운데 나오는 말이다. 이 시는 왕십이란 사람이 이백에게「차가운 밤에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느낀 바 있어서(寒夜獨酌有懷․한야독작유회)」란 시를 보내온 데 대해 회답한 시라고 한다.
왕십이란 사람은 자신의 불우한 신세와 쓸쓸한 심경을 시로써 이백에게 호소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백은 썰렁한 밤에 외로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왕십이의 모습을 그리면서 答詩(답시)를 지은 것이다.
이백은 이 시에서 「인생은 허무한 것, 오래 산다 해도 백년을 살지 못한다. 이 허무함을 술로써 씻어버리지 않겠는가」고 권하고 「당신과 같은 고결하고 훌륭한 인물은 지금 세상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고 위로하고 있다.
「지금은 鬪鷄(투계․닭싸움인데 당나라때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서 성행한 놀이)의 기술이 뛰어난 자가 天子(천자)의 귀염을 받아 큰 길을 으스대고 다니고, 오랑캐의 침입을 막는데 하찮은 공을 세운 자들이 대단한 충신인 양 날뛰는 세상이다. 당신이나 내가 어찌 그들의 흉내를 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차라리 햇볕이 들지 않는 북쪽 창에 기대어 시나 읊으세. 그러나 우리의 작품이 아무리 걸작이라 해도 지금 세상에서는 찬 물 한그릇값에도 못미치네」.
시는 이렇게 이어지다가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이런 말을 듣고도 고개를 내저으니 동풍이 말의 귓가를 스치는 것과 다를 바 없네(有如東風射馬耳․유여동풍사마이)」라고 한탄하기도 한다.
羅雀掘鼠 (라작굴서)
羅雀掘鼠(라작굴서)
그물 라 | 참새 작 | 팔 굴 | 쥐 서 |
그물로 참새를 잡고 땅을 파서 쥐를 잡는다는 뜻으로, 최악의 상태에 이르러 어찌할 방법이 없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 羅雀掘鼠(나작굴서)
그물 라 | 참새 작 | 팔 굴 | 쥐 서 |
그물로 참새를 잡고 땅을 파서 쥐를 잡는다는 뜻으로, 최악의 상태에 이르러 어찌할 방법이 없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 羅雀掘鼠(나작굴서)
羅雀掘鼠 (나작굴서)
羅雀掘鼠(나작굴서)
그물 라 | 참새 작 | 팔 굴 | 쥐 서 |
그물로 참새를 잡고 땅을 파서 쥐를 잡는다는 뜻으로, 최악의 상태에 이르러 어찌할 방법이 없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新唐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唐)나라 현종(玄宗)의 통치 말기, 장순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그는 충직한 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재주도 많고 무인답게 담력 또한 컸으며 대의가 분명한 그런 인물이었다. 정치가 부패하자 변방의 안록산(安祿山)은 군대를 일으켜 당나라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서시 756년, 진원(眞源) 현령 장순(張巡)은 군대를 동원하여 안록산 토벌에 나섰다. 이듬해, 안록산의 아들 안경서(安慶緖)는 윤자기(尹子琦)를 보내 십만 대군으로 장순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당시 장순에게는 겨우 삼 천명의 병력 뿐으로 수적으로 열세였다. 윤자기의 군대는 어떤 때에는 하루에 20여 차례나 공격을 해 왔지만, 장순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싸웠다. 윤자기의 군대는 수적으로는 우세하였지만, 성(城)을 함락하지 못하며, 몇 달 동안 대치하게 되었다. 장순은 몇 달 동안 구원군을 기다렸지만 그들이 오지 않자, 성 안의 식량과 풀이 다 바닥날 상황이었다. 형세가 급박하게 변하자 장순은 부하 남제운(南霽雲)을 보내 포위망을 뚫고 임회(臨淮) 태수 하란진명(賀蘭進明)에게 위급한 소식을 알렸다. 그러나 임회태수는 장순의 명성을 시기하여, 그들의 위급함을 보고도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윤자기는 강공(强攻)으로는 성을 함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방법을 바꾸어 장순에게 투항을 권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장순은 이에 굴하지 않고, 쉴새 없이 공격해 오는 적들을 모두 물리쳤다. 얼마 후, 성안의 식량이 점점 줄어들자, 군인들은 매일 한 수저의 쌀만을 먹었다. 이에 장순은 먹을 것을 확보하기 위하여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심지어는 그물을 쳐서 참새를 잡고 땅을 파서 쥐를 잡으며, 갑옷과 활에 붙어있는 소가죽을 삶아서 굶주림을 달래라고 하였다(至羅雀掘鼠, 煮鎧弩以食).
장순은 지휘관의 입장에서 자식같은 병사들의 몸부림을 안타깝게 여겨 자기 아내를 죽여 국을 끓여서 병사들에게 먹이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상황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악화되어 갔고, 더 이상 성을 고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성으로 진격해 들어오는 반란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장순이 항복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항복을 요구하는 반란군들을 향해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고는 청청병력 같은 소리로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반란군은 그 자리에서 그의 목을 베었다.
죽음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장순의 부하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의 죽음과 바꾼 충성심에 새삼 고개를 떨구게 되었다.
그물 라 | 참새 작 | 팔 굴 | 쥐 서 |
그물로 참새를 잡고 땅을 파서 쥐를 잡는다는 뜻으로, 최악의 상태에 이르러 어찌할 방법이 없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新唐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唐)나라 현종(玄宗)의 통치 말기, 장순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그는 충직한 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재주도 많고 무인답게 담력 또한 컸으며 대의가 분명한 그런 인물이었다. 정치가 부패하자 변방의 안록산(安祿山)은 군대를 일으켜 당나라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서시 756년, 진원(眞源) 현령 장순(張巡)은 군대를 동원하여 안록산 토벌에 나섰다. 이듬해, 안록산의 아들 안경서(安慶緖)는 윤자기(尹子琦)를 보내 십만 대군으로 장순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당시 장순에게는 겨우 삼 천명의 병력 뿐으로 수적으로 열세였다. 윤자기의 군대는 어떤 때에는 하루에 20여 차례나 공격을 해 왔지만, 장순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싸웠다. 윤자기의 군대는 수적으로는 우세하였지만, 성(城)을 함락하지 못하며, 몇 달 동안 대치하게 되었다. 장순은 몇 달 동안 구원군을 기다렸지만 그들이 오지 않자, 성 안의 식량과 풀이 다 바닥날 상황이었다. 형세가 급박하게 변하자 장순은 부하 남제운(南霽雲)을 보내 포위망을 뚫고 임회(臨淮) 태수 하란진명(賀蘭進明)에게 위급한 소식을 알렸다. 그러나 임회태수는 장순의 명성을 시기하여, 그들의 위급함을 보고도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윤자기는 강공(强攻)으로는 성을 함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방법을 바꾸어 장순에게 투항을 권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장순은 이에 굴하지 않고, 쉴새 없이 공격해 오는 적들을 모두 물리쳤다. 얼마 후, 성안의 식량이 점점 줄어들자, 군인들은 매일 한 수저의 쌀만을 먹었다. 이에 장순은 먹을 것을 확보하기 위하여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심지어는 그물을 쳐서 참새를 잡고 땅을 파서 쥐를 잡으며, 갑옷과 활에 붙어있는 소가죽을 삶아서 굶주림을 달래라고 하였다(至羅雀掘鼠, 煮鎧弩以食).
장순은 지휘관의 입장에서 자식같은 병사들의 몸부림을 안타깝게 여겨 자기 아내를 죽여 국을 끓여서 병사들에게 먹이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상황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악화되어 갔고, 더 이상 성을 고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성으로 진격해 들어오는 반란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장순이 항복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항복을 요구하는 반란군들을 향해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고는 청청병력 같은 소리로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반란군은 그 자리에서 그의 목을 베었다.
죽음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장순의 부하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의 죽음과 바꾼 충성심에 새삼 고개를 떨구게 되었다.
口蜜腹劍 (구밀복검)
口蜜腹劍(구밀복검)
口蜜腹剑 [kǒumìfùjiàn]
口 입 구 | 蜜 꿀 밀 | 腹 배 복 | 劍 칼 검 |
입에는 꿀을 바르고 있지만 뱃속에는 칼을 품고 있다. 곧 겉으로는 꿀같이 달콤하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해칠 생각을 하고 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honey-mouthed and dagger-hearted—a cruel heart under the cover of sugar-coated words; hypocritical and malignant
楊貴妃(양귀비)를 寵愛(총애)한 황제로 이름난 唐(당)나라 玄宗(현종)때 李林甫(이임보)라는 재상이 있었다. 그는 황제의 일가 친척인데다 宦官(환관)에게 뇌물을 바쳐 출세한 인물로 궁정을 활보하는 權臣(권신)이었다.
그는 또 아첨하는 재주가 있어서, 권세 있는 인물들과 자주 접촉하고, 황제의 주변 인물들에게도 많은 뇌물을 주어 황제의 언행을 항상 파악하여, 황제의 기분에 맞게 처세할 수 있었다.
언제나 현종의 측근에 있으면서 인사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조정의 누구도 이임보를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그는 19년 동안이나 안전하게 재상의 자리에 있으며, 위세를 떨쳤다. 그가 죽은 뒤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를 한때 亡國(망국)의 벼랑까지 몰고갔던 安祿山(안록산)도 두려워 할 정도였다.
그는 현종에게 盲從(맹종)하며 아첨하는 한편 올바른 말을 하는 충신들을 陰害(음해)하여 멀리 내쫓거나 죽음에 이르도록 했다.
어느날 현종이 이임보에게 물었다.
“嚴挺之(엄정지)는 지금 어디에 있지.그에게 중책을 맡기고 싶은데.”
엄정지는 강직한 신하로 중앙에서 요직을 맡고 있다가 이임보에게 밉보여 지방으로 쫓겨나 태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날 저녁 엄정지의 아우를 불러들인 이임보는 이렇게 말했다.
“황제께서 자네 형님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칭찬하시네.틀림없이 금명간 높은 벼슬을 주실거니까 일단 병치료차 장안에 돌아왔다고 상소문을 쓰도록 연락하게.”
긴급연락을 받은 엄정지는 현종에게 상소문을 올리자 이임보는 그걸 들고 현종에게 가서 말했다.
“전에 말씀하신 엄정지의 상소문이 올라왔습니다만 나이도 많은데다 중병에 걸린 모양이니 중임은 맡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황제는 이임보의 말에 따랐고 술수에 말려든 걸 알게 된 엄정지는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조정의 벼슬아치들은 이렇게 수군거렸다.
“이임보는 입에 꿀을 바르고 말하지만 뱃속에는 칼을 품고 있다[李林甫口有蜜, 腹有劍].”
출전
당서(唐書)
관련 한자
참조어
口有蜜腹有劒(구유밀복유검) | 面從腹背(면종복배) | 笑裏藏刀(소리장도) | 笑中刀(소중도) | 笑中有劍(소중유검) | 笑中有刀(소중유도) | 羊頭狗肉(양두구육) | 陽奉陰違(양봉음위) | 羊質虎皮(양질호피) | 表裏不同(표리부동) | 包藏禍心(포장화심) |
口蜜腹剑 [kǒumìfùjiàn]
口 입 구 | 蜜 꿀 밀 | 腹 배 복 | 劍 칼 검 |
입에는 꿀을 바르고 있지만 뱃속에는 칼을 품고 있다. 곧 겉으로는 꿀같이 달콤하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해칠 생각을 하고 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honey-mouthed and dagger-hearted—a cruel heart under the cover of sugar-coated words; hypocritical and malignant
楊貴妃(양귀비)를 寵愛(총애)한 황제로 이름난 唐(당)나라 玄宗(현종)때 李林甫(이임보)라는 재상이 있었다. 그는 황제의 일가 친척인데다 宦官(환관)에게 뇌물을 바쳐 출세한 인물로 궁정을 활보하는 權臣(권신)이었다.
그는 또 아첨하는 재주가 있어서, 권세 있는 인물들과 자주 접촉하고, 황제의 주변 인물들에게도 많은 뇌물을 주어 황제의 언행을 항상 파악하여, 황제의 기분에 맞게 처세할 수 있었다.
언제나 현종의 측근에 있으면서 인사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조정의 누구도 이임보를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그는 19년 동안이나 안전하게 재상의 자리에 있으며, 위세를 떨쳤다. 그가 죽은 뒤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를 한때 亡國(망국)의 벼랑까지 몰고갔던 安祿山(안록산)도 두려워 할 정도였다.
그는 현종에게 盲從(맹종)하며 아첨하는 한편 올바른 말을 하는 충신들을 陰害(음해)하여 멀리 내쫓거나 죽음에 이르도록 했다.
어느날 현종이 이임보에게 물었다.
“嚴挺之(엄정지)는 지금 어디에 있지.그에게 중책을 맡기고 싶은데.”
엄정지는 강직한 신하로 중앙에서 요직을 맡고 있다가 이임보에게 밉보여 지방으로 쫓겨나 태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날 저녁 엄정지의 아우를 불러들인 이임보는 이렇게 말했다.
“황제께서 자네 형님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칭찬하시네.틀림없이 금명간 높은 벼슬을 주실거니까 일단 병치료차 장안에 돌아왔다고 상소문을 쓰도록 연락하게.”
긴급연락을 받은 엄정지는 현종에게 상소문을 올리자 이임보는 그걸 들고 현종에게 가서 말했다.
“전에 말씀하신 엄정지의 상소문이 올라왔습니다만 나이도 많은데다 중병에 걸린 모양이니 중임은 맡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황제는 이임보의 말에 따랐고 술수에 말려든 걸 알게 된 엄정지는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조정의 벼슬아치들은 이렇게 수군거렸다.
“이임보는 입에 꿀을 바르고 말하지만 뱃속에는 칼을 품고 있다[李林甫口有蜜, 腹有劍].”
출전
당서(唐書)
관련 한자
참조어
口有蜜腹有劒(구유밀복유검) | 面從腹背(면종복배) | 笑裏藏刀(소리장도) | 笑中刀(소중도) | 笑中有劍(소중유검) | 笑中有刀(소중유도) | 羊頭狗肉(양두구육) | 陽奉陰違(양봉음위) | 羊質虎皮(양질호피) | 表裏不同(표리부동) | 包藏禍心(포장화심) |
家書萬金 (가서만금)
가서만금(家書萬金)
家 집 가, 여자 고 | 書 글 서 | 萬 일만 만 | 金 쇠 금, 성씨 김 |
타국(他國)이나 타향(他鄕)에 살 때는 고향(故鄕) 가족(家族)의 편지(便紙)가 더없이 반갑고, 그 소식(消息)의 값이 황금(黃金) 만 냥보다 더 소중(所重)하다는 말. 가서저만금(家書抵萬金)의 준말
여행 중에 가인(家人)으로부터 서신을 받으면 그 기쁨이 만금을 얻는 데 해당한다.
시성(詩聖)인 당(唐)나라 두보(杜甫 712∼770, 字:子美, 號:少陵)의 '춘망(春望)'이라는 시(詩)에 나오는 구절.
國破山河在 (국파산하재)
春城草木深 (춘성초목심)
感時和賤淚 (감시화천루)
恨別鳥驚心 (한별조경심)
烽火連三月 (봉화연삼월)
家書抵萬金 (가서저만금)
白頭搔更短 (백두소경단)
渾欲不勝簪 (혼욕불승잠)
나라는 망했어도 산하는 남아있고,
성에 봄이 오니 초목이 우거졌구나.
시절을 느껴 꽃에 눈물을 뿌리고,
이별을 한스러워하니 새 소리에도 놀란다.
봉화불은 삼 개월이나 계속 피고 있고,
집에서 온 편지는 만금에 해당하는구나.
대머리 긁어서 더욱 빠지고,
상투를 하고자 하나 비녀를 이기지 못하는구나.
유명한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는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붙잡혀서 이듬해(757년) 탈주했다. 수도 장안(長安)에 구속된 몸이 되었을 때, 전란으로 심하게 황폐해진 장안의 봄을 아파해서 만든 저 유명한 시 가운데 한 구절. 家書는 아내 혹은 가족으로부터의 편지.
출전
두보 춘망시(春望詩)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家書抵萬金(가서저만금) |
반의어·상대어
|
중요도·활용도
|
家 집 가, 여자 고 | 書 글 서 | 萬 일만 만 | 金 쇠 금, 성씨 김 |
타국(他國)이나 타향(他鄕)에 살 때는 고향(故鄕) 가족(家族)의 편지(便紙)가 더없이 반갑고, 그 소식(消息)의 값이 황금(黃金) 만 냥보다 더 소중(所重)하다는 말. 가서저만금(家書抵萬金)의 준말
여행 중에 가인(家人)으로부터 서신을 받으면 그 기쁨이 만금을 얻는 데 해당한다.
시성(詩聖)인 당(唐)나라 두보(杜甫 712∼770, 字:子美, 號:少陵)의 '춘망(春望)'이라는 시(詩)에 나오는 구절.
國破山河在 (국파산하재)
春城草木深 (춘성초목심)
感時和賤淚 (감시화천루)
恨別鳥驚心 (한별조경심)
烽火連三月 (봉화연삼월)
家書抵萬金 (가서저만금)
白頭搔更短 (백두소경단)
渾欲不勝簪 (혼욕불승잠)
나라는 망했어도 산하는 남아있고,
성에 봄이 오니 초목이 우거졌구나.
시절을 느껴 꽃에 눈물을 뿌리고,
이별을 한스러워하니 새 소리에도 놀란다.
봉화불은 삼 개월이나 계속 피고 있고,
집에서 온 편지는 만금에 해당하는구나.
대머리 긁어서 더욱 빠지고,
상투를 하고자 하나 비녀를 이기지 못하는구나.
유명한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는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붙잡혀서 이듬해(757년) 탈주했다. 수도 장안(長安)에 구속된 몸이 되었을 때, 전란으로 심하게 황폐해진 장안의 봄을 아파해서 만든 저 유명한 시 가운데 한 구절. 家書는 아내 혹은 가족으로부터의 편지.
출전
두보 춘망시(春望詩)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家書抵萬金(가서저만금) |
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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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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