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矛盾 (모순, máodùn)

矛盾(모순)

矛盾(máodùn)

矛 창 모 | 盾 방패 순,사람 이름 돈,벼슬 이름 윤 |


'창과 방패(防牌)'라는 뜻으로, 말이나 행동(行動)의 앞뒤가 서로 일치(一致)되지 아니함

1. [相抵之处]conflict 2. [哲学]contradiction 3. uncertain


논리학에서는, 두 개의 개념이나 명제(命題) 사이에 의미 내용이 서로 상반되는 관계를 말한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에 무기 상인이 있었다. 그는 시장으로 창과 방패를 팔러 나갔다. 상인은 가지고 온 방패를 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이 방패를 보십시오. 아주 견고하여 어떤 창이라도 막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창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여기 이 창을 보십시오. 이것의 예리함은 천하 일품, 어떤 방패라도 단번에 뚫어 버립니다." 그러자 구경꾼 중에 어떤 사람이 말했다. "그 예리하기 짝이 없는 창으로 그 견고하기 짝이 없는 방패를 찌르면 도대체 어찌 되는 거요?" 상인은 말문이 막혀 눈을 희번덕거리고 있다가 서둘러 달아나고 말았다.

楚人(초인)에 有(유) 盾與(순여) 矛者(모자)하여 譽之曰(예지왈)"吾盾之堅(오순지견)은 莫能陷也(막능함야)라"하고, 又譽其矛曰(우예기모왈)"吾矛之利(오모지리)는 於物(어물) 에 無不陷也(무불함야)니라"或曰(혹왈)"以子之矛(이자지모)로 陷子之盾(함자지순)이면 如何(여하)오."其人(기인)이 不能應也(불능응야)러라.

《한비자(韓非子)》 난일(難一) 난세편(難世篇)에 있는 고사(故事)로, 법지상주의자(法至上主義者)인 한비(韓非)가 유가(儒家)의 덕치주의를 비판한 우화이다.

유가에서 말하기를, ‘역산(歷山)의 농장에서 농지의 경계 때문에 분쟁이 있어 성인(聖人)인 순(舜)임금이 가서 몸소 일을 하였더니 1년에 분쟁이 사라지고, 황하지역에서 어장 문제로 분쟁이 있어 순임금이 가서 낚시질을 하였더니 이도 1년 만에 해결되었고, 동방의 이민족이 만드는 도기(陶器)가 조악(粗惡)하여 순임금이 가서 그릇을 만들었더니 이도 1년 만에 품질이 향상되었다. 이 모두가 순임금의 덕(德)에 의한 감화(感化)이다.’라고 하였다.

한비는 순임금이 유덕(有德)한 성인이라면 농부나 어부가 다투지 않을 것이요, 도기도 우량품으로 만들었다면 순임금이 덕을 베풀 여지가 있었겠는가. 순임금이 덕을 베풀어 분쟁이 해결되고 도기의 품질이 향상되었다는 것은 요(堯)임금에게 실정이 있었다는 것이 된다. 순임금을 성인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요임금의 치세를 부정하지 않을 수 없고, 요임금을 성인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순임금의 덕화(德化)를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으며, 마치 '창과 방패의 이치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여 순임금의 치세를 칭송하고 있는 유가의 설을 논란한 것이다.

전통적 논리학에서는 같은 주어에 대하여 서로 부정하는 판단을 내린 것을 연립시킨 명제의 성질이다. 현대 논리학에서는 하나의 명제와 이의 부정이 동시에 성립됨을 주장하는 명제이다.

[유래]
韓非子(한비자) : 難一(난일) |


관련 한자어

유의어

自己矛盾(자기모순) | 自家撞着(자가당착) | 二律背反(이율배반) |




矛(모,máo) 세모진 창. 끝이 꼬부라진 긴 창(槍). 2장(丈) 정도(程度)의 나무 자루 끝에 갈고리처럼 옆으로 굽어진 칼날이 달림. 옛날, 주(主)로 병거(兵車)에 세우고 다녔음. 구리. 쇠 따위로 만들었음. 추모(酋矛) ∥ 矛戈(모과) | 矛戟(모극) ∥ 矛盾(모순) | 矛盾撞着(모순당착) |

戈(과,gē) 창. ①중국(中國) 고대(古代)에서 쓰인, 갈고리 모양으로 된 무기(武器)의 하나. 자루 끝에 쌍날이 달렸음. 거의 청동으로 만들었으며, 쇠로 만든 것은 적음. 은(殷)나라 때부터 쓰기 시작(始作)하였음 ②우리나라에서 쓰인 끝이 두 갈래로 나누어진 긴 창(槍). 6자 정도(程度)의 나무 자루 끝에 두 개의 칼날, 즉 곧게 뻗은 7치 반(半)의 원(援)과 옆으로 뻗은 6치의 호(胡)가 달림. ∥ 戈殳(과수) | 戈矛(과모) |

槍(창,qiāng) ①옛날 무기(武器)의 한 가지. 긴 나무 자루 끝의 양쪽에 칼날이 있는 뾰족한 쇠가 달렸음. 직창(直槍)ㆍ구창(鉤滄)ㆍ관창(管槍)ㆍ십문자창(十支字滄) 등(等)이 있음 ②투창(投滄)에 쓰는 기구(器具). 남자용(男子用)은 길이 2.5m, 무게 800g이며 여자용(女子用)은 길이 2.2m, 무게 는 600g 이상(以上)임. 과모(戈矛)ㆍ과수(戈受) ∥ 槍刃(창인) |

戟(극,jǐ) ①중국(中國) 고대(古代)에 쓰인, 독특(獨特)한 갈고리 무기(武器)의 하나. 과(戈)와 비슷하나, 자루 끝에 날카로운 날이 선 창끝을 겸(兼)한 병기(兵器)임. 청동으로 만든 것보다 쇠로 만든 것이 많음 ②(옛날 우리나라에서 무기(武器)로 쓰인)끝이 세 갈래로 나누어진 긴 창(槍). 6자 정도(程度)의 나무 자루 끝에 3개의 칼날, 곧 7치 반의 원(援)ㆍ6치의 호(胡)ㆍ6치의 자(刺)가 달림 |

戣(규,kuǐ) 양지창(兩枝槍). 끝이 둘로 갈라진 창. |

矟(삭,shuò) 삼지창. |

杸(수,shū) 팔모진 창. |


韓非子(한비자) : 難一(난일) |

多岐亡羊 (다기망양)

多岐亡羊(다기망양)


달아난 양을 찾다가 여러 갈래 길에 이르러 길을 잃었다는 뜻으로, ①학문(學問)의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어 진리(眞理)를 찾기 어려움 ②방침(方針)이 많아 할 바를 모르게 됨. 곧 본 뜻이나 목적을 망각하고 지엽적이고 단편적인 것에 집착하게 되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말.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사상가(思想家)로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주장했던 양자(楊子)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어느날, 양자의 이웃집 양 한 마리가 도망쳤다. 이웃집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양자의 집 하인들까지 총동원되어 양을 찾으러 나섰다. 이런 소동을 보고 양자가 물었다.

"양 한 마리를 찾는데 쫓아가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가?"
"워낙 갈림길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게 하인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모두들 기진맥진해 돌아와서 말했다.

"갈림길을 지나면 또 갈림길이어서 양이 어느 길로 도망쳤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단념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 양은 찾았느냐?" "갈림길이 하도 많아서 그냥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양을 못 찾았단 말이냐?"

"예, 갈림길에 또 갈림길이 있는지라 양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통 알 길이 없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양자는 우울한 얼굴로 그날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제자들이 그 까닭을 물어도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제자인 맹손양(孟孫陽)은 스승의 고민을 알지 못하고 선배 제자인 심도자(心都子)에게 양자가 침묵하는 까닭을 물었다.

심도자의 대답은 이랬다.

"큰 길은 갈림길이 많아서 양을 놓쳐 버리고(多岐亡羊) 학문하는 사람은 방법이 많기 때문에 본성을 잃고 마네. 학문이란 원래 근본은 하나였는데 그 끝은 이같이 달라지게 되네. 그러므로 하나인 근본으로 되돌아가게 되면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다는 게 선생님의 생각이시네. 그런데 그렇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하시는 것이라네."

근본을 도외시(度外視)하고 지엽적인 것에 몰두하게 되면 아무런 소득이 없거나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유래: 列子(열자)


관련 한자어

유의어

望洋之歎(망양지탄) |


列子(열자) |

囊中之錐 (낭중지추, nángzhōngzhīzhuī)

囊中之錐(낭중지추)

囊中之锥(náng zhōng zhī zhuī)

囊 주머니 낭 | 中 가운데 중 | 之 갈 지 | 錐 송곳 추 |


능력과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스스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는 뜻.


전국시대(戰國時代) 말엽, 진(秦)나라의 공격을 받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은 동생이자 재상(宰相)인 평원군(平原君)을 초(楚)나라에 보내어 구원군을 청하기로 했다. 20명의 수행원이 필요한 평원군은 그의 3000여 식객(食客)중에서 19명은 쉽게 뽑았으나, 나머지 한 명을 뽑지못한 채 고심했다. 이 때에 모수(毛遂)라는 식객이 "나리,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하고 나섰다. 평원군은 어이없어 하며 "그대는 내집에 온 지 얼마나 되었소?"하고 물었다. 그가 "이제 3년이 됩니다."하고 대답하자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마치 주머니 속의 송곳 끝이 밖으로 나오듯이 남의 눈에 드러나는 법이오. 그런데 내 집에 온 지 3년이나 되었다는 그대는 단 한 번도 이름이 드러난 일이 없지 않소?"하고 반문하였다. 모수는 "나리께서 이제까지 저를 단 한번도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신다면 끝뿐이 아니라 자루(炳)까지 드러내 보이겠습니다."하고 재치있는 답변을 하였다. 만족한 평원군은 모수를 수행원으로 뽑았고, 초나라에 도착한 평원군은 모수가 활약한 덕분에 국빈(國賓)으로 환대받고, 구원군도 얻을수 있었다.

[출전]
史記(사기) : 平原君虞卿列傳(평원군우경열전) |


관련 한자어

유의어

鶴立鷄群 학립계군 | 出衆 출중 | 錐處囊中 추처낭중 | 錐囊 추낭 | 絶倫 절윤 | 白眉(백미) | 拔群 발군 | 群鷄一鶴 군계일학 | 鷄群一鶴 계군일학 | 鷄群孤鶴 계군고학 |

참조어

毛遂自薦(모수자천) | 三寸之舌(삼촌지설) |


史記(사기) : 平原君虞卿列傳(평원군우경열전) |

刻畵無鹽 (각화무염, kèhuàwúyán)

刻畵無鹽(각화무염)

刻畵无盐(kè huà wú yán)

刻 새길 각 | 畵 그림 화 | 無 : 없을 무 | 鹽 소금 염


차이가 많이 나는 물건을 비교하거나 맞지 않는 비유를 이르는 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차이가 나거나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을 비유한 성어(成語)이다.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의 무염(無鹽)이라는 지방에 '종리 춘(鐘離春)'이라는 못생긴 여자가 살았다. 종리 춘은 선왕에게 제나라의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그 재능을 인정받아 무염군에 봉해져 황후가 되었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월(越)나라의 미녀인 서시(西施)에 비유하여 못생긴 여자를 '무염'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무염은 고대 중국의 대표적 추녀(醜女)로 불리게 되었다.

《진서(晉書)》 〈주의전〉에 따르면, 진나라 원제 때 신하들이 주의를 악광(樂廣)과 같이 고결한 사람이라고 하자 주의는 스스로 악광과 비교될 수 없다면서 "어찌 무염에게 화장을 한다고 하여 갑자기 서시가 되겠는가[何乃刻畵無鹽 唐突西施也]"라고 말하면서 겸손함을 나타냈다고 전해진다. 얼굴이 못생긴 여자가 아무리 꾸며도 서시와 같은 미인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價値連城 (가치연성)

價値連城(가치연성)

价值连城(jiàzhíliánchéng)

價 값 가 | 値 값 치 | 連 이어질 연 | 城 성 성 |


여러 성을 합할 정도로 그 값어치가 귀중하다는 말.


소중한 보물이나 가치 있는 물건을 가리키는 성어(成語)로, 연성지보(連城之寶)·가중연성(價重連城)이라고도 한다.

이 말의 유래에 따르면,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초(楚)나라의 변화(卞和)가 다듬지 않은 구슬인 옥벽(玉璧)을 왕에게 올렸으나 돌을 속여서 바쳤다고 한쪽 다리가 잘리는 벌을 받았다. 변화는 무왕 때에도 옥벽을 바쳤는데 마찬가지로 다른 쪽 다리까지 잘리고 말았다. 그러나 문왕은, 변화가 바친 옥벽을 알아보고 초나라의 국보로 삼아 변화지벽(卞和之璧)·화씨지벽(和氏之璧)이라고 불렀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조(趙)나라의 혜문왕(惠文王)이 초나라의 옥벽을 소유하였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진(秦)나라 소왕(昭王)은 그 옥벽을 차지하려고 15개 성의 영토와 바꾸자고 조나라와 교섭하였으나, 인상여(藺相如)의 재치로 조나라는 진나라에게 옥벽을 빼앗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옥벽을 조벽(趙璧), 연성지벽(連城之璧)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출전]
史記(사기) : 廉頗藺相如列傳(염파인상여열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연성지보(連城之寶) | 價重連城(가중연성) |


史記(사기) : 廉頗藺相如列傳(염파인상여열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