推敲(퇴고)
推 밀 추, 밀 퇴 | 敲 두드릴 고, 두드릴 교, 두드릴 학 |
미느냐(推) 두드리느냐(敲)라는 뜻으로, 시문을 지을 때 자구(字句)를 여러 번 생각하여 고침. 당(唐)나라 가도(賈道)가 시를 짓는 데 퇴(推)자를 쓸까 고(敲)자를 쓸까 하고 고심한 고사에서 유래
당(唐)나라 시인 가도(賈島)가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문득 좋은 시상(詩想)이 떠올라서 즉시 정리해 보았다. 제목은 '이응(李凝)의 유거(幽居)에 제(題)함'으로 정하고, 다음과 같이 초(草)를 잡았다. 閑居少隣竝(한거소린병) 이웃이 드물어 한적한 집草徑入荒園(초경입황원) 풀이 자란 좁은 길은 거친 뜰로 이어져 있다. 鳥宿池邊樹(조숙지변수) 새는 못 속의 나무에 깃들고 僧敲月下門(승고월하문) 스님이 달 아래 문을 밀친다. 그런데, 결구(結句)를 밀다(推)로 해야 할지, 두드리다(敲)로 해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궁리하며 가다가 자신을 향해 오는 고관의 행차와 부딪혔다. 그 고관은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의 한 사람이며 부현지사(副縣知事)인 한유(韓愈)였다. 가도는 먼저 길을 피하지 못한 까닭을 말하고 사괴했다. 역시 대문장자인 한유는 뜻밖에 만난 시인의 말을 듣고 꾸짖는 것은 잊어버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말했다. " 내 생각엔 두드리다가 좋을 듯하네."이후 이들은 둘도 없는 시우(詩友)가 되었다고 한다. 이 고사로 인해 퇴(堆)와 고(鼓) 두 자 모두 문장을 다듬는다는 뜻이 전혀 없는데도 그러한 뜻을 지니게 되었다.
관련 한자어
유의어
潤文(윤문) | 敲推(고퇴) | 改稿(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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半食宰相 (반식재상)
半食宰相(반식재상)
반 반 | 밥 식 | 재상 재 | 서로 상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무능한 재상(대신)을 비꼬아 이르는 말.
당나라 6대 황제인 현종을 도와 당대(唐代) 최성기(最盛期)인 '개원(開元)의 치(治)'를 연 대신은 요숭이었다.
개원2년(713), 현종이 망국의 근원인 사치를 추방하기 위해 문문백관의 소사스럼 비단 관복을 정전(正殿)앞에 쌓아놓고 불사른 일을 비롯, 조세와 부역을 감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형벌 제도를 바로잡아 억울한 죄인을 없애고, 농병(農兵)제도를 모병(募兵)제도로 고친 것도 모두 요승의 진언에 다른 개혁이었다.
이처럼 요승은 백성들의 안녕을 꾀하는 일이 곧 나라 번영의 지름길이라 믿고 늘 이 원칙을 관철하는데 힘썼다. 특히 정무재결(政務裁決)에 있어서의 신속적확(迅速的確)함에는 그 어느 재상도 요승을 따르지 못했는데 당시 황문감(黃門監 : 환관 감독부서의 으뜸 벼슬)인 노회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노회신은 청렴 결백하고 근면한 사람이었으나 휴가중인 요숭의 직무를 10여일간 대행할 때 요숭처럼 신속히 재결하지 못함으로 해서 정무를 크게 정체시키고 말았다. 이때 자신이 요숭에게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체험한 노회신은 이후 매사를 요숭에게 상의한 다음에야 처리하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회신을 가리켜 '자리만 차지하고 회식이나 하는 무능한 대신[半食宰相]'이라고 냉평한다.
당나라 | 唐 | 무능 | 재상
반 반 | 밥 식 | 재상 재 | 서로 상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무능한 재상(대신)을 비꼬아 이르는 말.
당나라 6대 황제인 현종을 도와 당대(唐代) 최성기(最盛期)인 '개원(開元)의 치(治)'를 연 대신은 요숭이었다.
개원2년(713), 현종이 망국의 근원인 사치를 추방하기 위해 문문백관의 소사스럼 비단 관복을 정전(正殿)앞에 쌓아놓고 불사른 일을 비롯, 조세와 부역을 감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형벌 제도를 바로잡아 억울한 죄인을 없애고, 농병(農兵)제도를 모병(募兵)제도로 고친 것도 모두 요승의 진언에 다른 개혁이었다.
이처럼 요승은 백성들의 안녕을 꾀하는 일이 곧 나라 번영의 지름길이라 믿고 늘 이 원칙을 관철하는데 힘썼다. 특히 정무재결(政務裁決)에 있어서의 신속적확(迅速的確)함에는 그 어느 재상도 요승을 따르지 못했는데 당시 황문감(黃門監 : 환관 감독부서의 으뜸 벼슬)인 노회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노회신은 청렴 결백하고 근면한 사람이었으나 휴가중인 요숭의 직무를 10여일간 대행할 때 요숭처럼 신속히 재결하지 못함으로 해서 정무를 크게 정체시키고 말았다. 이때 자신이 요숭에게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체험한 노회신은 이후 매사를 요숭에게 상의한 다음에야 처리하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회신을 가리켜 '자리만 차지하고 회식이나 하는 무능한 대신[半食宰相]'이라고 냉평한다.
당나라 | 唐 | 무능 | 재상
瞞天過海 (만천과해, mántiānguòhǎi)
瞞天過海(만천과해)
瞒天过海(mán tiān guò hǎi)
三十六計(삼십육계) 勝戰計(승전계) 제1계. 하늘을 속여 바다를 건너다.
☞ Deceive the heavens to cross the ocean
“만천과해”계책은 원래 “진룡천자(眞龍天子)”라 일컬었던 당 태종을 속여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대해를 건너게 한 고사에서 나왔다. 명나라 때 쓰여진 백과사전인 <영락대전(永樂大典)>이 그 출전이다.
당나라 태종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동쪽의 고구려를 침공하려고 할 때의 일이었다. 바닷가에 이르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 했는데, 워낙 내륙에서 자란 당태종인지라 처음 보는 바다의 모습에 위축되어 배로서 바다를 건너는 것은 무리라 하여 군사를 돌리려 했었다. 그런데 마침 군사를 돌리려는 당태종 앞에 일대의 토호를 자처한 노인이 나타나 30만 군대를 위한 양식을 마련했다며 당태종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었다. 당태종으로서도 아무래도 지방의 권력과도 친해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그 초대에 응해 먹고 마시며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당태종이 일어나 보니 어느새 망망대해에 와 있는 것이었다. 바로 전날 노인의 집이라 초대된 연회장이 배 위였던 것이고, 노인은 막 당태종의 휘하로 들어와 있던 설인귀가 분장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당태종이 바다에 겁을 먹어 군대를 되돌릴 것 같자 노인으로 분장하여 당태종이 자신도 모른 새 배에 오르도록 하고는 당태종이 잠든 사이 배를 출발시켜버린 것이다. 말 그대로 천자, 즉 황제를 속여 바다를 건너는 것. 그래서 만천과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춘추시대 진문공의 일화가 있다. 진문공은 공자시절 중이라 불리웠었는데, 아버지인 진헌공의 정실로서 해제를 낳아 그를 왕으로 올리고자 하는 여희의 음모로 이오와 더불어 65살 다시 진나라로 돌아와 즉위하기까지 열국을 떠돌며 망명생활을 해야 했었다. 그 가운데 특히 제나라에서의 7년이 유독 사무쳤었는데, 아마도 그 시절이 오랜 망명기간 가운데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던 때문이었다.
당시 제나라의 군주는 춘추오패의 첫머리로 꼽는 제환공이었다. - 중이의 동생인 이오를 진의 목공과 함께 진의 왕으로 올린 것도 바로 이 환공이었다. - 제환공은 중이의 인품을 높이 사서 그에게 자신의 딸 제강과 수레 20승, 말 18필을 주어 후대했는데, 이미 형인 신생이 죽고, 다시 여희와 해제가 죽자 이오가 진혜공이 되어서는 적나라에 망명해 있던 그를 죽이려 하는 등, 참으로 바람잘 날 없던 삶이라, 더구나 당시 중이의 나이는 50을 넘어 있었다. 지금이야 50이면 한창 나이이지만 당시로서는 이미 죽을 날을 잡아 놓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중이로서도 이래도 편안히 남은 생을 보내자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 중이는 혼자몸이 아니었다. 그를 쫓아 그에게 일신을 의탁한 아홉 명의 신하가 있었다. 그들로서는 중이가 한시라도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 일을 도모하여 뜻을 이루어야 할 터인데 저렇게 당장의 편안함에 길들여져 큰 뜻을 잊은 채 허송세월만 하고 있으니 이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더구나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중이의 동생인 이오 - 즉 진혜공의 학정과 무능으로 말미암아 크게 어지러운 상황이었던데다, 제환공이 죽고 제나라의 내정 또한 혼란하여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으니 더욱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이는 그런 신하들의 마음을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을 찾아가도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쫓겨날 뿐, 결국 몇 번을 그렇게 중이를 만나지도 뫃가고 쫓겨나게 되자 신하들은 아예 사냥을 빌미로 중이를 밖으로 불러내서 그를 납치하려는 계획까지 세우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뜻하지 않게 제환공의 딸이기도 한 중이의 부인 제강이 끼어들었다.
시녀들을 통해 호언 등의 계획을 들은 제강은 은밀히 호언을 찾아가 진의 내정이 어렵고 혼란스러워 모든 대부와 백성들이 중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처럼 안락함에 빠져 움직이려 하지 않으니 그것은 장부의 도리가 아니라며 자신이 나서서 돕겠노라 말했다. 자신이 공자 중이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만들 터이니, 그때 몰래 중이를 업어 마차에 실어 목적한 곳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제환공의 딸다운 배포라 할 터인데, 이전부터도 제강은 몇 번이고 중이로 하여금 진나라의 공자로서 자신을 자각하여 진으로 돌아가 큰 뜻을 펼칠 것을 권하고 했었다. 그럴 경우 제강 자신이 버려질 수 있음을 알면서도 한 여자로서보다는 진나라 공자 중이의 처로서, 제환공의 딸이자 제나라의 공주로서 처신을 선택한 것이었다. 참으로 독심장부라고나 할까?
아무튼 호언 등과 그렇게 약속하고 돌아온 제강은 중이를 만나자 먼저 그 신하들이 중이를 모시고 다른 나라로 가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음을 알고 있다며 중이더러 자신을 버릴 것이냐고 다그쳤다. 당연히 금시초문인 중이는 펄쩍 뛰었다. 그는 그때까지도 사랑스런 제강과 제나라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겨우 마음이 놓이는 표정을 지어 보인 제강은 마치 다짐이라도 하려는 듯 중이에게 함께 술을 마시며 밤을 지새자고 제안했다. 그야말로 중이가 떠날 것을 걱정하다가 겨우 마음을 놓이게 된 처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중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호언 등이 몰고 있는 마차 안이었다. 제나라의 국경도 예전에 넘어 있었고 다시 돌아가려 해도 이미 제나라를 떠나온 신하들은 다시 제나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고, 아마 돌아간다고 해도 예전과 같은 생활은 누리지 못할 것이었다. 잠시 술에 취해 잠든 사이 일은 이렇게 완전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제강의 손으로 하늘을 가려 바다를 건너는 계책에 당한 것이니, 중이도 마침내 제나라에서의 생활에 대한 미련을 모두 접고 신하들이 이끄는 대로 자신의 운명이 가리키는 대로 따르게 되었다.
그렇게 중이는 제나라를 떠나 조나라로 갔다가 다시 송나라로, 송나라에서 또 초나라로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 마침내 진혜공에 이은 진회공의 신의없음과 포악함에 질려버린 진목공의 후원을 받아 그로부터 군사를 빌려 진나라로 돌아가 동생의 아들이기도 한 회공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바로 춘추오패에서 빠지지 않는 세 자리 가운데 하나인 진문공이다. 주왕실의 반란을 진압하고 천토의 회맹으로써 춘추시대의 두번째 패자가 되니, 불과 십 여 년의 짧은 치세지만 이때 진나라는 명실상부한 중원의 패자로서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가히 대단한 능력이라 하겠는데, 거기에는 여자로서의 자신을 희생한 제강의 현숙하면서도 치밀한 노력이 있었다. 진문공 또한 패자였으니 태종과 같이 이것도 만천과해라 하겠다.
그로부터 파생된 뜻은, 위장수단을 사용하여 공개적으로 가짜의 상을 만들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경계심을 풀게 하고, 없는 듯 하면서 있고, 가짜인 듯 하면서 진짜인 듯 만들어 문제되는 것들을 피하고 난관을 극복함으로써 상대방이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승리해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뜻한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 평상시 습관처럼 보이면 의심을 품지 않는 법이다. 은밀한 계략과 공개적인 형식은 서로 상반되지 않고, 반대로 음모는 밖으로 드러난 공개적인 행위 속에 감추어져 있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역]에서 태음이 바로 태양인 이치와 같다.
36계의 제1계인 만천과해는 승전계(勝戰計)에 속한다. 아군의 형세가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을 때 말을 타고 적을 압도하는 작전인 것이다.
흔히 '兵法'이라 하면, 소수의 아군으로 다수의 적군을 이기는 '신비한' 술책 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병법의 기본은 어디까지나 '다수의 아군으로 소수의 적군을 압박하여' 이기는 것이다. 손자병법에서도, 謨攻(모공)편에 이르길, "...그러므로 전쟁의 원칙은 병력이 적군의 10배일 때에는 적을 포위하고, 5배일 때에는 적을 공격하며, 2배일 때에는 계략을 써서 적을 분산시키며, 병력이 적과 비슷할 때에는 전력을 다하여 싸워야 하며, 병력이 적군보다 적을 때에는 적과 부딪치지 말고 싸움터에서 벗어나야 하며,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전투를 피하여야 한다..." 라고 하고 있다.
삼십육계의 구조도 위에 얘기한 손자병법 모공편의 문구에 따라 이루어져 있다. 적보다 우세할 때의 '승전계', 적과 세력이 비슷할 때의 '적전계', 적을 공격하기 위한 '공전계', 공방이 혼란할 때의 '혼전계', 다른 아군과 합세하여 싸울 때의 '병전계', 그리고 아군이 불리할 때의 '패전계' 와 같다.
삼십육계 원문에는 '만천과해'에 대한 짤막한 해설이 붙어 있다.
"아군의 수비가 안전하다고 생각되면 자칫 경계심이 흩어지기 쉽다. 또한 사람은 흔히 보아온 것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지 않게 된다. 그러한 약점에 계략을 찔러넣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헛점을 찌르는 계략은 대수롭지 않게 눈에 뜨이는 곳에 깃들게 하는 것이다. 꼭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備周則意怠,常見則不疑.陰在陽之內,不在陽之對.太陽,太陰.]"
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적을 방심하게 하고, 그것에 적이 익숙해졌을 때, 그 틈을 찌르는 계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만천과해와 관련하여 많이 드는 예는 삼국지의 태사자 예이다.
북해 태수 공융(孔融)이 황건적에게 포위되었을 때였다. 공융에게 평소 은혜를 입은 태사자의 모친은 공융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태사자에게 도우러 가라고 한다. 이에 태사자는 밤을 틈타 황건적의 포위망을 지나 공융에게로 간다. 공융은 유비에게 원군을 부탁하고자 하고, 이 임무를 태사자에게 부탁한다. 태사자(太史慈)는 포위망을 돌파하여 원병을 청하러 가야하나, 적의 포위망이 워낙 튼튼하여 쉽게 돌파하지 못한다.
그는 활과 과녁을 두 기사에게 들리고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성안에 있는 군사나 성밖에 있는 적병들이 이를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 그러나 태사자는 태연히 말을 끌고 성 가까이에 있는 언덕에 과녁을 세우고 활쏘기 연습을 시작했다. 이윽고 연습이 끝나자 그는 다시 성안으로 돌아왔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이렇게 활쏘기 연습을 거듭했다. 그러자 성밖에 있는 적병들 중에는 그것을 구경하는 자도 있고, 드러누워 낮잠을 자는 자도 있었다. 그는 변함없이 이렇게 활쏘기를 계속하여, 사흘째가 되자 황건적들은 이제 그에게 아무런 관심조차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때를 틈타 태사자는 갑자기 말 위에 올라 채찍을 휘두르며 비호처럼 적의 포위망을 뚫었다. 적들이 속았구나 하고 손을 쓰려 했을 때 그는 이미 멀리 가버린 후였다. 태사자는 말을 채찍질하여 황건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 유비에게 구원을 청하게 된다. [三國志(正史) 吳志 태사자전]
분명히 뜻풀이만으로 보자면 태사자의 예는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勝戰計' 즉, 아군이 '우세할 때' 쓰는 계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적을 방심하게 하고 그 틈을 찌른다'는 점에서는 타당하지만, 그보다 이전의 '승전계'라는 전제를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또다른 예로는 삼국시대 오나라 손책의 예를 들 수 있다.
삼국 시대 오나라의 손책(孫策)이 수일을 연하여 회계성을 쳤으나 성은 좀처럼 깨어지지 않았다. 성벽은 높고 해자는 또한 넓고 깊었다. 손책이 무리를 모아 놓고 성 칠 일을 의논하니, 군중에 함께 따라와 있던 그의 숙부 손정(孫靜)이 계책을 말했다.
"성이 원체 견고하고 왕랑이 또한 죽기로써 지키는 터이라, 이대로 쳐서는 깨뜨리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이제 회계땅의 전량(錢糧)이 태반이나 사독에 있고, 그곳이 여기서 불과 수십 리니, 먼저 그곳을 점거하는 것이 어떨까? 이것이 이른바 '공기무비(攻其無備)요 출기불의(出其不意)'라, 그 방비 없음을 치고, 예상치 못한 때에 나아간다는 것이 아니겠느냐."
손책은 크게 기뻐하였다.
"숙부님의 묘계로 족히 적을 깨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즉시 각문에 영을 내려 불을 밝히며 기호(旗號)를 많이 세워 의병(擬兵)을 삼게 하고, 밤을 이용하여 에움을 푼 다음 사독으로 가기로 했다.
그때 한 장수가 말했다.
"주공께서 대군을 거두시어 떠나는 것을 알게 되면, 적이 필연코 성을 나와 뒤를 쫓을 것이니 기병(奇兵)을 쓰시는 것이 마땅할까 합니다."
"내 이미 준비를 하여 놓았네. 회계성은 오늘밤 안으로 우리 장중에 들어오게 될 걸세."
손책의 군마가 물러갔다는 첩보를 받은 회계성의 장수 왕랑은 무리들과 함께 성루로 올라갔다. 성밖을 두루 살펴보니, 성 아래에 연기와 불이 함께 일어나며 무수한 정기(旌旗)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왕랑이 마음에 의심하기를 마지않을 때, 부장 주흔이 말했다.
"손책이 겁을 집어먹고 군사를 거두어 달아나는가 봅니다. 그래서 정기를 휘날려 우리를 의심케 하는 것이니, 지금 곧 군사를 내시어 뒤를 치도록 하십시오."
이때 한 장수가 말했다.
"손책이 이번에 간 것이 혹시 사독을 치기 위함이나 아닐까요. 일군을 따로 뽑아 뒤를 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랑은 드디어 뜻을 정하였다.
"사독은 곧 우리의 둔량처(屯糧處)이니 아무래도 방비를 엄히 해야만 하겠소."
왕랑의 군사는 남으로 사독을 향해 급히 뒤를 쫓아 20여 리를 갔다. 때는 초경이 가까운데, 갑자기 밀림속에서 북소리가 크게 울리며 횃불이 일시에 일어났다. 왕랑의 군사들이 깜짝 놀라 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려 할 때, 한 장수가 창을 빗겨 잡고 말을 내달아 나오니 그는 바로 손책이었다. 이 싸움에서 왕랑은 크게 패하여 마침내 성을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는데, 이는 바로 상대를 속여 그 약점을 누르고 때를 보아 기습하여 전승을 거둔 예이다.
또다른 예로는 전국시대 초기, 魏文侯(위문후)가 중산국을 정벌하기 위해 元帥(원수)로 삼은 '악양'의 사례가 있다.
위나라는 晉(진)나라가 나뉜 삼국(위, 조, 한) 중의 하나이다. 이때 晉의 동쪽에 中山國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는 진나라에 계속 조공을 바치고 있었는데 진이 삼국으로 나뉜 후로는 어느 나라를 섬겨야 할지 몰라서 아무 곳에도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중산국의 위치는 서쪽의 조나라와 가깝고 남쪽의 위나라와는 꽤 먼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나라가 중산국을 차지하면 위나라는 북쪽으로부터 상당한 압력을 받을 것이 뻔했다.
중산국을 치기로 마음먹은 위문후는 누구를 원수로 삼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 때, 책황이 악양을 천거한다. 하지만 다른 신하들은 악양의 아들인 악서가 중산국에서 벼슬을 삼고 있다는 이유로 악양을 원수로 삼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위문후가 악양을 불러 물어보니, 악양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어찌 公事를 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한다. 이에 위문후는 악양을 원수로 삼아 중산국을 치게 한다.
악양의 병법은 탁월하여 중산국의 병사들을 계속 이겨나가, 마침내 중산국의 수도인 중산성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중산국의 임금인 희굴은 악양의 아들인 악서를 내세워서 '항복하기 위해서는 임금과 신하가 상의할 시간이 필요하니 한달간의 말미를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악양이 승낙하자 희굴은 악양이 아들인 악서의 처지를 걱정하여 공격을 미루는 것으로 생각했다. 한달이 지나도 뾰족한 계책이 서지 않자 희굴은 또 악서를 보내 다시 한달의 여유를 얻어낸다. 이렇게 악양은 악서에게 세 달의 여유를 주었다.
그러자 중산국은 물론 위나라의 병사들까지도 '악양은 아들을 걱정하여 중산국을 치지 않을 것이다'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또한 조정에서는 일조에 원수가 된 악양을 시기하는 대신들이 위문후에게 악양을 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문후는 악양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때때로 사자를 보내 악양을 위로하고, 악양이 돌아오면 하사하기 위하여 도성 안에 좋은 집까지 마련해 두었다.
한 편, 악양은 약속한 3개월이 지나도 중산국이 항복을 하지 않자 병사들에게 총공격을 준비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병사들은 또다시 한달의 여유를 줄 것이 뻔한데 뭐하러 준비를 하느냐며 불만을 터뜨린다. 그러자 악양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중산국을 치러 온 것은 그 임금이 무도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중산국을 위나라에 영원히 편입시켜야 한다. 우리가 처음에 힘으로 중산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나, 그렇게 하면 백성들은 상처를 입고 우리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산국은 결코 위나라 땅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기다려 온 것은 백성들을 구하고 그들을 위나라의 백성으로 삼기 위함인 것이다."
사태가 급해진 중산국에서는 악서를 인질로 삼으려 하나 악양은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너는 참으로 불초한 자식이다. 벼슬을 살면서도 그 나라를 위해 계책을 세우지 못했고, 적과 싸워 이기지도 못했으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또 나라가 망하게 되었으면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화평을 청하도록 권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해야 하거늘, 그런 것도 못하고 부끄럽지 않느냐! 너 같은 놈을 살려두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죽여야겠다!"
악양은 이렇게 말하며 스스로 활을 들어 악서를 쏘려 했다. 그러자 악서는 황급히 숨어 들어갔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희굴은 악서를 죽여 그 시체로 국을 끓여 악양에게 보낸다. 악양이 충격을 받은 틈을 타서 공격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악양은 오히려 악서의 머리를 보고 꾸짖으며 국을 다 먹었다. 그러고는 중산국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 임금이 국을 보내주어 잘 먹었다. 중산성을 함락하는 즉시 내 너희 임금에게 직접 감사하리라. 너는 임금에게 돌아가 우리 군중에도 국을 끓이는 가마솥이 있음을 알려라!"
이후 악양은 중산국을 완전히 점령하고, 중산국 임금은 자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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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六計(삼십육계) 勝戰計(승전계) 제1계. 하늘을 속여 바다를 건너다.
☞ Deceive the heavens to cross the ocean
“만천과해”계책은 원래 “진룡천자(眞龍天子)”라 일컬었던 당 태종을 속여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대해를 건너게 한 고사에서 나왔다. 명나라 때 쓰여진 백과사전인 <영락대전(永樂大典)>이 그 출전이다.
당나라 태종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동쪽의 고구려를 침공하려고 할 때의 일이었다. 바닷가에 이르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 했는데, 워낙 내륙에서 자란 당태종인지라 처음 보는 바다의 모습에 위축되어 배로서 바다를 건너는 것은 무리라 하여 군사를 돌리려 했었다. 그런데 마침 군사를 돌리려는 당태종 앞에 일대의 토호를 자처한 노인이 나타나 30만 군대를 위한 양식을 마련했다며 당태종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었다. 당태종으로서도 아무래도 지방의 권력과도 친해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그 초대에 응해 먹고 마시며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당태종이 일어나 보니 어느새 망망대해에 와 있는 것이었다. 바로 전날 노인의 집이라 초대된 연회장이 배 위였던 것이고, 노인은 막 당태종의 휘하로 들어와 있던 설인귀가 분장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당태종이 바다에 겁을 먹어 군대를 되돌릴 것 같자 노인으로 분장하여 당태종이 자신도 모른 새 배에 오르도록 하고는 당태종이 잠든 사이 배를 출발시켜버린 것이다. 말 그대로 천자, 즉 황제를 속여 바다를 건너는 것. 그래서 만천과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춘추시대 진문공의 일화가 있다. 진문공은 공자시절 중이라 불리웠었는데, 아버지인 진헌공의 정실로서 해제를 낳아 그를 왕으로 올리고자 하는 여희의 음모로 이오와 더불어 65살 다시 진나라로 돌아와 즉위하기까지 열국을 떠돌며 망명생활을 해야 했었다. 그 가운데 특히 제나라에서의 7년이 유독 사무쳤었는데, 아마도 그 시절이 오랜 망명기간 가운데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던 때문이었다.
당시 제나라의 군주는 춘추오패의 첫머리로 꼽는 제환공이었다. - 중이의 동생인 이오를 진의 목공과 함께 진의 왕으로 올린 것도 바로 이 환공이었다. - 제환공은 중이의 인품을 높이 사서 그에게 자신의 딸 제강과 수레 20승, 말 18필을 주어 후대했는데, 이미 형인 신생이 죽고, 다시 여희와 해제가 죽자 이오가 진혜공이 되어서는 적나라에 망명해 있던 그를 죽이려 하는 등, 참으로 바람잘 날 없던 삶이라, 더구나 당시 중이의 나이는 50을 넘어 있었다. 지금이야 50이면 한창 나이이지만 당시로서는 이미 죽을 날을 잡아 놓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중이로서도 이래도 편안히 남은 생을 보내자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 중이는 혼자몸이 아니었다. 그를 쫓아 그에게 일신을 의탁한 아홉 명의 신하가 있었다. 그들로서는 중이가 한시라도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 일을 도모하여 뜻을 이루어야 할 터인데 저렇게 당장의 편안함에 길들여져 큰 뜻을 잊은 채 허송세월만 하고 있으니 이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더구나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중이의 동생인 이오 - 즉 진혜공의 학정과 무능으로 말미암아 크게 어지러운 상황이었던데다, 제환공이 죽고 제나라의 내정 또한 혼란하여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으니 더욱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이는 그런 신하들의 마음을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을 찾아가도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쫓겨날 뿐, 결국 몇 번을 그렇게 중이를 만나지도 뫃가고 쫓겨나게 되자 신하들은 아예 사냥을 빌미로 중이를 밖으로 불러내서 그를 납치하려는 계획까지 세우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뜻하지 않게 제환공의 딸이기도 한 중이의 부인 제강이 끼어들었다.
시녀들을 통해 호언 등의 계획을 들은 제강은 은밀히 호언을 찾아가 진의 내정이 어렵고 혼란스러워 모든 대부와 백성들이 중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처럼 안락함에 빠져 움직이려 하지 않으니 그것은 장부의 도리가 아니라며 자신이 나서서 돕겠노라 말했다. 자신이 공자 중이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만들 터이니, 그때 몰래 중이를 업어 마차에 실어 목적한 곳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제환공의 딸다운 배포라 할 터인데, 이전부터도 제강은 몇 번이고 중이로 하여금 진나라의 공자로서 자신을 자각하여 진으로 돌아가 큰 뜻을 펼칠 것을 권하고 했었다. 그럴 경우 제강 자신이 버려질 수 있음을 알면서도 한 여자로서보다는 진나라 공자 중이의 처로서, 제환공의 딸이자 제나라의 공주로서 처신을 선택한 것이었다. 참으로 독심장부라고나 할까?
아무튼 호언 등과 그렇게 약속하고 돌아온 제강은 중이를 만나자 먼저 그 신하들이 중이를 모시고 다른 나라로 가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음을 알고 있다며 중이더러 자신을 버릴 것이냐고 다그쳤다. 당연히 금시초문인 중이는 펄쩍 뛰었다. 그는 그때까지도 사랑스런 제강과 제나라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겨우 마음이 놓이는 표정을 지어 보인 제강은 마치 다짐이라도 하려는 듯 중이에게 함께 술을 마시며 밤을 지새자고 제안했다. 그야말로 중이가 떠날 것을 걱정하다가 겨우 마음을 놓이게 된 처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중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호언 등이 몰고 있는 마차 안이었다. 제나라의 국경도 예전에 넘어 있었고 다시 돌아가려 해도 이미 제나라를 떠나온 신하들은 다시 제나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고, 아마 돌아간다고 해도 예전과 같은 생활은 누리지 못할 것이었다. 잠시 술에 취해 잠든 사이 일은 이렇게 완전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제강의 손으로 하늘을 가려 바다를 건너는 계책에 당한 것이니, 중이도 마침내 제나라에서의 생활에 대한 미련을 모두 접고 신하들이 이끄는 대로 자신의 운명이 가리키는 대로 따르게 되었다.
그렇게 중이는 제나라를 떠나 조나라로 갔다가 다시 송나라로, 송나라에서 또 초나라로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 마침내 진혜공에 이은 진회공의 신의없음과 포악함에 질려버린 진목공의 후원을 받아 그로부터 군사를 빌려 진나라로 돌아가 동생의 아들이기도 한 회공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바로 춘추오패에서 빠지지 않는 세 자리 가운데 하나인 진문공이다. 주왕실의 반란을 진압하고 천토의 회맹으로써 춘추시대의 두번째 패자가 되니, 불과 십 여 년의 짧은 치세지만 이때 진나라는 명실상부한 중원의 패자로서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가히 대단한 능력이라 하겠는데, 거기에는 여자로서의 자신을 희생한 제강의 현숙하면서도 치밀한 노력이 있었다. 진문공 또한 패자였으니 태종과 같이 이것도 만천과해라 하겠다.
그로부터 파생된 뜻은, 위장수단을 사용하여 공개적으로 가짜의 상을 만들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경계심을 풀게 하고, 없는 듯 하면서 있고, 가짜인 듯 하면서 진짜인 듯 만들어 문제되는 것들을 피하고 난관을 극복함으로써 상대방이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승리해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뜻한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 평상시 습관처럼 보이면 의심을 품지 않는 법이다. 은밀한 계략과 공개적인 형식은 서로 상반되지 않고, 반대로 음모는 밖으로 드러난 공개적인 행위 속에 감추어져 있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역]에서 태음이 바로 태양인 이치와 같다.
36계의 제1계인 만천과해는 승전계(勝戰計)에 속한다. 아군의 형세가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을 때 말을 타고 적을 압도하는 작전인 것이다.
흔히 '兵法'이라 하면, 소수의 아군으로 다수의 적군을 이기는 '신비한' 술책 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병법의 기본은 어디까지나 '다수의 아군으로 소수의 적군을 압박하여' 이기는 것이다. 손자병법에서도, 謨攻(모공)편에 이르길, "...그러므로 전쟁의 원칙은 병력이 적군의 10배일 때에는 적을 포위하고, 5배일 때에는 적을 공격하며, 2배일 때에는 계략을 써서 적을 분산시키며, 병력이 적과 비슷할 때에는 전력을 다하여 싸워야 하며, 병력이 적군보다 적을 때에는 적과 부딪치지 말고 싸움터에서 벗어나야 하며,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전투를 피하여야 한다..." 라고 하고 있다.
삼십육계의 구조도 위에 얘기한 손자병법 모공편의 문구에 따라 이루어져 있다. 적보다 우세할 때의 '승전계', 적과 세력이 비슷할 때의 '적전계', 적을 공격하기 위한 '공전계', 공방이 혼란할 때의 '혼전계', 다른 아군과 합세하여 싸울 때의 '병전계', 그리고 아군이 불리할 때의 '패전계' 와 같다.
삼십육계 원문에는 '만천과해'에 대한 짤막한 해설이 붙어 있다.
"아군의 수비가 안전하다고 생각되면 자칫 경계심이 흩어지기 쉽다. 또한 사람은 흔히 보아온 것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지 않게 된다. 그러한 약점에 계략을 찔러넣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헛점을 찌르는 계략은 대수롭지 않게 눈에 뜨이는 곳에 깃들게 하는 것이다. 꼭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備周則意怠,常見則不疑.陰在陽之內,不在陽之對.太陽,太陰.]"
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적을 방심하게 하고, 그것에 적이 익숙해졌을 때, 그 틈을 찌르는 계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만천과해와 관련하여 많이 드는 예는 삼국지의 태사자 예이다.
북해 태수 공융(孔融)이 황건적에게 포위되었을 때였다. 공융에게 평소 은혜를 입은 태사자의 모친은 공융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태사자에게 도우러 가라고 한다. 이에 태사자는 밤을 틈타 황건적의 포위망을 지나 공융에게로 간다. 공융은 유비에게 원군을 부탁하고자 하고, 이 임무를 태사자에게 부탁한다. 태사자(太史慈)는 포위망을 돌파하여 원병을 청하러 가야하나, 적의 포위망이 워낙 튼튼하여 쉽게 돌파하지 못한다.
그는 활과 과녁을 두 기사에게 들리고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성안에 있는 군사나 성밖에 있는 적병들이 이를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 그러나 태사자는 태연히 말을 끌고 성 가까이에 있는 언덕에 과녁을 세우고 활쏘기 연습을 시작했다. 이윽고 연습이 끝나자 그는 다시 성안으로 돌아왔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이렇게 활쏘기 연습을 거듭했다. 그러자 성밖에 있는 적병들 중에는 그것을 구경하는 자도 있고, 드러누워 낮잠을 자는 자도 있었다. 그는 변함없이 이렇게 활쏘기를 계속하여, 사흘째가 되자 황건적들은 이제 그에게 아무런 관심조차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때를 틈타 태사자는 갑자기 말 위에 올라 채찍을 휘두르며 비호처럼 적의 포위망을 뚫었다. 적들이 속았구나 하고 손을 쓰려 했을 때 그는 이미 멀리 가버린 후였다. 태사자는 말을 채찍질하여 황건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 유비에게 구원을 청하게 된다. [三國志(正史) 吳志 태사자전]
분명히 뜻풀이만으로 보자면 태사자의 예는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勝戰計' 즉, 아군이 '우세할 때' 쓰는 계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적을 방심하게 하고 그 틈을 찌른다'는 점에서는 타당하지만, 그보다 이전의 '승전계'라는 전제를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또다른 예로는 삼국시대 오나라 손책의 예를 들 수 있다.
삼국 시대 오나라의 손책(孫策)이 수일을 연하여 회계성을 쳤으나 성은 좀처럼 깨어지지 않았다. 성벽은 높고 해자는 또한 넓고 깊었다. 손책이 무리를 모아 놓고 성 칠 일을 의논하니, 군중에 함께 따라와 있던 그의 숙부 손정(孫靜)이 계책을 말했다.
"성이 원체 견고하고 왕랑이 또한 죽기로써 지키는 터이라, 이대로 쳐서는 깨뜨리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이제 회계땅의 전량(錢糧)이 태반이나 사독에 있고, 그곳이 여기서 불과 수십 리니, 먼저 그곳을 점거하는 것이 어떨까? 이것이 이른바 '공기무비(攻其無備)요 출기불의(出其不意)'라, 그 방비 없음을 치고, 예상치 못한 때에 나아간다는 것이 아니겠느냐."
손책은 크게 기뻐하였다.
"숙부님의 묘계로 족히 적을 깨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즉시 각문에 영을 내려 불을 밝히며 기호(旗號)를 많이 세워 의병(擬兵)을 삼게 하고, 밤을 이용하여 에움을 푼 다음 사독으로 가기로 했다.
그때 한 장수가 말했다.
"주공께서 대군을 거두시어 떠나는 것을 알게 되면, 적이 필연코 성을 나와 뒤를 쫓을 것이니 기병(奇兵)을 쓰시는 것이 마땅할까 합니다."
"내 이미 준비를 하여 놓았네. 회계성은 오늘밤 안으로 우리 장중에 들어오게 될 걸세."
손책의 군마가 물러갔다는 첩보를 받은 회계성의 장수 왕랑은 무리들과 함께 성루로 올라갔다. 성밖을 두루 살펴보니, 성 아래에 연기와 불이 함께 일어나며 무수한 정기(旌旗)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왕랑이 마음에 의심하기를 마지않을 때, 부장 주흔이 말했다.
"손책이 겁을 집어먹고 군사를 거두어 달아나는가 봅니다. 그래서 정기를 휘날려 우리를 의심케 하는 것이니, 지금 곧 군사를 내시어 뒤를 치도록 하십시오."
이때 한 장수가 말했다.
"손책이 이번에 간 것이 혹시 사독을 치기 위함이나 아닐까요. 일군을 따로 뽑아 뒤를 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랑은 드디어 뜻을 정하였다.
"사독은 곧 우리의 둔량처(屯糧處)이니 아무래도 방비를 엄히 해야만 하겠소."
왕랑의 군사는 남으로 사독을 향해 급히 뒤를 쫓아 20여 리를 갔다. 때는 초경이 가까운데, 갑자기 밀림속에서 북소리가 크게 울리며 횃불이 일시에 일어났다. 왕랑의 군사들이 깜짝 놀라 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려 할 때, 한 장수가 창을 빗겨 잡고 말을 내달아 나오니 그는 바로 손책이었다. 이 싸움에서 왕랑은 크게 패하여 마침내 성을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는데, 이는 바로 상대를 속여 그 약점을 누르고 때를 보아 기습하여 전승을 거둔 예이다.
또다른 예로는 전국시대 초기, 魏文侯(위문후)가 중산국을 정벌하기 위해 元帥(원수)로 삼은 '악양'의 사례가 있다.
위나라는 晉(진)나라가 나뉜 삼국(위, 조, 한) 중의 하나이다. 이때 晉의 동쪽에 中山國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는 진나라에 계속 조공을 바치고 있었는데 진이 삼국으로 나뉜 후로는 어느 나라를 섬겨야 할지 몰라서 아무 곳에도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중산국의 위치는 서쪽의 조나라와 가깝고 남쪽의 위나라와는 꽤 먼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나라가 중산국을 차지하면 위나라는 북쪽으로부터 상당한 압력을 받을 것이 뻔했다.
중산국을 치기로 마음먹은 위문후는 누구를 원수로 삼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 때, 책황이 악양을 천거한다. 하지만 다른 신하들은 악양의 아들인 악서가 중산국에서 벼슬을 삼고 있다는 이유로 악양을 원수로 삼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위문후가 악양을 불러 물어보니, 악양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어찌 公事를 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한다. 이에 위문후는 악양을 원수로 삼아 중산국을 치게 한다.
악양의 병법은 탁월하여 중산국의 병사들을 계속 이겨나가, 마침내 중산국의 수도인 중산성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중산국의 임금인 희굴은 악양의 아들인 악서를 내세워서 '항복하기 위해서는 임금과 신하가 상의할 시간이 필요하니 한달간의 말미를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악양이 승낙하자 희굴은 악양이 아들인 악서의 처지를 걱정하여 공격을 미루는 것으로 생각했다. 한달이 지나도 뾰족한 계책이 서지 않자 희굴은 또 악서를 보내 다시 한달의 여유를 얻어낸다. 이렇게 악양은 악서에게 세 달의 여유를 주었다.
그러자 중산국은 물론 위나라의 병사들까지도 '악양은 아들을 걱정하여 중산국을 치지 않을 것이다'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또한 조정에서는 일조에 원수가 된 악양을 시기하는 대신들이 위문후에게 악양을 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문후는 악양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때때로 사자를 보내 악양을 위로하고, 악양이 돌아오면 하사하기 위하여 도성 안에 좋은 집까지 마련해 두었다.
한 편, 악양은 약속한 3개월이 지나도 중산국이 항복을 하지 않자 병사들에게 총공격을 준비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병사들은 또다시 한달의 여유를 줄 것이 뻔한데 뭐하러 준비를 하느냐며 불만을 터뜨린다. 그러자 악양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중산국을 치러 온 것은 그 임금이 무도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중산국을 위나라에 영원히 편입시켜야 한다. 우리가 처음에 힘으로 중산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나, 그렇게 하면 백성들은 상처를 입고 우리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산국은 결코 위나라 땅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기다려 온 것은 백성들을 구하고 그들을 위나라의 백성으로 삼기 위함인 것이다."
사태가 급해진 중산국에서는 악서를 인질로 삼으려 하나 악양은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너는 참으로 불초한 자식이다. 벼슬을 살면서도 그 나라를 위해 계책을 세우지 못했고, 적과 싸워 이기지도 못했으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또 나라가 망하게 되었으면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화평을 청하도록 권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해야 하거늘, 그런 것도 못하고 부끄럽지 않느냐! 너 같은 놈을 살려두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죽여야겠다!"
악양은 이렇게 말하며 스스로 활을 들어 악서를 쏘려 했다. 그러자 악서는 황급히 숨어 들어갔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희굴은 악서를 죽여 그 시체로 국을 끓여 악양에게 보낸다. 악양이 충격을 받은 틈을 타서 공격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악양은 오히려 악서의 머리를 보고 꾸짖으며 국을 다 먹었다. 그러고는 중산국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 임금이 국을 보내주어 잘 먹었다. 중산성을 함락하는 즉시 내 너희 임금에게 직접 감사하리라. 너는 임금에게 돌아가 우리 군중에도 국을 끓이는 가마솥이 있음을 알려라!"
이후 악양은 중산국을 완전히 점령하고, 중산국 임금은 자살한다.
永樂大典(영락대전) | 三十六計(삼십육계) | 三國志(Sānguózhì) |
望雲之情 (망운지정)
望雲之情(망운지정)
자녀가 부모를 그리는 정. 당(唐)나라 적인걸(狄仁傑)이 타향에서 산에 올라가 고향쪽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고 부모를 생각했다는 고사에서 유래.
자녀가 부모를 그리는 정. 당(唐)나라 적인걸(狄仁傑)이 타향에서 산에 올라가 고향쪽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고 부모를 생각했다는 고사에서 유래.
馬耳東風 (마이동풍)
馬耳東風 (마이동풍)
말의 귀를 동풍이 스친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흘려 버리는 태도를 비유하는 말. 한국 속담 ‘소 귀에 경 읽기”와 상통하는 말.
馬耳東風이란 말은 唐(당)나라의 대시인 李白(이백)의 「추운 밤에 홀로 잔을 드는 왕십이의 심경에 답하노라(答王十二寒夜獨酌有懷․답왕십이한야독작유회)」라는 장편시 가운데 나오는 말이다. 이 시는 왕십이란 사람이 이백에게「차가운 밤에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느낀 바 있어서(寒夜獨酌有懷․한야독작유회)」란 시를 보내온 데 대해 회답한 시라고 한다.
왕십이란 사람은 자신의 불우한 신세와 쓸쓸한 심경을 시로써 이백에게 호소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백은 썰렁한 밤에 외로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왕십이의 모습을 그리면서 答詩(답시)를 지은 것이다.
이백은 이 시에서 「인생은 허무한 것, 오래 산다 해도 백년을 살지 못한다. 이 허무함을 술로써 씻어버리지 않겠는가」고 권하고 「당신과 같은 고결하고 훌륭한 인물은 지금 세상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고 위로하고 있다.
「지금은 鬪鷄(투계․닭싸움인데 당나라때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서 성행한 놀이)의 기술이 뛰어난 자가 天子(천자)의 귀염을 받아 큰 길을 으스대고 다니고, 오랑캐의 침입을 막는데 하찮은 공을 세운 자들이 대단한 충신인 양 날뛰는 세상이다. 당신이나 내가 어찌 그들의 흉내를 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차라리 햇볕이 들지 않는 북쪽 창에 기대어 시나 읊으세. 그러나 우리의 작품이 아무리 걸작이라 해도 지금 세상에서는 찬 물 한그릇값에도 못미치네」.
시는 이렇게 이어지다가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이런 말을 듣고도 고개를 내저으니 동풍이 말의 귓가를 스치는 것과 다를 바 없네(有如東風射馬耳․유여동풍사마이)」라고 한탄하기도 한다.
말의 귀를 동풍이 스친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흘려 버리는 태도를 비유하는 말. 한국 속담 ‘소 귀에 경 읽기”와 상통하는 말.
馬耳東風이란 말은 唐(당)나라의 대시인 李白(이백)의 「추운 밤에 홀로 잔을 드는 왕십이의 심경에 답하노라(答王十二寒夜獨酌有懷․답왕십이한야독작유회)」라는 장편시 가운데 나오는 말이다. 이 시는 왕십이란 사람이 이백에게「차가운 밤에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느낀 바 있어서(寒夜獨酌有懷․한야독작유회)」란 시를 보내온 데 대해 회답한 시라고 한다.
왕십이란 사람은 자신의 불우한 신세와 쓸쓸한 심경을 시로써 이백에게 호소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백은 썰렁한 밤에 외로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왕십이의 모습을 그리면서 答詩(답시)를 지은 것이다.
이백은 이 시에서 「인생은 허무한 것, 오래 산다 해도 백년을 살지 못한다. 이 허무함을 술로써 씻어버리지 않겠는가」고 권하고 「당신과 같은 고결하고 훌륭한 인물은 지금 세상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고 위로하고 있다.
「지금은 鬪鷄(투계․닭싸움인데 당나라때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서 성행한 놀이)의 기술이 뛰어난 자가 天子(천자)의 귀염을 받아 큰 길을 으스대고 다니고, 오랑캐의 침입을 막는데 하찮은 공을 세운 자들이 대단한 충신인 양 날뛰는 세상이다. 당신이나 내가 어찌 그들의 흉내를 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차라리 햇볕이 들지 않는 북쪽 창에 기대어 시나 읊으세. 그러나 우리의 작품이 아무리 걸작이라 해도 지금 세상에서는 찬 물 한그릇값에도 못미치네」.
시는 이렇게 이어지다가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이런 말을 듣고도 고개를 내저으니 동풍이 말의 귓가를 스치는 것과 다를 바 없네(有如東風射馬耳․유여동풍사마이)」라고 한탄하기도 한다.
羅雀掘鼠 (나작굴서)
羅雀掘鼠(나작굴서)
그물 라 | 참새 작 | 팔 굴 | 쥐 서 |
그물로 참새를 잡고 땅을 파서 쥐를 잡는다는 뜻으로, 최악의 상태에 이르러 어찌할 방법이 없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新唐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唐)나라 현종(玄宗)의 통치 말기, 장순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그는 충직한 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재주도 많고 무인답게 담력 또한 컸으며 대의가 분명한 그런 인물이었다. 정치가 부패하자 변방의 안록산(安祿山)은 군대를 일으켜 당나라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서시 756년, 진원(眞源) 현령 장순(張巡)은 군대를 동원하여 안록산 토벌에 나섰다. 이듬해, 안록산의 아들 안경서(安慶緖)는 윤자기(尹子琦)를 보내 십만 대군으로 장순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당시 장순에게는 겨우 삼 천명의 병력 뿐으로 수적으로 열세였다. 윤자기의 군대는 어떤 때에는 하루에 20여 차례나 공격을 해 왔지만, 장순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싸웠다. 윤자기의 군대는 수적으로는 우세하였지만, 성(城)을 함락하지 못하며, 몇 달 동안 대치하게 되었다. 장순은 몇 달 동안 구원군을 기다렸지만 그들이 오지 않자, 성 안의 식량과 풀이 다 바닥날 상황이었다. 형세가 급박하게 변하자 장순은 부하 남제운(南霽雲)을 보내 포위망을 뚫고 임회(臨淮) 태수 하란진명(賀蘭進明)에게 위급한 소식을 알렸다. 그러나 임회태수는 장순의 명성을 시기하여, 그들의 위급함을 보고도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윤자기는 강공(强攻)으로는 성을 함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방법을 바꾸어 장순에게 투항을 권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장순은 이에 굴하지 않고, 쉴새 없이 공격해 오는 적들을 모두 물리쳤다. 얼마 후, 성안의 식량이 점점 줄어들자, 군인들은 매일 한 수저의 쌀만을 먹었다. 이에 장순은 먹을 것을 확보하기 위하여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심지어는 그물을 쳐서 참새를 잡고 땅을 파서 쥐를 잡으며, 갑옷과 활에 붙어있는 소가죽을 삶아서 굶주림을 달래라고 하였다(至羅雀掘鼠, 煮鎧弩以食).
장순은 지휘관의 입장에서 자식같은 병사들의 몸부림을 안타깝게 여겨 자기 아내를 죽여 국을 끓여서 병사들에게 먹이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상황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악화되어 갔고, 더 이상 성을 고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성으로 진격해 들어오는 반란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장순이 항복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항복을 요구하는 반란군들을 향해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고는 청청병력 같은 소리로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반란군은 그 자리에서 그의 목을 베었다.
죽음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장순의 부하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의 죽음과 바꾼 충성심에 새삼 고개를 떨구게 되었다.
그물 라 | 참새 작 | 팔 굴 | 쥐 서 |
그물로 참새를 잡고 땅을 파서 쥐를 잡는다는 뜻으로, 최악의 상태에 이르러 어찌할 방법이 없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新唐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唐)나라 현종(玄宗)의 통치 말기, 장순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그는 충직한 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재주도 많고 무인답게 담력 또한 컸으며 대의가 분명한 그런 인물이었다. 정치가 부패하자 변방의 안록산(安祿山)은 군대를 일으켜 당나라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서시 756년, 진원(眞源) 현령 장순(張巡)은 군대를 동원하여 안록산 토벌에 나섰다. 이듬해, 안록산의 아들 안경서(安慶緖)는 윤자기(尹子琦)를 보내 십만 대군으로 장순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당시 장순에게는 겨우 삼 천명의 병력 뿐으로 수적으로 열세였다. 윤자기의 군대는 어떤 때에는 하루에 20여 차례나 공격을 해 왔지만, 장순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싸웠다. 윤자기의 군대는 수적으로는 우세하였지만, 성(城)을 함락하지 못하며, 몇 달 동안 대치하게 되었다. 장순은 몇 달 동안 구원군을 기다렸지만 그들이 오지 않자, 성 안의 식량과 풀이 다 바닥날 상황이었다. 형세가 급박하게 변하자 장순은 부하 남제운(南霽雲)을 보내 포위망을 뚫고 임회(臨淮) 태수 하란진명(賀蘭進明)에게 위급한 소식을 알렸다. 그러나 임회태수는 장순의 명성을 시기하여, 그들의 위급함을 보고도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윤자기는 강공(强攻)으로는 성을 함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방법을 바꾸어 장순에게 투항을 권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장순은 이에 굴하지 않고, 쉴새 없이 공격해 오는 적들을 모두 물리쳤다. 얼마 후, 성안의 식량이 점점 줄어들자, 군인들은 매일 한 수저의 쌀만을 먹었다. 이에 장순은 먹을 것을 확보하기 위하여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심지어는 그물을 쳐서 참새를 잡고 땅을 파서 쥐를 잡으며, 갑옷과 활에 붙어있는 소가죽을 삶아서 굶주림을 달래라고 하였다(至羅雀掘鼠, 煮鎧弩以食).
장순은 지휘관의 입장에서 자식같은 병사들의 몸부림을 안타깝게 여겨 자기 아내를 죽여 국을 끓여서 병사들에게 먹이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상황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악화되어 갔고, 더 이상 성을 고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성으로 진격해 들어오는 반란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장순이 항복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항복을 요구하는 반란군들을 향해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고는 청청병력 같은 소리로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반란군은 그 자리에서 그의 목을 베었다.
죽음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장순의 부하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의 죽음과 바꾼 충성심에 새삼 고개를 떨구게 되었다.
家書萬金 (가서만금)
가서만금(家書萬金)
家 집 가, 여자 고 | 書 글 서 | 萬 일만 만 | 金 쇠 금, 성씨 김 |
타국(他國)이나 타향(他鄕)에 살 때는 고향(故鄕) 가족(家族)의 편지(便紙)가 더없이 반갑고, 그 소식(消息)의 값이 황금(黃金) 만 냥보다 더 소중(所重)하다는 말. 가서저만금(家書抵萬金)의 준말
여행 중에 가인(家人)으로부터 서신을 받으면 그 기쁨이 만금을 얻는 데 해당한다.
시성(詩聖)인 당(唐)나라 두보(杜甫 712∼770, 字:子美, 號:少陵)의 '춘망(春望)'이라는 시(詩)에 나오는 구절.
國破山河在 (국파산하재)
春城草木深 (춘성초목심)
感時和賤淚 (감시화천루)
恨別鳥驚心 (한별조경심)
烽火連三月 (봉화연삼월)
家書抵萬金 (가서저만금)
白頭搔更短 (백두소경단)
渾欲不勝簪 (혼욕불승잠)
나라는 망했어도 산하는 남아있고,
성에 봄이 오니 초목이 우거졌구나.
시절을 느껴 꽃에 눈물을 뿌리고,
이별을 한스러워하니 새 소리에도 놀란다.
봉화불은 삼 개월이나 계속 피고 있고,
집에서 온 편지는 만금에 해당하는구나.
대머리 긁어서 더욱 빠지고,
상투를 하고자 하나 비녀를 이기지 못하는구나.
유명한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는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붙잡혀서 이듬해(757년) 탈주했다. 수도 장안(長安)에 구속된 몸이 되었을 때, 전란으로 심하게 황폐해진 장안의 봄을 아파해서 만든 저 유명한 시 가운데 한 구절. 家書는 아내 혹은 가족으로부터의 편지.
출전
두보 춘망시(春望詩)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家書抵萬金(가서저만금) |
반의어·상대어
|
중요도·활용도
|
家 집 가, 여자 고 | 書 글 서 | 萬 일만 만 | 金 쇠 금, 성씨 김 |
타국(他國)이나 타향(他鄕)에 살 때는 고향(故鄕) 가족(家族)의 편지(便紙)가 더없이 반갑고, 그 소식(消息)의 값이 황금(黃金) 만 냥보다 더 소중(所重)하다는 말. 가서저만금(家書抵萬金)의 준말
여행 중에 가인(家人)으로부터 서신을 받으면 그 기쁨이 만금을 얻는 데 해당한다.
시성(詩聖)인 당(唐)나라 두보(杜甫 712∼770, 字:子美, 號:少陵)의 '춘망(春望)'이라는 시(詩)에 나오는 구절.
國破山河在 (국파산하재)
春城草木深 (춘성초목심)
感時和賤淚 (감시화천루)
恨別鳥驚心 (한별조경심)
烽火連三月 (봉화연삼월)
家書抵萬金 (가서저만금)
白頭搔更短 (백두소경단)
渾欲不勝簪 (혼욕불승잠)
나라는 망했어도 산하는 남아있고,
성에 봄이 오니 초목이 우거졌구나.
시절을 느껴 꽃에 눈물을 뿌리고,
이별을 한스러워하니 새 소리에도 놀란다.
봉화불은 삼 개월이나 계속 피고 있고,
집에서 온 편지는 만금에 해당하는구나.
대머리 긁어서 더욱 빠지고,
상투를 하고자 하나 비녀를 이기지 못하는구나.
유명한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는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붙잡혀서 이듬해(757년) 탈주했다. 수도 장안(長安)에 구속된 몸이 되었을 때, 전란으로 심하게 황폐해진 장안의 봄을 아파해서 만든 저 유명한 시 가운데 한 구절. 家書는 아내 혹은 가족으로부터의 편지.
출전
두보 춘망시(春望詩)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家書抵萬金(가서저만금) |
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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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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