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螢雪之功 (형설지공)

螢雪之功(형설지공)

萤雪之功(yíngxuězhīgōng)

螢 반딧불 형 | 雪 눈 설 | 之 갈 지 | 功 공 공 |


반딧불과 눈빛으로 이룬 공이라는 뜻으로, 가난을 이겨내며 반딧불과 눈빛으로 글을 읽어가며 고생 속에서 공부(工夫)하여 이룬 공을 일컫는 말


후진(後晉)의 이한(李瀚)이 지은 《몽구(蒙求)》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진(晉)나라의 차윤(車胤)이라는 소년이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전한 노력가로 공부를 열심히 했으나 집안이 가난해 등불을 켜는 데 사용하는 기름조차 없었다. 소년은 밤에도 책을 읽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끝에 엷은 명주 주머니를 벌레통처럼 만들어 그 속에 반디를 수십 마리 집어넣어 거기서 나오는 빛으로 책을 비추어 읽었다. 이렇게 열심히 노력한 끝에 상서랑(尙書郞 또는 吏部尙書)이라는 중앙 정부의 고급 관리로 출세했다.

또 같은 시대에 손강(孫康)이라는 소년은 어릴 때부터 악한 무리들과 사귀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으나 역시 집안이 가난해 등불을 켤 기름을 살 수가 없었다. 소년은 궁리 끝에, 겨울날 추위를 견디며 창으로 몸을 내밀고 쌓인 눈에 반사되는 달빛을 의지해 책을 읽었다. 그 결과 어사대부(御史大夫)라는 관원을 단속하는 관청의 장관이 되었다.

이 고사에서 비롯되어 어려운 처지에서 공부하는 것을 '형설지공' 또는 단순히 '형설'이라고 한다. 또 공부하는 서재를 형창설안(螢窓雪案)이라고도 한다.

[유래]
晉書(진서) : 卷83 : 車胤 | 蒙求(몽구)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螢窓雪案(형창설안) | 車螢孫雪(차형손설) | 车萤孙雪(chēyíngsūnxuě) | 車胤聚螢(차윤취형) | 車胤盛螢(차윤성형) | 孫康映雪(손강영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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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書(진서) : 卷83 : 車胤 | 蒙求(몽구) |

風聲鶴唳 (풍성학려)

風聲鶴唳(풍성학려)

风声鹤唳(fēngshēnghèlì)

風 바람 풍 | 聲 소리 성 | 鶴 학 학, 흴 학 | 唳 울 려(여) |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소리라는 뜻으로, 겁을 먹은 사람이 하찮은 일이나 작은 소리에도 몹시 놀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진서·사현전(晉書·謝玄傳)》 가운데, 전진(前秦) 때 진왕 부견(苻堅)이 동진(東晉)의 명장 사현(謝玄)에게 대패하고 도망갈 때, 바람 소리와 학의 울음소리를 듣고 추격병이 따라온 줄 알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함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은 병사 60만, 기마 27만의 대군을 이끌고 진(晉)나라의 정벌(征伐)에 나섰다. 진(秦)나라의 어진 재상(宰相) 왕맹(王猛)이 진(晉)나라 보다 몇 배 우위의 국력을 만들어 놓고 죽은 지 팔년 만에 부견(苻堅)은 진(晉)나라를 정벌(征伐)하러 나섰다. 진(晉)나라는 재상(宰相) 사안(謝安)의 동생인 사석(謝石)을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으로 삼아 진군(秦軍)에 맞섰다. 부견(苻堅)이 수양성에 올라 적을 바라보니 그 진용(陳容)이 엄하고 위력적이었다. 문득 팔공산 쪽으로 눈을 돌리자, 산은 적병으로 뒤덮여 있었다. 놀라서 자세히 보니, 그것은 풀과 나무였다. 부견은 불쾌하게 생각했다. 한편, 진(晉)나라는 진군(秦軍)이 비수(淝水)에 진을 치고 있어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자, 사신을 보내어 진(秦)의 진지를 다소 후퇴 시켜서 진군(晉軍)이 다 건넌 다음에 승부를 가리자고 청했다. 이에 부견은 "아군을 다소 뒤로 후퇴시켰다가 적이 반쯤 건넜을 때 격멸하라."하고 명령(命令)을 내렸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히 후퇴하라는 명령(命令)인 줄 알고 진군(秦軍)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제각기 먼저 도망하려고 덤비다가 자기들끼리 짓밟혀 죽은 자가들을 뒤덮었다. 혼비백산한 진병(晉兵)은 얼마나 겁에 질렸던지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소리[風聲鶴唳]’만 들려도 동진의 군사가 뒤쫓아온 줄 알고 도망가기 바빴다고 한다.

‘풍성학려’가 청각적인 착각이라면, 적을 두려워한 나머지 온 산의 초목까지도 모두 적군으로 보인다는 뜻의 ‘초목개병(草木皆兵)’이라는 말은 시각적인 착각을 말하는 것으로, 같은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출전
진서(晉書) 사현재기(謝玄載記)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草木皆兵(초목개병) | 風聲鶴唳(풍성학려) |

泰山壓卵 (태산압란)

泰山壓卵(태산압란)

泰 클 태 | 山 뫼 산 | 壓 누를 압, 싫어할 염, 숙일 엽, 누를 녑(엽) | 卵 알 란(난) |

큰 산이 알을 누른다는 뜻으로, 큰 위엄(威嚴)으로 여지없이 누르는 것의 비유(比喩ㆍ譬喩)①큰 위력(威力)으로 내리 누름 ②아주 손쉬운 것. 중국의 진(晉)나라 때 손혜(孫惠)의 고사(故事)에서 유래.


진(晉)나라 때, 손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조부와 부친은 모두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관리를 지냈다. 당시 진나라는 각지역 황족들의 다툼으로 몹시 혼란한 와중에 있었다.

손혜는 제왕(齊王) 경의 모사(謀士)로 있으면서 조왕(趙王) 윤(倫)을 토벌하는 일 등에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제왕이 차츰 교만하고 참람하게 행동하는 데 실망하여 병을 핑계로 떠났다. 손혜는 은거하던 중에 동해왕(東海王) 월(越)이 하비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남악일사(南嶽逸士) 진비(秦秘)라는 가명으로 편지를 보냈다.

손혜는 이 글에서 "하물며 순리를 따라 역리를 토벌하고, 정의로움으로 사악함을 정벌하는 것이니, 이는 오획 같은 장사에게 얼음을 깨뜨리게 하고, 맹분(孟賁)과 하육(夏育) 같은 장사에게 썩은 나무를 뽑아내게 하며, 맹수에게 여우를 잡아먹게 하며, 태산으로 달걀을 누르게 하며, 불타는 들판에 바람이 몰아치는 것과 같아서 맞설 수 없는 일입니다[況履順討逆, 執正伐邪, 是烏獲携氷, 賁育拉朽, 猛獸呑狐, 泰山壓卵, 因風燎原, 未足方也]"라고 하면서 동해왕의 거병에 동조하였다.

동해왕은 이 글을 읽고 손혜를 기용하여 기실참군(記室參軍)으로 삼았다. 이 고사는 《진서(晉書)》의 〈손혜열전(孫惠列傳)〉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태산압란은 태산처럼 큰 산이 아주 조그만 달걀을 누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큰 세력으로 미약한 세력을 억누르는 일이나 그러한 경우처럼 매우 쉬운 일, 또는 약자에 대한 강자의 압도적인 우세 등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출전

진서(晉書) 손혜전(孫惠傳)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排山壓卵(배산압란) | 泰山壓卵(태산압란) |

枕戈待旦 (침과대단)

枕戈待旦(침과대단)

枕 벨 침 | 戈 창 과 | 待 기다릴 대 | 旦 아침 단 |

'창을 베고 자면서 아침을 기다린다'라는 뜻으로, 항상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는 군인의 자세를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중국의 진(晉)나라 때 유곤(劉琨)과 조적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남북조시대의 진나라 때 유곤과 조적은 모두 성격이 활달하고 의협(義俠)을 중시하는 지사(志士)들이었다. 그 무렵 진나라는 표면상으로는 아직 중원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었다. 유곤과 조적은 함께 밤 늦도록 국가의 형세를 논하였고, 한밤중에 닭 울음소리를 경계 삼아(당시에는 닭이 밤에 우는 것을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무술을 연마하였다.

나중에 유곤은 조적이 조정에 중용되어 외적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곤은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나는 창을 베개 삼아 잠을 자며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면서 오랑캐 무리를 몰아내는 데 뜻을 두었으며, 늘 조적 선생이 나보다 먼저 공을 세우게 될까 염려하였다[吾枕戈待旦, 志梟逆虜, 常恐祖生先吾着鞭]"라고 하였다. 먼저 공을 세우는 것을 비유하는 선착편(先着鞭)이라는 고사성어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이 고사는 《진서(晉書)》의 유곤전(劉琨傳)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침과대단은 군무(軍務)에 전념하여 편안히 잠을 자지 못하는 경우나 항상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는 군인의 자세를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비슷한 표현으로 침과대적(枕戈待敵:창을 베고 적을 기다림), 침과좌갑(枕戈坐甲:창을 베고 갑옷을 깔고 앉음), 침과이대(枕戈以待:창을 베고 기다림), 침과침갑(枕戈寢甲:창을 베고 갑옷을 입고 잠을 잠) 등이 있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枕戈待旦(침과대단) | 침과대적(枕戈待敵) | 침과이대(枕戈以待) | 침과좌갑(枕戈坐甲) | 침과침갑(枕戈寢甲) |

草木皆兵 (초목개병)

草木皆兵(초목개병)

草木皆兵(cǎomùjiēbīng)

草 풀 초 | 木 나무 목 | 皆 다 개 | 兵 병사 병 |

초목이 모두 적병처럼 보여서 놀랐다는 데서 나온 말로, ①적의 힘을 두려워한 나머지 하찮은 것에도 겁냄 ② 몹시 놀라 이것도 의심스럽고 저것도 의심스러움. 경황 중에 함부로 이것저것 의심함.

Just before the war, the whole country was panic-stricken.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은 병사 60만, 기마 27만의 대군을 이끌고 진(晉)나라의 정벌(征伐)에 나섰다. 진(秦)나라의 어진 재상(宰相) 왕맹(王猛)이 진(晉)나라 보다 몇 배 우위의 국력을 만들어 놓고 죽은 지 팔년 만에 부견(苻堅)은 진(晉)나라를 정벌(征伐)하러 나섰다. 진(晉)나라는 재상(宰相) 사안(謝安)의 동생인 사석(謝石)을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으로 삼아 진군(秦軍)에 맞섰다. 부견(苻堅)이 수양성에 올라 적을 바라보니 그 진용(陳容)이 엄하고 위력적이었다. 문득 팔공산 쪽으로 눈을 돌리자, 산은 적병으로 뒤덮여 있었다. 놀라서 자세히 보니, 그것은 풀과 나무였다. 부견은 불쾌하게 생각했다. 한편, 진(晉)나라는 진군(秦軍)이 비수(淝水)에 진을 치고 있어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자, 사신을 보내어 진(秦)의 진지를 다소 후퇴 시켜서 진군(晉軍)이 다 건넌 다음에 승부를 가리자고 청했다. 이에 부견은 "아군을 다소 뒤로 후퇴시켰다가 적이 반쯤 건넜을 때 격멸하라."하고 명령(命令)을 내렸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히 후퇴하라는 명령(命令)인 줄 알고 진군(秦軍)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제각기 먼저 도망하려고 덤비다가 자기들끼리 짓밟혀 죽은 자가들을 뒤덮었다. 혼비백산한 진병(晉兵)은 울음소리에도 진군(秦軍)이 쳐들어오는 줄로 알고 놀라서 도망쳤다고 함

출전
晉書(진서) 사현재기(謝玄載記)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草木皆兵(초목개병) | 風聲鶴唳(풍성학려) |

竹馬之友 (죽마지우, zhúmǎzhīyǒu)

竹馬之友(죽마지우)

竹马之友(zhúmǎ zhī yǒu)

竹 대 죽 | 馬 말 마 | 之 의 지 | 友 벗 우 |


죽마를 타던 옛 친구라는 뜻으로, 소꿉동무를 이르는 말.


《세설신어(世說新語)》〈품조편(品藻篇)〉과 《진서(晉書)》〈은호전(殷浩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진(晉)나라의 은호는 성품이 온후(溫厚)하였으며, 학문 또한 박학(博學)하였다. 젊어서 《노자(老子)》와 《역경(易經)》을 즐겨 읽었으며, 벼슬이 싫어 조상의 무덤을 십여 년째 지켰다. 그러나 당시 간문제(簡文帝)는 연거푸 공신을 잃는 변을 당해 현신(賢臣)을 찾던 중, 은일(隱逸)하던 은호에게 간청하였다. 결국 은호는 청을 이기지 못하고 건무장군(建武將軍) 양주자사(揚州刺史)가 되어 조정에 나아갔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촉(蜀)을 평정하고 돌아와 세력이 커지고 있던 환온(桓溫)을 견제하려던 간문제의 계책이었다. 결국 은호와 환온은 서로 반목하게 되었다. 왕희지(王羲之)가 나서서 둘 사이에 화해를 주선하였으나 은호가 거절하였다. 이 무렵, 5호16국(五胡十六國)의 하나인 후조(後趙)의 왕 석계룡(石季龍)이 죽자 호족(胡族) 간에 내분이 일어났다. 진나라는 이 기회를 이용해 중원을 회복하려 하였으며, 은호가 오주군사(五州軍事)로 출병하였다.

그러나 출병에 앞서 은호가 낙마를 하는 바람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대패하였다. 이것을 두고 환온이 은호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려 서인(庶人)에 강등시키고 변방으로 귀양을 보냈다. 그런 다음 환온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은호는 어려서 나와 함께 죽마를 타고 놀던 친구다. 내가 죽마를 버리면 언제나 은호가 가지고 갔다. 그러니 그가 내 밑에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결국 은호는 변방의 귀양지에서 생을 마쳤다. 죽마는 대나무로 만든 말로, 아이들의 장난감이다. 죽마지우는 어릴 때의 친구, 즉 소꿉동무를 말한다.

이와 비슷한 말로 기죽지교(騎竹之交), 죽마지호(竹馬之好) 등이 있다.


관련 한자어

유의어

竹馬故友(죽마고우) | 騎竹之交(기죽지교) | 竹馬之好(죽마지호)

참조어

肝膽相照(간담상조) |
芝蘭之交(지란지교) |


世說新語, 세설신어, 晉書, 진서, 벗[friend], 우정, 친구 |

東山再起 (동산재기)

東山再起(동산재기)

東 동녘 동 | 山 뫼 산 | 再 두 재 | 起 일어날 기 |

동산(動産)에서 다시 일어난다는 뜻으로, 은퇴(隱退)한 사람이나 실패(失敗)한 사람이 재기(再起)하여 다시 세상(世上)에 나옴을 뜻함


사안(謝安)은 허난성 진군(陳郡) 양하(陽夏) 태생으로 동진(東晉) 최대의 명문 출신이다. 젊었을 때부터 재능과 식견이 뛰어나 조정에서 불렀으나 매번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당시의 정치(政治) 상황이 출사(出仕)하기에 알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회계군의 동산(東山)에 집을 짓고, 아름다운 그 곳의 산수에 묻혀 왕희지(王羲之)ㆍ지둔(支遁) 등과 어울리며 시를 짓고 술을 마시는 등 풍류를 즐겼다. 양주자사(揚州刺史) 유영(庾永)이 그의 평판을 듣고 몇 번이고 출사를 청하자 마지못해 한 달 남짓 관직에 있었지만 곧 사임하고 돌아와 버렸다. 주위 사람들이 서운하게 여기자 사안은 "지금의 상황으로는 관직에 그대로 머무는 것이 신상에 해로울 것 같다."고 답하며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문벌 세력이 서로 다투고 북쪽에서는 전진(前秦)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나이 40에 이르러, 문벌 세력을 제압한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환온(桓溫)이 청하자, 마침내 그의 휘하에 들어가 이부상서(吏部尙書)의 요직에까지 진급했다. 그러나 환온이 제위를 넘보려 하자 이를 저지하고, 그 공으로 효무제(孝武帝)가 즉위한 후에는 재상(宰相)이 되었다. 당시 북쪽에서는 전진 왕 부견(符堅)이 산시, 쓰촨, 후베이 일대를 장악하고 세력을 뽐내고 있었다. 환온이 죽자, 부견은 100만 대군을 이끌고 동진을 향해 남하하기 시작했다. 사안은 아우 사석(謝石)과 형의 아들 사현(謝玄), 그리고 유뇌지(劉牢之) 등을 앞세워 비수(底水)에서 전진군을 크게 무찔렀다.

동산재기란 이와 같이 사안이 동산에 은거하다가 관계에 나가 크게 성공한 것을 가리키던 말로, 오늘날에는 한번 실패했던 사람이 재기에 성공한 경우에까지 이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출전
晉書(진서) 謝安傳(사안전)

道傍苦李 (도방고리)

道傍苦李(도방고리)

道 길 도 | 傍 곁 방 | 苦 쓸 고, 땅 이름 호 | 李 오얏 리(이), 성씨 리(이) |

길가에 있는 쓴 자두 열매라는 뜻으로, ①남에게 버림받음을 비유(比喩ㆍ譬喩)해 이르는 말 또는, ②많은 사람이 무시하는 것은 반드시 그 이유가 있다는 뜻.


진서(晉書) 왕융전(王戎傳)과 육조시대 송(宋)나라 유의경(劉義慶)이 지은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나오는 이야기.

동진(東晉)의 왕융(王戎, 서기 234-305년)은 노장사상에 심취하여 예교(禮敎)를 방패로 권세를 잡으려는 세태에 저항하였다. 평생을 죽림에 묻혀 유유자적하며 청담(淸談)을 즐겨 완적(阮籍), 혜강(嵆康) 등과 함께 죽림칠현으로 불렸다. 이러한 왕융이 일곱 살이었을 때의 일이다.

그는 동네의 아이들과 놀다가 문득 길가의 자두나무에 가지가 휘어지게 많은 자두가 달려있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은 그것을 따려고 앞다투어 그 나무로 달려갔으나, 왕융만은 그 자리에 가만 있었다.

그때 길을 가던 어떤 사람이 왕융에게 물었다.

"얘야, 너는 왜 따러가지 않고 서 있는 거냐?"

그러자 왕융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무가 길 가에 있는데도 열매가 저렇게 많이 달려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써서 먹지 못하는 자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이들이 그 자두를 따서 맛을 보니 과연 왕융의 말처럼 먹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일로 사람들은 왕융의 영민함을 칭찬하면서도 일면 두려워하였다 한다.

도방고리란 이와 같이 쓸 데가 없어 버림받는다는 뜻에서 시작하여 오늘날에는 모두가 버리는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는 뜻으로까지 쓰이고 있다.


출전

진서(晉書) | 세설신어(世說新語) |

鹿死誰手 (녹사수수)

鹿死誰手(녹사수수)

鹿 사슴 녹(록) | 死 죽을 사 | 誰 누구 수 | 手 손 수 |

사슴이 누구의 손에 죽는가라는 뜻으로, 승패(勝敗)를 결정(決定)하지 못하는 것을 이르는 말


진서(晉書) 석륵재기하(石勒載記下)에 나오는 이야기다.

서진(西晉)말기, 중국 5호16국(五胡十六國)의 하나인 후조(後趙)의 제1대 황제 석륵(石勒:재위 319∼333)은 재간이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석륵은 외국의 사신들을 연회에 초대하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자, 석륵은 신하인 서광(徐光)에게 말했다.

"그대가 보기에 나는 이전의 어느 제왕(帝王)과 비교될 것 같소?"

서광은 공손하게 대답하였다.

"폐하의 지모(智謀)와 무용(武勇)은 모두 한(漢)나라 고조(高祖)인 유방(劉邦:재위 BC 202∼BC 195)을 능가합니다."

석륵은 이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말은 너무 지나치오. 내가 만약 한나라 고조를 만났더라면, 나는 기꺼이 그의 부하가 되어, 그의 지휘를 받으며 한신이나 팽월 같은 장군들과 실력을 겨루었을 것이오. 만약 한나라의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를 만났더라면, 나는 그와 함께 중원(中原)에서 함께 말을 달리며 재간을 겨루어, 사슴이 누구의 손에 죽는지를 알지 못하였을 것이오[未知鹿死誰手]."

양쪽의 실력이 비슷해 누가 이길지 모를 정도로 미리 승부를 짐작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지위나 정권을 사슴에 비유하였는데, 천하가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라는 뜻에서 제위의 다툼을 비유하는 중원축록(中原逐鹿)과 비슷한 말이다.


출전

진서(晉書)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角逐(각축) | 中原逐鹿(중원축록) | 逐鹿(축록) |



群鷄一鶴 (군계일학)

鷄群一鶴(계군일학) | 群鷄一鶴(군계일학) |

群鸡一鹤(qúnjīyíhè)

群 무리 군 | 鷄 닭 계 | 一 한 일 | 鶴 학 학,흴 학 |


무리 지어 있는 닭 가운데 있는 한 마리의 학이라는 뜻으로, 여러 평범(平凡)한 사람들 가운데 있는 뛰어난 한 사람을 이르는 말


위진시대(魏晉時代)에는 혼란스러운 세상을 피해 산속으로 들어가 문학과 노장(老莊)의 사상, 음악 등 청담(淸談)을 담론하며 세월을 보내던 선비가 적지 않았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은 죽림칠현(竹林七賢)으로 불리는 일곱 명의 선비 완적(阮籍)·완함(阮咸)·혜강(嵆康)·산도(山濤)·왕융(王戎)·유령(劉伶)·상수(尙秀) 등이다.

이들 가운데 혜강은 특히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는데,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을 당하였다. 당시 그에게 열살박이 아들 혜소(嵆紹)가 있었다. 혜소는 장성하자 혜강의 친구 중 한 사람인 산도가 혜소를 무제(武帝:265~290)에게 천거하며 이렇게 말했다.

"《서경(書經)》 〈강고편(康誥篇)〉에 보면, 아버지와 자식간의 죄는 서로 연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혜소는 비록 혜강의 아들이지만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대부 극결(郤缺)에 뒤지지 않을 만큼 총명합니다. 그를 비서랑(秘書郞)으로 임명하십시오." 무제는 "경(卿)이 천거(薦擧)하는 사람이라면 승(丞)이라도 능히 감당할 것이오"라고 흔쾌히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혜소는 비서랑보다 한 계급 위인 비서승에 임명되었다.

《진서(晉書)》 〈혜소전(嵆紹傳)〉에, 혜소가 낙양(洛陽)으로 가던 날,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이가 다음 날 왕융에게 "어제 구름같이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궁궐로 들어가는 혜소를 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의젓하고 늠름하여 마치 닭의 무리 속에 있는 한 마리의 학 같았습니다[昂昂然如野鶴之在雞群]"라고 하였다.

그러자 왕융은 말했다. "혜소의 아버지는 그보다 더 뛰어났었다네. 자네는 그의 부친을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일세." 왕융의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혜소는 부친만은 못하지만,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었다. 여기서 '계군일학'이란 말이 나왔으며 이 뜻은 학립계군(鶴立鷄群)·군계일학(群鷄一鶴)·계군고학(鷄群孤鶴) 등과 같이 통용된다. 혜소는 나중에 시중(侍中)으로 승진하여 혜제(惠帝) 곁에서 직언(直言)을 올리는 몸이 되어 올바르고 곧게 처신하였다고 한다.

팔왕의 난이 한창일 때 혜제는 이를 진압하려고 군병을 일으켰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피란을 가게 되었다. 혜소가 부름을 받아 당도하였을 때는 혜제의 군이 이미 패하였을 때였다. 해소는 백관 시위가 모두 도망해 버린 곳에서 홀로 의관을 바로하고, 창과 칼이 불꽃을 일으키는 어차 앞에서 몸으로 혜제를 감싸며 지키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혜제의 어의(御依)를 선혈로 물들였다. 난이 끝난 뒤, 근시(近侍)들이 의복을 빨려 하자 혜제는 “이것은 혜소가 흘린 충의의 피이다. 씻어 없애지 마라" 하였다 한다.

[유래] 晉書(진서) : 忠義 |


관련 한자어

유의어

鶴立鷄群(학립계군) | 出衆(출중) | 錐處囊中(추처낭중) | 錐囊(추낭) | 絶倫(절윤) | 穎脫而出(영탈이출) | 穎脫(영탈) | 白眉(백미) | 拔群(발군) | 囊中之錐(낭중지추) | 鷄群鶴(계군학) | 鷄群一鶴(계군일학) | 鷄群孤鶴(계군고학) |

出類拔萃(출류발췌) 무리 가운데 특출나게 뛰어난 사람을 이르는 한자성어 |

庸中佼佼(용중교교,yōngzhōngjiǎojiǎo) 평범한 사람 중의 비범한 사람. 군계일학(群鷄一鶴) |


Tag

晉書(진서) : 忠義 | 出衆(출중) | 혜소(嵆紹) |

刻畵無鹽 (각화무염, kèhuàwúyán)

刻畵無鹽(각화무염)

刻畵无盐(kè huà wú yán)

刻 새길 각 | 畵 그림 화 | 無 : 없을 무 | 鹽 소금 염


차이가 많이 나는 물건을 비교하거나 맞지 않는 비유를 이르는 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차이가 나거나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을 비유한 성어(成語)이다.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의 무염(無鹽)이라는 지방에 '종리 춘(鐘離春)'이라는 못생긴 여자가 살았다. 종리 춘은 선왕에게 제나라의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그 재능을 인정받아 무염군에 봉해져 황후가 되었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월(越)나라의 미녀인 서시(西施)에 비유하여 못생긴 여자를 '무염'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무염은 고대 중국의 대표적 추녀(醜女)로 불리게 되었다.

《진서(晉書)》 〈주의전〉에 따르면, 진나라 원제 때 신하들이 주의를 악광(樂廣)과 같이 고결한 사람이라고 하자 주의는 스스로 악광과 비교될 수 없다면서 "어찌 무염에게 화장을 한다고 하여 갑자기 서시가 되겠는가[何乃刻畵無鹽 唐突西施也]"라고 말하면서 겸손함을 나타냈다고 전해진다. 얼굴이 못생긴 여자가 아무리 꾸며도 서시와 같은 미인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