弄璋之慶 (농장지경)

弄璋之慶(농장지경)

아들을 낳은 경사.

老益壯 (노익장)

老益壯(노익장)

老 늙을 노(로) | 益 더할 익, 넘칠 일 | 壯 장할 장 |

①나이는 들었으나 기력(氣力)은 더욱 좋아짐 ②또는, 그런 사람

old but vigorous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한(東漢)시기, 부풍군(扶風郡) 무릉현(茂陵縣)에 부풍군의 독우(督郵)를 지낸 마원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느 날 군 태수의 명령으로 죄인들을 장안(長安)으로 압송하게 되었다. 그는 죄수들의 형편을 동정하여 그만 도중에서 그들을 풀어주고, 자신은 관직을 버리고 변방으로 도망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조정으로부터 대사면(大赦免)을 받고, 과거의 일을 다시 추궁 당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곳에서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지으며 항상 열심히 일하였다. 몇년 지나지 않아 풍성한 수확을 거두고 가축들도 그 수효가 많아져서, 그는 매우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변방으로 도망온 사람들에게 자주 "대장부가 뜻을 세웠으면, 생활이 궁핍할수록 그 의지를 굳게 하고, 나이가 들수록 그 정신을 왕성하게 해야한다[大丈夫爲者 窮當益堅 老當益壯]"라고 말했다.

老益壯(Live to agreen old age)이란 나이는 비록 많지만 그 활동과 정신이 더욱 강성해짐을 나타내는 말이다.


출전

後漢書(후한서) 마원전(馬援傳)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老當益壯(노당익장) | 老当益壮(lǎodāngyìzhuàng) | 老益壯(노익장) |

勞而無功 (노이무공)

勞而無功(노이무공)

勞 일할 노(로) | 而 말 이을 이, 능히 능 | 無 없을 무 | 功 공 공

①애를 썼으나 공이 없음 ②얻은 것 없이 헛수고만 함


온갖 애를 썼으나 아무런 보람이 없다는 뜻으로 '도로무공(徒勞無功)'이라고도 한다.

'莊子(장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옛날과 지금이란 물과 육지나 같은 게 아닙니까. 주나라와 노나라는 배와 수레나 같은 게 아닙니까[古今非水陸與 周魯非舟車與(고금비수륙여 주노비주차여]? 지금 주나라의 방식을 노나라에 행하려 한다는 것은 마치 육지에서 배를 밀고 가려는 것과 같습니다[今蘄行周於魯 是猶推舟於陸也(금기행주어노 시유추주어육야)]. 수고롭기만 했지 아무런 성과도 없을 것이며 자신에게 반드시 재앙이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勞而無功 身必有殃(노이무공 신필유앙)]."

'荀子(순자)' 정명편에는 "어리석은 사람의 말은 막연해서 갈피를 잡을 수 없고, 번잡하고 통일이 없으며 시끄럽게 떠들어대기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말은 하지만 요령이 없고, 몹시 애는 쓰지만 공이 없다"고 하였다.

'관자(管子)'의 형세편에도 "옳지 못한 것에 편들지 말라. 능하지 못한 것을 강제하지 말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르지 말라. 이와 같은 것을 가리켜 수고롭기만 하고 공이 없다고 말한다"고 하였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勞而無功(노이무공) | 萬事休矣(만사휴의) | 徒勞無益(도로무익) | 徒勞無功(도로무공) |

綠衣紅裳 (녹의홍상)

綠衣紅裳(녹의홍상)

여인의 고운 옷차림.

綠陰芳草 (녹음방초)

綠陰芳草(녹음방초)

푸른 나무 그늘과 꽃다운 풀. 곧 여름의 자연 경치.

路遙知馬力日久見人心 (노요지마력일구견인심)

路遙知馬力,日久見人心(노요지마력 일구견인심)

路 길 로, 길 노, 울짱 락, 울짱 낙 | 遙 멀 요 | 知 알 지 | 馬 말 마 | 力 힘 력, 힘 역 | 日 날 일 | 久 오랠 구 | 見 볼 견, 뵈올 현 | 人 사람 인 | 心 마음 심 |

길이 멀어야 말의 힘을 알 수 있고, 세월이 흘러야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은 같이 살아 보아야 알고, 말은 타 보아야 안다.

A Long Road Tests a Horse’s Strength


출전

명심보감(明心寶鑑) 교우편(交友篇)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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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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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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弄瓦之慶 (농와지경)

弄瓦之慶(농와지경)

딸을 낳은 경사.

勞心焦思 (노심초사)

勞心焦思(노심초사)

마음을 졸이며 생각에 골몰한다. 근심걱정이 많다

老生之夢 (노생지몽)

老生之夢(노생지몽)

인생은 한 바탕의 꿈과 같이 허무함.

鹿死誰手 (녹사수수)

鹿死誰手(녹사수수)

鹿 사슴 녹(록) | 死 죽을 사 | 誰 누구 수 | 手 손 수 |

사슴이 누구의 손에 죽는가라는 뜻으로, 승패(勝敗)를 결정(決定)하지 못하는 것을 이르는 말


진서(晉書) 석륵재기하(石勒載記下)에 나오는 이야기다.

서진(西晉)말기, 중국 5호16국(五胡十六國)의 하나인 후조(後趙)의 제1대 황제 석륵(石勒:재위 319∼333)은 재간이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석륵은 외국의 사신들을 연회에 초대하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자, 석륵은 신하인 서광(徐光)에게 말했다.

"그대가 보기에 나는 이전의 어느 제왕(帝王)과 비교될 것 같소?"

서광은 공손하게 대답하였다.

"폐하의 지모(智謀)와 무용(武勇)은 모두 한(漢)나라 고조(高祖)인 유방(劉邦:재위 BC 202∼BC 195)을 능가합니다."

석륵은 이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말은 너무 지나치오. 내가 만약 한나라 고조를 만났더라면, 나는 기꺼이 그의 부하가 되어, 그의 지휘를 받으며 한신이나 팽월 같은 장군들과 실력을 겨루었을 것이오. 만약 한나라의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를 만났더라면, 나는 그와 함께 중원(中原)에서 함께 말을 달리며 재간을 겨루어, 사슴이 누구의 손에 죽는지를 알지 못하였을 것이오[未知鹿死誰手]."

양쪽의 실력이 비슷해 누가 이길지 모를 정도로 미리 승부를 짐작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지위나 정권을 사슴에 비유하였는데, 천하가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라는 뜻에서 제위의 다툼을 비유하는 중원축록(中原逐鹿)과 비슷한 말이다.


출전

진서(晉書)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角逐(각축) | 中原逐鹿(중원축록) | 逐鹿(축록) |



路逢狹處難回避 (노봉협처난회피)

路逢狹處難回避(노봉협처난회피)

길 좁은 곳에서 원수를 만나면 피하기 어렵다는 뜻.

景行錄 曰, 恩義 廣施。人生何處不相逢。讐怨 莫結。路逢狹處 難回避。

"은혜와 의리를 널리 베풀라. 인생이 어느 곳에서든지 서로 만나지 않으랴? 원수와 원한을 맺지 말라. 길 좁은 곳에서 만나면 피하기 어렵다"라고 경행록에 나와있다.


관련 속담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


경행록, 명심보감, 명심보감:계선편, 원수

景行錄, 明心寶鑑, 明心寶鑑:繼善篇

怒髮衝冠 (노발충관)

怒髮衝冠(노발충관)

怒 성낼 노(로) | 髮 터럭 발 | 衝 찌를 충, 뒤얽힐 종 | 冠 갓 관 |

노한 머리털이 관을 추켜 올린다는 뜻으로, 몹시 성낸 모양(模樣)을 이르는 말


중국 전한(前漢)의 역사가인 사마 천(司馬遷:BC 145?∼BC 86?)이 저술한 사기(史記)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에 나오는 이야기.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나라의 혜문왕(惠文王)이 화씨지벽(和氏之璧)이라는 귀중한 보물을 갖게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은 화씨벽을 차지하려는 욕심에 혜문왕에게 진나라의 15성(城)과 바꾸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혜문왕은 화씨벽을 주더라도 15성을 얻지 못한채 속을 것만 같고, 그렇다고 주지 않으면 진나라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 걱정되었다.

혜문왕은 인상여를 사신으로 임명하여 진나라에 보냈다. 소양왕이 큰 나라의 위세를 부리며 성을 내주지 않고 인상여가 가져간 화씨지벽을 빼앗으려 하자 인상여는 진나라 소양왕의 무례한 행동을 크게 꾸짖었는데, '매우 분노하여 머리카락이 곤두서 갓이 벗어질 정도였다[怒髮上衝冠]'고 전해진다.


송나라 흥화군(興化軍) 선유(仙遊) 사람인 임예(林豫)는 신종(神宗) 희녕(熙寧) 9년(1076) 진사(進士)가 되었다. 일찍이 통리군(通利軍)을 맡아 소식(蘇軾) 형제와 친하게 사귀었다. 소철(蘇轍)이 폄적(貶謫)되자 그가 사(詞)를 지어 보냈는데, 그 안에 “화난 머리카락이 관을 뚫었고, 비장한 마음은 돌에 비긴만 하네.[怒髮衝冠 壯心比石]”란 구절이 있었다.


출전

사기(史記)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怒發大發(노발대발) | 怒髮上衝冠(노발상충관) | 노발충천(怒髮衝天) |


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老馬之智 (노마지지, lǎomǎzhīzhì)

老馬之智(노마지지)

老马之智(lǎomǎzhīzhì)

老 늙을 노(로) | 馬 말 마 | 之 갈 지 | 智 슬기 지,지혜 지 |

늙은 말의 지혜(智慧)라는 뜻으로, ①연륜이 깊으면 나름의 장점(長點)과 특기가 있음 ②저마다 한가지 재주는 지녔다는 말

An old dog for a hard road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저마다 장기(長技)나 장점을 지니고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한비자(韓非子)》설림(說林) 상편에 있는 이야기이다.

춘추시대 오패(五覇)의 한 사람이었던 제(齊)나라 환공(桓公) 때의 일이다. 어느 해 봄, 환공은 명재상 관중(管仲)과 대부(大夫) 습붕(隰朋)을 대동하고 고죽국(孤竹國:하북성(河北城)내)을 정벌하였다. 그런데 전쟁이 의외로 길어지는 바람에 그해 겨울에야 끝이 났다. 그래서 혹한 속에 지름길을 찾아 귀국하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

전군(全軍)이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져 떨고 있을 때 관중이 말하였다.

“이런 때 늙은 말의 지혜가 필요하다[老馬之智可用也(노마지지가용야)].”

즉시 늙은 말 한 마리를 풀어 놓았다. 그리고 전군이 그 뒤를 따라 행군한 지 얼마 안되어 큰길이 나타났다[乃放老馬而隨之 遂得道行(내방노마이수지 수득도행)].

또 한번은 산길을 행군하다가 식수가 떨어져 전군이 갈증에 시달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습붕이 말하였다.

“개미란 원래 여름엔 산 북쪽에 집을 짓지만 겨울엔 산 남쪽 양지 바른 곳에 집을 짓고 산다. 흙이 한 치[一寸]쯤 쌓인 개미집이 있으면 그 땅속 여덟 자[一仞≒8자≒2.4m]쯤 되는 곳에 물이 있는 법이다.”

군사들이 산을 뒤져 개미집을 찾은 다음 그곳을 파 내려가자 과연 샘물이 솟아났다.

이 이야기에 이어 한비는 그의 저서《한비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관중의 총명과 습붕의 지혜로도 모르는 것은 늙은 말과 개미를 스승으로 삼아 배웠다. 그러나 그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어리석음에도 성현의 지혜를 스승으로 삼아 배우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잘못된 일이 아닌가.”

노마지지란 여기서 나온 말인데, 노마식도(老馬識道)·노마지도(老馬知道)라고도 하며, 요즈음에도 ‘경험을 쌓은 사람이 갖춘 지혜’란 뜻으로 사용된다.

[유래]
韓非子(한비자) : 說林上(설림상) |


참조 한자어

동의어

老馬知途(노마지도) | 老馬識途(노마식도) : 老马识途(lǎomǎshítú) | 识途老马(shítúlǎomǎ) |

駑馬十駕 (노마십가)

駑馬十駕(노마십가)

駑 둔한 말 노, 둔할 노 | 馬 말 마 | 十 열 십 | 駕 멍에 가 |

둔한 말도 열흘 동안 수레를 끌 수 있다는 뜻으로, 재주 없는 사람도 노력(努力)하고 태만(怠慢)하지 않으면 재주 있는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음을 비유(比喩ㆍ譬喩)


중국 주(周)나라의 유학자(儒學者)인 순자(荀子)의 사상을 집록(輯錄)한 순자(荀子) 수신편(修身篇)에 나오는 말이다.

'천리마는 하루 만에 천 리를 달리는데, 둔한 말도 열흘 동안 달리면 이에 미칠 수 있다[夫驥一日而千里 駑馬十駕則亦及之矣].'

또한 '반 걸음이라도 쉬지 않으면 절룩거리며 가는 자라도 천리를 갈 수 있고, 흙을 쌓는데도 멈추지 않고 쌓아나가면 언덕이나 산을 이룰 것이다'라는 말도 있다.

駑馬란 걸음이 느린 말을 가리키며, 재능이 없고 무능한 사람을 비유하기도 한다. 말이 수레를 끌고 다니는 하루 동안의 노정(路程)을 일가(一駕)라 하니, 十駕란 곧 열흘간의 노정을 말한다.

駑馬十駕란 둔한 말이 열흘 동안 수레를 끌고 다니다라는 뜻이다. 이는 곧 재주 없는 사람이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훌륭한 사람에 미칠 수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영어의 Slow and steady wins the race. 라는 표현과 비슷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출전

순자(荀子) 수신편(修身篇)

綠林 (녹림, lùlín)

綠林(녹림)

绿林(lùlín)

綠 푸를 록 | 林 수풀 림


도둑의 별칭.


이 말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전한(前漢) 말기에 대사마(大司馬) 왕망(王莽)이 왕위를 찬탈하여 천자(天子)가 되고, 국호를 신(新)이라 고친 다음 모든 제도를 개혁하였다. 그러나 개혁정책이 너무 급격하여 혼란만 빚었고, 백성은 극도의 생활고에 빠져 새 왕조를 원망하게 되었다. AD 14년(천봉 4) 왕광(王匡) ·왕봉(王鳳) 일당이 이들 난민을 모아 녹림산(綠林山)에서 반기를 들었는데, 그 무리가 수백 명이었다. 그러자 관군에 쫓긴 마무(馬武) ·왕상(王常) ·성단(成丹) 등이 몰려와 함께 녹림산에 근거지를 차리고 마을을 공략하였는데, 이들의 세력이 몇 달 사이에 8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 후 이들은 형주자사(荊州刺使)가 이끈 관군 2만명과 싸워 크게 이기고, 세력이 커져 5만명이 되었을 때 유수(劉秀:光武帝)와 유현(劉玄)이 군사를 일으키자 이들과 합류하여 왕망을 위협하는 큰 세력을 이루었다. 녹림은 원래 산 이름이지만, 왕광의 무리가 굶주린 백성을 모아 이 곳을 근거지로 도둑질을 하였기 때문에 이 후부터 도둑의 소굴을 녹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수호지(水滸誌)》와 당(唐)나라 이섭(李涉)이 지은 우도시(遇盜詩)에도 도둑을 가리켜 녹림의 호객이라 하였다.

路柳牆花 (노류장화)

路柳牆花(노류장화)

누구든지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들과 담밑의 꽃이라는 뜻으로 기생 또는 몸을 파는 여자

老當益壯 (노당익장)

老當益壯(노당익장)

老当益壮(lǎodāngyìzhuàng)

老 늙을 노(로) | 當 마땅 당 | 益 더할 익, 넘칠 일 | 壯 장할 장 |

①늙을수록 더욱 강인한 마음과 뜻을 지녀야 함. ②나이는 들었으나 기력(氣力)은 더욱 좋아짐 ③또는, 그런 사람

old but vigorous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를 섬긴 명장 마원(馬援)은 열 두 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느 어렸을 때부터 큰 뜻을 품고 있었으며, 그의 형들도 그 장래(將來)를 주목(注目)하고 있었다.맏형 마황(馬況)은 그에게 『시경(詩經)』을 읽으라고 일렀지만, 마원은 케케묵은 책을 읽는 것을 싫어하고, 변지로 가서 목축을 하고 싶어했다. 마황은 아우 마원이 장래(將來)에 반드시 대성할 것이라 보고 그 소원을 들어 주었다.그 후 얼마 안 가서 뜻하지 않게 마황이 죽었다. 마원은 몹시 슬퍼하며, 과부가 된 형수를 잘 섬기고 아우로서의 예절(禮節)을 다했다. 그리고 북쪽 변지로 가는 것은 부득이 중단(中斷)해야만 했다. 뒤에 그는 시골 관원(官員)이 되었다. 한번은 죄인을 호송한 일이 있었다. 호송 도중 죄인의 신상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 달아나게 해주었다.마원도 북쪽 변경으로 도망가서 이름을 감춘 채 숨어 지내고 있었다. 다행히 대사면령이 내려 묵은 죄를 용서받은 그는 그 땅에 눌러 살면서 전부터 하고자 했던 목축업을 시작했다. 그의 선조가 예전에 그 곳에서 관원(官員) 노릇을 했기 때문에 많았는데, 모두들 그를 우두머리로 삼았다. 그는 목축과 함께 농업에도 종사(從事)했으며, 얼마 안 가서 소와 양이 수천 마리, 곡물이 숨나 석이나 되는 부자가 되었다.그는 항시 친구(親舊)에게 말했다. "대장부는, 곤란(困難)할 때는 의지를 보다 굳세게 갖고, 늙어서는 더욱 더 왕성해야만 한다(大丈夫爲志 當益堅 老當益壯)"그리고 또 말했다. "가멸지더라도 사람에게 베풀지 않으면 수전노일 뿐이다."그는 그 말대로 실천했다. 모은 돈이나 물건은 모조리 친척(親戚)이나 친구(親舊)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은 늘 수수한 옷차림으로 일에만 열중(熱中)했다.

출전
後漢書(후한서) 마원전(馬援傳)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老當益壯(노당익장) | 老当益壮(lǎodāngyìzhuàng) | 老益壯(노익장) |

論功行賞 (논공행상)

論功行賞(논공행상)

공적의 크고 작음을 따져 그에 알맞은 상을 준다는 말.


삼국시대의 魏(위)나라 文帝(문제) 曹丕(조비)는 병으로 죽기 며칠 전에 曹叡(조예)를 황태자로 정했다. 이 자리에서 문제는 장군이자 일가가 되는 曹眞(조진)과 曹休(조휴), 유교와 법에 정통한 陳群(진군), 원로인 司馬懿(사마의) 등 네 사람에게 뒷일을 간곡히 부탁했다.

문제의 죽음은 과연 吳(오)나라와 蜀(촉)나라에 위나라를 공격하는 기회를 주었다. 조예가 明帝(명제)로 등극한지 3개월 뒤 오나라의 孫權(손권)은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의 江夏郡(강하군)을 공격했다.

태수인 문빙이 공격을 막았다. 조정에서는 응원군을 보내 문빙을 도우려고 했다. 그러나 명제는 조정 중신들의 건의를 듣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오나라는 전통적으로 水戰(수전)에 강하다. 그런데도 그들이 배를 버리고 육상의 싸움에 도전한 것은 우리쪽의 무방비를 겨냥한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무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 못가서 지칠 것이다. 지금 문빙의 군대가 잘 버티고 있으니 攻守(공수)의 세력이 뒤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과연 얼마 뒤 손권은 후퇴했다. 오나라 장군 제갈근과 장패도 위나라를 공격해왔지만 대장군 사마의가 善戰(선전), 이들을 격파하고 장패를 목벴다. 용장 조휴도 오나라의 別動隊(별동대)를 격파했다.

삼국지는 싸움이 끝난 뒤 위나라 장병들의 「공에 따라 나누어준 포상은 그 공에 합당하게 각각에 주어졌다(論功行賞各有差․논공행상각유차)」라고 적고 있다.

弄假成眞 (농가성진)

弄假成眞(농가성진)

장난삼아 한 것이 참으로 한 것처럼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