羅雀掘鼠(라작굴서)
그물 라 | 참새 작 | 팔 굴 | 쥐 서 |
그물로 참새를 잡고 땅을 파서 쥐를 잡는다는 뜻으로, 최악의 상태에 이르러 어찌할 방법이 없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 羅雀掘鼠(나작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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螳螂窺蟬 (당랑규선, tánglángkuīchán)
螳螂窺蟬(당랑규선)
螳螂窥蝉(táng láng kuī chán)
螳 사마귀 당 | 螂 사마귀 랑 | 窺 엿볼 규 | 蟬 매미 선 |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려고 엿본다는 말로, 눈 앞의 이익에 어두워 뒤에 따를 걱정거리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
전한(前漢) 때 유향(劉向)이 지은 《설원(說苑)》정간(正諫)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랑포선(螳螂捕蟬)이라고도 한다. 《장자(莊子)》 산목편(山木篇)에 나오는 당랑박선(螳螂搏蟬)이나,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오는 당랑재후(螳螂在後)라는 말이 모두 같은 뜻이다.
춘추시대 말기 오왕(吳王) 부차(夫差)는 월나라 공략에 성공한 후 자만에 빠져 간신 백비의 중상을 믿고 상국(相國:재상) 오자서(伍子胥)를 죽였으며, 월(越)나라에서 보내 온 미인 서시(西施)와 유락 생활에 탐닉하였다. 월의 구천이 와신상담 재기를 노린다는 것을 아는 중신들이 간하여도 막무가내였다.
어느 날 아침 태자 우(友)는 젖은 옷을 입고 활을 든 채 부차를 만났다. “너는 아침부터 무엇을 그리 허둥대느냐?” 부차가 묻자, 우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침에 정원에 갔더니 높은 나뭇가지에 매미가 앉아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 뒤를 보니 사마귀 한 마리가 매미를 잡아먹으려고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홀연 참새[黃雀] 한 마리가 날아와서 그 사마귀를 먹으려고 노리는데, 사마귀는 통 기미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참새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습니다. 그런데 그만 활 쏘는 데 정신이 팔려 웅덩이 속으로 빠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옷을 이렇게 적신 것입니다. 천하에는 이런 예가 부지기수입니다. 이를테면 제나라는 까닭없이 노나라를 쳐서 그 땅을 손에 넣고 기뻐했지만, 우리 오나라에게 그 배후를 공격받고 대패했듯이 말입니다.”
부차는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너는 오자서가 못다한 충고를 할 셈이냐? 이제 그런 소리는 신물이 난다.”
충심에서 우러난 간언을 듣지 않은 부차는 결국 월나라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고, 그 자신은 자결하였다.
장자는 이 일화를 ‘모든 사물은 본래 서로 해를 끼치는 것이며, 이(利)와 해(害)는 서로가 서로를 불러들이는 것’이라는 비유로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 소탐대실(小貪大失)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출전]
說苑(설원) : 正諫 |
黃雀 ①꾀꼬리. 黃鶯兒(황앵아). ②참새. 依人雀(의인작). 賓雀(빈작).
관련 한자어
유의어
螳螂窺蟬(당랑규선) | 螳螂搏蟬(당랑박선, táng láng bó chán) | 螳螂捕蟬(당랑포선, táng láng bǔ chán) | 螳螂在後(당랑재후) |
說苑(설원) : 正諫 |
螳螂窥蝉(táng láng kuī chán)
螳 사마귀 당 | 螂 사마귀 랑 | 窺 엿볼 규 | 蟬 매미 선 |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려고 엿본다는 말로, 눈 앞의 이익에 어두워 뒤에 따를 걱정거리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
전한(前漢) 때 유향(劉向)이 지은 《설원(說苑)》정간(正諫)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랑포선(螳螂捕蟬)이라고도 한다. 《장자(莊子)》 산목편(山木篇)에 나오는 당랑박선(螳螂搏蟬)이나,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오는 당랑재후(螳螂在後)라는 말이 모두 같은 뜻이다.
춘추시대 말기 오왕(吳王) 부차(夫差)는 월나라 공략에 성공한 후 자만에 빠져 간신 백비의 중상을 믿고 상국(相國:재상) 오자서(伍子胥)를 죽였으며, 월(越)나라에서 보내 온 미인 서시(西施)와 유락 생활에 탐닉하였다. 월의 구천이 와신상담 재기를 노린다는 것을 아는 중신들이 간하여도 막무가내였다.
어느 날 아침 태자 우(友)는 젖은 옷을 입고 활을 든 채 부차를 만났다. “너는 아침부터 무엇을 그리 허둥대느냐?” 부차가 묻자, 우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침에 정원에 갔더니 높은 나뭇가지에 매미가 앉아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 뒤를 보니 사마귀 한 마리가 매미를 잡아먹으려고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홀연 참새[黃雀] 한 마리가 날아와서 그 사마귀를 먹으려고 노리는데, 사마귀는 통 기미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참새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습니다. 그런데 그만 활 쏘는 데 정신이 팔려 웅덩이 속으로 빠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옷을 이렇게 적신 것입니다. 천하에는 이런 예가 부지기수입니다. 이를테면 제나라는 까닭없이 노나라를 쳐서 그 땅을 손에 넣고 기뻐했지만, 우리 오나라에게 그 배후를 공격받고 대패했듯이 말입니다.”
부차는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너는 오자서가 못다한 충고를 할 셈이냐? 이제 그런 소리는 신물이 난다.”
충심에서 우러난 간언을 듣지 않은 부차는 결국 월나라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고, 그 자신은 자결하였다.
장자는 이 일화를 ‘모든 사물은 본래 서로 해를 끼치는 것이며, 이(利)와 해(害)는 서로가 서로를 불러들이는 것’이라는 비유로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 소탐대실(小貪大失)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출전]
說苑(설원) : 正諫 |
黃雀 ①꾀꼬리. 黃鶯兒(황앵아). ②참새. 依人雀(의인작). 賓雀(빈작).
관련 한자어
유의어
螳螂窺蟬(당랑규선) | 螳螂搏蟬(당랑박선, táng láng bó chán) | 螳螂捕蟬(당랑포선, táng láng bǔ chán) | 螳螂在後(당랑재후) |
說苑(설원) : 正諫 |
羅雀掘鼠 (나작굴서)
羅雀掘鼠(나작굴서)
그물 라 | 참새 작 | 팔 굴 | 쥐 서 |
그물로 참새를 잡고 땅을 파서 쥐를 잡는다는 뜻으로, 최악의 상태에 이르러 어찌할 방법이 없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新唐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唐)나라 현종(玄宗)의 통치 말기, 장순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그는 충직한 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재주도 많고 무인답게 담력 또한 컸으며 대의가 분명한 그런 인물이었다. 정치가 부패하자 변방의 안록산(安祿山)은 군대를 일으켜 당나라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서시 756년, 진원(眞源) 현령 장순(張巡)은 군대를 동원하여 안록산 토벌에 나섰다. 이듬해, 안록산의 아들 안경서(安慶緖)는 윤자기(尹子琦)를 보내 십만 대군으로 장순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당시 장순에게는 겨우 삼 천명의 병력 뿐으로 수적으로 열세였다. 윤자기의 군대는 어떤 때에는 하루에 20여 차례나 공격을 해 왔지만, 장순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싸웠다. 윤자기의 군대는 수적으로는 우세하였지만, 성(城)을 함락하지 못하며, 몇 달 동안 대치하게 되었다. 장순은 몇 달 동안 구원군을 기다렸지만 그들이 오지 않자, 성 안의 식량과 풀이 다 바닥날 상황이었다. 형세가 급박하게 변하자 장순은 부하 남제운(南霽雲)을 보내 포위망을 뚫고 임회(臨淮) 태수 하란진명(賀蘭進明)에게 위급한 소식을 알렸다. 그러나 임회태수는 장순의 명성을 시기하여, 그들의 위급함을 보고도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윤자기는 강공(强攻)으로는 성을 함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방법을 바꾸어 장순에게 투항을 권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장순은 이에 굴하지 않고, 쉴새 없이 공격해 오는 적들을 모두 물리쳤다. 얼마 후, 성안의 식량이 점점 줄어들자, 군인들은 매일 한 수저의 쌀만을 먹었다. 이에 장순은 먹을 것을 확보하기 위하여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심지어는 그물을 쳐서 참새를 잡고 땅을 파서 쥐를 잡으며, 갑옷과 활에 붙어있는 소가죽을 삶아서 굶주림을 달래라고 하였다(至羅雀掘鼠, 煮鎧弩以食).
장순은 지휘관의 입장에서 자식같은 병사들의 몸부림을 안타깝게 여겨 자기 아내를 죽여 국을 끓여서 병사들에게 먹이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상황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악화되어 갔고, 더 이상 성을 고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성으로 진격해 들어오는 반란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장순이 항복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항복을 요구하는 반란군들을 향해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고는 청청병력 같은 소리로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반란군은 그 자리에서 그의 목을 베었다.
죽음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장순의 부하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의 죽음과 바꾼 충성심에 새삼 고개를 떨구게 되었다.
그물 라 | 참새 작 | 팔 굴 | 쥐 서 |
그물로 참새를 잡고 땅을 파서 쥐를 잡는다는 뜻으로, 최악의 상태에 이르러 어찌할 방법이 없음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新唐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唐)나라 현종(玄宗)의 통치 말기, 장순이라는 장수가 있었다. 그는 충직한 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재주도 많고 무인답게 담력 또한 컸으며 대의가 분명한 그런 인물이었다. 정치가 부패하자 변방의 안록산(安祿山)은 군대를 일으켜 당나라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서시 756년, 진원(眞源) 현령 장순(張巡)은 군대를 동원하여 안록산 토벌에 나섰다. 이듬해, 안록산의 아들 안경서(安慶緖)는 윤자기(尹子琦)를 보내 십만 대군으로 장순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당시 장순에게는 겨우 삼 천명의 병력 뿐으로 수적으로 열세였다. 윤자기의 군대는 어떤 때에는 하루에 20여 차례나 공격을 해 왔지만, 장순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싸웠다. 윤자기의 군대는 수적으로는 우세하였지만, 성(城)을 함락하지 못하며, 몇 달 동안 대치하게 되었다. 장순은 몇 달 동안 구원군을 기다렸지만 그들이 오지 않자, 성 안의 식량과 풀이 다 바닥날 상황이었다. 형세가 급박하게 변하자 장순은 부하 남제운(南霽雲)을 보내 포위망을 뚫고 임회(臨淮) 태수 하란진명(賀蘭進明)에게 위급한 소식을 알렸다. 그러나 임회태수는 장순의 명성을 시기하여, 그들의 위급함을 보고도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윤자기는 강공(强攻)으로는 성을 함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방법을 바꾸어 장순에게 투항을 권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장순은 이에 굴하지 않고, 쉴새 없이 공격해 오는 적들을 모두 물리쳤다. 얼마 후, 성안의 식량이 점점 줄어들자, 군인들은 매일 한 수저의 쌀만을 먹었다. 이에 장순은 먹을 것을 확보하기 위하여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심지어는 그물을 쳐서 참새를 잡고 땅을 파서 쥐를 잡으며, 갑옷과 활에 붙어있는 소가죽을 삶아서 굶주림을 달래라고 하였다(至羅雀掘鼠, 煮鎧弩以食).
장순은 지휘관의 입장에서 자식같은 병사들의 몸부림을 안타깝게 여겨 자기 아내를 죽여 국을 끓여서 병사들에게 먹이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상황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악화되어 갔고, 더 이상 성을 고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성으로 진격해 들어오는 반란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장순이 항복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항복을 요구하는 반란군들을 향해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고는 청청병력 같은 소리로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자 반란군은 그 자리에서 그의 목을 베었다.
죽음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장순의 부하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의 죽음과 바꾼 충성심에 새삼 고개를 떨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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