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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書須用意一字值千金 (독서수용의일자치천금)
读书须用意,一字值千金
读 dú | 书 shū | 须 xū | 用 yòng | 意 yì | 一 yī | 字 zì | 值 zhí | 千 qiān | 金 jīn |
- 中國俗談
Intention of required study, the word worth a thousand gold.
- Chinese Proverb
Meaning: When reading, don’t let a single word escape your attention; one word may be worth a thousand pieces of gold. This proverb stresses the fact that study requires undivided attention. And if there is something you don't understand, interrupt yourself. Only in this way can study be rewarded.
책을 읽고 그 뜻을 가다듬으면, 한 글자가 천냥의 가치가 있다. [讀書須用意 一字值千金(독서수용의 일자치천금)]
- 중국속담(中國俗談)
讀 읽을 독,구절 두 | 書 글 서 | 須 모름지기 수, 수염 수 | 用 쓸 용 | 意 뜻 의, 기억할 억 | 一 한 일 | 字 글자 자 | 値 값 치 | 千 일천 천, 밭두둑 천, 그네 천 | 金 성씨 김, 쇠 금 |
燈下不明 (등하불명)
燈下不明(등하불명)
燈 등불 등 | 下 아래 하 | 不 아닐 불 | 明 밝을 명 |
등잔 밑이 어둡다는 뜻으로 바로 가까이에 있는 것을 모른다는 말.
[출전]
東言解(동언해).
관련 속담
동의어·유의어
¶ 등잔 밑이 어둡다.
¶ 업은 아이 삼 년 찾는다.
¶ One has to go abroad to get news of home.
¶ The beacon does not shine on its own base.
燈 등불 등 | 下 아래 하 | 不 아닐 불 | 明 밝을 명 |
등잔 밑이 어둡다는 뜻으로 바로 가까이에 있는 것을 모른다는 말.
[출전]
東言解(동언해).
관련 속담
동의어·유의어
¶ 등잔 밑이 어둡다.
¶ 업은 아이 삼 년 찾는다.
¶ One has to go abroad to get news of home.
¶ The beacon does not shine on its own base.
燈火可親 (등화가친)
燈火可親(등화가친)
가을밤은 등불을 가까이 하여 글읽기에 심기(心氣)가 좋다는 뜻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燈火可親(등화가친) | 新凉燈火(신량등화) | 天高馬肥(천고마비) | 秋高气爽(qiūgāoqìshuǎng, 추고기상) | 秋高馬肥(추고마비) |
가을밤은 등불을 가까이 하여 글읽기에 심기(心氣)가 좋다는 뜻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燈火可親(등화가친) | 新凉燈火(신량등화) | 天高馬肥(천고마비) | 秋高气爽(qiūgāoqìshuǎng, 추고기상) | 秋高馬肥(추고마비) |
得全全昌 (득전전창)
得全全昌(득전전창)
得 얻을 득 | 全 완전할 전 | 全 완전할 전 | 昌 창성할 창 |
일을 도모할 때 만전을 기해야 번창한다.
무릇 일을 꾀하는 데 萬全之策(만전지책)을 쓰면 성공하여 昌盛(창성)하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하여 망한다는 말.
중국 한나라 때 일이다. 매승이라는 문인이 한나라 오왕에게 올린 상소문에는 `득전자전창(得全者全昌) 실전자전망(失全者全亡)`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출전]
史記(사기) 田敬仲完世家(전경중완세가)
得 얻을 득 | 全 완전할 전 | 全 완전할 전 | 昌 창성할 창 |
일을 도모할 때 만전을 기해야 번창한다.
무릇 일을 꾀하는 데 萬全之策(만전지책)을 쓰면 성공하여 昌盛(창성)하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하여 망한다는 말.
중국 한나라 때 일이다. 매승이라는 문인이 한나라 오왕에게 올린 상소문에는 `득전자전창(得全者全昌) 실전자전망(失全者全亡)`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출전]
史記(사기) 田敬仲完世家(전경중완세가)
得意洋洋 (득의양양)
得意洋洋(득의양양)
得 얻을 득 | 意 뜻 의 | 洋 넘칠 양 | 洋 넘칠 양 |
사기(史記) 관안열전(管晏列傳)에는 겸손의 교훈을 주는 고사가 기록되어 있다. 춘추시기, 제(齊)나라의 유명한 재상인 안영(晏 )에게는 한 마부(馬夫)가 있었다. 어느 날, 안영이 마차를 타고 외출을 하려는데, 마부의 처가 문틈으로 자기 남편의 거동을 엿보았다. 자신의 남편은 수레 위에 큰 차양을 씌우더니, 마차의 앞자리에 앉아 채찍질하는 흉내를 내며 의기양양하여 매우 만족스러워 하고 있었다[意氣揚揚, 甚自得也]
남편이 집에 돌아오자, 그의 처는 그에게 이혼해야겠다고 하였다. 영문을 모르는 마부가 그 이유를 묻자, 아내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안자(晏子)께서는 키가 6척도 못되지만 나라의 재상으로 명성이 높습니다. 그분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매우 겸손한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키가 8척이 넘으면서도 남의 마부가 된게 만족스런 듯 기뻐하니, 저는 이런 남자의 곁을 떠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후 마부는 늘 겸손한 태도를 지니게 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안자는 그를 대부(大夫)로 천거하였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意氣揚揚(의기양양) |
得 얻을 득 | 意 뜻 의 | 洋 넘칠 양 | 洋 넘칠 양 |
사기(史記) 관안열전(管晏列傳)에는 겸손의 교훈을 주는 고사가 기록되어 있다. 춘추시기, 제(齊)나라의 유명한 재상인 안영(晏 )에게는 한 마부(馬夫)가 있었다. 어느 날, 안영이 마차를 타고 외출을 하려는데, 마부의 처가 문틈으로 자기 남편의 거동을 엿보았다. 자신의 남편은 수레 위에 큰 차양을 씌우더니, 마차의 앞자리에 앉아 채찍질하는 흉내를 내며 의기양양하여 매우 만족스러워 하고 있었다[意氣揚揚, 甚自得也]
남편이 집에 돌아오자, 그의 처는 그에게 이혼해야겠다고 하였다. 영문을 모르는 마부가 그 이유를 묻자, 아내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안자(晏子)께서는 키가 6척도 못되지만 나라의 재상으로 명성이 높습니다. 그분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매우 겸손한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키가 8척이 넘으면서도 남의 마부가 된게 만족스런 듯 기뻐하니, 저는 이런 남자의 곁을 떠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후 마부는 늘 겸손한 태도를 지니게 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안자는 그를 대부(大夫)로 천거하였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意氣揚揚(의기양양) |
登龍門 (등용문)
登龍門(등용문)
용문에 오르다. 곧 난관을 돌파함으로써 약진의 기회를 붙잡는다는 말. 옛날에는 과거에, 오늘날에는 고시 등에 합격해 출세의 관문을 들어섰다는 뜻으로 쓰인다.
용문이란 黃河(황하)상류에 있는 골짜기 이름. 이 근처는 물의 흐름이 가파르고 빨라서 보통 물고기는 올라가지 못한다고 한다.그래서 이 용문 밑으로 수천마리의 물고기가 몰려들지만 여간해선 용문으로 오르지 못하는데 일단 오르기만 하면 용이 된다고 전해지고 있다.
後漢(후한)말기는 宦官(환관)들의 횡포가 극심했다. 일부 정의파 관료들은 환관들의 사악한 횡포에 항쟁하다가 이른바 「黨錮(당고)의 화」라는 대규모적인 탄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 정의파 관료들의 領袖(영수)로 지목되는 인물은 李膺(이응)이었다. 출세가도를 순탄하게 달려오던 그도 환관들의 비위를 거슬러 지방으로 좌천되었다가 투옥까지 당하기도 했다.
혼탁한 官界(관계)에서도 이응은 홀로 先賢(선현)들의 가르침을 지키면서 절조를 굽히지 않고 고결한 품위를 유지했다. 그 때문에 그의 명성은 점점 올라가 마침내 「천하의 모범은 이응」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신진 관료들도 이응의 인정을 받고 추천받는 것을 큰 영예로 알았는데 그에게 인정받게 되면 「용문에 올랐다(登龍門)」고 했다.
「등용문」의 반대가 되는 말로 點額(점액)이란 것이 있다. 額(액)은 이마, 點(점)은 상처를 입는다는 뜻. 용문에 오르려고 급류에 도전한 물고기가 있는 힘을 다해 솟구치려 하다가 거센 물살에 휩쓸려 바위에 비늘을 긁혀 상처를 입는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출세경쟁에서 탈락한 落伍者(낙오자)를 가리킨다.
용문에 오르다. 곧 난관을 돌파함으로써 약진의 기회를 붙잡는다는 말. 옛날에는 과거에, 오늘날에는 고시 등에 합격해 출세의 관문을 들어섰다는 뜻으로 쓰인다.
용문이란 黃河(황하)상류에 있는 골짜기 이름. 이 근처는 물의 흐름이 가파르고 빨라서 보통 물고기는 올라가지 못한다고 한다.그래서 이 용문 밑으로 수천마리의 물고기가 몰려들지만 여간해선 용문으로 오르지 못하는데 일단 오르기만 하면 용이 된다고 전해지고 있다.
後漢(후한)말기는 宦官(환관)들의 횡포가 극심했다. 일부 정의파 관료들은 환관들의 사악한 횡포에 항쟁하다가 이른바 「黨錮(당고)의 화」라는 대규모적인 탄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 정의파 관료들의 領袖(영수)로 지목되는 인물은 李膺(이응)이었다. 출세가도를 순탄하게 달려오던 그도 환관들의 비위를 거슬러 지방으로 좌천되었다가 투옥까지 당하기도 했다.
혼탁한 官界(관계)에서도 이응은 홀로 先賢(선현)들의 가르침을 지키면서 절조를 굽히지 않고 고결한 품위를 유지했다. 그 때문에 그의 명성은 점점 올라가 마침내 「천하의 모범은 이응」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신진 관료들도 이응의 인정을 받고 추천받는 것을 큰 영예로 알았는데 그에게 인정받게 되면 「용문에 올랐다(登龍門)」고 했다.
「등용문」의 반대가 되는 말로 點額(점액)이란 것이 있다. 額(액)은 이마, 點(점)은 상처를 입는다는 뜻. 용문에 오르려고 급류에 도전한 물고기가 있는 힘을 다해 솟구치려 하다가 거센 물살에 휩쓸려 바위에 비늘을 긁혀 상처를 입는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출세경쟁에서 탈락한 落伍者(낙오자)를 가리킨다.
得隴望蜀 (득롱망촉)
得隴望蜀(득롱망촉)
한(漢) 광무제가 농 땅을 얻고서도 촉(蜀) 땅을 탐내듯이 욕심에 한이 없음을 이르는 말.
後漢(후한)을 세운 광무제가 마침내 帝位(제위)에 올라 낙양을 도읍으로 정했을 무렵이다.
그때 유분자는 前漢(전한)의 수도 장안을 차지하고 있었고 외효는 농서(감숙성)에, 공손술은 촉(사천성)에, 유영은 수양(하남성)에, 이헌은 노강(안휘성)에, 장보는 임치(산동성)에 割據(할거)하고 있었다.
이들중 유분자 유영 이헌 공손술은 스스로 황제를 칭할만큼 세력이 커졌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광무제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공손술과 더불어 남아있던 외효도 병으로 죽자 농서마저 광무제 차지가 되었다.
이때 광무제는 『인간이란 만족할줄 모른다더니 그 말이 맞군. 이미 내가 농을 얻고도 다시 촉을 바라고 있으니 』라고 했다.
4년뒤 과연 광무제는 촉을 손아귀에 넣고 宿願(숙원)을 이루게 된다.
또 삼국시대가 시작될 즈음 위나라의 조조는 농을 쳐서 수중에 넣었다. 이때 조조의 부하 사마의는 조금만 무리를 하면 적의 본거지인 촉의 땅 모두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進言(진언)에 조조는 말한다.
『인간이 만족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 이미 농을 얻은 마당에 촉을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야』
한(漢) 광무제가 농 땅을 얻고서도 촉(蜀) 땅을 탐내듯이 욕심에 한이 없음을 이르는 말.
後漢(후한)을 세운 광무제가 마침내 帝位(제위)에 올라 낙양을 도읍으로 정했을 무렵이다.
그때 유분자는 前漢(전한)의 수도 장안을 차지하고 있었고 외효는 농서(감숙성)에, 공손술은 촉(사천성)에, 유영은 수양(하남성)에, 이헌은 노강(안휘성)에, 장보는 임치(산동성)에 割據(할거)하고 있었다.
이들중 유분자 유영 이헌 공손술은 스스로 황제를 칭할만큼 세력이 커졌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광무제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공손술과 더불어 남아있던 외효도 병으로 죽자 농서마저 광무제 차지가 되었다.
이때 광무제는 『인간이란 만족할줄 모른다더니 그 말이 맞군. 이미 내가 농을 얻고도 다시 촉을 바라고 있으니 』라고 했다.
4년뒤 과연 광무제는 촉을 손아귀에 넣고 宿願(숙원)을 이루게 된다.
또 삼국시대가 시작될 즈음 위나라의 조조는 농을 쳐서 수중에 넣었다. 이때 조조의 부하 사마의는 조금만 무리를 하면 적의 본거지인 촉의 땅 모두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進言(진언)에 조조는 말한다.
『인간이 만족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 이미 농을 얻은 마당에 촉을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야』
得道多助失道寡助 (득도다조실도과조)
得道多助 失道寡助(득도다조 실도과조)
得道多助,失道寡助 [dédàoduōzhù, shīdàoguǎzhù]
도(道)에 맞으면 도와 주는 사람이 많고, 도(道)에 어긋나면 도와 주는 사람이 적다.
得道多助,失道寡助 [dédàoduōzhù, shīdàoguǎzhù]
도(道)에 맞으면 도와 주는 사람이 많고, 도(道)에 어긋나면 도와 주는 사람이 적다.
斗酒百篇 (두주백편, dǒujiǔbǎipiān)
斗酒百篇(두주백편)
斗酒百篇(dǒujiǔbǎipiān)
斗 말 두,싸울 두,싸울 투,싸울 각 | 酒 술 주 | 百 일백 백 | 篇 책 편 |
술을 좋아하고 시를 잘 짓다.
말술을 마시는 동안에 시 백 편을 쓰다. 두보의 《飮中八仙歌》에서 “李白斗酒诗百篇,长安市上酒家眠”라는 시구에서 나온 말로, 이백이 술 마신 후에 시를 잘 지었음을 칭찬한 말임.
출전: 飮中八仙歌
관련 한시
飮中八仙歌(음중팔선가) |
斗酒百篇(dǒujiǔbǎipiān)
斗 말 두,싸울 두,싸울 투,싸울 각 | 酒 술 주 | 百 일백 백 | 篇 책 편 |
술을 좋아하고 시를 잘 짓다.
말술을 마시는 동안에 시 백 편을 쓰다. 두보의 《飮中八仙歌》에서 “李白斗酒诗百篇,长安市上酒家眠”라는 시구에서 나온 말로, 이백이 술 마신 후에 시를 잘 지었음을 칭찬한 말임.
출전: 飮中八仙歌
관련 한시
飮中八仙歌(음중팔선가) |
杜撰 (두찬)
杜撰(두찬)
원래는 杜黙(두묵)이 지은 작품이란 뜻. 典據(전거)가 확실하지 못한 저술이나 틀린 곳이 많은 작품을 말한다.
두묵은 宋(송)나라 때 문인으로 그가 지은 시는 당시의 大家(대가) 歐陽修(구양수)의 작품과 함께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두묵은 흔히 규칙에 어긋난 시, 다시 말하면 韻律(운율)이 맞지 않는 시를 지었는데 그 破格(파격) 때문에 인기를 끌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격식에 맞지 않는 詩文(시문)을 가리켜 「두묵의 작품」(杜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송나라의 왕무가 지은 「야객총서」에 나오는 말이다.
왕무는 또 이 책에서 이렇게도 적고 있다.
『일반적으로 杜는 「그 땅에서 나는 토산물」을 가리키는데 杜자가 붙은 말은 좋지 못하거나 변변치 않다는 뜻으로 쓰인다. 예를 들면 좋지 못한 밭이나 농장을 杜田(두전) 杜園(두원)이라고 한다. 그리고 집에서 자기 손으로 빚은 묽고 맛없는 술을 杜酒(두주)라고 한다. 그러니까 杜撰도 변변치 못한 작품이란 뜻이 된다』
「두찬」의 語源(어원)에 대해서는 이밖에도 여러가지 異說(이설)이 있다. 한가지만 더 들어보자.
송나라 석문렬이 쓴 「湘山野錄(상산야록)」에서 道敎(도교)의 경전인 「道藏(도장)」에 관해 언급한 대목에도 「두찬」이란 말이 나온다.
『「도장」 5천여권 중 「道德經(도덕경)」 2권만이 진본이고 나머지는 蜀(촉)나라의 두광정이 쓴 僞作(위작)이다. 이때부터 하찮은 위작을 「두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런 식이어서 「두찬」의 어원도 두찬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 있다.
원래는 杜黙(두묵)이 지은 작품이란 뜻. 典據(전거)가 확실하지 못한 저술이나 틀린 곳이 많은 작품을 말한다.
두묵은 宋(송)나라 때 문인으로 그가 지은 시는 당시의 大家(대가) 歐陽修(구양수)의 작품과 함께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두묵은 흔히 규칙에 어긋난 시, 다시 말하면 韻律(운율)이 맞지 않는 시를 지었는데 그 破格(파격) 때문에 인기를 끌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격식에 맞지 않는 詩文(시문)을 가리켜 「두묵의 작품」(杜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송나라의 왕무가 지은 「야객총서」에 나오는 말이다.
왕무는 또 이 책에서 이렇게도 적고 있다.
『일반적으로 杜는 「그 땅에서 나는 토산물」을 가리키는데 杜자가 붙은 말은 좋지 못하거나 변변치 않다는 뜻으로 쓰인다. 예를 들면 좋지 못한 밭이나 농장을 杜田(두전) 杜園(두원)이라고 한다. 그리고 집에서 자기 손으로 빚은 묽고 맛없는 술을 杜酒(두주)라고 한다. 그러니까 杜撰도 변변치 못한 작품이란 뜻이 된다』
「두찬」의 語源(어원)에 대해서는 이밖에도 여러가지 異說(이설)이 있다. 한가지만 더 들어보자.
송나라 석문렬이 쓴 「湘山野錄(상산야록)」에서 道敎(도교)의 경전인 「道藏(도장)」에 관해 언급한 대목에도 「두찬」이란 말이 나온다.
『「도장」 5천여권 중 「道德經(도덕경)」 2권만이 진본이고 나머지는 蜀(촉)나라의 두광정이 쓴 僞作(위작)이다. 이때부터 하찮은 위작을 「두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런 식이어서 「두찬」의 어원도 두찬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 있다.
倒行逆施 (도행역시)
도행역시(倒行逆施)
倒 거꾸로 할 도 | 行 행할 행 | 逆 거스를 역 | 施 베풀 시 |
차례(次例)를 거꾸로 시행(施行)한다는 뜻으로, 곧 도리(道理)에 순종(順從)하지 않고 일을 행(行)하며 상도(常道)를 벗어나서 일을 억지로 함을 뜻
춘추 시대 초(楚)나라에 오자서(伍子胥)란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 오사(伍奢)는 왕자의 스승이고 형 역시 관직에 있었는데, 비무기(費無忌)라는 간신배의 모략에 걸려 아버지와 형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자기 목숨도 위태롭다고 본 오자서는 깊은 원한을 품고 멀리 도망치기로 했다. 그런데 도중에 친구인 신포서(申包胥)를 만나게 되었다.
“자네 어디로 가는 건가?”
“동쪽 오(吳)나라로 갈까 하네. 지금은 힘이 없어 달아나지만, 이놈의 나라를 멸하여 원수를 갚을 테니 두고 보게.”
오자서의 심정을 이해하는 신포서는 깊은 동정을 표하는 한편, 좋은 말로 다독거렸다.
“자네 마음을 내가 왜 못 헤아리겠는가. 하지만 원한을 슬기롭게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참된 선비일세. 더군다나 사적인 감정으로 자기 나라를 뒤엎겠다는 발상은 듣기에도 거북하네 그려.”
그렇지만 뼈저린 원한에 불타는 오자서의 귀에 그 말이 제대로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언성이 높아졌고, 끝내 친구가 마음을 돌리지 않음에 화가 난 신포서는 얼굴을 붉혔다.
“좋아. 자네가 정 초나라를 멸하겠다면 어디 해 보게나! 나는 역으로 기필코 구해 보이고 말 테니.”
이런 언쟁으로 두 사람은 우정을 깨뜨리고 결별하게 되었다.
양자강을 따라 고생고생 끝에 오나라로 간 오자서는 공자(公子) 광(光)을 사귀었다. 그리하여 광이 사촌 아우인 요(僚)임금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할 때 적극 협조하여 출세의 기회를 잡았다. 이렇게 하여 등극한 오왕이 역사상으로 유명한 합려(闔閭)인데, 특출한 자질을 발휘하여 두각을 나타낸 오자서는 대부(大夫)가 되어 조정 일을 좌지우지하는 실력자로 올라섰다. 그는 합려에게 초나라를 정벌하자고 기회 있을 때마다 설득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왕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한 오자서는 정벌군의 선두에 서서 고국인 초나라로 향했다.
진격에 진격을 거듭한 오나라 군대는 마침내 초나라 도읍인 영(郢)에 들이닥쳤고, 별다른 대비도 없었던 초나라는 난리가 났다. 이때는 이미 평왕이 죽고 소왕(昭王)이 후사를 잇고 있었는데, 소왕은 혼비백산하여 도성을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 도성을 점령하긴 했으나 살아 있는 평왕에게 직접 복수할 수 없게 된 오자서는 무덤을 파헤쳐 유해를 끌어내어 마구 채찍질을 했고[掘墓鞭屍(굴묘편시)], 그러고도 모자라 뼈를 짓찧어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이 정도로는 내 아버님과 형님의 원한을 풀기에 모자란다. 원수의 아들 놈을 붙들어 죽여야만 끝나는 것이다.”
오자서는 이렇게 부르짖으며 부하들로 하여금 소왕을 추적하라고 명령했다. 그때 옛 친구 신포서의 편지가 날아왔다. 행동이 너무 잔혹하지 않느냐고 꾸짖고, 그 정도에서 그쳐 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오자서는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기 때문에[日暮途遠(일모도원)] 도리에 어긋나는 줄 알면서도 부득이하게 순리에 거슬러 행동했다[倒行逆施(도행역시)]’고 거절했다.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판단한 신포서는 북쪽 진(秦)나라에 달려가 애공(哀公)을 붙들고 눈물로 구원군을 요청했고, 그 애소에 감복한 애공은 마침내 출병을 허락했다.
“진나라가 끼어들겠다고? 좋다! 어디 맛을 보여 주지.”
오자서는 투지를 불태우며 이번에는 창끝을 진나라에 겨누었다. 그런데 이때 오나라 국내에 반란이 일어났다. 다급해진 오자서는 진나라와의 결전과 소왕 추적을 포기하고 회군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오나라에 돌아오자마자 반란군을 격파해 급한 불은 껐지만, 그를 신임한 합려가 죽고 공자인 부차(夫差)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그의 입지는 눈에 띄게 약화되어 갔다.
부차는 타국 출신으로 자기네 나라에 들어와서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오자서를 평소부터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왕권을 쥐게 되자 그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것이다. 오자서를 시기하던 백비(佰嚭)가 갖은 험담으로 중상모략하자, 부차는 그 말을 전적으로 믿고 오자서로 하여금 자결하도록 명령했다.
“아하, 세상 이치란 결국 이런 것인가!”
오자서는 여전히 해소하지 못한 채 자결하고 말았다.
출전
史記(사기) 伍子胥傳(오자서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倒行(도행) |
참조어
掘墓鞭屍(굴묘편시) | 倒行逆施(도행역시) | 日暮途遠(일모도원) |
倒 거꾸로 할 도 | 行 행할 행 | 逆 거스를 역 | 施 베풀 시 |
차례(次例)를 거꾸로 시행(施行)한다는 뜻으로, 곧 도리(道理)에 순종(順從)하지 않고 일을 행(行)하며 상도(常道)를 벗어나서 일을 억지로 함을 뜻
춘추 시대 초(楚)나라에 오자서(伍子胥)란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 오사(伍奢)는 왕자의 스승이고 형 역시 관직에 있었는데, 비무기(費無忌)라는 간신배의 모략에 걸려 아버지와 형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자기 목숨도 위태롭다고 본 오자서는 깊은 원한을 품고 멀리 도망치기로 했다. 그런데 도중에 친구인 신포서(申包胥)를 만나게 되었다.
“자네 어디로 가는 건가?”
“동쪽 오(吳)나라로 갈까 하네. 지금은 힘이 없어 달아나지만, 이놈의 나라를 멸하여 원수를 갚을 테니 두고 보게.”
오자서의 심정을 이해하는 신포서는 깊은 동정을 표하는 한편, 좋은 말로 다독거렸다.
“자네 마음을 내가 왜 못 헤아리겠는가. 하지만 원한을 슬기롭게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참된 선비일세. 더군다나 사적인 감정으로 자기 나라를 뒤엎겠다는 발상은 듣기에도 거북하네 그려.”
그렇지만 뼈저린 원한에 불타는 오자서의 귀에 그 말이 제대로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언성이 높아졌고, 끝내 친구가 마음을 돌리지 않음에 화가 난 신포서는 얼굴을 붉혔다.
“좋아. 자네가 정 초나라를 멸하겠다면 어디 해 보게나! 나는 역으로 기필코 구해 보이고 말 테니.”
이런 언쟁으로 두 사람은 우정을 깨뜨리고 결별하게 되었다.
양자강을 따라 고생고생 끝에 오나라로 간 오자서는 공자(公子) 광(光)을 사귀었다. 그리하여 광이 사촌 아우인 요(僚)임금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할 때 적극 협조하여 출세의 기회를 잡았다. 이렇게 하여 등극한 오왕이 역사상으로 유명한 합려(闔閭)인데, 특출한 자질을 발휘하여 두각을 나타낸 오자서는 대부(大夫)가 되어 조정 일을 좌지우지하는 실력자로 올라섰다. 그는 합려에게 초나라를 정벌하자고 기회 있을 때마다 설득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왕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한 오자서는 정벌군의 선두에 서서 고국인 초나라로 향했다.
진격에 진격을 거듭한 오나라 군대는 마침내 초나라 도읍인 영(郢)에 들이닥쳤고, 별다른 대비도 없었던 초나라는 난리가 났다. 이때는 이미 평왕이 죽고 소왕(昭王)이 후사를 잇고 있었는데, 소왕은 혼비백산하여 도성을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 도성을 점령하긴 했으나 살아 있는 평왕에게 직접 복수할 수 없게 된 오자서는 무덤을 파헤쳐 유해를 끌어내어 마구 채찍질을 했고[掘墓鞭屍(굴묘편시)], 그러고도 모자라 뼈를 짓찧어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이 정도로는 내 아버님과 형님의 원한을 풀기에 모자란다. 원수의 아들 놈을 붙들어 죽여야만 끝나는 것이다.”
오자서는 이렇게 부르짖으며 부하들로 하여금 소왕을 추적하라고 명령했다. 그때 옛 친구 신포서의 편지가 날아왔다. 행동이 너무 잔혹하지 않느냐고 꾸짖고, 그 정도에서 그쳐 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오자서는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기 때문에[日暮途遠(일모도원)] 도리에 어긋나는 줄 알면서도 부득이하게 순리에 거슬러 행동했다[倒行逆施(도행역시)]’고 거절했다.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판단한 신포서는 북쪽 진(秦)나라에 달려가 애공(哀公)을 붙들고 눈물로 구원군을 요청했고, 그 애소에 감복한 애공은 마침내 출병을 허락했다.
“진나라가 끼어들겠다고? 좋다! 어디 맛을 보여 주지.”
오자서는 투지를 불태우며 이번에는 창끝을 진나라에 겨누었다. 그런데 이때 오나라 국내에 반란이 일어났다. 다급해진 오자서는 진나라와의 결전과 소왕 추적을 포기하고 회군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오나라에 돌아오자마자 반란군을 격파해 급한 불은 껐지만, 그를 신임한 합려가 죽고 공자인 부차(夫差)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그의 입지는 눈에 띄게 약화되어 갔다.
부차는 타국 출신으로 자기네 나라에 들어와서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오자서를 평소부터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왕권을 쥐게 되자 그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것이다. 오자서를 시기하던 백비(佰嚭)가 갖은 험담으로 중상모략하자, 부차는 그 말을 전적으로 믿고 오자서로 하여금 자결하도록 명령했다.
“아하, 세상 이치란 결국 이런 것인가!”
오자서는 여전히 해소하지 못한 채 자결하고 말았다.
출전
史記(사기) 伍子胥傳(오자서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倒行(도행) |
참조어
掘墓鞭屍(굴묘편시) | 倒行逆施(도행역시) | 日暮途遠(일모도원) |
塗炭之苦 (도탄지고)
塗炭之苦(도탄지고)
塗 진흙 도 | 炭 숯 탄 | 之 갈 지 | 苦 괴로울 고 |
서경(書經) 중훼지고(仲虺之誥)에는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어진 신하였던 중 훼가 탕왕에게 고하는 글이 실려있다. 탕왕은 무력으로 왕위를 차지한 것을 늘 괴롭게 여기고 후세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구실 삼을까 염려하였다. 중훼는 이러한 탕왕의 마음을 알고 다음과 같이 아뢰어 그를 격려하였다.
하늘은 총명한 이를 내셔서 이들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夏)나라 임금은 덕에 어두워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으니(民墜塗炭), 하늘은 이에 임금님께 용기와 지혜를 내리시어, 온 나라의 의표가 되어 바로 다스리게 하시어, 우(禹)임금의 옛 일을 계승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는 그분의 법을 따라서 하늘의 명을 받드시는 것입니다.
塗는 진흙을 뜻하고 炭은 숯불을 뜻하니, 塗炭之苦란 진흙수렁이나 숯불에 빠진 것과 같은 괴로움을 말한다. 이는 재난(災難) 등으로 몹시 곤란한 처지에 빠져있음을 나타낸다.
塗 진흙 도 | 炭 숯 탄 | 之 갈 지 | 苦 괴로울 고 |
서경(書經) 중훼지고(仲虺之誥)에는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어진 신하였던 중 훼가 탕왕에게 고하는 글이 실려있다. 탕왕은 무력으로 왕위를 차지한 것을 늘 괴롭게 여기고 후세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구실 삼을까 염려하였다. 중훼는 이러한 탕왕의 마음을 알고 다음과 같이 아뢰어 그를 격려하였다.
하늘은 총명한 이를 내셔서 이들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夏)나라 임금은 덕에 어두워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으니(民墜塗炭), 하늘은 이에 임금님께 용기와 지혜를 내리시어, 온 나라의 의표가 되어 바로 다스리게 하시어, 우(禹)임금의 옛 일을 계승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는 그분의 법을 따라서 하늘의 명을 받드시는 것입니다.
塗는 진흙을 뜻하고 炭은 숯불을 뜻하니, 塗炭之苦란 진흙수렁이나 숯불에 빠진 것과 같은 괴로움을 말한다. 이는 재난(災難) 등으로 몹시 곤란한 처지에 빠져있음을 나타낸다.
同舟共濟 (동주공제)
同舟共濟 (동주공제)
같은 배를 타고 천(川)을 건넌다는 뜻으로 이해(利害)와 환란(患亂)을 같이 했다는 것을 뜻함.
회남자(淮南子) 병략훈(兵略訓)과 후한서(後漢書) 주목전(朱穆傳)에서 인용.
회남자:병략훈, 후한서:주목전
淮南子:兵略訓, 後漢書:朱穆傳
같은 배를 타고 천(川)을 건넌다는 뜻으로 이해(利害)와 환란(患亂)을 같이 했다는 것을 뜻함.
회남자(淮南子) 병략훈(兵略訓)과 후한서(後漢書) 주목전(朱穆傳)에서 인용.
회남자:병략훈, 후한서:주목전
淮南子:兵略訓, 後漢書:朱穆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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