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良藥苦口 (양약고구)
良药苦口 [liángyàokǔkǒu]
- 中國俗談
Bitter pills may have wholesome effects.
- Chinese Proverb
good medicine tastes bitter; bitter pills may have wholesome effects—good advice is hard to take; the remedy is tough but salutary
좋은 약은 입에 쓰다. [良藥苦口(양약고구)]
- 중국속담(中國俗談)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뜻으로, 충언(忠言)은 귀에 거슬린다는 말.
良 어질 양(량) | 藥 약 약, 뜨거울 삭, 간 맞출 략(약) | 苦 쓸 고, 땅 이름 호 | 口 입 구 |
《사기(史記)》의 유후세가(留侯世家)에 나오는 말이다.
진(秦)의 시황제가 죽자 천하는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진나라를 타도하려고 군사를 일으켰는데 그 중에 유방(劉邦)과 항우(項羽)도 끼어 있었다. 그런데 유방이 항우보다 앞서 진나라의 도읍 함양에 입성했다. 유방은 3세 황제 자영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왕궁으로 들어갔다. 궁중에는 온갖 재보와 아름다운 궁녀들이 잔뜩 있었다. 유방은 마음이 동하여 그대로 궁중에 머물려고 했다. 이에 용장 번쾌(樊噲)가 간했다.
“아직 천하가 통일되지 않았습니다. 속히 이곳을 떠나 적당한 곳에 진을 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나 유방은 듣지 않았다. 이번에는 장량(張良)이 나섰다.
"진(秦)나라의 무도한 학정(虐政)으로 말미암아 귀공 같은 일개 서민이 오늘 왕궁에 들어앉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귀공은 임무는 한시 바삐 남은 적을 무찌르고 천하(天下)의 인심을 안정시키는 데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소 상복을 입고 진(秦)나라에 시달린 백성(百姓)을 조상하고 위로(慰勞)하여야 합니다. 그런데도 금은보화와 여색에 눈이 어두워 진(秦)나라 왕의 음락(淫樂)을 본받으려 하니, 포악한 군주의 표본인 하(夏)나라의 걸왕(桀王)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본시 충언(忠言)은 귀에 거슬리나 자신을 위하는 것이며, 양약은 입에 쓰나 병에는 효력(效力)이 있습니다.[忠言逆於耳而利於行] 부디 번쾌의 충언(忠言)에 따르도록 하소서."
이 말에 유방은 크게 뉘우치고 왕궁을 떠나 패상(覇上)에 진을 치고는 바로 뒤따라 진격(進擊)한 항우와 유명한 '홍문(鴻門)의 회(會)'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공자가어(孔子家語)》의 육본편(六本篇)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 이롭고, 충언은 귀에 거슬리지만 행실에 이롭다. 은나라 탕왕은 간언하는 충성스런 신하가 있었기 때문에 번창하였고, 하나라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은 아첨하는 신하들만 있었기 때문에 멸망했다. 임금이 잘못하면 신하가, 아버지가 잘못하면 아들이, 형이 잘못하면 동생이, 자신이 잘못하면 친구가 간언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나라가 위태롭거나 멸망하는 일이 없으며, 집안에 덕을 거스르는 악행이 없으며, 친구간의 사귐도 끊임이 없을 것이다.” 좋은 충고는 귀에 거슬리지만 행함에 있어 이롭다는 뜻으로 쓰인다.
출전
사기(史記) 유후세가(留侯世家) |
諱疾忌醫 (휘질기의)
諱疾忌醫(휘질기의)
諱 숨길 휘/꺼릴 휘 | 疾 병 질 | 忌 꺼릴 기 | 醫 의원 의 |
병을 숨기고 의원에게 보이기를 꺼린다는 뜻으로, 자신의 결점을 감추고 남의 충고를 듣지 않음을 비유(比喩ㆍ譬喩)하는 말
《한비자(韓非子)》의 유로(喩老)편과 《사기(史記)》의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에 실려 있다.
춘추시대, 채(蔡)나라에 편작(扁鵲)이라는 유명한 의원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채나라 환공(桓公)에게 말했다.
"대왕께서는 병이 나셨는데, 그 병은 피부에 있습니다. 지금 치료하시지 않으면 심해질 것입니다."
이에 채환공은 병이 없다면서 치료를 거절했다. 열흘 후, 편작은 채환공을 알현하고 그에게 병이 살 속까지 퍼져서 서둘러 치료하지 않으면 심각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환공이 이를 무시하며 몹시 불쾌해했다.
다시 열흘이 지나자, 편작은 채환공을 찾아가 병이 이미 내장에 이르렀으니,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위험하게 됩니다 라고 했다. 그러나 환공은 여전히 이를 무시하며 화를 냈다.
열흘 후, 편작은 환공을 찾아가 병이 이미 골수에 이르러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닷새 후, 채환공은 온몸에 고통을 느끼며 결국 죽고 말았다.
북송(北宋)의 유학자 주돈이(周敦頤)는 《통서(通書)》에서 "요즘 사람들은 잘못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바로잡아 주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병을 숨기면서 의원에게 보이지 않아 몸을 망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다[今人有過, 不喜人規, 如護疾而忌醫, 寧滅其身而無悟也]"라고 당시의 세태를 비판하였다.
출전
한비자(韓非子) 유로(喩老) | 사기(史記)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 | 주자통서(周子通書)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護疾忌醫(호질기의) |
반의어·상대어
|
중요도·활용도
諱 숨길 휘/꺼릴 휘 | 疾 병 질 | 忌 꺼릴 기 | 醫 의원 의 |
병을 숨기고 의원에게 보이기를 꺼린다는 뜻으로, 자신의 결점을 감추고 남의 충고를 듣지 않음을 비유(比喩ㆍ譬喩)하는 말
《한비자(韓非子)》의 유로(喩老)편과 《사기(史記)》의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에 실려 있다.
춘추시대, 채(蔡)나라에 편작(扁鵲)이라는 유명한 의원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채나라 환공(桓公)에게 말했다.
"대왕께서는 병이 나셨는데, 그 병은 피부에 있습니다. 지금 치료하시지 않으면 심해질 것입니다."
이에 채환공은 병이 없다면서 치료를 거절했다. 열흘 후, 편작은 채환공을 알현하고 그에게 병이 살 속까지 퍼져서 서둘러 치료하지 않으면 심각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환공이 이를 무시하며 몹시 불쾌해했다.
다시 열흘이 지나자, 편작은 채환공을 찾아가 병이 이미 내장에 이르렀으니,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위험하게 됩니다 라고 했다. 그러나 환공은 여전히 이를 무시하며 화를 냈다.
열흘 후, 편작은 환공을 찾아가 병이 이미 골수에 이르러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닷새 후, 채환공은 온몸에 고통을 느끼며 결국 죽고 말았다.
북송(北宋)의 유학자 주돈이(周敦頤)는 《통서(通書)》에서 "요즘 사람들은 잘못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바로잡아 주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병을 숨기면서 의원에게 보이지 않아 몸을 망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다[今人有過, 不喜人規, 如護疾而忌醫, 寧滅其身而無悟也]"라고 당시의 세태를 비판하였다.
출전
한비자(韓非子) 유로(喩老) | 사기(史記)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 | 주자통서(周子通書)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護疾忌醫(호질기의) |
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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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鴻門宴 (홍문연, Hóngményàn)
鸿门宴(홍문연,Hóngményàn)
鸿门宴(Hóngményàn)
鴻 기러기 홍 | 門 문 문 | 宴 잔치 연 |
초청객을 모해할 목적으로 차린 주연(酒宴).
鸿门宴(Hóngményàn)
鴻 기러기 홍 | 門 문 문 | 宴 잔치 연 |
초청객을 모해할 목적으로 차린 주연(酒宴).
虎狼之國 (호랑지국)
虎狼之國(호랑지국)
虎 범 호 | 狼 이리 랑(낭) | 之 갈 지, -의 지 | 國 나라 국 |
호랑이와 이리의 나라라는 뜻으로, 포악(暴惡)하고 신의(信義)가 없는 강대국(强大國)을 비유(比喩ㆍ譬喩)하는 말
사기(史記) 굴원(屈原)열전의 이야기다.
전국시대에 진나라를 비롯하여 제(齊)·초(楚)·연(燕)·위(魏)·한(韓)·조(趙)의 7개국이 패권을 놓고 대립하였다. 진나라는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나라로서 나머지 6개국을 위협하였다. 남쪽 초(楚)나라도 그 위협을 피할 수는 없었다.
당시 초나라 회왕(懷王)의 대신(大臣)으로 있던 유명한 시인(詩人) 굴원은 제(齊)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고 간언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회왕은 진나라 장의(張儀)에게 속임을 당하였다. 이에 초 회왕은 진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크게 패하였다. 이듬해, 장의는 다시 초나라를 방문하여 초왕의 신하와 총비(寵妃)를 매수하고, 초왕을 설득하여 진나라와 형제지국의 관계를 맺었다.
얼마 후, 진나라 소왕(昭王)은 거짓으로 초나라와 통혼(通婚)을 청하며 회왕에게 만나자고 제의하였다. 회왕이 이를 곧이 듣고 진나라로 가려 하자, 굴원은 이것이 함정임을 주장하며 진나라는 호랑이와 같은 나라이므로 믿을 수 없으니, 가시지 않는게 좋습니다[秦, 虎狼之國, 不可信, 不如無行]라고 하였다. 그러나 진나라에 갔던 초왕은 결국 그곳에서 붙잡혀 죽고 말았다.
또 같은 전국시대에 소진(蘇秦)은 6개국을 돌아다니며 힘을 합쳐 진나라에 대적하여야 한다는 합종책(合從策)을 유세하였다. 그는 초나라에 가서 "무릇 진나라는 호랑이나 이리와 같은 사나운 나라로서 천하를 삼키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므로 천하의 원수입니다[夫秦虎狼之國也, 有呑天下之心, 秦天下之仇讐也]"라고 하면서 위왕(威王)을 설득하였다. 이 고사는 《사기》의 〈소진열전〉과 《전국책(戰國策)》의 〈초책(楚策)〉편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호랑지국은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괴롭히는 포학한 강대국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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虎 범 호 | 狼 이리 랑(낭) | 之 갈 지, -의 지 | 國 나라 국 |
호랑이와 이리의 나라라는 뜻으로, 포악(暴惡)하고 신의(信義)가 없는 강대국(强大國)을 비유(比喩ㆍ譬喩)하는 말
사기(史記) 굴원(屈原)열전의 이야기다.
전국시대에 진나라를 비롯하여 제(齊)·초(楚)·연(燕)·위(魏)·한(韓)·조(趙)의 7개국이 패권을 놓고 대립하였다. 진나라는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나라로서 나머지 6개국을 위협하였다. 남쪽 초(楚)나라도 그 위협을 피할 수는 없었다.
당시 초나라 회왕(懷王)의 대신(大臣)으로 있던 유명한 시인(詩人) 굴원은 제(齊)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고 간언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회왕은 진나라 장의(張儀)에게 속임을 당하였다. 이에 초 회왕은 진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크게 패하였다. 이듬해, 장의는 다시 초나라를 방문하여 초왕의 신하와 총비(寵妃)를 매수하고, 초왕을 설득하여 진나라와 형제지국의 관계를 맺었다.
얼마 후, 진나라 소왕(昭王)은 거짓으로 초나라와 통혼(通婚)을 청하며 회왕에게 만나자고 제의하였다. 회왕이 이를 곧이 듣고 진나라로 가려 하자, 굴원은 이것이 함정임을 주장하며 진나라는 호랑이와 같은 나라이므로 믿을 수 없으니, 가시지 않는게 좋습니다[秦, 虎狼之國, 不可信, 不如無行]라고 하였다. 그러나 진나라에 갔던 초왕은 결국 그곳에서 붙잡혀 죽고 말았다.
또 같은 전국시대에 소진(蘇秦)은 6개국을 돌아다니며 힘을 합쳐 진나라에 대적하여야 한다는 합종책(合從策)을 유세하였다. 그는 초나라에 가서 "무릇 진나라는 호랑이나 이리와 같은 사나운 나라로서 천하를 삼키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므로 천하의 원수입니다[夫秦虎狼之國也, 有呑天下之心, 秦天下之仇讐也]"라고 하면서 위왕(威王)을 설득하였다. 이 고사는 《사기》의 〈소진열전〉과 《전국책(戰國策)》의 〈초책(楚策)〉편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호랑지국은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괴롭히는 포학한 강대국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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合從連衡 (합종연횡)
합종연횡 (合從連衡)
合 합할 합, 쪽문 합, 홉 홉 | 從 좇을 종 | 連 잇닿을 연 | 衡 저울대 형, 가로 횡 |
①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행(行)해졌던 최강국인 진(秦)과 연(燕)·제(齊)·초(楚)·한(韓)·위(魏)·조(趙)의 6국 사이의 외교(外交)방식(方式)으로 합종책(合從策)과 연횡책(連衡策)을 말함 ② 약자(弱者)끼리 세로로 연합(聯合)하여 강자(强者)에게 대항(對抗)하거나, 약자(弱者)들이 가로로 나란히 서서 강자(强者)와 화해(和解)함
소진(蘇秦)의 합종설(合從說)과 장의(張儀)의 연횡설(連衡說), 곧 전국(戰國) 시대(時代)의 군사(軍事) 동맹(同盟)의 형태(形態)에서 유래.
BC 4세기 말 여러 나라를 유세하고 있던 소진(蘇秦)은 우선 연에게, 이어서 다른 5국에게 '진 밑에서 쇠꼬리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닭의 머리가 되자'고 설득하여, 한위조연초제(韓魏趙燕楚齊) 6국을 종적(縱的)으로 연합시켜 서쪽의 강대한 진나라와 대결할 공수동맹을 맺도록 하였다. 이것을 합종(合從:從은 縱)이라 한다.
소진은 자신이 거쳐온 조나라를 시작으로 한, 위, 제, 초를 차례로 유세해 최종적으로 6국 동맹이라는 합종의 마지막 수순을 완성하였다. 소진 자신은 6국의 공동재상이 되어 각국을 돌며 강대국 진나라에 공동으로 맞서는 전략을 설파하고 다듬어 나갔다. 합종은 1강 독주체제를 막기 위한 전략이지만, 나머지 6국이 기본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예측불허의 변수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와해될 수 있는 심각한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뒤에 위나라 장의(張儀)는 합종은 일시적 허식에 지나지 않으며 진을 섬겨야 한다고, 6국을 돌며 연합할 것을 설득하여 진이 6국과 개별로 횡적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였다. 이것을 연횡(連衡:衡은 橫)이라고 한다.
장의의 연횡론은 진나라의 동방에 횡으로 늘어서 있는 6국을 각개 겨파해 최종적으로 천하를 통일한다는 전략이다. 철두철미하게 합종에 대응하는 전략으로 6국의 동맹을 와해시키는 것을 최종 목표로 했다. 장의의 연횡은 지극히 현실적인 전략이며, 궁극적으로는 6국의 소멸을 전제로 한 힘의 논리 그 자체였다.
결국 진은 합종을 타파한 뒤 6국을 차례로 멸망시켜 중국을 통일하였다.
[출전]
사기(史記) |
사기(史記) |
合 합할 합, 쪽문 합, 홉 홉 | 從 좇을 종 | 連 잇닿을 연 | 衡 저울대 형, 가로 횡 |
①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행(行)해졌던 최강국인 진(秦)과 연(燕)·제(齊)·초(楚)·한(韓)·위(魏)·조(趙)의 6국 사이의 외교(外交)방식(方式)으로 합종책(合從策)과 연횡책(連衡策)을 말함 ② 약자(弱者)끼리 세로로 연합(聯合)하여 강자(强者)에게 대항(對抗)하거나, 약자(弱者)들이 가로로 나란히 서서 강자(强者)와 화해(和解)함
소진(蘇秦)의 합종설(合從說)과 장의(張儀)의 연횡설(連衡說), 곧 전국(戰國) 시대(時代)의 군사(軍事) 동맹(同盟)의 형태(形態)에서 유래.
BC 4세기 말 여러 나라를 유세하고 있던 소진(蘇秦)은 우선 연에게, 이어서 다른 5국에게 '진 밑에서 쇠꼬리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닭의 머리가 되자'고 설득하여, 한위조연초제(韓魏趙燕楚齊) 6국을 종적(縱的)으로 연합시켜 서쪽의 강대한 진나라와 대결할 공수동맹을 맺도록 하였다. 이것을 합종(合從:從은 縱)이라 한다.
소진은 자신이 거쳐온 조나라를 시작으로 한, 위, 제, 초를 차례로 유세해 최종적으로 6국 동맹이라는 합종의 마지막 수순을 완성하였다. 소진 자신은 6국의 공동재상이 되어 각국을 돌며 강대국 진나라에 공동으로 맞서는 전략을 설파하고 다듬어 나갔다. 합종은 1강 독주체제를 막기 위한 전략이지만, 나머지 6국이 기본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예측불허의 변수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와해될 수 있는 심각한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뒤에 위나라 장의(張儀)는 합종은 일시적 허식에 지나지 않으며 진을 섬겨야 한다고, 6국을 돌며 연합할 것을 설득하여 진이 6국과 개별로 횡적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였다. 이것을 연횡(連衡:衡은 橫)이라고 한다.
장의의 연횡론은 진나라의 동방에 횡으로 늘어서 있는 6국을 각개 겨파해 최종적으로 천하를 통일한다는 전략이다. 철두철미하게 합종에 대응하는 전략으로 6국의 동맹을 와해시키는 것을 최종 목표로 했다. 장의의 연횡은 지극히 현실적인 전략이며, 궁극적으로는 6국의 소멸을 전제로 한 힘의 논리 그 자체였다.
결국 진은 합종을 타파한 뒤 6국을 차례로 멸망시켜 중국을 통일하였다.
[출전]
사기(史記) |
사기(史記) |
炮烙之刑 (포락지형, páoluòzhīxíng)
炮烙之刑(포락지형)
炮烙之刑(páoluòzhīxíng)
炮 통째로 구울 포 | 烙 | 지질 락(낙) | 之 갈 지 | 刑 형벌 형,탕기 형 |
①중국(中國) 은(殷)나라 주왕(紂王)이 쓰던 매우 심한 형벌(刑罰). 기름칠한 구리 기둥을 숯불 위에 걸쳐 놓고 죄인(罪人)을 맨발로 걸어가게 하였다 함 ②달군 쇠로 지지는 극형(極刑)을 통속적(通俗的)으로 이르는 말
炮烙之刑(páoluòzhīxíng)
炮 통째로 구울 포 | 烙 | 지질 락(낙) | 之 갈 지 | 刑 형벌 형,탕기 형 |
①중국(中國) 은(殷)나라 주왕(紂王)이 쓰던 매우 심한 형벌(刑罰). 기름칠한 구리 기둥을 숯불 위에 걸쳐 놓고 죄인(罪人)을 맨발로 걸어가게 하였다 함 ②달군 쇠로 지지는 극형(極刑)을 통속적(通俗的)으로 이르는 말
忠言逆耳 (충언역이)
忠言逆耳(충언역이)
忠言逆耳(zhōngyánnì'ěr)
忠 충성 충 | 言 말씀 언, 화기애애할 은 | 逆 거스릴 역 | 耳 귀 이, 팔대째 손자 잉 |
좋은 말은 귀에 듣기 거슬림.
Candid advice that grates on the ear; honest exhortations may be unpleasant to the ear.
[출전]
공자가어(孔子家語), 史記(사기) 淮南王傳(회남왕전)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良藥苦口(양약고구) |
忠言逆耳(zhōngyánnì'ěr)
忠 충성 충 | 言 말씀 언, 화기애애할 은 | 逆 거스릴 역 | 耳 귀 이, 팔대째 손자 잉 |
좋은 말은 귀에 듣기 거슬림.
Candid advice that grates on the ear; honest exhortations may be unpleasant to the ear.
[출전]
공자가어(孔子家語), 史記(사기) 淮南王傳(회남왕전)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良藥苦口(양약고구) |
出奇制勝 (출기제승)
出奇制勝(출기제승)
出 날 출, 단락 척 | 奇 기특할 기, 의지할 의 | 制 절제할 제/지을 제 | 勝 이길 승 |
기묘한 계략(計略)을 써서 승리함
사기(史記) 전단(田單)열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전국시대, 제(齊)나라 민왕(湣王)은 교만하고 향락을 즐겨 국사를 돌보지 않았다. 이웃한 연(燕)나라의 국왕은 대장군 악의(樂毅)에게 명하여 제나라를 격파하고 전국을 평정하였다. 도망한 민왕은 거성(거城)과 즉묵(卽墨)에서 몸을 보전하고 있었다. [及燕使樂毅伐破齊,齊湣王出奔, 已而保莒城.]
연나라의 대군이 즉묵성을 포위하자, 즉묵의 대부는 나와 싸우다가 죽었다. 이에 성안의 사람들은 민왕의 먼 친척인 전단을 장군으로 뽑았다. 잔단은 용병술이 뛰어났으므로 성을 막아낼 수 있었다. [燕引兵東圍即墨,即墨大夫出與戰,敗死. 城中相與推 田單,曰: 安平之戰,田單宗人以鐵籠得全,習兵. 立以為將軍,以即墨距燕.]
그후 연나라의 소왕의 뒤를 이어 혜왕(惠王)이 즉위했다는 사실을 안 전단은 간첩을 보내어 악의와 혜왕을 이간질하였다. 그 결과 연왕은 악의 대신 기겁(騎劫)을 보냈다. 기겁의 학대를 받은 연나라 군대는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전단은 이 틈을 노려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는 한밤중에 꼬리에 횃불을 단 소들을 이용하여 연나라 군대를 크게 물리쳤다.
사마천은 손자(孫子)의 말을 인용하여 전단의 용병술을 묘사하였다.
전쟁이란 정면으로 대치하여 싸우나, 유격(遊擊)인 기병(奇兵)을 가지고 이기는 것이다. 전쟁을 잘하는 자는 기병을 쓰는 방법이 무궁무진하다[兵以正合, 以奇勝. 善之者, 出奇無窮]. 기습과 정공(正攻)이 돌고 도는 것이 마치 고리가 끝이 없는 것과 같다. [太史公曰: 兵以正合,以奇勝. 善之者,出奇無窮. 奇正還相生,如環之無端.]
出奇制勝이란 특출한 전략을 이용하여 승리함을 뜻한다.
출전
史記(사기) | 손자(孫子) 제5 병세(兵勢) |
出 날 출, 단락 척 | 奇 기특할 기, 의지할 의 | 制 절제할 제/지을 제 | 勝 이길 승 |
기묘한 계략(計略)을 써서 승리함
사기(史記) 전단(田單)열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전국시대, 제(齊)나라 민왕(湣王)은 교만하고 향락을 즐겨 국사를 돌보지 않았다. 이웃한 연(燕)나라의 국왕은 대장군 악의(樂毅)에게 명하여 제나라를 격파하고 전국을 평정하였다. 도망한 민왕은 거성(거城)과 즉묵(卽墨)에서 몸을 보전하고 있었다. [及燕使樂毅伐破齊,齊湣王出奔, 已而保莒城.]
연나라의 대군이 즉묵성을 포위하자, 즉묵의 대부는 나와 싸우다가 죽었다. 이에 성안의 사람들은 민왕의 먼 친척인 전단을 장군으로 뽑았다. 잔단은 용병술이 뛰어났으므로 성을 막아낼 수 있었다. [燕引兵東圍即墨,即墨大夫出與戰,敗死. 城中相與推 田單,曰: 安平之戰,田單宗人以鐵籠得全,習兵. 立以為將軍,以即墨距燕.]
그후 연나라의 소왕의 뒤를 이어 혜왕(惠王)이 즉위했다는 사실을 안 전단은 간첩을 보내어 악의와 혜왕을 이간질하였다. 그 결과 연왕은 악의 대신 기겁(騎劫)을 보냈다. 기겁의 학대를 받은 연나라 군대는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전단은 이 틈을 노려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는 한밤중에 꼬리에 횃불을 단 소들을 이용하여 연나라 군대를 크게 물리쳤다.
사마천은 손자(孫子)의 말을 인용하여 전단의 용병술을 묘사하였다.
전쟁이란 정면으로 대치하여 싸우나, 유격(遊擊)인 기병(奇兵)을 가지고 이기는 것이다. 전쟁을 잘하는 자는 기병을 쓰는 방법이 무궁무진하다[兵以正合, 以奇勝. 善之者, 出奇無窮]. 기습과 정공(正攻)이 돌고 도는 것이 마치 고리가 끝이 없는 것과 같다. [太史公曰: 兵以正合,以奇勝. 善之者,出奇無窮. 奇正還相生,如環之無端.]
出奇制勝이란 특출한 전략을 이용하여 승리함을 뜻한다.
출전
史記(사기) | 손자(孫子) 제5 병세(兵勢) |
穿楊貫蝨 (천양관슬, chuānyángguànshī)
穿楊貫蝨(천양관슬)
穿杨贯虱(chuānyángguànshī)
穿 뚫을 천 | 楊 버들 양 | 貫 꿸 관 | 蝨 이 슬 |
'버드나무 잎을 맞히고 이를 꿰뚫는다'라는 뜻으로, 매우 뛰어난 활솜씨를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고대 중국의 명궁인 양유기(養由基)와 기창(紀昌)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穿杨贯虱(chuānyángguànshī)
穿 뚫을 천 | 楊 버들 양 | 貫 꿸 관 | 蝨 이 슬 |
'버드나무 잎을 맞히고 이를 꿰뚫는다'라는 뜻으로, 매우 뛰어난 활솜씨를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고대 중국의 명궁인 양유기(養由基)와 기창(紀昌)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千慮一失 (천려일실)
千慮一失(천려일실)
千 일천 천, 밭두둑 천, 그네 천 | 慮 생각할 려(여), 사실할 록(녹) | 一 한 일 | 失 잃을 실, 놓을 일 |
천번의 생각에 한번의 실수라는 뜻으로, ①지혜(智慧)로운 사람이라도 많은 생각을 하다 보면 하나쯤은 실수(失手)가 있을 수 있다는 말 ②여러 번 생각하여 신중(愼重)하고 조심스럽게 한 일에도 때로는 실수(失手)가 있음
한나라 고조의 명에 따라 대군을 이끌고 조나라로 쳐들어간 한신(韓信)은 결전을 앞두고 '적장 이좌거를 사로잡는 장병에게는 천금을 주겠다'고 공언했다. 지덕을 겸비한 그를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漢(한)나라의 장군 韓信(한신)이 趙(조)나라를 공격했다.조나라의 탁월한 전략가 李左車(이좌거)는 主君(주군)에게 3만명의 군대를 보내주면 한신이 쳐들어올 길목을 끊겠다고 歎願(탄원)했다. 그러나 주군은 이 말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그 결과 조나라는 싸움에서 크게 패하여 나라는 망하고 말았다.이좌거의 작전이 받아들여졌다면 한신은 아예 조나라를 정벌할 마음조차 먹지 않았을 것이다. 미리 첩자를 보내 이좌거의 작전이 채택되지 않은 것을 안 한신은 마음놓고 조나라를 쳤던 것이다.
이좌거는 포로가 되어 한신(韓信) 앞에 끌려 나왔다. 한신(韓信)은 손수 포박을 풀어준 뒤 상석에 앉히고 주연을 베풀어 위로(慰勞)했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한나라의 천하통일(統一天下)에 마지막 걸림돌로 남아 있는 연, 제에 대한 공략책을 물었다. 그러나 이좌거는 '패한 장수는 병법을 논하지 않는 법'이라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한신(韓信)이 재삼 정중히 청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패한 장수는 병법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하며 거절했지만 끈질긴 한신의 간청에 마음이 움직여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많은 생각을 하다 보면 반드시 하나쯤은 실책이 있고[智者千慮 必有一失 (지자천려 필유일실)],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많은 생각을 하다 보면 반드시 하나쯤은 득책이 있다[愚者千慮 必有一得 (우자천려 필유일득)]고 했습니다.그러니, 패장의 생각 가운데 하나라도 득책이 있으면 이만 다행이 없을까 합니다.』하고 말한 뒤 연나라와 제나라를 쳐부술 계책을 말해주었다. 그 후 이좌거는 한신(韓信)의 참모가 되어 크게 공헌(貢獻)했다고 한다.
출전
사기(史記)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智者一失(지자일실) |
반의어·상대어
千慮一得(천려일득) |
千 일천 천, 밭두둑 천, 그네 천 | 慮 생각할 려(여), 사실할 록(녹) | 一 한 일 | 失 잃을 실, 놓을 일 |
천번의 생각에 한번의 실수라는 뜻으로, ①지혜(智慧)로운 사람이라도 많은 생각을 하다 보면 하나쯤은 실수(失手)가 있을 수 있다는 말 ②여러 번 생각하여 신중(愼重)하고 조심스럽게 한 일에도 때로는 실수(失手)가 있음
한나라 고조의 명에 따라 대군을 이끌고 조나라로 쳐들어간 한신(韓信)은 결전을 앞두고 '적장 이좌거를 사로잡는 장병에게는 천금을 주겠다'고 공언했다. 지덕을 겸비한 그를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漢(한)나라의 장군 韓信(한신)이 趙(조)나라를 공격했다.조나라의 탁월한 전략가 李左車(이좌거)는 主君(주군)에게 3만명의 군대를 보내주면 한신이 쳐들어올 길목을 끊겠다고 歎願(탄원)했다. 그러나 주군은 이 말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그 결과 조나라는 싸움에서 크게 패하여 나라는 망하고 말았다.이좌거의 작전이 받아들여졌다면 한신은 아예 조나라를 정벌할 마음조차 먹지 않았을 것이다. 미리 첩자를 보내 이좌거의 작전이 채택되지 않은 것을 안 한신은 마음놓고 조나라를 쳤던 것이다.
이좌거는 포로가 되어 한신(韓信) 앞에 끌려 나왔다. 한신(韓信)은 손수 포박을 풀어준 뒤 상석에 앉히고 주연을 베풀어 위로(慰勞)했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한나라의 천하통일(統一天下)에 마지막 걸림돌로 남아 있는 연, 제에 대한 공략책을 물었다. 그러나 이좌거는 '패한 장수는 병법을 논하지 않는 법'이라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한신(韓信)이 재삼 정중히 청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패한 장수는 병법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하며 거절했지만 끈질긴 한신의 간청에 마음이 움직여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많은 생각을 하다 보면 반드시 하나쯤은 실책이 있고[智者千慮 必有一失 (지자천려 필유일실)],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많은 생각을 하다 보면 반드시 하나쯤은 득책이 있다[愚者千慮 必有一得 (우자천려 필유일득)]고 했습니다.그러니, 패장의 생각 가운데 하나라도 득책이 있으면 이만 다행이 없을까 합니다.』하고 말한 뒤 연나라와 제나라를 쳐부술 계책을 말해주었다. 그 후 이좌거는 한신(韓信)의 참모가 되어 크게 공헌(貢獻)했다고 한다.
출전
사기(史記)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智者一失(지자일실) |
반의어·상대어
千慮一得(천려일득) |
跖狗吠堯 (척구폐요, ZhíjūfèiYáo)
跖狗吠堯(척구폐요)
跖拘吠尧(ZhíjūfèiYáo)
跖 밟을 척 | 狗 개 구 | 吠 짖을 폐 | 堯 요임금 요 |
도척의 개가 요임금을 보고 짖는다.
跖拘吠尧(ZhíjūfèiYáo)
跖 밟을 척 | 狗 개 구 | 吠 짖을 폐 | 堯 요임금 요 |
도척의 개가 요임금을 보고 짖는다.
紙上兵談 (지상병담)
紙上兵談(지상병담)
紙 종이 지 | 上 위 상 | 兵 군사 병 | 談 말씀 담 |
종위 위에서 펼치는 용병의 이야기라는 뜻으로, 실현성(實現性)이 없는 허황(虛荒)된 이론(理論)을 일컬음
사기(史記) 염파 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에는 허울좋은 한 장군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전국(戰國)시대 조(趙)나라에 조사(趙奢)와 염파(廉頗)라는 명장이 있었는데, 이들은 진(秦)나라의 침공을 수차례 격퇴하였다. 당시 진나라의 대장이었던 백기(白起)는 염파의 지략(智略)을 당해내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조나라에 거짓 정보를 흘렸다. 조나라 왕은 결국 염파를 대신하여 조사의 아들인 조괄(趙括)을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조괄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서 병법을 공부하였지만 실전(實戰) 경험은 전혀 없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장군의 직에 임용되지 않기를 원하였으나 조나라 왕은 끝내 그를 대장으로 임명하여 전투에 내보냈다.
진나라 장군 백기는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나라 군대를 유인하여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괄은 진나라 군사의 화살에 죽고 수십만의 조나라 군사들은 항복했다가 모두 생매장 당하였다.
紙上兵談(Mere paper talk)이란 실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공론(空論)을 비유한 말이며, 탁상공론(卓上空論:an armchair argument)이라는 말과 같은 표현이다.
출전
사기(史記)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卓上空論(탁상공론) |
紙 종이 지 | 上 위 상 | 兵 군사 병 | 談 말씀 담 |
종위 위에서 펼치는 용병의 이야기라는 뜻으로, 실현성(實現性)이 없는 허황(虛荒)된 이론(理論)을 일컬음
사기(史記) 염파 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에는 허울좋은 한 장군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전국(戰國)시대 조(趙)나라에 조사(趙奢)와 염파(廉頗)라는 명장이 있었는데, 이들은 진(秦)나라의 침공을 수차례 격퇴하였다. 당시 진나라의 대장이었던 백기(白起)는 염파의 지략(智略)을 당해내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조나라에 거짓 정보를 흘렸다. 조나라 왕은 결국 염파를 대신하여 조사의 아들인 조괄(趙括)을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조괄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서 병법을 공부하였지만 실전(實戰) 경험은 전혀 없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장군의 직에 임용되지 않기를 원하였으나 조나라 왕은 끝내 그를 대장으로 임명하여 전투에 내보냈다.
진나라 장군 백기는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나라 군대를 유인하여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괄은 진나라 군사의 화살에 죽고 수십만의 조나라 군사들은 항복했다가 모두 생매장 당하였다.
紙上兵談(Mere paper talk)이란 실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공론(空論)을 비유한 말이며, 탁상공론(卓上空論:an armchair argument)이라는 말과 같은 표현이다.
출전
사기(史記)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卓上空論(탁상공론) |
酒池肉林 (주지육림, jiǔchíròulín)
酒池肉林(주지육림)
술로 못을 이루고, 고기로 숲을 이룬다는 뜻으로, '극히 호사스럽고 방탕한 술잔치'를 이르는 말.
sumptuous feast
고대 중국의 하(夏)나라 걸왕(桀王)과 은(殷)나라 주왕(紂王)은 원래 지용(智勇)을 겸비한 현주(賢主)였으나 그들은 각기 매희(妹喜)와 달기(妲己)라는 희대(稀代)의 두 요녀독부(妖女毒婦)에게 빠져서, 사치(奢侈)와 주색(酒色)에 탐닉(眈溺)하다가 결국 폭군 음주(暴君淫主)라는 낙인(烙印)이 찍힌 채 나라를 망치고 말았다.
하(夏)나라 걸왕은 자신이 정복한 오랑캐의 유시씨국(有施氏國)에서 공물 (供物)로 바친 희대의 요녀 매희[또는 말희(末喜)]에게 반해서 보석과 상아로 장식한 호화스런 궁전을 짓고 옥으로 만든 침대에서 밤마다 일락(逸樂)에 빠졌다.
걸왕은 그녀의 소망에 따라 전국에서 선발한 3000명의 미소녀(美少女)들에게 오색 찬란한 옷을 입혀 날마다 무악(舞樂)을 베풀기도 했다. 또 무악(舞樂)에 싫증이 난 매희의 요구에 따라 궁정(宮庭) 한 모퉁이에 큰 못을 판 다음 바닥에 새하얀 모래를 깔고 향기로운 미주(美酒)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못 둘레에는 못 둘레에는 나무들마다 말린 고기[脯肉]를 걸친 숲을 만들고, 고기로 동산을 쌓았다. 술로 만든 못에는 배를 띄울 수 있었고 술 지게미가 쌓여 된 둑은 십 리까지 뻗어 있었다. 걸왕과 매희는 그 못에 호화선을 띄우고, 못 둘레에서 춤을 추던 3,000명의 미소녀(美少女)들이 신호의 북이 울리면 일제히 못의 미주를 마시고 숲의 포육을 탐식(貪食)하는 광경을 구경하며 희희낙낙 즐겼다.
이 같은 사치음일(奢侈淫佚)의 나날이 계속되는 가운데 국력은 피폐하고 백성의 원성은 하늘에 닿았다. 이리하여 걸왕은 하나라에 복속(服屬)했던 은(殷)나라 탕왕에 의해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유래] 史記(사기) | 帝王世紀(제왕세기) | 十八史略
또한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에는 상(商)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紂王)의 방탕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탕왕으로부터 28대째로 은(殷)나라 마지막 군주가 된 주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달기는 주왕이 정벌한 오랑캐의 유소씨국(有蘇氏國)에서 공물(供物)로 보내온 희대의 독부였다. 주왕은 본시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현명한 임금이었으나 그녀의 끝없는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향락을 위하여 높이가 천척(千尺)에 달하고 둘레가 삼리(三里)나 되는 궁전을 만들도록 명령하고, 수많은 백성들을 동원하여 7년 동안 노역케 하였다. 화려한 궁실(宮室)이 완성되자 각지의 준마(駿馬), 명견(名犬), 미녀(美女) 등을 수집하여 자신의 쾌락을 위한 도구로 삼았다. 창고에는 백성들로부터 수탈(收奪)한 전백(錢帛)과 곡식이 산처럼 쌓였고, 국내의 온갖 진수기물(珍獸奇物)은 속속 궁중으로 징발되었다.
이것으로도 부족했던 그는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덩이를 걸어 숲을 이루게[以酒爲池, 懸肉爲林] 만들었다. 그 못 둘레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젊은 남녀의 한 무리가 음란한 북리무악(北里舞樂)에 맞추어 광란의 춤을 추면 주왕의 가슴에 안긴 달기는 몰아(沒我)의 황홀경(怳惚境)에서 음탕한 미소를 짓곤 했다. 또 때로는 낮에도 장막을 드리운 방에서 촛불을 밝히고 벌이는 광연(狂宴)이 주야장천(晝夜長川) 120일간이나 계속되기도 했는데 은나라 사람들은 이를 장야지음(長夜之飮)이라 일컬었다.
이같이 상궤(常軌)를 벗어난 광태(狂態)를 보다못해 충신들이 간하면 주왕은 도리어 그들을 제왕의 행동을 비방하는 불충자로 몰아 가차없이 포락지형(炮烙之刑)에 처하곤 했다. 포락지형이란 기름칠한 구리 기둥[銅柱]을 숯불 위에 걸쳐놓고 죄인을 그 위로 건너가게 하는 일종의 잔인 무도한 사형 방법인데, 미끄러운 구리 기둥에서 숯불 속으로 떨어져 타 죽은 희생자들의 아비규환(阿鼻叫喚)의 모습까지도 잔인한 달기의 음욕(淫慾)을 돋우는 재료가 되었다.
이렇듯 폭군 음주(暴君淫主)로 악명을 떨치던 주 왕도 결국 걸왕의 전철을 밟아 주(周)나라 시조(始祖)인 무왕(武王)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유래] 史記(사기) : 殷本紀(은본기)
"주왕(紂王)은 술을 좋아하고 여자도 좋아하였다. 특히 달기(妲己)라는 여자를 사랑하여 그녀의 말은 무엇이나 들어 주었다. …그는 사구(沙丘)에 큰 놀이터와 별궁을 지어 두고 많은 들짐승과 새들을 거기에 놓아 길렀다. …술로 못을 만들고 고기를 달아 숲을 만든 다음[以酒爲池懸肉爲林] 남녀가 벌거벗고 그 사이에서 밤낮없이 술을 퍼마시며 즐겼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肉山酒池(육산주지) | 肉山脯林(육산포림) |
참조어
傾國之色(경국지색) | 長夜之飮(장야지음) | 炮烙之刑(포락지형) |
帝王世紀, 제왕세기, 史記, 사기, 史記:殷本紀, 사기:은본기 |
酒池肉林(jiǔchíròulín)
酒 술 주 | 池 못 지,강 이름 타,제거할 철 | 肉 고기 육,둘레 유 | 林 수풀 림(임) |
술로 못을 이루고, 고기로 숲을 이룬다는 뜻으로, '극히 호사스럽고 방탕한 술잔치'를 이르는 말.
sumptuous feast
고대 중국의 하(夏)나라 걸왕(桀王)과 은(殷)나라 주왕(紂王)은 원래 지용(智勇)을 겸비한 현주(賢主)였으나 그들은 각기 매희(妹喜)와 달기(妲己)라는 희대(稀代)의 두 요녀독부(妖女毒婦)에게 빠져서, 사치(奢侈)와 주색(酒色)에 탐닉(眈溺)하다가 결국 폭군 음주(暴君淫主)라는 낙인(烙印)이 찍힌 채 나라를 망치고 말았다.
하(夏)나라 걸왕은 자신이 정복한 오랑캐의 유시씨국(有施氏國)에서 공물 (供物)로 바친 희대의 요녀 매희[또는 말희(末喜)]에게 반해서 보석과 상아로 장식한 호화스런 궁전을 짓고 옥으로 만든 침대에서 밤마다 일락(逸樂)에 빠졌다.
걸왕은 그녀의 소망에 따라 전국에서 선발한 3000명의 미소녀(美少女)들에게 오색 찬란한 옷을 입혀 날마다 무악(舞樂)을 베풀기도 했다. 또 무악(舞樂)에 싫증이 난 매희의 요구에 따라 궁정(宮庭) 한 모퉁이에 큰 못을 판 다음 바닥에 새하얀 모래를 깔고 향기로운 미주(美酒)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못 둘레에는 못 둘레에는 나무들마다 말린 고기[脯肉]를 걸친 숲을 만들고, 고기로 동산을 쌓았다. 술로 만든 못에는 배를 띄울 수 있었고 술 지게미가 쌓여 된 둑은 십 리까지 뻗어 있었다. 걸왕과 매희는 그 못에 호화선을 띄우고, 못 둘레에서 춤을 추던 3,000명의 미소녀(美少女)들이 신호의 북이 울리면 일제히 못의 미주를 마시고 숲의 포육을 탐식(貪食)하는 광경을 구경하며 희희낙낙 즐겼다.
이 같은 사치음일(奢侈淫佚)의 나날이 계속되는 가운데 국력은 피폐하고 백성의 원성은 하늘에 닿았다. 이리하여 걸왕은 하나라에 복속(服屬)했던 은(殷)나라 탕왕에 의해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유래] 史記(사기) | 帝王世紀(제왕세기) | 十八史略
또한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에는 상(商)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紂王)의 방탕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탕왕으로부터 28대째로 은(殷)나라 마지막 군주가 된 주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달기는 주왕이 정벌한 오랑캐의 유소씨국(有蘇氏國)에서 공물(供物)로 보내온 희대의 독부였다. 주왕은 본시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현명한 임금이었으나 그녀의 끝없는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향락을 위하여 높이가 천척(千尺)에 달하고 둘레가 삼리(三里)나 되는 궁전을 만들도록 명령하고, 수많은 백성들을 동원하여 7년 동안 노역케 하였다. 화려한 궁실(宮室)이 완성되자 각지의 준마(駿馬), 명견(名犬), 미녀(美女) 등을 수집하여 자신의 쾌락을 위한 도구로 삼았다. 창고에는 백성들로부터 수탈(收奪)한 전백(錢帛)과 곡식이 산처럼 쌓였고, 국내의 온갖 진수기물(珍獸奇物)은 속속 궁중으로 징발되었다.
이것으로도 부족했던 그는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덩이를 걸어 숲을 이루게[以酒爲池, 懸肉爲林] 만들었다. 그 못 둘레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젊은 남녀의 한 무리가 음란한 북리무악(北里舞樂)에 맞추어 광란의 춤을 추면 주왕의 가슴에 안긴 달기는 몰아(沒我)의 황홀경(怳惚境)에서 음탕한 미소를 짓곤 했다. 또 때로는 낮에도 장막을 드리운 방에서 촛불을 밝히고 벌이는 광연(狂宴)이 주야장천(晝夜長川) 120일간이나 계속되기도 했는데 은나라 사람들은 이를 장야지음(長夜之飮)이라 일컬었다.
이같이 상궤(常軌)를 벗어난 광태(狂態)를 보다못해 충신들이 간하면 주왕은 도리어 그들을 제왕의 행동을 비방하는 불충자로 몰아 가차없이 포락지형(炮烙之刑)에 처하곤 했다. 포락지형이란 기름칠한 구리 기둥[銅柱]을 숯불 위에 걸쳐놓고 죄인을 그 위로 건너가게 하는 일종의 잔인 무도한 사형 방법인데, 미끄러운 구리 기둥에서 숯불 속으로 떨어져 타 죽은 희생자들의 아비규환(阿鼻叫喚)의 모습까지도 잔인한 달기의 음욕(淫慾)을 돋우는 재료가 되었다.
이렇듯 폭군 음주(暴君淫主)로 악명을 떨치던 주 왕도 결국 걸왕의 전철을 밟아 주(周)나라 시조(始祖)인 무왕(武王)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유래] 史記(사기) : 殷本紀(은본기)
"주왕(紂王)은 술을 좋아하고 여자도 좋아하였다. 특히 달기(妲己)라는 여자를 사랑하여 그녀의 말은 무엇이나 들어 주었다. …그는 사구(沙丘)에 큰 놀이터와 별궁을 지어 두고 많은 들짐승과 새들을 거기에 놓아 길렀다. …술로 못을 만들고 고기를 달아 숲을 만든 다음[以酒爲池懸肉爲林] 남녀가 벌거벗고 그 사이에서 밤낮없이 술을 퍼마시며 즐겼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肉山酒池(육산주지) | 肉山脯林(육산포림) |
참조어
傾國之色(경국지색) | 長夜之飮(장야지음) | 炮烙之刑(포락지형) |
帝王世紀, 제왕세기, 史記, 사기, 史記:殷本紀, 사기:은본기 |
舟中敵國 (주중적국)
舟中敵國(주중적국)
舟 배 주 | 中 가운데 중 | 敵 대적할 적, 다할 활 | 國 나라 국 |
배(舟) 속의 적국(敵國)이라는 뜻으로, 군주(君主)가 덕을 닦지 않으면, 같은 배를 타고 있는 것과 같이 이해(利害) 관계(關係)가 같은 사람들이라도, 적이 되는 수가 있음을 비유(比喩ㆍ譬喩)해 이르는 말, 곧 자기편(自己便)이라도 갑자기 적이 될 수 있음을 이름
사기(史記) 손자오기(孫子吳起)열전의 이야기.
전국(戰國)시대, 오기는 위(衛)나라 사람으로, 문후(文侯)를 섬겨 진(秦)나라를 쳐서 5개의 성을 빼앗았다. 문후는 오기가 용병에 능하고 부하들에게도 신망을 얻고 있는 것을 알고 서하(西河)를 지켜 진나라와 한(韓)나라를 방어하게 하였다. 문후가 죽자 오기는 그의 아들 무후(武侯)를 섬겼다.
어느 날, 무후가 오기와 함께 배를 타고 서하(西河)를 둘러본 일이 있었다. 무후는 강의 중류에 이르러 오기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산과 강의 험난한 조망이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이것이야말로 우리 위나라의 보배로다."
이에 오기는 다음과 같이 아뢰어 무후를 깨우쳤다.
"국가의 보배가 되는 것은 임금의 덕일뿐, 지형의 험난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옛날 삼묘씨(三苗氏)의 나라는 동정호(洞庭湖)의 왼쪽을 끼고 팽려호를 오른쪽으로 끼고 있었으나, 임금이 덕의(德義)를 닦지 않았기 때문에 우왕(禹王)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하(夏)나라의 걸왕(桀王)이 살던 곳은 왼쪽에 황하(黃河)와 제수(濟水)가 흐르고, 오른쪽에 태산(泰山)과 화산(華山)이 솟아 있으며, 남쪽으로 이궐(伊闕)이라는 깎아지른 절벽과 북쪽으로 양장산(羊腸山)을 면하고 있어 험준함을 자랑하였지만 정치가 어질지 못하여 탕(湯) 임금에게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또 은(殷)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紂王)의 거처는 왼쪽에 맹문산(孟門山)이 있고, 오른쪽에 상산(常山)이 있었으며, 남쪽으로는 황하가 도도하게 흘러 험준하였지만 역시 정치를 행함에 덕이 없어 결국 무왕(武王)에게 살해당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살펴보건대 나라의 보배는 덕에 있는 것이지 지세의 험준함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군주께서 덕을 닦지 않으신다면 이 배 안에 함께 타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적국의 편이 될 것입니다[若君不修德, 舟中之人盡爲敵國也]."
舟中敵國이란 친했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이탈함을 비유한 말이다.
출전
사기(史記) 권65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
舟 배 주 | 中 가운데 중 | 敵 대적할 적, 다할 활 | 國 나라 국 |
배(舟) 속의 적국(敵國)이라는 뜻으로, 군주(君主)가 덕을 닦지 않으면, 같은 배를 타고 있는 것과 같이 이해(利害) 관계(關係)가 같은 사람들이라도, 적이 되는 수가 있음을 비유(比喩ㆍ譬喩)해 이르는 말, 곧 자기편(自己便)이라도 갑자기 적이 될 수 있음을 이름
사기(史記) 손자오기(孫子吳起)열전의 이야기.
전국(戰國)시대, 오기는 위(衛)나라 사람으로, 문후(文侯)를 섬겨 진(秦)나라를 쳐서 5개의 성을 빼앗았다. 문후는 오기가 용병에 능하고 부하들에게도 신망을 얻고 있는 것을 알고 서하(西河)를 지켜 진나라와 한(韓)나라를 방어하게 하였다. 문후가 죽자 오기는 그의 아들 무후(武侯)를 섬겼다.
어느 날, 무후가 오기와 함께 배를 타고 서하(西河)를 둘러본 일이 있었다. 무후는 강의 중류에 이르러 오기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산과 강의 험난한 조망이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이것이야말로 우리 위나라의 보배로다."
이에 오기는 다음과 같이 아뢰어 무후를 깨우쳤다.
"국가의 보배가 되는 것은 임금의 덕일뿐, 지형의 험난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옛날 삼묘씨(三苗氏)의 나라는 동정호(洞庭湖)의 왼쪽을 끼고 팽려호를 오른쪽으로 끼고 있었으나, 임금이 덕의(德義)를 닦지 않았기 때문에 우왕(禹王)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하(夏)나라의 걸왕(桀王)이 살던 곳은 왼쪽에 황하(黃河)와 제수(濟水)가 흐르고, 오른쪽에 태산(泰山)과 화산(華山)이 솟아 있으며, 남쪽으로 이궐(伊闕)이라는 깎아지른 절벽과 북쪽으로 양장산(羊腸山)을 면하고 있어 험준함을 자랑하였지만 정치가 어질지 못하여 탕(湯) 임금에게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또 은(殷)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紂王)의 거처는 왼쪽에 맹문산(孟門山)이 있고, 오른쪽에 상산(常山)이 있었으며, 남쪽으로는 황하가 도도하게 흘러 험준하였지만 역시 정치를 행함에 덕이 없어 결국 무왕(武王)에게 살해당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살펴보건대 나라의 보배는 덕에 있는 것이지 지세의 험준함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군주께서 덕을 닦지 않으신다면 이 배 안에 함께 타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적국의 편이 될 것입니다[若君不修德, 舟中之人盡爲敵國也]."
舟中敵國이란 친했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이탈함을 비유한 말이다.
출전
사기(史記) 권65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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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令暮改 (조령모개, zhāolìngmùgǎi)
朝令暮改(조령모개)
朝令暮改(zhāolìngmùgǎi)
朝 아침 조,고을 이름 주 | 令 하여금 령(영) | 暮 저물 모 | 改 고칠 개 |
아침에 명령(命令)을 내리고서 저녁에 다시 바꾼다는 뜻으로, ①법령(法令)의 개정(改定)이 너무 빈번(頻煩)하여 믿을 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 ②아침에 조세(租稅)를 부과(賦課)하고 저녁에 걷어들임을 이르는 말
to issue an order in the morning and change it in the evening—to make changes in policy at will
《사기(史記)》〈평준서(平準書)〉 재정경제사장(財政經濟史章)에는, 전한(前漢) 문제(文帝) 때의 일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흉노(匈奴)가 자주 변방을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하니, 경작하면서 수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자연히 변방에서 수확하는 곡식만으로 충당하기에 식량이 부족하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곡식을 헌납받는 사람들과, 그 곡식을 변방까지 수송할 사람들을 모집하여 벼슬을 주기로 하였다. 그 벼슬의 지위는 대서장(大庶長)까지였다. 이 조치는, 문제와 경제(景帝) 때의 어사대부(御史大夫)였던 조조(晁錯)의 헌책(獻策)을 취한 것이었음을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에서 밝히고 있다. 조조가 상소한 이 헌책은 후세에 〈논귀속소(論貴粟疏)〉라 불리게 되는데, 여기에 조령모개라는 말이 있다. 조조는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지금 다섯 가족의 농가에서는 부역이 과중하여, 노역(勞役)에 복종하는 사람이 두 사람을 내려가지 않는다. 따라서 경작하여 수확하는 것은 백 묘(畝)가 고작인데, 이 백 묘는 많아야 백 석에 지나지 않는다. 봄에 경작하고 여름철에 풀 뽑고, 가을에 수확하여 겨울에 저장하는 외에, 관청을 수리하고 부역에 불려나가는 등 춘하추동 쉴 날이 없다. 또 개인적으로는 사람들을 보내고 맞이하며, 죽은 자를 조문하고 고아들을 받고, 어린이를 기른다. 또한 홍수와 한발의 재해를 당하는 위에 갑자기 세금이나 부역을 당한다. 이것은 일정한 때도 정해져 있지 않아, 아침에 영을 내리고 저녁에 고친다(朝令而暮改). 전답이 있는 사람은 반값으로 팔고, 없는 사람은 빚을 내어 10할의 이자를 낸다. 이리하여 농지나 집을 방매(放買)하고, 아들과 손자를 팔아 부채를 갚는 자가 나오게 된다.
여기서 '조령모개'는 '법령에 일관성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청(淸)나라 때의 학자 왕염손(王念孫)은 후한(後漢) 때의 순열(荀悅)이 《한기(漢紀)》에 기록한 대로, '조령이모득(朝令而暮得)’으로 고쳐 써야 한다고 하였다. '조령모득'은 '아침에 법령을 내리고 저녁에 거둔다'는 뜻이다.
관련 한자어
유의어
朝夕變改(조석변개) | 朝變夕改(조변석개) | 朝變暮改(조변모개) | 朝令夕改(조령석개,zhāolìngxīgǎi) | 朝改暮變(조개모변) | 作心三日(작심삼일) | 高麗公事三日(고려공사삼일) |
朝令暮改(zhāolìngmùgǎi)
朝 아침 조,고을 이름 주 | 令 하여금 령(영) | 暮 저물 모 | 改 고칠 개 |
아침에 명령(命令)을 내리고서 저녁에 다시 바꾼다는 뜻으로, ①법령(法令)의 개정(改定)이 너무 빈번(頻煩)하여 믿을 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 ②아침에 조세(租稅)를 부과(賦課)하고 저녁에 걷어들임을 이르는 말
to issue an order in the morning and change it in the evening—to make changes in policy at will
《사기(史記)》〈평준서(平準書)〉 재정경제사장(財政經濟史章)에는, 전한(前漢) 문제(文帝) 때의 일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흉노(匈奴)가 자주 변방을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하니, 경작하면서 수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자연히 변방에서 수확하는 곡식만으로 충당하기에 식량이 부족하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곡식을 헌납받는 사람들과, 그 곡식을 변방까지 수송할 사람들을 모집하여 벼슬을 주기로 하였다. 그 벼슬의 지위는 대서장(大庶長)까지였다. 이 조치는, 문제와 경제(景帝) 때의 어사대부(御史大夫)였던 조조(晁錯)의 헌책(獻策)을 취한 것이었음을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에서 밝히고 있다. 조조가 상소한 이 헌책은 후세에 〈논귀속소(論貴粟疏)〉라 불리게 되는데, 여기에 조령모개라는 말이 있다. 조조는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지금 다섯 가족의 농가에서는 부역이 과중하여, 노역(勞役)에 복종하는 사람이 두 사람을 내려가지 않는다. 따라서 경작하여 수확하는 것은 백 묘(畝)가 고작인데, 이 백 묘는 많아야 백 석에 지나지 않는다. 봄에 경작하고 여름철에 풀 뽑고, 가을에 수확하여 겨울에 저장하는 외에, 관청을 수리하고 부역에 불려나가는 등 춘하추동 쉴 날이 없다. 또 개인적으로는 사람들을 보내고 맞이하며, 죽은 자를 조문하고 고아들을 받고, 어린이를 기른다. 또한 홍수와 한발의 재해를 당하는 위에 갑자기 세금이나 부역을 당한다. 이것은 일정한 때도 정해져 있지 않아, 아침에 영을 내리고 저녁에 고친다(朝令而暮改). 전답이 있는 사람은 반값으로 팔고, 없는 사람은 빚을 내어 10할의 이자를 낸다. 이리하여 농지나 집을 방매(放買)하고, 아들과 손자를 팔아 부채를 갚는 자가 나오게 된다.
여기서 '조령모개'는 '법령에 일관성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청(淸)나라 때의 학자 왕염손(王念孫)은 후한(後漢) 때의 순열(荀悅)이 《한기(漢紀)》에 기록한 대로, '조령이모득(朝令而暮得)’으로 고쳐 써야 한다고 하였다. '조령모득'은 '아침에 법령을 내리고 저녁에 거둔다'는 뜻이다.
관련 한자어
유의어
朝夕變改(조석변개) | 朝變夕改(조변석개) | 朝變暮改(조변모개) | 朝令夕改(조령석개,zhāolìngxīgǎi) | 朝改暮變(조개모변) | 作心三日(작심삼일) | 高麗公事三日(고려공사삼일) |
轉禍爲福 (전화위복)
轉禍爲福(전화위복)
轉 구를 전 | 禍 재앙 화 | 爲 하 위, 할 위 | 福 복 복, 간직할 부 |
재앙이 바뀌어 오히려 복이 되다. 불행한 일이나 실패를 끊임없는 노력으로 잘 처리함으로써 거꾸로 행복의 계기로 삼는다는 말.
《사기(史記)》 열전편(列傳篇) '관안(管晏)열전'에 나온다. 관중(管仲)을 평하기를 다음과 같다고 하였다. “정치의 실재면에 있어, 번번이 화를 전환시켜 복으로 하고 실패를 전환시켜 성공으로 이끌었다. 어떤 사물에 있어서도 그 경중을 잘 파악하여 그 균형을 잃지 않도록 신중하게 처리했다.”
전국시대 합종책(合從策)으로 한(韓), 위(魏), 조(趙), 연(燕), 제(齊), 초(楚)의 여섯 나라 재상을 겸임하였던 소진(蘇秦)도 《전국책(戰國策)》의 〈연책(燕策)〉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고 한다.
"옛날, 일을 잘 처리했던 사람은 화를 바꾸어 복이 되게 했고[轉禍爲福], 실패한 것을 바꾸어 공이 되게 하였다[因敗爲功]."
전국시대 말엽 蘇秦(소진)의 설득으로 강국 秦(진)나라에 대항하는 여섯나라의 合縱(합종), 다시 말하면 6국 동맹이 맺어져 소진은 여섯 나라의 재상을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齊(제) 魏(위) 두 나라가 진나라의 계략에 놀아나 趙(조)나라를 침으로써 잘 유지돼온 합종체제는 깨어져 버렸다. 때마침 燕(연)나라에서는 태자가 易王(이왕)이 되었는데 제나라는 또 이 정권교체의 혼란을 틈타서 연나라를 쳐 10개 성을 빼앗았다. 분개한 이왕은 소진을 불러들여 따졌다.
“우리 연나라는 그대가 주장한 합종책에 따랐을 뿐인데 이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소. 그대의 힘으로 빼앗긴 땅을 도로 찾아 주시오.” 소진은 곧바로 제나라로 가서 宣王(선왕)을 설득했다. “연나라 이왕은 진나라 혜왕의 사위입니다. 연나라 영토를 빼앗은 귀국은 앞으로 진나라와도 원수가 될 것이오.”
안색이 바뀌는 선왕을 보면서 소진은 말을 이었다. “예로부터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은 ‘재앙을 바꾸어 복을 만들었고(轉禍爲福) 실패를 성공으로 바꿔놓았다고 합니다. 빼앗은 땅을 즉각 연나라에 되돌려주는 것이 최선의 일처리 방식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연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진나라의 위세 때문에 땅을 돌려준 것으로 알고 진나라 왕도 기뻐할 것입니다.진 연 두나라와 친교를 맺게 되면 다른 왕들도 전하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약간의 땅을 버리고 천하를 얻는다면 이거야말로 覇王(패왕)의 業(업)이 아니겠습니까.” 선왕은 소진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출전]
사기(史記):열전편(列傳篇):관안열전(管晏列傳) | 전국책(戰國策):연책(燕策)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禍轉爲福(화전위복) | 塞翁禍福(새옹화복) | 塞翁之馬(새옹지마) | 塞翁爲福(새옹위복) | 塞翁得失(새옹득실) | 反禍爲福(반화위복) | 轉禍爲福(전화위복) |
轉 구를 전 | 禍 재앙 화 | 爲 하 위, 할 위 | 福 복 복, 간직할 부 |
재앙이 바뀌어 오히려 복이 되다. 불행한 일이나 실패를 끊임없는 노력으로 잘 처리함으로써 거꾸로 행복의 계기로 삼는다는 말.
《사기(史記)》 열전편(列傳篇) '관안(管晏)열전'에 나온다. 관중(管仲)을 평하기를 다음과 같다고 하였다. “정치의 실재면에 있어, 번번이 화를 전환시켜 복으로 하고 실패를 전환시켜 성공으로 이끌었다. 어떤 사물에 있어서도 그 경중을 잘 파악하여 그 균형을 잃지 않도록 신중하게 처리했다.”
전국시대 합종책(合從策)으로 한(韓), 위(魏), 조(趙), 연(燕), 제(齊), 초(楚)의 여섯 나라 재상을 겸임하였던 소진(蘇秦)도 《전국책(戰國策)》의 〈연책(燕策)〉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고 한다.
"옛날, 일을 잘 처리했던 사람은 화를 바꾸어 복이 되게 했고[轉禍爲福], 실패한 것을 바꾸어 공이 되게 하였다[因敗爲功]."
전국시대 말엽 蘇秦(소진)의 설득으로 강국 秦(진)나라에 대항하는 여섯나라의 合縱(합종), 다시 말하면 6국 동맹이 맺어져 소진은 여섯 나라의 재상을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齊(제) 魏(위) 두 나라가 진나라의 계략에 놀아나 趙(조)나라를 침으로써 잘 유지돼온 합종체제는 깨어져 버렸다. 때마침 燕(연)나라에서는 태자가 易王(이왕)이 되었는데 제나라는 또 이 정권교체의 혼란을 틈타서 연나라를 쳐 10개 성을 빼앗았다. 분개한 이왕은 소진을 불러들여 따졌다.
“우리 연나라는 그대가 주장한 합종책에 따랐을 뿐인데 이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소. 그대의 힘으로 빼앗긴 땅을 도로 찾아 주시오.” 소진은 곧바로 제나라로 가서 宣王(선왕)을 설득했다. “연나라 이왕은 진나라 혜왕의 사위입니다. 연나라 영토를 빼앗은 귀국은 앞으로 진나라와도 원수가 될 것이오.”
안색이 바뀌는 선왕을 보면서 소진은 말을 이었다. “예로부터 일을 잘 처리하는 사람은 ‘재앙을 바꾸어 복을 만들었고(轉禍爲福) 실패를 성공으로 바꿔놓았다고 합니다. 빼앗은 땅을 즉각 연나라에 되돌려주는 것이 최선의 일처리 방식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연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진나라의 위세 때문에 땅을 돌려준 것으로 알고 진나라 왕도 기뻐할 것입니다.진 연 두나라와 친교를 맺게 되면 다른 왕들도 전하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약간의 땅을 버리고 천하를 얻는다면 이거야말로 覇王(패왕)의 業(업)이 아니겠습니까.” 선왕은 소진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출전]
사기(史記):열전편(列傳篇):관안열전(管晏列傳) | 전국책(戰國策):연책(燕策)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禍轉爲福(화전위복) | 塞翁禍福(새옹화복) | 塞翁之馬(새옹지마) | 塞翁爲福(새옹위복) | 塞翁得失(새옹득실) | 反禍爲福(반화위복) | 轉禍爲福(전화위복) |
以暴易暴 (이포역포, yǐbàoyìbào)
以暴易暴(이포역포)
以暴易暴(yǐbàoyìbào)
以 써 이 | 暴 사나울 포,사나울 폭,쬘 폭,앙상할 박 | 易 바꿀 역,쉬울 이 | 暴 사나울 포,사나울 폭,쬘 폭,앙상할 박 |
횡포(橫暴)로써 횡포(橫暴)함을 바꾼다는 뜻으로, (1) 난폭한 세력으로 난폭한 세력을 대체하다. (2) 통치자가 바뀌었으나, 포학한 통치는 여전히 그대로이다. (3) 하나의 환난을 없애기 위해 다른 환난을 불러들이다. (4) 폭력으로써 폭력에 대응하다.
이포여포란 위정자가 정치를 함에 있어, 힘에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관련한 고사가 《사기(史記)》 〈백이숙제열전편(伯夷叔齊列傳篇)〉에 실려 있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孤竹國)의 왕자이다. 왕은 아우 숙제로 하여금 자신의 뒤를 잇게 하였다. 그러나 왕이 죽자 숙제는 백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백이는 아버지의 명을 따라야 한다고 나라를 떠났으며, 숙제 또한 그 뒤를 따라갔다. 나라에서는 할 수 없이 둘째를 왕으로 삼았다. 이때 백이와 숙제는 서백(西伯) 창(昌)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 의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서백은 이미 죽어 문왕(文王)에 추존되었으며,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아버지의 위패를 수레에 싣고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을 정벌하려 하였다.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이렇게 간(諫)하였다. “부친의 장례도 치르지 않고 바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효라 할 수 있는가? 신하된 자로서 군주를 시해하려는 것을 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무왕의 호위 무사들이 그들을 죽이려 하였으나, 태공이 이들을 의인이라고 하며 돌려보내게 하였다.
무왕이 은을 평정하여 천하가 주(周) 왕실을 종주로 섬겼으나, 백이와 숙제는 그 백성이 되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지조를 지켜 주나라의 양식을 먹으려 하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비[薇]를 꺾어 배를 채웠다. 그들은 굶주려 죽기 전에 이런 노래를 지었다.
저 서산에 올라 산중의 고비나 꺾자구나. 포악한 것으로 포악한 것을 다스렸으니, 그 잘못을 알지 못하는구나. 신농(神農), 우(禹), 하(夏)의 시대는 홀연히 지나가고 우리는 장차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아! 이제는 죽음뿐이로다, 쇠잔한 우리의 운명이여!
유교적 관점에서 백이와 숙제의 정절은 높이 받들여진다. 그러나, 그 두사람은 왕위를 포기하여 오히려 나라를 어려움에 처하게 한 것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史記, 사기, 史記:伯夷列傳, 사기:백이열전
以暴易暴(yǐbàoyìbào)
以 써 이 | 暴 사나울 포,사나울 폭,쬘 폭,앙상할 박 | 易 바꿀 역,쉬울 이 | 暴 사나울 포,사나울 폭,쬘 폭,앙상할 박 |
횡포(橫暴)로써 횡포(橫暴)함을 바꾼다는 뜻으로, (1) 난폭한 세력으로 난폭한 세력을 대체하다. (2) 통치자가 바뀌었으나, 포학한 통치는 여전히 그대로이다. (3) 하나의 환난을 없애기 위해 다른 환난을 불러들이다. (4) 폭력으로써 폭력에 대응하다.
이포여포란 위정자가 정치를 함에 있어, 힘에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관련한 고사가 《사기(史記)》 〈백이숙제열전편(伯夷叔齊列傳篇)〉에 실려 있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孤竹國)의 왕자이다. 왕은 아우 숙제로 하여금 자신의 뒤를 잇게 하였다. 그러나 왕이 죽자 숙제는 백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백이는 아버지의 명을 따라야 한다고 나라를 떠났으며, 숙제 또한 그 뒤를 따라갔다. 나라에서는 할 수 없이 둘째를 왕으로 삼았다. 이때 백이와 숙제는 서백(西伯) 창(昌)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 의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서백은 이미 죽어 문왕(文王)에 추존되었으며,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아버지의 위패를 수레에 싣고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을 정벌하려 하였다.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이렇게 간(諫)하였다. “부친의 장례도 치르지 않고 바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효라 할 수 있는가? 신하된 자로서 군주를 시해하려는 것을 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무왕의 호위 무사들이 그들을 죽이려 하였으나, 태공이 이들을 의인이라고 하며 돌려보내게 하였다.
무왕이 은을 평정하여 천하가 주(周) 왕실을 종주로 섬겼으나, 백이와 숙제는 그 백성이 되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지조를 지켜 주나라의 양식을 먹으려 하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비[薇]를 꺾어 배를 채웠다. 그들은 굶주려 죽기 전에 이런 노래를 지었다.
저 서산에 올라 산중의 고비나 꺾자구나. 포악한 것으로 포악한 것을 다스렸으니, 그 잘못을 알지 못하는구나. 신농(神農), 우(禹), 하(夏)의 시대는 홀연히 지나가고 우리는 장차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아! 이제는 죽음뿐이로다, 쇠잔한 우리의 운명이여!
유교적 관점에서 백이와 숙제의 정절은 높이 받들여진다. 그러나, 그 두사람은 왕위를 포기하여 오히려 나라를 어려움에 처하게 한 것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史記, 사기, 史記:伯夷列傳, 사기:백이열전
一罰百戒 (일벌백계, yìfábǎijiè)
一罰百戒(일벌백계)
一罚百戒(yìfábǎijiè)
一 한 일 | 罰 벌할 벌 | 百 일백 백,힘쓸 맥 | 戒 경계할 계 |
한 사람을 벌주어 백 사람을 경계한다는 뜻으로, 한 가지 죄와 또는 한 사람을 벌(罰)줌으로써 여러 사람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킴
전국시대의 병법가 손자(孫子)는 이름이 무(武)로, 제(齊)나라 사람이다. 그가 병법(兵法)이라는 특기를 가지고 오왕(吳王) 합려를 만났다. 합려가 말했다. “그대의 병서는 나도 모두 읽었다. 실제로 군을 지휘해 보여주겠는가?” “좋습니다.” “여인들이라도 좋은가?” “좋습니다.” 합려는 궁녀 180명을 모았다. 손자는 이것을 2대(隊)로 나눈 뒤, 왕의 총희(寵姬) 두 사람을 각각 대장으로 삼았다. 그런 다음 나머지 궁녀들에게는 갈래진 창[戟]을 들게 하고 명령하였다. “앞으로 하면 가슴을 보고, 좌로 하면 왼손을 보고 우로 하면 오른손을 보고, 뒤로 하면 등을 보라.” 이렇게 군령을 선포하고 군고(軍鼓)를 쳐서 명령하자 궁녀들은 크게 웃을 뿐이었다. 손자가 말했다. “군령이 분명하지 않아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은 주장(主將)의 책임이다.” 다시 큰소리로 세 번 되풀이 하고 다섯 차례 설명하고 나서 군고를 쳐서 호령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크게 웃을 뿐이었다. 손자가 말했다. “군령이 분명하지 않아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은 주장의 책임이다. 그러나 이미 군령이 분명한 데도 따르지 않는 것은 대장의 책임이다.” 하고는 칼을 뽑아 두 총희를 베려고 하였다. 대 위에서 이것을 보고 있던 합려가 전령을 보내왔다. “장군의 용병술(用兵術)을 잘 알았다. 그들을 용서해 줄 수 없을까.” 손자가 말했다. “신이 이미 명령을 받아 장군이 되었습니다. 장군은 진중에 있는 한 임금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들을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침내 두 총희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리고는 차석의 시녀를 대장으로 삼았다. 다시 군고를 울리자 궁녀들은 수족처럼 움직이고 동작이 모두 규칙에 들어맞아 감히 소리지르는 사람 하나 없었다. 손자는 전령을 보내 왕에게 보고했다. “군병은 이미 정돈되었습니다. 몸소 열병하심이 어떠하올지. 왕의 명령이라면 물이면 물, 불이면 불 가운데라 할지라도 뛰어들 것입니다.” 합려가 말했다. “장군은 피로할테니 휴식을 위하여 숙사로 가라. 내려가서 볼 생각은 없다.” 손자가 말했다. “왕께서는 한갓 용병의 이론을 좋아하실 뿐, 실제로 응용하시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으로 합려는 손자를 장군에 기용했다.
오나라가 서쪽으로는 초(楚)나라를 꺾고 북으로는 제나라, 진(晉)나라를 위협하여 명성을 제후 사이에 떨쳤는데, 손자의 힘이 컸다. 《사기(史記)》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 중 손자의 일화이다. 여기서 ‘일벌백계’는 ‘하나에게 본을 보임으로써 전체에게 경종을 울리는 방법’으로 쓰였다. 그리고 이런 방법은 고래로 무리를 통솔할 때 자주 이용되어 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것이 능력 없는 지휘자에게는 자칫 무리하게 이용되는 수도 있다.
관련 한자어
유의어
罚一儆百(벌일경백,fáyījǐngbǎi) | 以一警百(이일경백) | 以一儆百(이일경백,yǐyījǐngbǎi) | 惩一戒百(징일계백,chéngyíjièbǎi) | 惩一儆百(징일경백,chéngyījǐngbǎi) | 惩一警百(징일경백,chéngyījǐngbǎi) | 懲一勵百(징일여백) |
泣斬馬謖(읍참마속) |
史記,사기,史記:孫子吳起列傳, 사기:손자오기열전
一罚百戒(yìfábǎijiè)
一 한 일 | 罰 벌할 벌 | 百 일백 백,힘쓸 맥 | 戒 경계할 계 |
한 사람을 벌주어 백 사람을 경계한다는 뜻으로, 한 가지 죄와 또는 한 사람을 벌(罰)줌으로써 여러 사람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킴
전국시대의 병법가 손자(孫子)는 이름이 무(武)로, 제(齊)나라 사람이다. 그가 병법(兵法)이라는 특기를 가지고 오왕(吳王) 합려를 만났다. 합려가 말했다. “그대의 병서는 나도 모두 읽었다. 실제로 군을 지휘해 보여주겠는가?” “좋습니다.” “여인들이라도 좋은가?” “좋습니다.” 합려는 궁녀 180명을 모았다. 손자는 이것을 2대(隊)로 나눈 뒤, 왕의 총희(寵姬) 두 사람을 각각 대장으로 삼았다. 그런 다음 나머지 궁녀들에게는 갈래진 창[戟]을 들게 하고 명령하였다. “앞으로 하면 가슴을 보고, 좌로 하면 왼손을 보고 우로 하면 오른손을 보고, 뒤로 하면 등을 보라.” 이렇게 군령을 선포하고 군고(軍鼓)를 쳐서 명령하자 궁녀들은 크게 웃을 뿐이었다. 손자가 말했다. “군령이 분명하지 않아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은 주장(主將)의 책임이다.” 다시 큰소리로 세 번 되풀이 하고 다섯 차례 설명하고 나서 군고를 쳐서 호령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크게 웃을 뿐이었다. 손자가 말했다. “군령이 분명하지 않아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은 주장의 책임이다. 그러나 이미 군령이 분명한 데도 따르지 않는 것은 대장의 책임이다.” 하고는 칼을 뽑아 두 총희를 베려고 하였다. 대 위에서 이것을 보고 있던 합려가 전령을 보내왔다. “장군의 용병술(用兵術)을 잘 알았다. 그들을 용서해 줄 수 없을까.” 손자가 말했다. “신이 이미 명령을 받아 장군이 되었습니다. 장군은 진중에 있는 한 임금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들을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침내 두 총희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리고는 차석의 시녀를 대장으로 삼았다. 다시 군고를 울리자 궁녀들은 수족처럼 움직이고 동작이 모두 규칙에 들어맞아 감히 소리지르는 사람 하나 없었다. 손자는 전령을 보내 왕에게 보고했다. “군병은 이미 정돈되었습니다. 몸소 열병하심이 어떠하올지. 왕의 명령이라면 물이면 물, 불이면 불 가운데라 할지라도 뛰어들 것입니다.” 합려가 말했다. “장군은 피로할테니 휴식을 위하여 숙사로 가라. 내려가서 볼 생각은 없다.” 손자가 말했다. “왕께서는 한갓 용병의 이론을 좋아하실 뿐, 실제로 응용하시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으로 합려는 손자를 장군에 기용했다.
오나라가 서쪽으로는 초(楚)나라를 꺾고 북으로는 제나라, 진(晉)나라를 위협하여 명성을 제후 사이에 떨쳤는데, 손자의 힘이 컸다. 《사기(史記)》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 중 손자의 일화이다. 여기서 ‘일벌백계’는 ‘하나에게 본을 보임으로써 전체에게 경종을 울리는 방법’으로 쓰였다. 그리고 이런 방법은 고래로 무리를 통솔할 때 자주 이용되어 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것이 능력 없는 지휘자에게는 자칫 무리하게 이용되는 수도 있다.
관련 한자어
유의어
罚一儆百(벌일경백,fáyījǐngbǎi) | 以一警百(이일경백) | 以一儆百(이일경백,yǐyījǐngbǎi) | 惩一戒百(징일계백,chéngyíjièbǎi) | 惩一儆百(징일경백,chéngyījǐngbǎi) | 惩一警百(징일경백,chéngyījǐngbǎi) | 懲一勵百(징일여백) |
泣斬馬謖(읍참마속) |
史記,사기,史記:孫子吳起列傳, 사기:손자오기열전
一飯千金 (일반천금)
一飯千金(일반천금)
一 한 일 | 飯 밥 반 | 千 일천 천, 밭두둑 천, 그네 천 | 金 쇠 금, 성씨 김 |
한 끼의 식사(食事)에 천금같은 은혜(恩惠)가 들어 있다는 뜻으로, 조그만 은혜(恩惠)에 크게 보답(報答)함을 이르는 말
사기(史記) 회음후(淮陰侯)열전의 이야기.
한신(韓新)이 무명의 서민이었을 때, 집안이 가난한데다가 별 재간도 없어서 항상 남에게 얹혀 먹고 사는 신세였다. 이렇다보니 그를 싫어 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일찍이 남창(南昌)의 한 마을의 촌장 집에서 자주 밥을 얻어 먹었는데, 여러 달씩이나 신세를 진적도 있었다. 한신을 귀찮게 여기던 촌장의 아내는 아침 밥을 지어 몰래 먹어 치우곤 하였다.
어느 날, 한신은 회수(淮水)에서 낚시질을 하다가, 마침 물가에서 무명을 표백하고 있던 노파들을 보았다. 그들 중 한 노파가 굶주린 한신의 모습을 보고 수십 일동안 그에게 밥을 먹여 주었다. 이에 한신은 크게 감동하여 언젠가 반드시 후하게 보답하겠다고 말했다.
한신은 초왕(楚王)에 봉하여진 뒤, 고향 회음에 와서 자신에게 밥을 주었던 노파를 찾아 천금을 주고, 촌장에게는 일백전의 돈을 주었다.
출전
사기(史記) 淮陰侯傳(회음후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일반은(一飯恩) | 일반지은(一飯之恩) | 일반천금(一飯千金) |
반의어·상대어
|
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一 한 일 | 飯 밥 반 | 千 일천 천, 밭두둑 천, 그네 천 | 金 쇠 금, 성씨 김 |
한 끼의 식사(食事)에 천금같은 은혜(恩惠)가 들어 있다는 뜻으로, 조그만 은혜(恩惠)에 크게 보답(報答)함을 이르는 말
사기(史記) 회음후(淮陰侯)열전의 이야기.
한신(韓新)이 무명의 서민이었을 때, 집안이 가난한데다가 별 재간도 없어서 항상 남에게 얹혀 먹고 사는 신세였다. 이렇다보니 그를 싫어 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일찍이 남창(南昌)의 한 마을의 촌장 집에서 자주 밥을 얻어 먹었는데, 여러 달씩이나 신세를 진적도 있었다. 한신을 귀찮게 여기던 촌장의 아내는 아침 밥을 지어 몰래 먹어 치우곤 하였다.
어느 날, 한신은 회수(淮水)에서 낚시질을 하다가, 마침 물가에서 무명을 표백하고 있던 노파들을 보았다. 그들 중 한 노파가 굶주린 한신의 모습을 보고 수십 일동안 그에게 밥을 먹여 주었다. 이에 한신은 크게 감동하여 언젠가 반드시 후하게 보답하겠다고 말했다.
한신은 초왕(楚王)에 봉하여진 뒤, 고향 회음에 와서 자신에게 밥을 주었던 노파를 찾아 천금을 주고, 촌장에게는 일백전의 돈을 주었다.
출전
사기(史記) 淮陰侯傳(회음후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일반은(一飯恩) | 일반지은(一飯之恩) | 일반천금(一飯千金) |
반의어·상대어
|
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移木之信 (이목지신)
移木之信(이목지신)
移 옮길 이 | 木 나무 목 | 之 의 지 | 信 믿을 신 |
위정자(爲政者)가 나무 옮기기로 백성(百姓)을 믿게 한다는 뜻으로, ①신용(信用)을 지킴을 이르는 말 ②남을 속이지 아니함
진(秦)나라의 효공(孝公) 때에 상앙(商鞅)이라는 재상(宰相)이 있었다.
상앙(商鞅)은 전국 시대 진(秦)나라의 명재상이었으며,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위(衛)나라의 공족(公族) 출신이었으며, 법률에 밝았는데 특히 법치주의(法治主義)를 바탕으로 한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을 펴 천하통일(統一天下)의 기틀을 마련했다.
상앙은 법치주의자답게 법의 제정이나 시행에 매우 신중한 면모를 보였는데, 한번은 법을 제정해 놓고도 얼른 시행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효공이 그 까닭을 묻자, 상앙은 이렇게 대답했다.
“법을 세상에 내놓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백성들이 조정을 믿고 잘 따라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못하여 사람들이 그 법을 우습게 알거나 잘 모르거나 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면 백성들의 관심을 끌어 모을 수 있을까, 그것을 신중히 생각하는 중입니다.”
상앙은 그런 이유로 고심하던 나머지 하나의 계책(計策)을 생각해 냈다. 다음날, 도성 남문 근처에는 높이가 석 장[三丈(삼장)]에 이르는 커다란 나무 기둥 하나가 세워졌다. 그리고 옆에는 다음과 같은 방이 붙었다.
누구든지 이 기둥을 북문으로 옮겨 놓는 사람한테 십 금(十金)을 주겠노라.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고, 아무도 선뜻 나서서 옮기려고 하지 않았다. 우선 나무가 크고 무거워 보이기도 했거니와, 그것을 옮긴다고 해서 상금을 틀림없이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반응을 지켜 본 상앙은 다음날에는 상금을 올려서 방을 바꾸어 붙였다.
이 기둥을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한테 오십 금(五十金)을 주겠노라.
이번에는 사람들의 반응이 달랐다. 상금이 상당히 많이 붙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운께나 쓰는 사람 하나가 달려들어 나무 기둥을 둘러매고는 낑낑대며 북문까지 옮겨 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호기심에 차서 그 뒤를 줄레줄레 따라갔다. 마침내 나무 기둥이 북문에 도착하자, 상앙은 약속대로 그 남자에게 오십 금을 내주었다.
그런 다음 드디어 법령을 공포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조정이 약속한 바는 틀림없이 지켜진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그 법에 대해서는 상당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조문의 내용들이 너무 엄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행 일 년 동안에 새 법령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사람이 1천 명을 넘었다.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법이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따라야만 하겠구나.’
상앙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 태자가 그 법을 어겼다. 상앙은 옳다구나 하고, 법에 따라 태자의 태부(太傅)를 참형에 처하는 한편 태사(太師)는 칼로 이마를 째어 글자를 새기는 경형(鯨刑)에 처했다. 이러한 처벌을 본 백성들은 겁이 덜컥 나서 법을 잘 지키게 되었다.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나자 백성들은 법에 익숙해져 오히려 만족스러워했고, 남의 물건이면 길바닥에 떨어져 있어도 줍지 않았으며, 도적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뿐만 아니라 강력한 제도의 지원 덕분에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한결 윤택해졌다.
출전
사기(史記)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徙木之信(사목지신) | 移木之信(이목지신) |
반의어·상대어
食言(식언) |
移 옮길 이 | 木 나무 목 | 之 의 지 | 信 믿을 신 |
위정자(爲政者)가 나무 옮기기로 백성(百姓)을 믿게 한다는 뜻으로, ①신용(信用)을 지킴을 이르는 말 ②남을 속이지 아니함
진(秦)나라의 효공(孝公) 때에 상앙(商鞅)이라는 재상(宰相)이 있었다.
상앙(商鞅)은 전국 시대 진(秦)나라의 명재상이었으며,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위(衛)나라의 공족(公族) 출신이었으며, 법률에 밝았는데 특히 법치주의(法治主義)를 바탕으로 한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을 펴 천하통일(統一天下)의 기틀을 마련했다.
상앙은 법치주의자답게 법의 제정이나 시행에 매우 신중한 면모를 보였는데, 한번은 법을 제정해 놓고도 얼른 시행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효공이 그 까닭을 묻자, 상앙은 이렇게 대답했다.
“법을 세상에 내놓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백성들이 조정을 믿고 잘 따라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못하여 사람들이 그 법을 우습게 알거나 잘 모르거나 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면 백성들의 관심을 끌어 모을 수 있을까, 그것을 신중히 생각하는 중입니다.”
상앙은 그런 이유로 고심하던 나머지 하나의 계책(計策)을 생각해 냈다. 다음날, 도성 남문 근처에는 높이가 석 장[三丈(삼장)]에 이르는 커다란 나무 기둥 하나가 세워졌다. 그리고 옆에는 다음과 같은 방이 붙었다.
누구든지 이 기둥을 북문으로 옮겨 놓는 사람한테 십 금(十金)을 주겠노라.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고, 아무도 선뜻 나서서 옮기려고 하지 않았다. 우선 나무가 크고 무거워 보이기도 했거니와, 그것을 옮긴다고 해서 상금을 틀림없이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반응을 지켜 본 상앙은 다음날에는 상금을 올려서 방을 바꾸어 붙였다.
이 기둥을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한테 오십 금(五十金)을 주겠노라.
이번에는 사람들의 반응이 달랐다. 상금이 상당히 많이 붙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운께나 쓰는 사람 하나가 달려들어 나무 기둥을 둘러매고는 낑낑대며 북문까지 옮겨 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호기심에 차서 그 뒤를 줄레줄레 따라갔다. 마침내 나무 기둥이 북문에 도착하자, 상앙은 약속대로 그 남자에게 오십 금을 내주었다.
그런 다음 드디어 법령을 공포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조정이 약속한 바는 틀림없이 지켜진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그 법에 대해서는 상당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조문의 내용들이 너무 엄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행 일 년 동안에 새 법령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사람이 1천 명을 넘었다.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법이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따라야만 하겠구나.’
상앙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 태자가 그 법을 어겼다. 상앙은 옳다구나 하고, 법에 따라 태자의 태부(太傅)를 참형에 처하는 한편 태사(太師)는 칼로 이마를 째어 글자를 새기는 경형(鯨刑)에 처했다. 이러한 처벌을 본 백성들은 겁이 덜컥 나서 법을 잘 지키게 되었다.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나자 백성들은 법에 익숙해져 오히려 만족스러워했고, 남의 물건이면 길바닥에 떨어져 있어도 줍지 않았으며, 도적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뿐만 아니라 강력한 제도의 지원 덕분에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한결 윤택해졌다.
출전
사기(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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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어·유의어
徙木之信(사목지신) | 移木之信(이목지신) |
반의어·상대어
食言(식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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