忙中閑(망중한)
바쁜 중의 한가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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妄自尊大 (망자존대)
妄自尊大(망자존대)
妄 허망할 망 | 自 스스로 자 | 尊 높을 존 | 大 큰 대 |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의 이야기. 동한(東漢) 초, 유수(劉秀)는 동한을 건국하고 광무제(光武帝)가 되었지만, 전국은 여전히 군웅들이 날뛰는 상태였다. 당시 최대의 세력 중의 하나인 공손술(公孫述)은 사천지방에서 황제가 되었다. 한편 감숙 일대를 점거하고 있던 외효( )는 정치적인 출로(出路)를 찾기 위해, 마원을 공손술에게 보냈다. 마원은 공손술과 동향이었므로, 그가 자신을 환영해 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마원은 공손술의 의례적인 접견에 매우 실망하여 자기 나라로 돌아 왔다. 그는 외효에게 말하였다.
공손술은 진지한 마음으로 인재들을 받아들여 함께 일을 하려고 하기는 커녕 스스로 잘난체 교만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식견이 얕은 사람으로서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을 뿐이며, 스스로 잘난 체 하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있었습니다[井底蛙耳, 妄自尊大]. 우리의 뜻을 동쪽의 유수에게 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妄自尊大란 교만을 부리며 잘난 체함을 뜻한다.
妄 허망할 망 | 自 스스로 자 | 尊 높을 존 | 大 큰 대 |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의 이야기. 동한(東漢) 초, 유수(劉秀)는 동한을 건국하고 광무제(光武帝)가 되었지만, 전국은 여전히 군웅들이 날뛰는 상태였다. 당시 최대의 세력 중의 하나인 공손술(公孫述)은 사천지방에서 황제가 되었다. 한편 감숙 일대를 점거하고 있던 외효( )는 정치적인 출로(出路)를 찾기 위해, 마원을 공손술에게 보냈다. 마원은 공손술과 동향이었므로, 그가 자신을 환영해 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마원은 공손술의 의례적인 접견에 매우 실망하여 자기 나라로 돌아 왔다. 그는 외효에게 말하였다.
공손술은 진지한 마음으로 인재들을 받아들여 함께 일을 하려고 하기는 커녕 스스로 잘난체 교만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식견이 얕은 사람으로서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을 뿐이며, 스스로 잘난 체 하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있었습니다[井底蛙耳, 妄自尊大]. 우리의 뜻을 동쪽의 유수에게 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妄自尊大란 교만을 부리며 잘난 체함을 뜻한다.
芒刺在背 (망자재배)
芒刺在背(망자재배)
芒刺在背[mángcìzàibèi]
芒 까끄라기 망, 황홀할 황 | 刺 찌를 자, 찌를 척, 수라 라(나), 비방할 체 | 在 있을 재 | 背 등 배, 배반할 배 |
가시를 등에 지고 있다는 뜻으로,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편하지 않다.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다. 안절부절못하다. 좌불안석(坐不安席).
한서(漢書) 곽광(藿光)전의 이야기다.
전한(前漢)의 무제(武帝) 때 곽광(藿光)이란 인물이 있었다. 무제는 사리가 분명하고 과단성이 있는 그를 대단히 신임하여 자기 사후의 조정 일을 미리 위임했다.
기원전 87년, 한무제가 세상을 떠나자, 여덟살 된 아들이 소제(昭帝)로서 제위를 계승하였다. 각광은 대사마 대장군이란 막강한 직위를 차지하고는 어린 나이로 등극한 소제(昭帝)의 후견인이 되어 국정을 좌지우지했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황제의 폐립 문제까지 독단할 정도로 권력을 휘둘렀다.
한소제가 21세로 죽자, 곽광은 한무제의 손자인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제위에 앉혔다. 그런데 그는 음란하고 놀기만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국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 일생일대의 실수로다!’
곽광은 후회막급하여 즉시 폐위 절차에 들어갔다. 우선 대사농(大司農) 전연년(田延年)을 은밀히 불러 의논했다.
“생각건대 아무래도 옥좌의 주인을 갈아야 할 것 같소.”
“이 사람 역시 같은 생각이지만, 황실의 어른이신 태후마마께서 과연 허락하실지 모르겠구려.”
“나라의 장래를 위하는 일인데 설마 마다하시겠소? 무황제께서 이 사람한테 내리신 유조(遺詔)도 있고 하니 설득해 봅시다.”
태후 앞에 나아간 곽광은 유하의 잘못을 역설하여 태후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런 다음 즉각 퇴위 절차를 밟아 유하를 내쫓고 무제의 증손자 유순(劉詢)을 데려다 보위에 앉히기로 했다. 유순은 무제의 태자 유거(劉據)의 손자인데, 냉혹하기로 이름난 무제는 말년에 무고 사건에 걸린 유거를 친아들인데도 용서하지 않고 일가족까지 다 죽여 버렸다. 다만, 이때 유순은 갓난아이였기 때문에 요행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유순으로 대통을 잇게 한다는 방침은 섰으나, 그의 현재 신분이 걸림돌이 되어 일단 양무후(陽武侯)로 봉했다가 나중에야 황제로 옹립했다. 그가 곧 선제(宣帝)다. 보위에 오른 선제는 고조의 묘에 참배하기 위해 대궐을 나섰는데, 이때 곽광이 대장군으로서 호위역을 맡았다.
한선제는 기골이 장대하고 날카로운 눈에 엄한 표정을 한 곽광을 보며, 수레 안에서 마치 등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若有芒刺在背] 참기 어려운 모습으로 떨고 있었다. 기원전 68년, 곽광이 병들어 죽자, 비로소 한선제는 친정(親政)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느낌을 갖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芒刺在背(A thorn in the flesh) 란 몹시 불안한 상태를 비유한 말이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坐不安席(좌불안석) | 如坐针毡[rúzuòzhēnzhān] |
芒刺在背[mángcìzàibèi]
芒 까끄라기 망, 황홀할 황 | 刺 찌를 자, 찌를 척, 수라 라(나), 비방할 체 | 在 있을 재 | 背 등 배, 배반할 배 |
가시를 등에 지고 있다는 뜻으로,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편하지 않다.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다. 안절부절못하다. 좌불안석(坐不安席).
한서(漢書) 곽광(藿光)전의 이야기다.
전한(前漢)의 무제(武帝) 때 곽광(藿光)이란 인물이 있었다. 무제는 사리가 분명하고 과단성이 있는 그를 대단히 신임하여 자기 사후의 조정 일을 미리 위임했다.
기원전 87년, 한무제가 세상을 떠나자, 여덟살 된 아들이 소제(昭帝)로서 제위를 계승하였다. 각광은 대사마 대장군이란 막강한 직위를 차지하고는 어린 나이로 등극한 소제(昭帝)의 후견인이 되어 국정을 좌지우지했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황제의 폐립 문제까지 독단할 정도로 권력을 휘둘렀다.
한소제가 21세로 죽자, 곽광은 한무제의 손자인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제위에 앉혔다. 그런데 그는 음란하고 놀기만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국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 일생일대의 실수로다!’
곽광은 후회막급하여 즉시 폐위 절차에 들어갔다. 우선 대사농(大司農) 전연년(田延年)을 은밀히 불러 의논했다.
“생각건대 아무래도 옥좌의 주인을 갈아야 할 것 같소.”
“이 사람 역시 같은 생각이지만, 황실의 어른이신 태후마마께서 과연 허락하실지 모르겠구려.”
“나라의 장래를 위하는 일인데 설마 마다하시겠소? 무황제께서 이 사람한테 내리신 유조(遺詔)도 있고 하니 설득해 봅시다.”
태후 앞에 나아간 곽광은 유하의 잘못을 역설하여 태후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런 다음 즉각 퇴위 절차를 밟아 유하를 내쫓고 무제의 증손자 유순(劉詢)을 데려다 보위에 앉히기로 했다. 유순은 무제의 태자 유거(劉據)의 손자인데, 냉혹하기로 이름난 무제는 말년에 무고 사건에 걸린 유거를 친아들인데도 용서하지 않고 일가족까지 다 죽여 버렸다. 다만, 이때 유순은 갓난아이였기 때문에 요행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유순으로 대통을 잇게 한다는 방침은 섰으나, 그의 현재 신분이 걸림돌이 되어 일단 양무후(陽武侯)로 봉했다가 나중에야 황제로 옹립했다. 그가 곧 선제(宣帝)다. 보위에 오른 선제는 고조의 묘에 참배하기 위해 대궐을 나섰는데, 이때 곽광이 대장군으로서 호위역을 맡았다.
한선제는 기골이 장대하고 날카로운 눈에 엄한 표정을 한 곽광을 보며, 수레 안에서 마치 등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若有芒刺在背] 참기 어려운 모습으로 떨고 있었다. 기원전 68년, 곽광이 병들어 죽자, 비로소 한선제는 친정(親政)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느낌을 갖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芒刺在背(A thorn in the flesh) 란 몹시 불안한 상태를 비유한 말이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坐不安席(좌불안석) | 如坐针毡[rúzuòzhēnzhān] |
望雲之情 (망운지정)
望雲之情(망운지정)
자녀가 부모를 그리는 정. 당(唐)나라 적인걸(狄仁傑)이 타향에서 산에 올라가 고향쪽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고 부모를 생각했다는 고사에서 유래.
자녀가 부모를 그리는 정. 당(唐)나라 적인걸(狄仁傑)이 타향에서 산에 올라가 고향쪽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고 부모를 생각했다는 고사에서 유래.
望洋之歎 (망양지탄, wàngyángzhītàn)
望洋之歎(망양지탄)
望洋之叹(wàngyángzhītàn)
望 바랄 망,보름 망 | 洋 큰 바다 양 | 之 갈 지 | 歎 탄식할 탄 |
넓은 바다를 보고 탄식(歎息)한다는 뜻으로, ①남의 원대(遠大)함에 감탄(感歎)하고, 나의 미흡(未洽)함을 부끄러워함의 비유(比喩) ②제 힘이 미치지 못할 때 하는 탄식(歎息)
《장자(莊子)》 외편 추수(秋水)에 나오는 말이다.
옛날 황허(黃河)중류의 맹진(孟津:하남성 내)에 하백(河伯)이라는 하신(河神)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금빛 찬란히 빛나는 강물을 보고 감탄하여 말했다. "이런 큰 강은 달리 또 없을 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늙은 자라였다. "그럼, 황하보다 더 큰 물이 있단 말인고?" "그렇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해 뜨는 쪽에 북해(北海)가 있는데, 이 세상의 모든 강이 사시 사철 그곳으로 흘러들기 때문에 그 넓이는 실로 황하의 몇 갑절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 큰 강이 있을까? 어쨌든 내 눈으로 보기 전엔 못 믿겠네." 황하 중류의 맹진을 떠나 본 적이 없는 하백은 늙은 자라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어느 가을 홍수로 인해 모든 개울물이 황허로 흘러들자, 강의 넓이는 몇 갑절이나 넓어져 하백으로도 믿기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하백은 문득 지난날 늙은 자라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는 이 기회에 강 하류로 내려가 북해를 한번 보기로 했다. 그래서 동쪽으로 따라 내려갔다.
한참을 흘러 내려간 후 마침내 북해(北海)에 이르자 그 곳의 해신(海神)인 약(若)이 반가이 맞아 주었다. "잘 왔소. 진심으로 환영하오."
북해의 해신이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자 파도는 가라앉고 눈앞에 거울 같은 바다가 펼쳐졌다. '세상에는 황하 말고도 이처럼 큰 강이 있었단 말인가‥….'
하백이 약의 안내로 주위를 돌아보니, 천하가 모두 물로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백은 그 너른 바다를 보고 감탄하며(望洋而歎) 이렇게 말하였다. "속담에 이르기를 백 가지 도를 듣고서는 자기만한 자가 없는 줄 안다고 했는데, 이는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아, 만일 내가 이 곳을 보지 못하였다면 위태로울 뻔했습니다. 오래도록 내가 도를 아는 척 행세하여 웃음거리가 되었을테니까 말입니다."
북해의 신 약은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물 안 개구리(井中之蛙)에게 바다에 대해 말해도 소용없음은 그가 사는 곳에 얽매어 있기 때문이고, 여름벌레에게 얼음에 대해 말해도 소용없음은 그가 시절에 묶여 있기 때문이오. 지금 그대는 벼랑 가에서 나와 큰 바다를 보고, 비로소 그대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으니, 이제야말로 큰 이치를 말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겠소?"
여기서 망양지탄은 가없는 진리의 길을 보고 스스로 자기가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오늘날에는 뜻을 넓게 해석하여 자기의 힘이 미치지 못함을 탄식한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유래: 장자(莊子)의 추수편(秋水篇)
관련 한자어
동의어
望洋之嘆(망양지탄) | 亡羊之歎(망양지탄) | 亡羊歎(망양탄) | 亡羊之嘆(망양지탄) | 望洋兴叹(망양흥탄,wàngyángxīngtàn) |
유의어
多岐亡羊(다기망양) 달아난 양을 찾다가 여러 갈래 길에 이르러 길을 잃었다는 뜻으로, ①학문(學問)의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어 진리(眞理)를 찾기 어려움 ②방침(方針)이 많아 할 바를 모르게 됨
참조어
井中之蛙(정중지와) | 用管窺天(용관규천) |
莊子(장자) | 秋水篇(추수편) | 河伯(하백) | 若(약) |
望洋之叹(wàngyángzhītàn)
望 바랄 망,보름 망 | 洋 큰 바다 양 | 之 갈 지 | 歎 탄식할 탄 |
넓은 바다를 보고 탄식(歎息)한다는 뜻으로, ①남의 원대(遠大)함에 감탄(感歎)하고, 나의 미흡(未洽)함을 부끄러워함의 비유(比喩) ②제 힘이 미치지 못할 때 하는 탄식(歎息)
《장자(莊子)》 외편 추수(秋水)에 나오는 말이다.
옛날 황허(黃河)중류의 맹진(孟津:하남성 내)에 하백(河伯)이라는 하신(河神)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금빛 찬란히 빛나는 강물을 보고 감탄하여 말했다. "이런 큰 강은 달리 또 없을 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늙은 자라였다. "그럼, 황하보다 더 큰 물이 있단 말인고?" "그렇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해 뜨는 쪽에 북해(北海)가 있는데, 이 세상의 모든 강이 사시 사철 그곳으로 흘러들기 때문에 그 넓이는 실로 황하의 몇 갑절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 큰 강이 있을까? 어쨌든 내 눈으로 보기 전엔 못 믿겠네." 황하 중류의 맹진을 떠나 본 적이 없는 하백은 늙은 자라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어느 가을 홍수로 인해 모든 개울물이 황허로 흘러들자, 강의 넓이는 몇 갑절이나 넓어져 하백으로도 믿기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하백은 문득 지난날 늙은 자라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는 이 기회에 강 하류로 내려가 북해를 한번 보기로 했다. 그래서 동쪽으로 따라 내려갔다.
한참을 흘러 내려간 후 마침내 북해(北海)에 이르자 그 곳의 해신(海神)인 약(若)이 반가이 맞아 주었다. "잘 왔소. 진심으로 환영하오."
북해의 해신이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자 파도는 가라앉고 눈앞에 거울 같은 바다가 펼쳐졌다. '세상에는 황하 말고도 이처럼 큰 강이 있었단 말인가‥….'
하백이 약의 안내로 주위를 돌아보니, 천하가 모두 물로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백은 그 너른 바다를 보고 감탄하며(望洋而歎) 이렇게 말하였다. "속담에 이르기를 백 가지 도를 듣고서는 자기만한 자가 없는 줄 안다고 했는데, 이는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아, 만일 내가 이 곳을 보지 못하였다면 위태로울 뻔했습니다. 오래도록 내가 도를 아는 척 행세하여 웃음거리가 되었을테니까 말입니다."
북해의 신 약은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물 안 개구리(井中之蛙)에게 바다에 대해 말해도 소용없음은 그가 사는 곳에 얽매어 있기 때문이고, 여름벌레에게 얼음에 대해 말해도 소용없음은 그가 시절에 묶여 있기 때문이오. 지금 그대는 벼랑 가에서 나와 큰 바다를 보고, 비로소 그대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으니, 이제야말로 큰 이치를 말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겠소?"
여기서 망양지탄은 가없는 진리의 길을 보고 스스로 자기가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오늘날에는 뜻을 넓게 해석하여 자기의 힘이 미치지 못함을 탄식한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유래: 장자(莊子)의 추수편(秋水篇)
관련 한자어
동의어
望洋之嘆(망양지탄) | 亡羊之歎(망양지탄) | 亡羊歎(망양탄) | 亡羊之嘆(망양지탄) | 望洋兴叹(망양흥탄,wàngyángxīngtàn) |
유의어
多岐亡羊(다기망양) 달아난 양을 찾다가 여러 갈래 길에 이르러 길을 잃었다는 뜻으로, ①학문(學問)의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어 진리(眞理)를 찾기 어려움 ②방침(方針)이 많아 할 바를 모르게 됨
참조어
井中之蛙(정중지와) | 用管窺天(용관규천) |
莊子(장자) | 秋水篇(추수편) | 河伯(하백) | 若(약) |
亡羊之歎 (망양지탄)
亡羊之歎(망양지탄)
☞ 望洋之歎 (망양지탄, wàngyángzhītàn)
넓은 바다를 바라보고 감탄하다. 남의 훌륭함에 감탄하고 자신의 미흡함을 부끄러워함의 비유. 아득히 먼 옛날 이야기다.
黃河(황하)의 神(신) 河伯(하백)은 늘 황하의 장대한 모습을 보면서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황하 중류의 孟津(맹진)이란 곳에살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멀리 떠나본 적이 없었다.
어느날 아침 태양이 불끈 솟아오르면서 강의 수면이 황금빛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하백은 새삼스레 감탄의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큰 물은 여기 말고 달리 있을 턱이 없지.” 그런데 등 뒤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그건 모르고 하는 말씀입니다.”
뒤돌아보니 늙은 자라였다. “그렇다면 황하보다도 더 큰 물이 있다는 말이냐.” “해가 뜨는 쪽에 北海(북해)라는 곳이 있는데 그 크기가 황하의 몇갑절이나 된답니다.” 하백은 어느날 황하의 물줄기를 따라 해뜨는 동쪽으로 내려가보다가 마침내 북해에 이르렀다.
과연 바라보니 망망한 바다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부끄러워진 하백은 바다를 바라보고 북해신 若(약)을 향해 감탄하면서 말했다(望洋向若而歎曰․망양향약이탄왈).“북해가 엄청 넓다는 말을 들었지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와서 실제로 보지 않았더라면 저의 얕은 소견을 깨닫지 못했을뻔 했습니다.”
그러자 북해신 약은 이렇게 말했다. “우물안 개구리가 바다를 모르는 건 그가 좁은 장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며 여름벌레가 얼음을 모르는 건 그가 여름밖에 알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것은 그들이 상식의 가르침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오. 이제 당신은 좁은 개울에서 나와 큰 바다를 보았으니 이제 더불어 큰 진리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었소.”
☞ 望洋之歎 (망양지탄, wàngyángzhītàn)
관련 한자어
동의어
望洋之嘆(망양지탄) | 亡羊之歎(망양지탄) | 亡羊歎(망양탄) | 亡羊之嘆(망양지탄) | 望洋兴叹(망양흥탄,wàngyángxīngtàn) |
☞ 望洋之歎 (망양지탄, wàngyángzhītàn)
넓은 바다를 바라보고 감탄하다. 남의 훌륭함에 감탄하고 자신의 미흡함을 부끄러워함의 비유. 아득히 먼 옛날 이야기다.
黃河(황하)의 神(신) 河伯(하백)은 늘 황하의 장대한 모습을 보면서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황하 중류의 孟津(맹진)이란 곳에살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멀리 떠나본 적이 없었다.
어느날 아침 태양이 불끈 솟아오르면서 강의 수면이 황금빛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하백은 새삼스레 감탄의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큰 물은 여기 말고 달리 있을 턱이 없지.” 그런데 등 뒤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그건 모르고 하는 말씀입니다.”
뒤돌아보니 늙은 자라였다. “그렇다면 황하보다도 더 큰 물이 있다는 말이냐.” “해가 뜨는 쪽에 北海(북해)라는 곳이 있는데 그 크기가 황하의 몇갑절이나 된답니다.” 하백은 어느날 황하의 물줄기를 따라 해뜨는 동쪽으로 내려가보다가 마침내 북해에 이르렀다.
과연 바라보니 망망한 바다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부끄러워진 하백은 바다를 바라보고 북해신 若(약)을 향해 감탄하면서 말했다(望洋向若而歎曰․망양향약이탄왈).“북해가 엄청 넓다는 말을 들었지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와서 실제로 보지 않았더라면 저의 얕은 소견을 깨닫지 못했을뻔 했습니다.”
그러자 북해신 약은 이렇게 말했다. “우물안 개구리가 바다를 모르는 건 그가 좁은 장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며 여름벌레가 얼음을 모르는 건 그가 여름밖에 알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것은 그들이 상식의 가르침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오. 이제 당신은 좁은 개울에서 나와 큰 바다를 보았으니 이제 더불어 큰 진리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었소.”
☞ 望洋之歎 (망양지탄, wàngyángzhītàn)
관련 한자어
동의어
望洋之嘆(망양지탄) | 亡羊之歎(망양지탄) | 亡羊歎(망양탄) | 亡羊之嘆(망양지탄) | 望洋兴叹(망양흥탄,wàngyángxīngtàn) |
亡羊補牢 (망양보뢰)
亡羊補牢(망양보뢰)
亡 망할 망, 없을 무 | 羊 양 양 | 補 기울 보, 도울 보 | 牢 우리 뢰(뇌) |
양을 잃고서 그 우리를 고친다는 뜻으로, ①실패(失敗)한 후(後)에 일을 대비(對備)함 ②이미 어떤 일을 실패한 뒤에 뉘우쳐도 소용이 없음
It is never too late to mend
중국 전한(前漢) 때의 학자 유향(劉向)이 편찬한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에서 유래되었다.
전국시대, 초나라 경양왕(頃襄王)은 간신들을 중용하고 주색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楚(초)나라 중신인 莊辛(장신)은 어느날 襄王(양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요즘 전하께서 궁 안에서는 왼쪽에 주후를, 오른쪽에 하후를 데리고 계시고 궁 밖에 계실 때에는 언릉군과 수근군이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는데 이 네 사람은 하나같이 음탕하고 방종하여 나랏돈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다가는 나라 재정이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양왕은 화를 벌컥 내며 장신을 꾸짖듯 말했다.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오. 그런 터무니없는 말로 민심을 부추길 작정이오. 혹시 망령이라도 든 게 아니오."
그러나 장신은 조금도 거리낌없이 진언했다.
"분명한 사실인데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습니다. 황공하오나 전하께서는 하루속히 이 일을 시정하시기 바라옵니다. 만약 그대로 가게 된다면 초나라의 앞날은 너무나도 뻔합니다."
迷妄(미망)에 빠져있는 양왕의 귀에 이런 충언이 들어올 턱이 없었다.
장신은 결국 조(趙)나라로 갔는데, 5개월 뒤 진나라가 초나라를 침공하여 양왕은 성양으로 망명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양왕은 그제서야 비로소 장신의 말이 옳았음을 깨닫고 조나라에 사람을 보내 그를 불러들였다. 양왕이 이제 어찌해야 하는지를 묻자 장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토끼를 발견하고서 사냥개를 준비해도 아직 늦지 않고 양이 없어진 다음에 양우리를 고치더라도 늦지 않다[見兎而顧犬 未爲晩也 亡羊而補牢 未爲遲也(망양이보뢰 미위지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탕왕과 무왕은 백 리 땅에서 나라를 일으켰고, 걸왕과 주왕은 천하가 너무 넓어 끝내 멸망했습니다. 이제 초나라가 비록 작지만 긴 것을 잘라 짧은 것을 기우면 수천 리나 되니, 탕왕과 무왕의 백 리 땅과 견줄 바가 아닙니다."
여기서 망양보뢰는 이미 양을 잃은 뒤에 우리를 고쳐도 늦지 않다는 뜻으로 쓰였다. 다시 말해 실패 또는 실수를 해도 빨리 뉘우치고 수습하면 늦지 않다는 말이다. 따라서 부정적인 뜻보다는 긍정적인 뜻이 강하다.
하지만 뒤로 가면서 원래의 뜻과 달리, 일을 그르친 뒤에는 뉘우쳐도 이미 소용이 없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바뀌었다. 한국에서도 전자보다는 후자의 뜻으로 쓰인다. 망우보뢰(亡牛補牢: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와 같은 뜻이며,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사후청심환(死後淸心丸)·실마치구(失馬治廐)·실우치구(失牛治廐)·만시지탄(晩時之歎)과도 뜻이 통한다.
출전
전국책(戰國策)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十日之菊(십일지국) | 失牛治廐(실우치구) | 失馬治廐(실마치구) | 死後淸心丸(사후청심환) | 死後藥方文(사후약방문) | 亡牛補牢(망우보뢰) | 晩時之歎(만시지탄) | 渴而穿井(갈이천정) |
반의어·상대어
有備無患(유비무환) | 安居危思(안거위사) | 曲突徙薪(곡돌사신) | 居安思危(거안사위) |
亡 망할 망, 없을 무 | 羊 양 양 | 補 기울 보, 도울 보 | 牢 우리 뢰(뇌) |
양을 잃고서 그 우리를 고친다는 뜻으로, ①실패(失敗)한 후(後)에 일을 대비(對備)함 ②이미 어떤 일을 실패한 뒤에 뉘우쳐도 소용이 없음
It is never too late to mend
중국 전한(前漢) 때의 학자 유향(劉向)이 편찬한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에서 유래되었다.
전국시대, 초나라 경양왕(頃襄王)은 간신들을 중용하고 주색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楚(초)나라 중신인 莊辛(장신)은 어느날 襄王(양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요즘 전하께서 궁 안에서는 왼쪽에 주후를, 오른쪽에 하후를 데리고 계시고 궁 밖에 계실 때에는 언릉군과 수근군이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는데 이 네 사람은 하나같이 음탕하고 방종하여 나랏돈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다가는 나라 재정이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양왕은 화를 벌컥 내며 장신을 꾸짖듯 말했다.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오. 그런 터무니없는 말로 민심을 부추길 작정이오. 혹시 망령이라도 든 게 아니오."
그러나 장신은 조금도 거리낌없이 진언했다.
"분명한 사실인데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습니다. 황공하오나 전하께서는 하루속히 이 일을 시정하시기 바라옵니다. 만약 그대로 가게 된다면 초나라의 앞날은 너무나도 뻔합니다."
迷妄(미망)에 빠져있는 양왕의 귀에 이런 충언이 들어올 턱이 없었다.
장신은 결국 조(趙)나라로 갔는데, 5개월 뒤 진나라가 초나라를 침공하여 양왕은 성양으로 망명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양왕은 그제서야 비로소 장신의 말이 옳았음을 깨닫고 조나라에 사람을 보내 그를 불러들였다. 양왕이 이제 어찌해야 하는지를 묻자 장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토끼를 발견하고서 사냥개를 준비해도 아직 늦지 않고 양이 없어진 다음에 양우리를 고치더라도 늦지 않다[見兎而顧犬 未爲晩也 亡羊而補牢 未爲遲也(망양이보뢰 미위지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탕왕과 무왕은 백 리 땅에서 나라를 일으켰고, 걸왕과 주왕은 천하가 너무 넓어 끝내 멸망했습니다. 이제 초나라가 비록 작지만 긴 것을 잘라 짧은 것을 기우면 수천 리나 되니, 탕왕과 무왕의 백 리 땅과 견줄 바가 아닙니다."
여기서 망양보뢰는 이미 양을 잃은 뒤에 우리를 고쳐도 늦지 않다는 뜻으로 쓰였다. 다시 말해 실패 또는 실수를 해도 빨리 뉘우치고 수습하면 늦지 않다는 말이다. 따라서 부정적인 뜻보다는 긍정적인 뜻이 강하다.
하지만 뒤로 가면서 원래의 뜻과 달리, 일을 그르친 뒤에는 뉘우쳐도 이미 소용이 없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바뀌었다. 한국에서도 전자보다는 후자의 뜻으로 쓰인다. 망우보뢰(亡牛補牢: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와 같은 뜻이며,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사후청심환(死後淸心丸)·실마치구(失馬治廐)·실우치구(失牛治廐)·만시지탄(晩時之歎)과도 뜻이 통한다.
출전
전국책(戰國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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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어·유의어
十日之菊(십일지국) | 失牛治廐(실우치구) | 失馬治廐(실마치구) | 死後淸心丸(사후청심환) | 死後藥方文(사후약방문) | 亡牛補牢(망우보뢰) | 晩時之歎(만시지탄) | 渴而穿井(갈이천정) |
반의어·상대어
有備無患(유비무환) | 安居危思(안거위사) | 曲突徙薪(곡돌사신) | 居安思危(거안사위) |
望梅解渴 (망매해갈)
望梅解渴(망매해갈)
望 바랄 망 | 梅 매화나무 매 | 解 풀 해 | 渴 목마를 갈 |
세설신어(世說新語) 가휼(假譎)편에는 조조(曹操)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위(魏)나라 문제(文帝)의 일화가 실려 있다.
동한(東漢) 말엽에, 조조는 군대를 통솔하여 장수(張繡)를 정벌하러 나섰다. 행군 도중 날씨가 너무 더워 병사들은 지치고 심한 갈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마실 물을 찾지 못해 진군을 멈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조조는 한참 생각하다가 묘책이 떠올랐는지 병사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외쳤다. 조금나 더 가면 앞에 큰 매화나무 숲이 있다[前有大梅林]. 열매도 많이 달려 있는데, 그 맛은 달고도 새콤하다. 이제 갈증을 풀 수 있을 것이다[可以解渴].
병사들은 매화가 있다는 말에 입안에 곧 침이 돌았다. 모두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전진하였는데, 얼마가지 않아 물이 있는 곳에 이르게 되었다.
望梅解渴(매실을 생각하며 갈증을 풀다)은 望梅止渴(망매지갈), 梅林解渴(매림해갈)이라고도 한다. 이는 공상으로 잠시 동안의 평안과 위안을 얻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望梅解渴(망매해갈) | 望梅止渴(망매지갈) | 梅林解渴(매림해갈) |
望 바랄 망 | 梅 매화나무 매 | 解 풀 해 | 渴 목마를 갈 |
세설신어(世說新語) 가휼(假譎)편에는 조조(曹操)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위(魏)나라 문제(文帝)의 일화가 실려 있다.
동한(東漢) 말엽에, 조조는 군대를 통솔하여 장수(張繡)를 정벌하러 나섰다. 행군 도중 날씨가 너무 더워 병사들은 지치고 심한 갈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마실 물을 찾지 못해 진군을 멈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조조는 한참 생각하다가 묘책이 떠올랐는지 병사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외쳤다. 조금나 더 가면 앞에 큰 매화나무 숲이 있다[前有大梅林]. 열매도 많이 달려 있는데, 그 맛은 달고도 새콤하다. 이제 갈증을 풀 수 있을 것이다[可以解渴].
병사들은 매화가 있다는 말에 입안에 곧 침이 돌았다. 모두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전진하였는데, 얼마가지 않아 물이 있는 곳에 이르게 되었다.
望梅解渴(매실을 생각하며 갈증을 풀다)은 望梅止渴(망매지갈), 梅林解渴(매림해갈)이라고도 한다. 이는 공상으로 잠시 동안의 평안과 위안을 얻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관련 한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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望梅解渴(망매해갈) | 望梅止渴(망매지갈) | 梅林解渴(매림해갈) |
罔談彼短 (망담피단)
罔談彼短(망담피단)
罔 없을 망, 그물 망 | 談 말씀 담 | 彼 저 피 | 短 짧을 단 |
자기(自己)의 단점(短點)을 말하지 않는 동시(同時)에 남의 잘못을 욕하지 말아야 함
[출전]
千字文(천자문)
罔 없을 망, 그물 망 | 談 말씀 담 | 彼 저 피 | 短 짧을 단 |
자기(自己)의 단점(短點)을 말하지 않는 동시(同時)에 남의 잘못을 욕하지 말아야 함
[출전]
千字文(천자문)
亡國之音 (망국지음)
亡國之音(망국지음)
亡 망할 망, 없을 무 | 國 나라 국 | 之 갈 지 | 音 소리 음, 그늘 음 |
나라를 망치는 음악(音樂)이란 뜻으로, '저속(低俗)하고 난잡(亂雜)한 음악(音樂)'을 일컫는 말
《예기(禮記)》 악기(樂記)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세상을 다스리는 음악은 편하고 즐거우니 그 정치가 조화를 이루게 되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음악은 원망하고 성내게 하니 그 정치를 어긋나게 한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음악은 슬프고 생각하게 하니 그 백성이 곤궁하니라[治世之音 安以樂 其政和, 亂世之音 怨以怒 其政乖, 亡國之音 哀以思 其民困].
한비자(韓非子) 십과편(十過篇)에는 위(衛)나라 영공(靈公)이 진(晉)나라로 가는 도중에 들었다는 멋있는 음악에 관한 고사가 기록되어 있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위(衛)나라의 영공(靈公)이 진(晉)나라로 가는 도중 복수(濮水) 근방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현묘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음률이 너무나 절묘하여 마치 천상의 소리인 듯했다. 한참을 넋을 잃고 듣던 영공은 수행하던 악사(樂師)에게 그 가사를 베끼고 악보까지도 채록하라 명했다.
진(秦)나라에 도착하자 영공은 그 신묘한 음악을 진(秦)나라의 평공(平公)에게 손수 연주하여 들려주었다.
평공은 다시 진(秦)나라에서 유명한 음악가였던 사광(師曠)을 불러들여 함께 듣도록 했는데, 영공의 음악을 듣고 있던 사광은 깜짝 놀라 영공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것은 망국의 음악입니다[亡國之音]."
놀란 영공과 평공에게 사광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옛날 주나라의 악사인 사연(師延)이라는 유명한 음악가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신성백리(新聲百里)'라는 음탕한 음악을 지어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에게 바쳤습니다. 주왕은 이 음악을 즐기며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무왕(武王)에게 망했고, 사연은 복수까지 도망와서는 거문고를 안고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지금도 복수를 지날 때는 누구나 이 음악을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음악을 망국의 음악이라 하며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亡國之音은 亡國之聲(망국지성)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음란하고 사치스러워 나라를 망칠 음악을 말한다.
사광의 이야기가 끝나자, 평공은 픽 웃었다.
“그럴듯한 이야기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음악에 불과하다. 한낱 음율에 무슨 그런 조화가 따르랴.”
그리고는 사광의 간곡한 반대를 무릅쓰고 사연으로 하여금 ‘신성백리’를 끝까지 탄주하도록 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사광더러 이보다 더 슬픈 노래를 들려 달라고 명했다. 밥보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평공이었다. 왕명에 어쩔 수 없이 거문고를 잡은 사광은 ‘청치(淸徵)’란 곡을 탄주했는데, 갑자기 검은 학들이 남쪽으로부터 날아와 대궐 지붕 용마루에 앉았다. 그것을 본 평왕이 다시 한번 탄주를 명함에 따라 사광이 거문고 줄을 퉁기자 학들은 나란히 열을 지어 섰고, 세 번째 탄주에서는 목을 뽑아 우짖으면서 너울너울 춤을 추기 시작했다.
“좋다! 그보다 더 슬픈 곡을 뜯도록 하라.”
신바람이 난 평공은 그렇게 명했고, 사광은 체념한 듯 ‘청각(淸角)’이란 곡을 들고 나왔다. 그러자 첫 번째 탄주에서 서북쪽으로부터 검은 구름이 몰려왔고, 두 번째 탄주에서는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기왓장과 그릇들이 날아서 깨지고 휘장이 찢어지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 지경에 이르자 아무리 음악을 좋아하는 평공도 혼비백산하여 숨지 않을 수 없었고,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진나라는 삼 년이나 가뭄이 들어 백성들은 무수히 굶어죽었고, 평공도 불치병에 걸려 무진 고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한다.
출전
예기(禮記) 악기편(樂記篇), 한비자(韓非子) 십과편(十過篇)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亡國之聲(망국지성) [출전] 한비자(韓非子) |
靡靡之樂(미미지악) | 亡國(망국)의 음악. 중국 殷(은)나라의 최후 임금인 紂王(주왕)이 師延(사연)에게 시켜서 만든 음악. 망한 나라의 음악. [출전] 淮南子(회남자). |
濮上之音(복상지음) 음란한 노래. 중국 衛(위)나라 靈公(영공)이 晋(진)나라에 가는 중 濮水(복수) 근처에서 이 곡을 들었는데 이것을 平公(평공) 앞에서 연주하게 했더니 師曠(사광)이 亡國(망국) 殷(은)나라의 음악이라 하여 中止(중지)시켰다는 옛일. [출전] 禮記(예기) |
北里之舞(북리지무) 북리는 북비. 음란한 음악. 北鄙之音(북비지음) |
桑間濮上(상간복상) 淫亂(음란)한 음악. 濮水(복수) 가에 있는 뽕나무 숲 사이에서 유행하였으므로 음란한 음악의 대명사가 됨. |
鄭衛桑間(정위상간) | 난세의 음악. 본래는 춘추시대 두 나라의 이름인데 그 나라 노래 소리가 음란하였으므로 인심을 현혹케 하는 음란한 음악을 정위의 소리라고 함. 鄭衛之音(정위지음). |
鄭音(정음) |
亡 망할 망, 없을 무 | 國 나라 국 | 之 갈 지 | 音 소리 음, 그늘 음 |
나라를 망치는 음악(音樂)이란 뜻으로, '저속(低俗)하고 난잡(亂雜)한 음악(音樂)'을 일컫는 말
《예기(禮記)》 악기(樂記)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세상을 다스리는 음악은 편하고 즐거우니 그 정치가 조화를 이루게 되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음악은 원망하고 성내게 하니 그 정치를 어긋나게 한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음악은 슬프고 생각하게 하니 그 백성이 곤궁하니라[治世之音 安以樂 其政和, 亂世之音 怨以怒 其政乖, 亡國之音 哀以思 其民困].
한비자(韓非子) 십과편(十過篇)에는 위(衛)나라 영공(靈公)이 진(晉)나라로 가는 도중에 들었다는 멋있는 음악에 관한 고사가 기록되어 있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위(衛)나라의 영공(靈公)이 진(晉)나라로 가는 도중 복수(濮水) 근방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현묘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음률이 너무나 절묘하여 마치 천상의 소리인 듯했다. 한참을 넋을 잃고 듣던 영공은 수행하던 악사(樂師)에게 그 가사를 베끼고 악보까지도 채록하라 명했다.
진(秦)나라에 도착하자 영공은 그 신묘한 음악을 진(秦)나라의 평공(平公)에게 손수 연주하여 들려주었다.
평공은 다시 진(秦)나라에서 유명한 음악가였던 사광(師曠)을 불러들여 함께 듣도록 했는데, 영공의 음악을 듣고 있던 사광은 깜짝 놀라 영공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것은 망국의 음악입니다[亡國之音]."
놀란 영공과 평공에게 사광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옛날 주나라의 악사인 사연(師延)이라는 유명한 음악가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신성백리(新聲百里)'라는 음탕한 음악을 지어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에게 바쳤습니다. 주왕은 이 음악을 즐기며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무왕(武王)에게 망했고, 사연은 복수까지 도망와서는 거문고를 안고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지금도 복수를 지날 때는 누구나 이 음악을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음악을 망국의 음악이라 하며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亡國之音은 亡國之聲(망국지성)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음란하고 사치스러워 나라를 망칠 음악을 말한다.
사광의 이야기가 끝나자, 평공은 픽 웃었다.
“그럴듯한 이야기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음악에 불과하다. 한낱 음율에 무슨 그런 조화가 따르랴.”
그리고는 사광의 간곡한 반대를 무릅쓰고 사연으로 하여금 ‘신성백리’를 끝까지 탄주하도록 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사광더러 이보다 더 슬픈 노래를 들려 달라고 명했다. 밥보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평공이었다. 왕명에 어쩔 수 없이 거문고를 잡은 사광은 ‘청치(淸徵)’란 곡을 탄주했는데, 갑자기 검은 학들이 남쪽으로부터 날아와 대궐 지붕 용마루에 앉았다. 그것을 본 평왕이 다시 한번 탄주를 명함에 따라 사광이 거문고 줄을 퉁기자 학들은 나란히 열을 지어 섰고, 세 번째 탄주에서는 목을 뽑아 우짖으면서 너울너울 춤을 추기 시작했다.
“좋다! 그보다 더 슬픈 곡을 뜯도록 하라.”
신바람이 난 평공은 그렇게 명했고, 사광은 체념한 듯 ‘청각(淸角)’이란 곡을 들고 나왔다. 그러자 첫 번째 탄주에서 서북쪽으로부터 검은 구름이 몰려왔고, 두 번째 탄주에서는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기왓장과 그릇들이 날아서 깨지고 휘장이 찢어지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 지경에 이르자 아무리 음악을 좋아하는 평공도 혼비백산하여 숨지 않을 수 없었고,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진나라는 삼 년이나 가뭄이 들어 백성들은 무수히 굶어죽었고, 평공도 불치병에 걸려 무진 고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한다.
출전
예기(禮記) 악기편(樂記篇), 한비자(韓非子) 십과편(十過篇)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亡國之聲(망국지성) [출전] 한비자(韓非子) |
靡靡之樂(미미지악) | 亡國(망국)의 음악. 중국 殷(은)나라의 최후 임금인 紂王(주왕)이 師延(사연)에게 시켜서 만든 음악. 망한 나라의 음악. [출전] 淮南子(회남자). |
濮上之音(복상지음) 음란한 노래. 중국 衛(위)나라 靈公(영공)이 晋(진)나라에 가는 중 濮水(복수) 근처에서 이 곡을 들었는데 이것을 平公(평공) 앞에서 연주하게 했더니 師曠(사광)이 亡國(망국) 殷(은)나라의 음악이라 하여 中止(중지)시켰다는 옛일. [출전] 禮記(예기) |
北里之舞(북리지무) 북리는 북비. 음란한 음악. 北鄙之音(북비지음) |
桑間濮上(상간복상) 淫亂(음란)한 음악. 濮水(복수) 가에 있는 뽕나무 숲 사이에서 유행하였으므로 음란한 음악의 대명사가 됨. |
鄭衛桑間(정위상간) | 난세의 음악. 본래는 춘추시대 두 나라의 이름인데 그 나라 노래 소리가 음란하였으므로 인심을 현혹케 하는 음란한 음악을 정위의 소리라고 함. 鄭衛之音(정위지음). |
鄭音(정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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