豹死留皮(표사유피)
豹死留皮(bàosǐliúpí)
豹 표범 표 | 死 죽을 사 | 留 머무를 유(류) | 皮 가죽 피 |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뜻에서 사람은 죽어서 명예를 남겨야 함의 비유. 그래서 豹死留皮에 人死留名(인사유명)을 잇달아 쓰기도 한다.
唐(당)나라 哀帝(애제)의 신하 朱全忠(주전충)은 애제를 폐하고 임금의 자리에 올라 梁(양)의 태조가 되었다. 그로부터 중국 대륙은 근 반세기동안 도처에 영웅호걸이 할거하여 이른바 五代(오대)격란의 시대를 맞는다. 양나라 왕실에도 내분이 일어나 주전충은 그의 아들 朱友珪(주우규)에게 피살되고 주우규도 동생한테 목숨을 잃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틈을 타 晋王(진왕) 李存勖(이존욱)은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국호도 唐(당)으로 바꾸고 양나라로 쳐들어 왔다.
이때 맞서 싸운 양나라 장수는 王彦章(왕언장)이었다. 젊을 때부터 주전충의 심복부하였던 그가 두자루의 철창을 휘두르며 적진에 뛰어들면 당할 자가 없다고 해서 王鐵槍(왕철창)이란 별명을 갖고 있었다. 왕언장은 초토사(招討使)가 되어 싸우다가 패해 일시 파면되었다가 당나라 황제가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오자 다시 등용되었다. 그는 양나라가 멸망할 때 겨우 5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수도를 지키다가 상처를 입고 포로가 되었다.
당제(唐帝) 이존욱은 그의 용맹스러움을 아껴 귀순할 것을 권했으나 왕언장은 이를 거절하며 말했다.
"아침에 양나라를 섬기다가 저녁에 당나라를 섬길 수는 없소."
왕언장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 이때 그의 나이 61세였고, 그가 죽은 후 양나라는 곧 멸망하였다. 왕언장은 생전에 글을 배우지 못해 거의 문자를 알지 못했으나 언제나 즐겨 인용하는 이언(俚諺)이 있었다.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豹死留皮 人死留名]."
[출전]
구양수의 ≪신오대사≫ 사절전(死節傳) |《오대사(五代史)》 왕언장전(王彦章傳)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虎死留皮(호사유피) | 人死留名(인사유명) | 豹死留皮人死留名(표사유피인사유명) | 人死留名豹死留皮(rénsǐliúmíngbàosǐliúpí) | 人在名虎在皮(인재명호재피) | 虎死留皮人死留名(호사유피인사유명)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