泰山北斗 (태산북두)

泰山北斗(태산북두)

泰山北斗(tàishānběidǒu)

泰 클 태 | 山 뫼 산 | 北 북녘 북, 달아날 배 | 斗 말 두, 싸울 두, 싸울 투, 싸울 각 |

중국(中國) 제일(第一)의 명산인 태산(泰山)과 북두성(北斗星)이라는 뜻으로, ①학문(學問)ㆍ예술(藝術) 분야(分野)의 대가(大家) ②태산(泰山)과 북두칠성(北斗七星)을 여러 사람이 우러러보듯이, 남에게 존경(尊敬)받는 뛰어난 존재(存在).

Mount talisman and the northern star - person of distinction; abbreviation as 泰斗.


명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의 한사람인 한유(韓愈)는 두 살에 고아(孤兒)가 되었으나, 각고의 노력 끝에 25세에는 진사(進士)가 되었고, 차츰 벼슬이 올라 드디어 경조윤(京兆尹) 겸 어사대부(御史大夫)에까지 이르렀다. 그가 죽은 뒤 조정에서는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증(贈)하고, 시호(諡號)를 문(文)이라 했다. 한유는 벼슬살이를 할 때에 궁중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폐단을 상소하여 황제(皇帝)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는데, '논불골표(論佛骨表)'라 하여 황제(皇帝)가 부처의 유골을 영접하여 궁중에 삼 일간이나 머물게 한 후, 여러 절에 보낸 일에 대해 간단한 글이 유명하다. 한유는 이 글에서 불교는 사교이므로 불골 같은 것은 수화(水火)에 던져버려야 한다고 통렬히 간했기 때문에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되기도 했다. 한유는 글의 모범을 선진(先秦)에 구하고, 육조(六朝) 이래의 사륙(四六)변려의 숙폐(宿弊)를 타파하려 했다.

그 때문에 당서(唐書) '한유전(韓愈傳)'에는 "당나라가 일어난 이래, 한유는 육경(六經)의 글을 가지고 모든 학자들의 도사(導師)가 되었다. 그가 죽은 뒤에 그 학문(學問)이 점점 융성하여 학자들은 그를 태산북두를 우러러 보는 것 같이 존경했다."고 기록되어 있음.

여기서 '태산'은 글자상으로는 큰 산이라는 뜻이지만 중국에서는 오악(五嶽)의 하나로서 성산(聖山)으로 우러러보는 산이다. '북두'는 북두칠성을 가리키는데, 북두칠성이 모든 별의 중심적인 존재로 받들어지고 있는 데서 '북두'라는 말 자체도 뛰어난 인물을 비유할 때 사용한다. 오늘날 이 말은 '태두(泰斗)', '산두(山斗)'라는 약칭으로 통용되며, 특히 학술적 업적이 뛰어난 학자를 가리키는 데 쓰인다.

출전: 당서(唐書)


관련 인물

한유(韓愈, 768~824)


관련 한자어

유의어

泰斗(태두) | 山斗(산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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