沐猴而冠(목후이관,mùhóu'érguàn)
沐猴而冠(mùhóu'érguàn)
沐 머리 감을 목 | 猴 원숭이 후 | 而 말 이을 이,능히 능 | 冠 갓 관 |
1. 원숭이가 관을 쓰고 사람처럼 꾸미다. 《사기·항우본기(史記·項羽本紀)》에 나오는, “사람들이 초(楚)나라 사람은 관을 쓰고 사람 행세를 하는 원숭이 같다고 하던데, 정말 그렇구나.”라는 말에서 유래함. 2.[성어,비유] 덕도 없고 무능하면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사람.
초(楚)나라의 패왕인 항우(項羽)가 진(秦)나라의 서울을 불태워버리고 유방(劉邦)을 추방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며 자기는 금의 환향(錦衣還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한생(韓生)이 항우는 그런 의관을 할 사람이 됨이 못 된다고 비꼬아 한 말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오는 말이다. 홍문(鴻門)의 연(宴)으로 유방으로부터 진(秦)의 수도 함양을 넘겨받은 항우는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여 함양을 폐허로 만들었다. 함양이 폐허로 변하자, 자기의 성공을 고향에서 뽐내기도 할 겸 해서 초(楚)의 팽성(彭城)으로 천도를 서둘렀다. ‘부귀한 뒤에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다’는 금의환향(錦衣還鄕)의 욕심 때문이었다.
함양은 주(周)와 진(秦)이 일어났던 패업의 땅으로, 관중(關中)이라고도 불리는 천혜의 요지이다. 그럼에도 항우가 천도를 고집하자, 간의대부(諫議大夫) 한생(韓生)이 이를 간하였다.
“관중은 예부터 천혜의 요지로 패업의 땅이었고, 토지 또한 비옥합니다. 여기에 도읍을 정하고 천하의 왕이 되십시오. 지난 번 범승상(范丞相:范增)이 떠날 때도 결코 함양을 버리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이 말을 들은 항우는 화를 벌컥 내면서 한생의 말을 막았다. 한생은 크게 탄식하며 물러나서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원숭이를 목욕시켜 관을 씌운 꼴이군[沐猴而冠].”
그런데 이 말을 그만 항우가 듣고 말았다. 항우가 옆에 있던 진평에게 그 뜻을 묻자, 진평이 답하였다.
“폐하를 비방하는 말이온데,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원숭이는 관을 써도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것과 원숭이는 꾸준하지 못해 관을 쓰면 조바심을 낸다는 것, 그리고 원숭이는 사람이 아니므로 만지작거리다가 의관을 찢고 만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듣고 격분한 항우는 한생을 붙잡아 펄펄 끓는 가마솥에 던져 죽였다. 한생이 죽으면서 말했다.
“나는 간언하다가 죽게 되었다. 그러나 두고 보아라. 백일 이내에 한왕(漢王)이 그대를 멸하리라. 역시 초나라 사람들은 원숭이와 같아 관을 씌워도 소용이 없구나.”
결국 천도를 감행한 항우는 관중을 유방에게 빼앗기고 마침내는 해하(垓下)에서 사면초가(四面楚歌) 속에 목숨을 끊고 말았다.
[유래]
史記(사기) : 項羽本紀(항우본기)
관련 한자어
참조어
錦衣還鄕(금의환향) | 四面楚歌(사면초가) |
史記(사기) : 項羽本紀(항우본기) |
毛施淑姿工嚬姸笑 (모시숙자공빈연소)
毛施淑姿工嚬姸笑(모시숙자공빈연소)
毛 터럭 모 | 施 베풀 시 | 淑 맑을 숙 | 姿 맵시 자 | 工 공교할 공 | 嚬 찡그릴 빈 | 姸 고울 연 | 笑 웃을 소 |
毛薔(모장)과 西施(서시)는 자태가 아름다워 공교하게 찡그리고 곱게 웃었다.
毛薔(모장)과 西施(서시)는 찡그리는 모습도 예쁘고 웃는 모습은 말할 나위 없이 고왔다. 越王(월왕) 句踐(구천)이 사랑했던 毛薔(모장)과 또 월나라 여인 西施(서시)는 절세미인으로서 찡그리는 모습조차 아름다워 흉내 낼 수 없었거늘 하물며 그 웃는 얼굴이야 얼마나 아름다웠으랴. ≪莊子(장자)≫에 보면 서시는 찌푸린 얼굴조차 아름다웠다는 말을 못생긴 여자가 듣고, 미인은 항상 얼굴을 찌푸린다고 생각하여 얼굴을 찌푸리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다.
[출전]
千字文(천자문)
毛 터럭 모 | 施 베풀 시 | 淑 맑을 숙 | 姿 맵시 자 | 工 공교할 공 | 嚬 찡그릴 빈 | 姸 고울 연 | 笑 웃을 소 |
毛薔(모장)과 西施(서시)는 자태가 아름다워 공교하게 찡그리고 곱게 웃었다.
毛薔(모장)과 西施(서시)는 찡그리는 모습도 예쁘고 웃는 모습은 말할 나위 없이 고왔다. 越王(월왕) 句踐(구천)이 사랑했던 毛薔(모장)과 또 월나라 여인 西施(서시)는 절세미인으로서 찡그리는 모습조차 아름다워 흉내 낼 수 없었거늘 하물며 그 웃는 얼굴이야 얼마나 아름다웠으랴. ≪莊子(장자)≫에 보면 서시는 찌푸린 얼굴조차 아름다웠다는 말을 못생긴 여자가 듣고, 미인은 항상 얼굴을 찌푸린다고 생각하여 얼굴을 찌푸리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다.
[출전]
千字文(천자문)
毛遂自薦 (모수자천, Máosuìzìjiàn)
毛遂自薦(毛遂自荐,모수자천,MáoSuìzìjiàn)
毛遂自荐(MáoSuìzìjiàn)
毛 털 모 | 遂 드디어 수,따를 수 | 自 스스로 자 | 薦 천거할 천,꽂을 진 |
모수(毛邃)가 스스로 천거(薦擧)했다는 뜻으로, 자기(自己)가 자기(自己)를 추천(推薦)하는 것을 이르는 말. 오늘날에는 의미가 변질되어 일의 앞뒤도 모르고 나서는 사람을 비유(比喩)함.
Volunteer one’s services
《사기(史記)》 평원군열전(平原君列傳)에 나오는 말로, 본래는 어려운 일을 당하여 스스로 그 일을 맡고 나선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차츰 의미가 변질되어 일의 전후도 모르고 나서는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다. 다음과 같은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은 자신의 집에 수많은 식객들을 두고 있었다. 조나라 효왕(孝王) 9년, 기원전 257년, 진(秦)이 조(趙)의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하자, 조왕은 평원군(平原君)을 초(楚)나라에 보내 합종(合從)을 맺음으로써 이를 격퇴하려 하였다. 평원군은 출발에 앞서 문하에 출입하는 식객 중 20명을 뽑아 같이 가려 했는데, 19명을 선발하고 적당한 사람이 없어 1명을 채우지 못했다. 이때 식객 중에 모수(毛遂)라는 사람이 스스로 자기가 끼기를 청하였다[毛遂自薦].
그것을 보고 평원군이 말하였다.
"당신은 내게로 와 몇 년이나 되었소?"
모수가 3년 되었다고 대답하자, 평원군은 다시 물었다.
"뛰어난 인물이 세상에 있는 것은 송곳이 부대자루에 있는 것과 같아서 송곳의 끝이 밖으로 삐져 나오듯이 그 뛰어남이 저절로 드러난 법이오[囊中之錐]. 그런데 그대는 내 문하에 있은 지 3년에 당신의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소." 그러자 모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래서 이제 주머니에 넣어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나를 부대 속에 넣어 주기만 하면 끝만이 아니라 그 자루까지도 보여줄 것입니다."
결국 평원군은 모수를 데리고 초나라로 갔다. 초왕과의 회담에서 식객 19명이 모두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평원군은 마침내 모수에게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이 말을 들은 모수는 칼을 빼어든 채 초왕의 면전으로 나아가 "당신은 수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지만 지금 당신의 목숨은 내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은(殷)의 탕왕(湯王)이나 주(周)의 문왕(文王)이 패업을 이룬 것은 군사가 많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초나라는 땅도 비옥하고 군사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진나라 군사에게 종묘를 위협받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합종은 초나라도 위한 것이지 조나라만 위한 것은 아닙니다" 하고 설득하여 마침내 합종을 성공시켰다. 일을 마무리하고 조나라로 돌아온 평원군은 이후 모수를 상객(上客)으로 모시고 후하게 대접했다 한다.
출전
史記(사기) : 平原君虞卿列傳(평원군우경열전) |
관련 한자어
유의어
自畵自讚(자화자찬) | 自告奋勇(자고분용) |
참조어
囊中之錐(낭중지추) | 三寸之舌(삼촌지설) |
史記(사기) : 平原君虞卿列傳(평원군우경열전) |
毛遂自荐(MáoSuìzìjiàn)
毛 털 모 | 遂 드디어 수,따를 수 | 自 스스로 자 | 薦 천거할 천,꽂을 진 |
모수(毛邃)가 스스로 천거(薦擧)했다는 뜻으로, 자기(自己)가 자기(自己)를 추천(推薦)하는 것을 이르는 말. 오늘날에는 의미가 변질되어 일의 앞뒤도 모르고 나서는 사람을 비유(比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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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 평원군열전(平原君列傳)에 나오는 말로, 본래는 어려운 일을 당하여 스스로 그 일을 맡고 나선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차츰 의미가 변질되어 일의 전후도 모르고 나서는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다. 다음과 같은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은 자신의 집에 수많은 식객들을 두고 있었다. 조나라 효왕(孝王) 9년, 기원전 257년, 진(秦)이 조(趙)의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하자, 조왕은 평원군(平原君)을 초(楚)나라에 보내 합종(合從)을 맺음으로써 이를 격퇴하려 하였다. 평원군은 출발에 앞서 문하에 출입하는 식객 중 20명을 뽑아 같이 가려 했는데, 19명을 선발하고 적당한 사람이 없어 1명을 채우지 못했다. 이때 식객 중에 모수(毛遂)라는 사람이 스스로 자기가 끼기를 청하였다[毛遂自薦].
그것을 보고 평원군이 말하였다.
"당신은 내게로 와 몇 년이나 되었소?"
모수가 3년 되었다고 대답하자, 평원군은 다시 물었다.
"뛰어난 인물이 세상에 있는 것은 송곳이 부대자루에 있는 것과 같아서 송곳의 끝이 밖으로 삐져 나오듯이 그 뛰어남이 저절로 드러난 법이오[囊中之錐]. 그런데 그대는 내 문하에 있은 지 3년에 당신의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소." 그러자 모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래서 이제 주머니에 넣어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나를 부대 속에 넣어 주기만 하면 끝만이 아니라 그 자루까지도 보여줄 것입니다."
결국 평원군은 모수를 데리고 초나라로 갔다. 초왕과의 회담에서 식객 19명이 모두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평원군은 마침내 모수에게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이 말을 들은 모수는 칼을 빼어든 채 초왕의 면전으로 나아가 "당신은 수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지만 지금 당신의 목숨은 내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은(殷)의 탕왕(湯王)이나 주(周)의 문왕(文王)이 패업을 이룬 것은 군사가 많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초나라는 땅도 비옥하고 군사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진나라 군사에게 종묘를 위협받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합종은 초나라도 위한 것이지 조나라만 위한 것은 아닙니다" 하고 설득하여 마침내 합종을 성공시켰다. 일을 마무리하고 조나라로 돌아온 평원군은 이후 모수를 상객(上客)으로 모시고 후하게 대접했다 한다.
출전
史記(사기) : 平原君虞卿列傳(평원군우경열전) |
관련 한자어
유의어
自畵自讚(자화자찬) | 自告奋勇(자고분용) |
참조어
囊中之錐(낭중지추) | 三寸之舌(삼촌지설) |
史記(사기) : 平原君虞卿列傳(평원군우경열전) |
矛盾 (모순, máodùn)
矛盾(모순)
矛盾(máodùn)
矛 창 모 | 盾 방패 순,사람 이름 돈,벼슬 이름 윤 |
'창과 방패(防牌)'라는 뜻으로, 말이나 행동(行動)의 앞뒤가 서로 일치(一致)되지 아니함
1. [相抵之处]conflict 2. [哲学]contradiction 3. uncertain
논리학에서는, 두 개의 개념이나 명제(命題) 사이에 의미 내용이 서로 상반되는 관계를 말한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에 무기 상인이 있었다. 그는 시장으로 창과 방패를 팔러 나갔다. 상인은 가지고 온 방패를 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이 방패를 보십시오. 아주 견고하여 어떤 창이라도 막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창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여기 이 창을 보십시오. 이것의 예리함은 천하 일품, 어떤 방패라도 단번에 뚫어 버립니다." 그러자 구경꾼 중에 어떤 사람이 말했다. "그 예리하기 짝이 없는 창으로 그 견고하기 짝이 없는 방패를 찌르면 도대체 어찌 되는 거요?" 상인은 말문이 막혀 눈을 희번덕거리고 있다가 서둘러 달아나고 말았다.
楚人(초인)에 有(유) 盾與(순여) 矛者(모자)하여 譽之曰(예지왈)"吾盾之堅(오순지견)은 莫能陷也(막능함야)라"하고, 又譽其矛曰(우예기모왈)"吾矛之利(오모지리)는 於物(어물) 에 無不陷也(무불함야)니라"或曰(혹왈)"以子之矛(이자지모)로 陷子之盾(함자지순)이면 如何(여하)오."其人(기인)이 不能應也(불능응야)러라.
《한비자(韓非子)》 난일(難一) 난세편(難世篇)에 있는 고사(故事)로, 법지상주의자(法至上主義者)인 한비(韓非)가 유가(儒家)의 덕치주의를 비판한 우화이다.
유가에서 말하기를, ‘역산(歷山)의 농장에서 농지의 경계 때문에 분쟁이 있어 성인(聖人)인 순(舜)임금이 가서 몸소 일을 하였더니 1년에 분쟁이 사라지고, 황하지역에서 어장 문제로 분쟁이 있어 순임금이 가서 낚시질을 하였더니 이도 1년 만에 해결되었고, 동방의 이민족이 만드는 도기(陶器)가 조악(粗惡)하여 순임금이 가서 그릇을 만들었더니 이도 1년 만에 품질이 향상되었다. 이 모두가 순임금의 덕(德)에 의한 감화(感化)이다.’라고 하였다.
한비는 순임금이 유덕(有德)한 성인이라면 농부나 어부가 다투지 않을 것이요, 도기도 우량품으로 만들었다면 순임금이 덕을 베풀 여지가 있었겠는가. 순임금이 덕을 베풀어 분쟁이 해결되고 도기의 품질이 향상되었다는 것은 요(堯)임금에게 실정이 있었다는 것이 된다. 순임금을 성인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요임금의 치세를 부정하지 않을 수 없고, 요임금을 성인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순임금의 덕화(德化)를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으며, 마치 '창과 방패의 이치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여 순임금의 치세를 칭송하고 있는 유가의 설을 논란한 것이다.
전통적 논리학에서는 같은 주어에 대하여 서로 부정하는 판단을 내린 것을 연립시킨 명제의 성질이다. 현대 논리학에서는 하나의 명제와 이의 부정이 동시에 성립됨을 주장하는 명제이다.
[유래]
韓非子(한비자) : 難一(난일) |
관련 한자어
유의어
自己矛盾(자기모순) | 自家撞着(자가당착) | 二律背反(이율배반) |
창
矛(모,máo) 세모진 창. 끝이 꼬부라진 긴 창(槍). 2장(丈) 정도(程度)의 나무 자루 끝에 갈고리처럼 옆으로 굽어진 칼날이 달림. 옛날, 주(主)로 병거(兵車)에 세우고 다녔음. 구리. 쇠 따위로 만들었음. 추모(酋矛) ∥ 矛戈(모과) | 矛戟(모극) ∥ 矛盾(모순) | 矛盾撞着(모순당착) |
戈(과,gē) 창. ①중국(中國) 고대(古代)에서 쓰인, 갈고리 모양으로 된 무기(武器)의 하나. 자루 끝에 쌍날이 달렸음. 거의 청동으로 만들었으며, 쇠로 만든 것은 적음. 은(殷)나라 때부터 쓰기 시작(始作)하였음 ②우리나라에서 쓰인 끝이 두 갈래로 나누어진 긴 창(槍). 6자 정도(程度)의 나무 자루 끝에 두 개의 칼날, 즉 곧게 뻗은 7치 반(半)의 원(援)과 옆으로 뻗은 6치의 호(胡)가 달림. ∥ 戈殳(과수) | 戈矛(과모) |
槍(창,qiāng) ①옛날 무기(武器)의 한 가지. 긴 나무 자루 끝의 양쪽에 칼날이 있는 뾰족한 쇠가 달렸음. 직창(直槍)ㆍ구창(鉤滄)ㆍ관창(管槍)ㆍ십문자창(十支字滄) 등(等)이 있음 ②투창(投滄)에 쓰는 기구(器具). 남자용(男子用)은 길이 2.5m, 무게 800g이며 여자용(女子用)은 길이 2.2m, 무게 는 600g 이상(以上)임. 과모(戈矛)ㆍ과수(戈受) ∥ 槍刃(창인) |
戟(극,jǐ) ①중국(中國) 고대(古代)에 쓰인, 독특(獨特)한 갈고리 무기(武器)의 하나. 과(戈)와 비슷하나, 자루 끝에 날카로운 날이 선 창끝을 겸(兼)한 병기(兵器)임. 청동으로 만든 것보다 쇠로 만든 것이 많음 ②(옛날 우리나라에서 무기(武器)로 쓰인)끝이 세 갈래로 나누어진 긴 창(槍). 6자 정도(程度)의 나무 자루 끝에 3개의 칼날, 곧 7치 반의 원(援)ㆍ6치의 호(胡)ㆍ6치의 자(刺)가 달림 |
戣(규,kuǐ) 양지창(兩枝槍). 끝이 둘로 갈라진 창. |
矟(삭,shuò) 삼지창. |
杸(수,shū) 팔모진 창. |
韓非子(한비자) : 難一(난일) |
矛盾(máodùn)
矛 창 모 | 盾 방패 순,사람 이름 돈,벼슬 이름 윤 |
'창과 방패(防牌)'라는 뜻으로, 말이나 행동(行動)의 앞뒤가 서로 일치(一致)되지 아니함
1. [相抵之处]conflict 2. [哲学]contradiction 3. uncertain
논리학에서는, 두 개의 개념이나 명제(命題) 사이에 의미 내용이 서로 상반되는 관계를 말한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에 무기 상인이 있었다. 그는 시장으로 창과 방패를 팔러 나갔다. 상인은 가지고 온 방패를 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이 방패를 보십시오. 아주 견고하여 어떤 창이라도 막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창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여기 이 창을 보십시오. 이것의 예리함은 천하 일품, 어떤 방패라도 단번에 뚫어 버립니다." 그러자 구경꾼 중에 어떤 사람이 말했다. "그 예리하기 짝이 없는 창으로 그 견고하기 짝이 없는 방패를 찌르면 도대체 어찌 되는 거요?" 상인은 말문이 막혀 눈을 희번덕거리고 있다가 서둘러 달아나고 말았다.
楚人(초인)에 有(유) 盾與(순여) 矛者(모자)하여 譽之曰(예지왈)"吾盾之堅(오순지견)은 莫能陷也(막능함야)라"하고, 又譽其矛曰(우예기모왈)"吾矛之利(오모지리)는 於物(어물) 에 無不陷也(무불함야)니라"或曰(혹왈)"以子之矛(이자지모)로 陷子之盾(함자지순)이면 如何(여하)오."其人(기인)이 不能應也(불능응야)러라.
《한비자(韓非子)》 난일(難一) 난세편(難世篇)에 있는 고사(故事)로, 법지상주의자(法至上主義者)인 한비(韓非)가 유가(儒家)의 덕치주의를 비판한 우화이다.
유가에서 말하기를, ‘역산(歷山)의 농장에서 농지의 경계 때문에 분쟁이 있어 성인(聖人)인 순(舜)임금이 가서 몸소 일을 하였더니 1년에 분쟁이 사라지고, 황하지역에서 어장 문제로 분쟁이 있어 순임금이 가서 낚시질을 하였더니 이도 1년 만에 해결되었고, 동방의 이민족이 만드는 도기(陶器)가 조악(粗惡)하여 순임금이 가서 그릇을 만들었더니 이도 1년 만에 품질이 향상되었다. 이 모두가 순임금의 덕(德)에 의한 감화(感化)이다.’라고 하였다.
한비는 순임금이 유덕(有德)한 성인이라면 농부나 어부가 다투지 않을 것이요, 도기도 우량품으로 만들었다면 순임금이 덕을 베풀 여지가 있었겠는가. 순임금이 덕을 베풀어 분쟁이 해결되고 도기의 품질이 향상되었다는 것은 요(堯)임금에게 실정이 있었다는 것이 된다. 순임금을 성인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요임금의 치세를 부정하지 않을 수 없고, 요임금을 성인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순임금의 덕화(德化)를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으며, 마치 '창과 방패의 이치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여 순임금의 치세를 칭송하고 있는 유가의 설을 논란한 것이다.
전통적 논리학에서는 같은 주어에 대하여 서로 부정하는 판단을 내린 것을 연립시킨 명제의 성질이다. 현대 논리학에서는 하나의 명제와 이의 부정이 동시에 성립됨을 주장하는 명제이다.
[유래]
韓非子(한비자) : 難一(난일) |
관련 한자어
유의어
自己矛盾(자기모순) | 自家撞着(자가당착) | 二律背反(이율배반) |
창
矛(모,máo) 세모진 창. 끝이 꼬부라진 긴 창(槍). 2장(丈) 정도(程度)의 나무 자루 끝에 갈고리처럼 옆으로 굽어진 칼날이 달림. 옛날, 주(主)로 병거(兵車)에 세우고 다녔음. 구리. 쇠 따위로 만들었음. 추모(酋矛) ∥ 矛戈(모과) | 矛戟(모극) ∥ 矛盾(모순) | 矛盾撞着(모순당착) |
戈(과,gē) 창. ①중국(中國) 고대(古代)에서 쓰인, 갈고리 모양으로 된 무기(武器)의 하나. 자루 끝에 쌍날이 달렸음. 거의 청동으로 만들었으며, 쇠로 만든 것은 적음. 은(殷)나라 때부터 쓰기 시작(始作)하였음 ②우리나라에서 쓰인 끝이 두 갈래로 나누어진 긴 창(槍). 6자 정도(程度)의 나무 자루 끝에 두 개의 칼날, 즉 곧게 뻗은 7치 반(半)의 원(援)과 옆으로 뻗은 6치의 호(胡)가 달림. ∥ 戈殳(과수) | 戈矛(과모) |
槍(창,qiāng) ①옛날 무기(武器)의 한 가지. 긴 나무 자루 끝의 양쪽에 칼날이 있는 뾰족한 쇠가 달렸음. 직창(直槍)ㆍ구창(鉤滄)ㆍ관창(管槍)ㆍ십문자창(十支字滄) 등(等)이 있음 ②투창(投滄)에 쓰는 기구(器具). 남자용(男子用)은 길이 2.5m, 무게 800g이며 여자용(女子用)은 길이 2.2m, 무게 는 600g 이상(以上)임. 과모(戈矛)ㆍ과수(戈受) ∥ 槍刃(창인) |
戟(극,jǐ) ①중국(中國) 고대(古代)에 쓰인, 독특(獨特)한 갈고리 무기(武器)의 하나. 과(戈)와 비슷하나, 자루 끝에 날카로운 날이 선 창끝을 겸(兼)한 병기(兵器)임. 청동으로 만든 것보다 쇠로 만든 것이 많음 ②(옛날 우리나라에서 무기(武器)로 쓰인)끝이 세 갈래로 나누어진 긴 창(槍). 6자 정도(程度)의 나무 자루 끝에 3개의 칼날, 곧 7치 반의 원(援)ㆍ6치의 호(胡)ㆍ6치의 자(刺)가 달림 |
戣(규,kuǐ) 양지창(兩枝槍). 끝이 둘로 갈라진 창. |
矟(삭,shuò) 삼지창. |
杸(수,shū) 팔모진 창. |
韓非子(한비자) : 難一(난일) |
謀事在人 (모사재인)
謀事在人(모사재인)
謀 꾀 모 | 事 일 사 | 在 있을 재 | 人 사람 인 |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에게 달렸다는 말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謀事在人成事在天(모사재인성사재천) | 謀事在人(모사재인) | 成事在天(성사재천) |
謀 꾀 모 | 事 일 사 | 在 있을 재 | 人 사람 인 |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에게 달렸다는 말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謀事在人成事在天(모사재인성사재천) | 謀事在人(모사재인) | 成事在天(성사재천) |
謀事在人成事在天 (모사재인성사재천)
謀事在人成事在天(모사재인성사재천)
謀 꾀할 모 | 事 일 사 | 在 있을 재 | 人 사람 인 | 成 이룰 성 | 事 일 사 | 在 있을 재 | 天 하늘 천 |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인데,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 말.
Man proposes, God disposes.
일을 해결하려고 꾀를 내는 것은 사람이지만, 일이 잘되고 못되는 것은 하늘이 정한 운수에 달렸다는 뜻이다. 인간이 노력하여 일을 이루어내는데 도움을 얻지 못하여 이루지 못하는 일도 있다는 말이다.
중국 원(元)나라 때의 소설가 나관중(羅貫中)이 지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나오는 삼국시대 촉한(蜀漢:220∼263)의 정치가이자 전략가인 제갈 량(諸葛亮:181∼234)의 말에서 유래한다.
제갈 량은 오(吳)나라의 손권(孫權:182∼252)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위(魏)나라 조조(曹操:155∼220)의 대군을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대파하였다. 촉한의 제1대 황제 유비(劉備:161∼223)는 제갈 량을 재상에 등용하였다. 유비가 죽은 뒤 제갈 량은 다시 오나라와 손잡고 위나라와 항쟁하였는데, 위나라 사마 의(司馬懿:179∼251)의 군대를 호로곡이라는 계곡으로 유인하여 불을 질러 공격하는 화공(火攻)으로써 몰살할 수 있었으나 그순간 하늘에서 소나기가 내려 계획을 이룰 수 없었다. 제갈 량은 몹시 탄식하면서 "계략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어서 강제로 할 수 없다[謀事在人 成事在天 不可强也]"라고 하였다.
사람이 힘써서 일을 꾀하는데, 그 일의 성사여부는 오로지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한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謀事在人成事在天(모사재인성사재천) | 謀事在人(모사재인) | 成事在天(성사재천) |
謀 꾀할 모 | 事 일 사 | 在 있을 재 | 人 사람 인 | 成 이룰 성 | 事 일 사 | 在 있을 재 | 天 하늘 천 |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인데,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 말.
Man proposes, God disposes.
일을 해결하려고 꾀를 내는 것은 사람이지만, 일이 잘되고 못되는 것은 하늘이 정한 운수에 달렸다는 뜻이다. 인간이 노력하여 일을 이루어내는데 도움을 얻지 못하여 이루지 못하는 일도 있다는 말이다.
중국 원(元)나라 때의 소설가 나관중(羅貫中)이 지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나오는 삼국시대 촉한(蜀漢:220∼263)의 정치가이자 전략가인 제갈 량(諸葛亮:181∼234)의 말에서 유래한다.
제갈 량은 오(吳)나라의 손권(孫權:182∼252)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위(魏)나라 조조(曹操:155∼220)의 대군을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대파하였다. 촉한의 제1대 황제 유비(劉備:161∼223)는 제갈 량을 재상에 등용하였다. 유비가 죽은 뒤 제갈 량은 다시 오나라와 손잡고 위나라와 항쟁하였는데, 위나라 사마 의(司馬懿:179∼251)의 군대를 호로곡이라는 계곡으로 유인하여 불을 질러 공격하는 화공(火攻)으로써 몰살할 수 있었으나 그순간 하늘에서 소나기가 내려 계획을 이룰 수 없었다. 제갈 량은 몹시 탄식하면서 "계략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어서 강제로 할 수 없다[謀事在人 成事在天 不可强也]"라고 하였다.
사람이 힘써서 일을 꾀하는데, 그 일의 성사여부는 오로지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한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謀事在人成事在天(모사재인성사재천) | 謀事在人(모사재인) | 成事在天(성사재천) |
目不識丁 (목불식정)
目不識丁(목불식정)
目 눈 목 | 不 아닐 불, 아닐 부 | 識 알 식, 적을 지, 깃발 치 | 丁 고무래 정, 장정 정 |
고무래를 보고도 정자를 알지 못한다는 뜻으로, 아주 무식(無識)하다는 뜻. 또는 그러한 사람을 비유(比喩ㆍ譬喩)해 이르는 말
Not to know A from a windmill
신당서(新唐書) 張弘靖傳(장홍정전)에 실린 이야기다.
당(唐)나라 목종(穆宗) 시기, 정치는 부패하고 관리들의 생활은 방탕하기 짝이 없었다. 장홍정(張弘靖)이란 사람은 못나고 무식하며 행동(行動) 또한 오만불손(傲慢不遜)했다. 그러나 부친인 장연상(張延賞)이 조정에 끼친 공적이 많아 그 덕분으로 그의 벼슬길은 매우 순탄했다. 그가 노룡(盧龍)의 절도사(節度使)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부하들과 어려운 병영생활을 하려 않고 가마를 타고 즐기며 군사들을 괴롭히고 교만했다.
그의 막료인 위옹과 장종후 등은 매일 술자리를 마련하고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고 즐겼다. 관아(官衙)를 나서고 돌아올 때에는 앞뒤에 호위를 세우고, 등불을 환하게 밝히며 추태를 부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세를 믿고, 하급 군관들이나 사병들은 아예 안중에 두지도 않았으며, 항상 그들은 때리고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런 까닭으로 부하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자 오히려 그들은 꾸짖으며 '지금은 태평성대이므로 천하에는 전쟁이 없다. 너희들이 아무리 두 석 무게의 석궁을 끌어 당길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丁자 하나 아는 것만도 못하다[汝輩挽得兩石力弓, 不如識一丁字]'라고 하였다.
참다 못한 부하 관리들이 반란을 일으켜 장홍정을 잡아 가두자, 이 소식을 들은 황제는 장홍정의 직책을 박탈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한다. “그놈이야말로 목불식정이로고.”
目不識丁(Not to know A from a windmill) 이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 을 비유한 말이다.
출전
新唐書(신당서) 張弘靖傳(장홍정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불학무식(不學無識) | 菽麥不辨(숙맥불변) | 魚魯不辨(어로불변) | 一文不知(일문부지) | 一文不通(일문불통) | 一字無識(일자무식) | 一字不識(일자불식) | 全無識(전무식) | 判無識(판무식) |
관련 속담
동의어·유의어
¶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
¶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다.
반의어·상대어
¶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
目 눈 목 | 不 아닐 불, 아닐 부 | 識 알 식, 적을 지, 깃발 치 | 丁 고무래 정, 장정 정 |
고무래를 보고도 정자를 알지 못한다는 뜻으로, 아주 무식(無識)하다는 뜻. 또는 그러한 사람을 비유(比喩ㆍ譬喩)해 이르는 말
Not to know A from a windmill
신당서(新唐書) 張弘靖傳(장홍정전)에 실린 이야기다.
당(唐)나라 목종(穆宗) 시기, 정치는 부패하고 관리들의 생활은 방탕하기 짝이 없었다. 장홍정(張弘靖)이란 사람은 못나고 무식하며 행동(行動) 또한 오만불손(傲慢不遜)했다. 그러나 부친인 장연상(張延賞)이 조정에 끼친 공적이 많아 그 덕분으로 그의 벼슬길은 매우 순탄했다. 그가 노룡(盧龍)의 절도사(節度使)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부하들과 어려운 병영생활을 하려 않고 가마를 타고 즐기며 군사들을 괴롭히고 교만했다.
그의 막료인 위옹과 장종후 등은 매일 술자리를 마련하고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고 즐겼다. 관아(官衙)를 나서고 돌아올 때에는 앞뒤에 호위를 세우고, 등불을 환하게 밝히며 추태를 부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세를 믿고, 하급 군관들이나 사병들은 아예 안중에 두지도 않았으며, 항상 그들은 때리고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런 까닭으로 부하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자 오히려 그들은 꾸짖으며 '지금은 태평성대이므로 천하에는 전쟁이 없다. 너희들이 아무리 두 석 무게의 석궁을 끌어 당길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丁자 하나 아는 것만도 못하다[汝輩挽得兩石力弓, 不如識一丁字]'라고 하였다.
참다 못한 부하 관리들이 반란을 일으켜 장홍정을 잡아 가두자, 이 소식을 들은 황제는 장홍정의 직책을 박탈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한다. “그놈이야말로 목불식정이로고.”
目不識丁(Not to know A from a windmill) 이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 을 비유한 말이다.
출전
新唐書(신당서) 張弘靖傳(장홍정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불학무식(不學無識) | 菽麥不辨(숙맥불변) | 魚魯不辨(어로불변) | 一文不知(일문부지) | 一文不通(일문불통) | 一字無識(일자무식) | 一字不識(일자불식) | 全無識(전무식) | 判無識(판무식) |
관련 속담
동의어·유의어
¶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
¶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다.
반의어·상대어
¶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
未能免俗 (미능면속)
未能免俗(미능면속)
未能免俗[wèinéngmiǎnsú]
未 아닐 미 | 能 능할 능, 견딜 내 | 免 면할 면, 해산할 문 | 俗 풍속 속 |
아직도 속(俗)된 습관을 버리지 못하였다는 뜻으로, 한번 물든 속물근성(俗物根性)은 버리기 어렵다는 말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任誕)편의 이야기.
위진남북조시대의 진(晉)나라 사람 완함(阮咸)은 숙부인 완적(阮籍)과 더불어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다. 완함과 완적은 남쪽에 이웃하여 살았고, 다른 완씨 일가는 북쪽에 이웃하여 살았다. 사람들은 완함과 완적이 남쪽에 산다 하여 남완(南阮)이라 부르고, 북쪽의 완씨 일가는 북완(北阮)이라 불렀다. 권력과 부를 비웃으며 전원에 묻혀 살던 완함과 완적은 가난하였고, 북완은 부유하였다.
그 무렵에는 7월 7일이 되면 겨울옷을 꺼내 햇볕에 말리는 풍습이 있었다. 북완은 당연히 화려한 옷을 내다 말렸는데, 그 모습이 마치 서로 잘 사는 티를 내려고 경쟁하는 것 같아 보였다. 가난한 남완은 내다 말릴 만한 변변한 옷이 없었다. 어느 해 7월 7일이 되자 북완은 경쟁하듯 화려한 옷을 내다 말렸다. 항상 북완을 경멸해 오던 완함은 장대 위에 굵은 베로 짠 초라한 짧은 바지를 걸어 놓고 햇볕에 말렸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사람이 묻자, 완함은 웃으며 "속된 습속을 버리지 못하여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라오[未能免俗, 聊復爾耳]"라고 대답하였다.
이로부터 미능면속은 속물 근성을 버리지 못함을 비웃는 뜻의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이 고사는 《세설신어》 가운데 세속에 구애되지 않고 제뜻대로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놓은 '임탄(任誕)'편에 실려 있다.
출전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任誕) | 晉書(진서) 阮咸傳(완함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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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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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未能免俗[wèinéngmiǎnsú]
未 아닐 미 | 能 능할 능, 견딜 내 | 免 면할 면, 해산할 문 | 俗 풍속 속 |
아직도 속(俗)된 습관을 버리지 못하였다는 뜻으로, 한번 물든 속물근성(俗物根性)은 버리기 어렵다는 말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任誕)편의 이야기.
위진남북조시대의 진(晉)나라 사람 완함(阮咸)은 숙부인 완적(阮籍)과 더불어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다. 완함과 완적은 남쪽에 이웃하여 살았고, 다른 완씨 일가는 북쪽에 이웃하여 살았다. 사람들은 완함과 완적이 남쪽에 산다 하여 남완(南阮)이라 부르고, 북쪽의 완씨 일가는 북완(北阮)이라 불렀다. 권력과 부를 비웃으며 전원에 묻혀 살던 완함과 완적은 가난하였고, 북완은 부유하였다.
그 무렵에는 7월 7일이 되면 겨울옷을 꺼내 햇볕에 말리는 풍습이 있었다. 북완은 당연히 화려한 옷을 내다 말렸는데, 그 모습이 마치 서로 잘 사는 티를 내려고 경쟁하는 것 같아 보였다. 가난한 남완은 내다 말릴 만한 변변한 옷이 없었다. 어느 해 7월 7일이 되자 북완은 경쟁하듯 화려한 옷을 내다 말렸다. 항상 북완을 경멸해 오던 완함은 장대 위에 굵은 베로 짠 초라한 짧은 바지를 걸어 놓고 햇볕에 말렸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사람이 묻자, 완함은 웃으며 "속된 습속을 버리지 못하여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라오[未能免俗, 聊復爾耳]"라고 대답하였다.
이로부터 미능면속은 속물 근성을 버리지 못함을 비웃는 뜻의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이 고사는 《세설신어》 가운데 세속에 구애되지 않고 제뜻대로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놓은 '임탄(任誕)'편에 실려 있다.
출전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任誕) | 晉書(진서) 阮咸傳(완함전)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
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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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毛骨悚然 (모골송연)
毛骨悚然(모골송연)
毛骨悚然[máogǔsǒngrán]
毛 터럭 모 | 骨 뼈 골 | 悚 두려울 송 | 然 그럴 연, 불탈 연 |
주 끔직한 일을 당(當)하거나 볼 때, 두려워 몸이나 털이 곤두선다는 말
make sb’s flesh creep; with one's hair standing on end—absolutely terrified
화감(畵鑒) 당화(唐畵)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唐)나라 중기, 소를 잘 그리기로 유명한 대숭(戴嵩)이라는 화가가 있었다. 그는 소를 그리기 위해 소의 무리속으로 들어가 소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소의 생활 습성을 깊게 연구하였다. 그가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릴 때면, 그림 속의 소는 매우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쳤으므로, 사람들은 크게 감동하였다. 특히 그의 투우도(鬪牛圖)는 소들이 들에서 활동하고, 장난하며 싸우는 모습 등을 그린 그림으로서, 전체 그림에 야성(野性)의 아름다움이 충만해 있다.
원(元)나라의 대화가(大畵家)들은 그가 그린 싸우는 소들의 모습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 마리의 소들이 날뛰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온몸에 소름이 끼치게 하고 머리 끝이 솟게 한다[二牛相鬪, 毛骨悚然]. 그들의 공격하려는 자세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차가운 기운이 뼈속에 스며드는 것을 느끼게 한다.
毛骨悚然(Hair rising and bones feeling) 이란 끔찍스러워서 몸이 으쓱하며 털끝이 쭈삣하여짐을 뜻한다.
출전
화감(畵鑒) 당화(唐畵)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胆战心惊[dǎnzhànxīnjīng] [성어] 담이 떨리고 심장이 놀라다. |
毛骨悚然[máogǔsǒngrán]
毛 터럭 모 | 骨 뼈 골 | 悚 두려울 송 | 然 그럴 연, 불탈 연 |
주 끔직한 일을 당(當)하거나 볼 때, 두려워 몸이나 털이 곤두선다는 말
make sb’s flesh creep; with one's hair standing on end—absolutely terrified
화감(畵鑒) 당화(唐畵)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唐)나라 중기, 소를 잘 그리기로 유명한 대숭(戴嵩)이라는 화가가 있었다. 그는 소를 그리기 위해 소의 무리속으로 들어가 소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소의 생활 습성을 깊게 연구하였다. 그가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릴 때면, 그림 속의 소는 매우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쳤으므로, 사람들은 크게 감동하였다. 특히 그의 투우도(鬪牛圖)는 소들이 들에서 활동하고, 장난하며 싸우는 모습 등을 그린 그림으로서, 전체 그림에 야성(野性)의 아름다움이 충만해 있다.
원(元)나라의 대화가(大畵家)들은 그가 그린 싸우는 소들의 모습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 마리의 소들이 날뛰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온몸에 소름이 끼치게 하고 머리 끝이 솟게 한다[二牛相鬪, 毛骨悚然]. 그들의 공격하려는 자세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차가운 기운이 뼈속에 스며드는 것을 느끼게 한다.
毛骨悚然(Hair rising and bones feeling) 이란 끔찍스러워서 몸이 으쓱하며 털끝이 쭈삣하여짐을 뜻한다.
출전
화감(畵鑒) 당화(唐畵)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胆战心惊[dǎnzhànxīnjīng] [성어] 담이 떨리고 심장이 놀라다. |
木鷄 (목계)
목계 (木鷄)
이것은 장자의 달생편에 나오는 우화로서 옛날 중국의 주나라 선왕이 닭싸움을 좋아하여 닭을 잘 훈련시키는 [기성자]라는 사람을 불러 닭 한 마리를 주면서 싸움을 잘하는 닭으로 훈련시키기를 명하였는데, 열흘이 지난 후에 왕이 [기성자]를 불러 "훈련 상황이 어떠한가?" 물으매, 답하기를 ”아직은 멀었습니다. 닭이 허장성세가 심한 것이 싸움할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래서 또 열흘이 지난 후 다시 닭의 훈련상태를 물으니 답하기를 "상대 닭을 보기만 하면 싸우려 하는 것이 훈련이 덜 되었습니다." 고 하여 다시 또 열흘이 지나 다시 물으니, 답하기를 ”아직도 상대 닭을 보면 살기를 번득이는 것이 훈련이 덜 되었습니다".고 하여 다시 열흘 후 닭의 훈련 상태가 어떠한지 물으매, 답하기를 "이제는 훈련이 거이 되었습니다.”고 하며, 말하기를 "닭이 목계(木鷄)와 같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상대 닭이 살기를 번득이며 싸움을 하려 달려들다가도 마치 목계(木鷄)와 같으므로, 덕이 충만하여 그 모습만 보아도 상대방은 등을 돌리고 도망을 칩니다."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장자의 달생편에 나오는 우화로서 옛날 중국의 주나라 선왕이 닭싸움을 좋아하여 닭을 잘 훈련시키는 [기성자]라는 사람을 불러 닭 한 마리를 주면서 싸움을 잘하는 닭으로 훈련시키기를 명하였는데, 열흘이 지난 후에 왕이 [기성자]를 불러 "훈련 상황이 어떠한가?" 물으매, 답하기를 ”아직은 멀었습니다. 닭이 허장성세가 심한 것이 싸움할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래서 또 열흘이 지난 후 다시 닭의 훈련상태를 물으니 답하기를 "상대 닭을 보기만 하면 싸우려 하는 것이 훈련이 덜 되었습니다." 고 하여 다시 또 열흘이 지나 다시 물으니, 답하기를 ”아직도 상대 닭을 보면 살기를 번득이는 것이 훈련이 덜 되었습니다".고 하여 다시 열흘 후 닭의 훈련 상태가 어떠한지 물으매, 답하기를 "이제는 훈련이 거이 되었습니다.”고 하며, 말하기를 "닭이 목계(木鷄)와 같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상대 닭이 살기를 번득이며 싸움을 하려 달려들다가도 마치 목계(木鷄)와 같으므로, 덕이 충만하여 그 모습만 보아도 상대방은 등을 돌리고 도망을 칩니다."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明珠彈雀 (명주탄작)
明珠彈雀(명주탄작)
明 밝을 명 | 珠 구슬 주 | 彈 탄알 탄 | 雀 참새 작 |
새를 잡는 데 구슬을 쓴다는 뜻으로, 작은 것을 얻으려다 큰 것을 손해 보게 됨을 이르는 말
장자(莊子) 양왕(讓王)편의 이야기.
노(魯)나라 애공(哀公)은 안합(安闔)이 도를 터득한 인물이라는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예물을 들고 그를 찾아가 보게 하였다. 애공의 사자가 찾아가 보니, 안합은 허술한 집에서 남루한 옷을 입고 소를 돌보고 있었다. 안합은 사자를 돌려 보냈다. 사자가 다시 그의 집을 찾았지만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장자는 이 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안합은 부귀에 뜻이 없었으며, 부귀가 찾아오는 것도 환영하지 않았다. 세속적인 군자들은 생명을 돌보지 않고 부귀를 추구하는데, 참으로 슬픈 일이다. 어떤 사람이 수후(隨侯)의 보석으로 천길 벼랑 위에 있는 참새를 쏘았다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분명 그를 비웃을 것이다[以隨侯之珠彈千 之雀]."
출전
장자(莊子)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小貪大失(소탐대실) | 隨珠彈雀(수주탄작) | 以珠彈雀(이주탄작) |
반의어·상대어
|
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明 밝을 명 | 珠 구슬 주 | 彈 탄알 탄 | 雀 참새 작 |
새를 잡는 데 구슬을 쓴다는 뜻으로, 작은 것을 얻으려다 큰 것을 손해 보게 됨을 이르는 말
장자(莊子) 양왕(讓王)편의 이야기.
노(魯)나라 애공(哀公)은 안합(安闔)이 도를 터득한 인물이라는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예물을 들고 그를 찾아가 보게 하였다. 애공의 사자가 찾아가 보니, 안합은 허술한 집에서 남루한 옷을 입고 소를 돌보고 있었다. 안합은 사자를 돌려 보냈다. 사자가 다시 그의 집을 찾았지만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장자는 이 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안합은 부귀에 뜻이 없었으며, 부귀가 찾아오는 것도 환영하지 않았다. 세속적인 군자들은 생명을 돌보지 않고 부귀를 추구하는데, 참으로 슬픈 일이다. 어떤 사람이 수후(隨侯)의 보석으로 천길 벼랑 위에 있는 참새를 쏘았다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분명 그를 비웃을 것이다[以隨侯之珠彈千 之雀]."
출전
장자(莊子)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小貪大失(소탐대실) | 隨珠彈雀(수주탄작) | 以珠彈雀(이주탄작) |
반의어·상대어
|
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名從主人 (명종주인)
名從主人(명종주인)
名 이름 명 | 從 좇을 종 | 主 임금 주, 주인 주 | 人 사람 인 |
사물(事物)의 이름은 원래 주인이 붙인 이름을 따른다는 뜻으로, 사물(事物)의 명칭(名稱)은 현지의 호칭법(號稱法)을 따라야 함을 이르는 말
namming is on a owner or master.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환공(桓公) 2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여름철 4월, 노(魯)나라는 고(稿)나라에서 만든 큰 솥을 송(宋)나라로부터 입수하여, 무신(戊申)날에 주공(周公)의 대묘에 바쳤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이름은 그 주인을 따르고, 물건은 중국을 따르는 법이니[名從主人 物從中國], 고나라의 큰 솥이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큰 솥(大鼎)은 본시 고나라에서 만든 것이었는데, 후에 송나라가 이것을 차지하였다가, 다시 송나라의 화보독(華父督)이 환공에게 뇌물로 제공한 것이었다.
따라서 노나라에서는 내력(內歷)이 복잡한 이 물건을 어떻게 불러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공자의 의견을 들었던 것이다.
名從主人이란 사물은 원래 주인의 이름을 따라 짓게 됨 을 뜻하며, 이는 곧 사물의 명칭이 그것의 소재지나 나라의 호칭법에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名 이름 명 | 從 좇을 종 | 主 임금 주, 주인 주 | 人 사람 인 |
사물(事物)의 이름은 원래 주인이 붙인 이름을 따른다는 뜻으로, 사물(事物)의 명칭(名稱)은 현지의 호칭법(號稱法)을 따라야 함을 이르는 말
namming is on a owner or master.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환공(桓公) 2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여름철 4월, 노(魯)나라는 고(稿)나라에서 만든 큰 솥을 송(宋)나라로부터 입수하여, 무신(戊申)날에 주공(周公)의 대묘에 바쳤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이름은 그 주인을 따르고, 물건은 중국을 따르는 법이니[名從主人 物從中國], 고나라의 큰 솥이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큰 솥(大鼎)은 본시 고나라에서 만든 것이었는데, 후에 송나라가 이것을 차지하였다가, 다시 송나라의 화보독(華父督)이 환공에게 뇌물로 제공한 것이었다.
따라서 노나라에서는 내력(內歷)이 복잡한 이 물건을 어떻게 불러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공자의 의견을 들었던 것이다.
名從主人이란 사물은 원래 주인의 이름을 따라 짓게 됨 을 뜻하며, 이는 곧 사물의 명칭이 그것의 소재지나 나라의 호칭법에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鳴鳳在樹 (명봉재수)
鳴鳳在樹(명봉재수)
鳴 울 명 | 鳳 새 봉 | 在 있을 재 | 樹 나무 수 |
명군(名君), 성현(聖賢)이 나타나면 봉(鳳)이 운다는 말과 같이 덕망(德望)이 미치는 곳마다 봉(鳳)이 나무 위에서 울 것임
[출전]
千字文(천자문)
鳴 울 명 | 鳳 새 봉 | 在 있을 재 | 樹 나무 수 |
명군(名君), 성현(聖賢)이 나타나면 봉(鳳)이 운다는 말과 같이 덕망(德望)이 미치는 곳마다 봉(鳳)이 나무 위에서 울 것임
[출전]
千字文(천자문)
名不虛傳 (명불허전)
名不虛傳(명불허전)
名 이름 명 | 不 아닐 불, 아닐 부 | 虛 빌 허 | 傳 전할 전 |
이름은 헛되이 전(傳)해지는 법이 아니라는 뜻으로, 명성(名聲)이나 명예(名譽)가 널리 알려진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理由)가 있음을 이르는 말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名不虛得(명불허득) |
名 이름 명 | 不 아닐 불, 아닐 부 | 虛 빌 허 | 傳 전할 전 |
이름은 헛되이 전(傳)해지는 법이 아니라는 뜻으로, 명성(名聲)이나 명예(名譽)가 널리 알려진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理由)가 있음을 이르는 말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名不虛得(명불허득) |
面壁功深 (면벽공심)
面壁功深(면벽공심)
面壁功深[miànbìgōngshēn]
面 낯 면, 밀가루 면 | 壁 벽 벽 | 功 공로 공 | 深 깊을 심 |
중국 선종(禪宗)의 창시자인 달마(達磨)가 쑹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서 9년간 면벽좌선(面壁坐禪)하면서 높은 경지에 올랐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성어(成語). 목표를 세우고 오랫동안 갈고 닦으면 높고 깊은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비유.
송(宋)나라 혜명(慧明) 등이 엮은 오등회원(五燈會元) 동토조사(東土祖師)편에 나오는 이야기.
남북조시대에 불교가 흥성하자, 많은 인도 승려들이 중국으로 왔다. 양(梁)나라 무제(武帝) 때, 천축국 향지왕(香至王)의 셋째 왕자인 달마(達摩)는 광동지방을 지나 양나라의 수도인 건업(建業)에 도착하였다. 중국 선종의 창시자인 달마는 건업을 떠나 북위(北魏)의 영토인 숭산(嵩山)에 있는 소림사(少林寺)에 머무르게 되었다.
달마는 소림사에서 밤낮으로 벽을 향해 앉은채 종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面壁而坐, 終日默然]. 그에게 무슨 오묘함이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9년을 변함없이 면벽좌선하고 나서, 깨달은 선법(禪法)을 제자 혜가(慧可)에게 전수한 뒤 죽었다.
소림사의 서쪽에는 높이가 2 장(丈)이나 되는 석벽(石壁)이 있다. 얼핏 보면 보통 돌 같지만, 대여섯 걸음 물러나서 보면, 달마가 정좌(靜坐)하고 있는 모습이나 움직이는 모습이 나타난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달마가 9년 동안 면벽하며 도를 닦아 남긴 흔적이라고 한다.
면벽공심은 여기서 유래하였다. 달마가 9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한결같이 면벽좌선에 정진해 드높고 깊은 깨달음의 경지에 올랐다는 뜻이다. 뒤에 오랜 수행과 정진을 통해 어떤 경지에 이른 경우에 이 말을 갖다 붙이면서, 장기간의 연찬 끝에 학문이나 기술 등이 정밀하고 깊은 경지에 오름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출전
오등회원(五燈會元) 동토조사(東土祖師)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
반의어·상대어
|
중요도·활용도
面壁功深[miànbìgōngshēn]
面 낯 면, 밀가루 면 | 壁 벽 벽 | 功 공로 공 | 深 깊을 심 |
중국 선종(禪宗)의 창시자인 달마(達磨)가 쑹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서 9년간 면벽좌선(面壁坐禪)하면서 높은 경지에 올랐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성어(成語). 목표를 세우고 오랫동안 갈고 닦으면 높고 깊은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비유.
송(宋)나라 혜명(慧明) 등이 엮은 오등회원(五燈會元) 동토조사(東土祖師)편에 나오는 이야기.
남북조시대에 불교가 흥성하자, 많은 인도 승려들이 중국으로 왔다. 양(梁)나라 무제(武帝) 때, 천축국 향지왕(香至王)의 셋째 왕자인 달마(達摩)는 광동지방을 지나 양나라의 수도인 건업(建業)에 도착하였다. 중국 선종의 창시자인 달마는 건업을 떠나 북위(北魏)의 영토인 숭산(嵩山)에 있는 소림사(少林寺)에 머무르게 되었다.
달마는 소림사에서 밤낮으로 벽을 향해 앉은채 종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面壁而坐, 終日默然]. 그에게 무슨 오묘함이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9년을 변함없이 면벽좌선하고 나서, 깨달은 선법(禪法)을 제자 혜가(慧可)에게 전수한 뒤 죽었다.
소림사의 서쪽에는 높이가 2 장(丈)이나 되는 석벽(石壁)이 있다. 얼핏 보면 보통 돌 같지만, 대여섯 걸음 물러나서 보면, 달마가 정좌(靜坐)하고 있는 모습이나 움직이는 모습이 나타난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달마가 9년 동안 면벽하며 도를 닦아 남긴 흔적이라고 한다.
면벽공심은 여기서 유래하였다. 달마가 9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한결같이 면벽좌선에 정진해 드높고 깊은 깨달음의 경지에 올랐다는 뜻이다. 뒤에 오랜 수행과 정진을 통해 어떤 경지에 이른 경우에 이 말을 갖다 붙이면서, 장기간의 연찬 끝에 학문이나 기술 등이 정밀하고 깊은 경지에 오름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출전
오등회원(五燈會元) 동토조사(東土祖師)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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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의어·상대어
|
중요도·활용도
明眸皓齒 (명모호치)
明眸皓齒(명모호치)
눈동자가 밝고 이가 희다는 뜻으로 미인(美人)을 비유.
중국 삼국시대의 영웅인 魏(위)나라 曹操(조조)의 셋째아들 曹植(조식)은 詩文(시문)에 특출한 재능을 보여 아버지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아버지가 죽자 사이가 나쁜 형인 曹丕(조비)가 즉위했다.
아니나다를까 형에게 미움을 사고있던 조식은 領地(영지)를 깎이고 사랑하는 절세의 미인 견일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조식은 형에게 빼앗긴 애인의 죽음을 애도하여 시를 지었는데 그 시가 「洛神賦(낙신부)」다. 여기에 처음으로 명모와 호치란 말이 보인다.
붉은 입술은 밖에서 낭랑하고
새하얀 이(皓齒)는 안에서 빛나도다
맑은 눈동자(明眸)로 뒤돌아보니
보조개 진 얼굴이 돋보이는구나
명모호치란 말은 杜甫(두보)의 시 「哀江頭(애강두)」에도 나온다.
「맑은 눈동자 흰 이는 지금 어디 있는가(明眸皓齒今何在)」로 이 시는 시작되는데 여기서 명모호치는 楊貴妃(양귀비)를 가리킨다.
눈동자가 밝고 이가 희다는 뜻으로 미인(美人)을 비유.
중국 삼국시대의 영웅인 魏(위)나라 曹操(조조)의 셋째아들 曹植(조식)은 詩文(시문)에 특출한 재능을 보여 아버지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아버지가 죽자 사이가 나쁜 형인 曹丕(조비)가 즉위했다.
아니나다를까 형에게 미움을 사고있던 조식은 領地(영지)를 깎이고 사랑하는 절세의 미인 견일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조식은 형에게 빼앗긴 애인의 죽음을 애도하여 시를 지었는데 그 시가 「洛神賦(낙신부)」다. 여기에 처음으로 명모와 호치란 말이 보인다.
붉은 입술은 밖에서 낭랑하고
새하얀 이(皓齒)는 안에서 빛나도다
맑은 눈동자(明眸)로 뒤돌아보니
보조개 진 얼굴이 돋보이는구나
명모호치란 말은 杜甫(두보)의 시 「哀江頭(애강두)」에도 나온다.
「맑은 눈동자 흰 이는 지금 어디 있는가(明眸皓齒今何在)」로 이 시는 시작되는데 여기서 명모호치는 楊貴妃(양귀비)를 가리킨다.
明鏡止水 (명경지수)
明鏡止水(명경지수)
明鏡(명경)은 밝은 거울, 한 점의 흐림도 없는 거울이며 止水(지수)는 움직임 없이 고요히 머물러 있는 물. 합쳐져서 흔들림 없이 맑고 고요한 심경을 뜻한다.
魯(노)나라에 형벌로 발목이 잘린 왕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주위에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비록 불구의 몸이 되었을망정 학문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았으므로 그의 제자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았다. 그 수가 나날이 늘어 마침내는 공자의 문하생수와 맞먹을 만큼 커졌다.
공자의 제자 常季(상계)는 이러한 사실이 못내 불쾌해 공자에게 그 까닭을 물어보았다.
『몸도 불구인 왕태라는 자에게 날마다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드니 도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공자의 대답은 이랬다.
『그것은 그분의 마음이 조용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보거나 흔들리지 않는 그분의 마음의 평온함 때문인 것이다. 사람들이 거울 대신 비쳐볼 수 있는 물은 흐르는 물이 아니고 가만히 정지해 있는 물이다(人莫鑑流水 而鑑於止水․인막감유수 이감어지수)』
공자의 말은 더 이어졌다.
『그분은 우주와 자연의 이치를 꿰뚫어 보고 있다. 눈 앞에 얼씬거리는 사물에 솔깃하여 마음이 흔들리는 법이 없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아름다움이나 추악한 것에 이목을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정신의 아름다움을 찾고 손해와 이득을 초월하여 전혀 문제로 삼지 않는다. 비록 발목 하나 떨어져 나가기는 했어도 흙 한줌 내다버린 정도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상계는 공자의 이런 말에 비로소 품었던 감정이 풀렸다.
明鏡(명경)은 밝은 거울, 한 점의 흐림도 없는 거울이며 止水(지수)는 움직임 없이 고요히 머물러 있는 물. 합쳐져서 흔들림 없이 맑고 고요한 심경을 뜻한다.
魯(노)나라에 형벌로 발목이 잘린 왕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주위에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비록 불구의 몸이 되었을망정 학문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았으므로 그의 제자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았다. 그 수가 나날이 늘어 마침내는 공자의 문하생수와 맞먹을 만큼 커졌다.
공자의 제자 常季(상계)는 이러한 사실이 못내 불쾌해 공자에게 그 까닭을 물어보았다.
『몸도 불구인 왕태라는 자에게 날마다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드니 도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공자의 대답은 이랬다.
『그것은 그분의 마음이 조용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보거나 흔들리지 않는 그분의 마음의 평온함 때문인 것이다. 사람들이 거울 대신 비쳐볼 수 있는 물은 흐르는 물이 아니고 가만히 정지해 있는 물이다(人莫鑑流水 而鑑於止水․인막감유수 이감어지수)』
공자의 말은 더 이어졌다.
『그분은 우주와 자연의 이치를 꿰뚫어 보고 있다. 눈 앞에 얼씬거리는 사물에 솔깃하여 마음이 흔들리는 법이 없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아름다움이나 추악한 것에 이목을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정신의 아름다움을 찾고 손해와 이득을 초월하여 전혀 문제로 삼지 않는다. 비록 발목 하나 떨어져 나가기는 했어도 흙 한줌 내다버린 정도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상계는 공자의 이런 말에 비로소 품었던 감정이 풀렸다.
明鏡高懸 (명경고현)
明鏡高懸(명경고현)
明 밝을 명 | 鏡 거울 경 | 高 높을 고 | 懸 매달 현 |
밝은 거울이 높이 걸려 있다는 뜻으로, 사리(事理)에 밝거나 판결(判決)이 공정(公正)함을 일컫는 말
a clear mirror hung on high
한(漢)나라 때의 괴담이나 전설, 일화 등을 수록한 서경잡기(西京雜記) 권3에는 진(秦)나라 때의 신기한 거울 이야기가 실려 있다.
진나라의 함양(咸陽)궁에 소장된 진귀한 보물들 가운데, 너비가 4척, 높이가 5척 9촌으로 앞뒷면이 모두 밝게 빛나는 거울이 하나 있었다. 사람이 그 앞에 서면 거울에는 거꾸로 선 모습이 나타나고, 가슴을 어루만지며 비춰보면 그 사람의 오장(五臟)이 나타났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이 비추면 환부가 나타났으며, 이 거울은 사람의 나쁜 마음까지도 비춰 보였다. 이 때문에 진시황은 이 거울을 이용하여 궁궐안의 모든 사람들의 충성심을 비춰 보았다. 심장이나 쓸개가 급히 뛰는 사람을 발견하면, 진시황은 즉각 그를 체포하여 심문하고 처벌하였다. 그러나, 이 거울은 진나라 말기, 유방(劉邦)이 함양을 공격하던 혼란속에서 그만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明鏡高懸(a clear mirror hung on high)은 진경고현(秦鏡高懸)이라고도 하며 높게 매달려 있는 맑은 거울이라는 뜻이다. 이는 시비를 분명하게 따져 판단하는 공정무사(公正無私)한 법관을 비유한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秦鏡高懸(진경고현) |
明 밝을 명 | 鏡 거울 경 | 高 높을 고 | 懸 매달 현 |
밝은 거울이 높이 걸려 있다는 뜻으로, 사리(事理)에 밝거나 판결(判決)이 공정(公正)함을 일컫는 말
a clear mirror hung on high
한(漢)나라 때의 괴담이나 전설, 일화 등을 수록한 서경잡기(西京雜記) 권3에는 진(秦)나라 때의 신기한 거울 이야기가 실려 있다.
진나라의 함양(咸陽)궁에 소장된 진귀한 보물들 가운데, 너비가 4척, 높이가 5척 9촌으로 앞뒷면이 모두 밝게 빛나는 거울이 하나 있었다. 사람이 그 앞에 서면 거울에는 거꾸로 선 모습이 나타나고, 가슴을 어루만지며 비춰보면 그 사람의 오장(五臟)이 나타났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이 비추면 환부가 나타났으며, 이 거울은 사람의 나쁜 마음까지도 비춰 보였다. 이 때문에 진시황은 이 거울을 이용하여 궁궐안의 모든 사람들의 충성심을 비춰 보았다. 심장이나 쓸개가 급히 뛰는 사람을 발견하면, 진시황은 즉각 그를 체포하여 심문하고 처벌하였다. 그러나, 이 거울은 진나라 말기, 유방(劉邦)이 함양을 공격하던 혼란속에서 그만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明鏡高懸(a clear mirror hung on high)은 진경고현(秦鏡高懸)이라고도 하며 높게 매달려 있는 맑은 거울이라는 뜻이다. 이는 시비를 분명하게 따져 판단하는 공정무사(公正無私)한 법관을 비유한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秦鏡高懸(진경고현) |
名繮利鎖 (명강리쇄)
名繮利鎖(명강리쇄)
名 이름 명 | 繮 고삐 강 | 利 이로울 리 | 鎖 쇠사슬 쇄 |
명예의 고삐 줄과 이익이라는 쇠사슬.
한(漢)나라 동방삭(東方朔)의 여우인서(與友人書) 에 나오는 이야기다.
당(唐)나라 덕종(德宗)년간, 못생긴 외모에다 음흉한 마음씨를 가진 노기(盧杞)라는 재상(宰相)이 있었다. 어느 날, 노기는 길가에서 풍성(馮聲)이라는 가난한 선비와 마주쳤다. 노기는 여태 그를 멸시해 온터라, 마음대로 그의 주머니를 뒤져 묵(墨) 조각을 찾아내고는 큰 소리로 비웃었다. 그러나 풍성은 점잖게 '이번에는 제가 당신의 짐꾸러미를 한번 뒤져보기로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작은 종이 삼백여장을 찾아냈다. 이는 당시의 명함으로서 고관대작을 방문할 때 사용하던 것들이었다.
풍성은 웃으며 말했다.
"어찌 된 일입니까? 이렇게 삼백여장의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명리(名利)의 노예인 당신과 나를 비교해 본다면, 더 나은 쪽은 누구이겠습니까?"
名繮利鎖는 명예의 고삐와 이익의 사슬을 뜻하니, 이는 곧 명예와 이익에 얽매어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名 이름 명 | 繮 고삐 강 | 利 이로울 리 | 鎖 쇠사슬 쇄 |
명예의 고삐 줄과 이익이라는 쇠사슬.
한(漢)나라 동방삭(東方朔)의 여우인서(與友人書) 에 나오는 이야기다.
당(唐)나라 덕종(德宗)년간, 못생긴 외모에다 음흉한 마음씨를 가진 노기(盧杞)라는 재상(宰相)이 있었다. 어느 날, 노기는 길가에서 풍성(馮聲)이라는 가난한 선비와 마주쳤다. 노기는 여태 그를 멸시해 온터라, 마음대로 그의 주머니를 뒤져 묵(墨) 조각을 찾아내고는 큰 소리로 비웃었다. 그러나 풍성은 점잖게 '이번에는 제가 당신의 짐꾸러미를 한번 뒤져보기로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작은 종이 삼백여장을 찾아냈다. 이는 당시의 명함으로서 고관대작을 방문할 때 사용하던 것들이었다.
풍성은 웃으며 말했다.
"어찌 된 일입니까? 이렇게 삼백여장의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명리(名利)의 노예인 당신과 나를 비교해 본다면, 더 나은 쪽은 누구이겠습니까?"
名繮利鎖는 명예의 고삐와 이익의 사슬을 뜻하니, 이는 곧 명예와 이익에 얽매어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梅妻鶴子 (매처학자, méiqīhèzǐ)
梅妻鶴子(매처학자)
梅妻鹤子(méiqīhèzǐ)
梅 매화 매 | 妻 아내 처 | 鶴 학 학,흴 학 | 子 아들 자 |
매화(梅花)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子息)으로 삼는다는 뜻으로, 선비의 풍류(風流) 생활(生活)을 두고 이르는 말
송나라의 완열(阮閱)이 편집한 시화집《시화총귀(詩話總龜):원명은 시총(詩總)》에 나오는 말이다. 송(宋)나라 때 임포(林浦)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평생을 홀아비로 살면서 세속의 영리를 버리고 고적한 가운데 유유자적하며 사는 시인이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유정(幽靜)하면서도 청고(淸高)하였는데, 시로써 이름이 나는 것을 싫어하여 많은 시를 버리고, 후세에 전하여질 것이 두려워 시를 읊되 기록하지 않기도 하였다.
그가 은둔 생활을 한 곳은 서호(西湖) 근처의 고산(孤山)이란 곳이었다. 자주 호수에 나가 조각배를 띄우고, 간혹 절을 찾아 유한한 정취를 즐겼는데, 임포는 처자가 없는 대신 자신이 머물고 있는 초당 주위에 수많은 매화나무를 심어 놓고 학을 기르며 살았다. 그는 학이 나는 것을 보고 손님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임포를 두고, ‘매화 아내에 학 아들을 가지고 있다(梅妻鶴子)’고 하였다. 그 후 사람들은 풍류를 즐기며 초야에서 정한(靜閑)하게 사는 사람을 가리켜 매처학자라 부르게 되었다.
관련 한자어
유의어
妻梅子鶴(처매자학) | 悠悠自適(유유자적) |
詩話總龜(시화총귀) | 詩總(시총) |
梅妻鹤子(méiqīhèzǐ)
梅 매화 매 | 妻 아내 처 | 鶴 학 학,흴 학 | 子 아들 자 |
매화(梅花)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子息)으로 삼는다는 뜻으로, 선비의 풍류(風流) 생활(生活)을 두고 이르는 말
송나라의 완열(阮閱)이 편집한 시화집《시화총귀(詩話總龜):원명은 시총(詩總)》에 나오는 말이다. 송(宋)나라 때 임포(林浦)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평생을 홀아비로 살면서 세속의 영리를 버리고 고적한 가운데 유유자적하며 사는 시인이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유정(幽靜)하면서도 청고(淸高)하였는데, 시로써 이름이 나는 것을 싫어하여 많은 시를 버리고, 후세에 전하여질 것이 두려워 시를 읊되 기록하지 않기도 하였다.
그가 은둔 생활을 한 곳은 서호(西湖) 근처의 고산(孤山)이란 곳이었다. 자주 호수에 나가 조각배를 띄우고, 간혹 절을 찾아 유한한 정취를 즐겼는데, 임포는 처자가 없는 대신 자신이 머물고 있는 초당 주위에 수많은 매화나무를 심어 놓고 학을 기르며 살았다. 그는 학이 나는 것을 보고 손님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임포를 두고, ‘매화 아내에 학 아들을 가지고 있다(梅妻鶴子)’고 하였다. 그 후 사람들은 풍류를 즐기며 초야에서 정한(靜閑)하게 사는 사람을 가리켜 매처학자라 부르게 되었다.
관련 한자어
유의어
妻梅子鶴(처매자학) | 悠悠自適(유유자적) |
詩話總龜(시화총귀) | 詩總(시총) |
盲玩丹靑 (맹완단청)
盲玩丹靑(맹완단청)
장님의 단청 구경. 보이지 않는 눈으로 단청을 구경해 봤자 아무런 소득이나 분별이 있을 수 없듯이, 사물을 보아도 전혀 사리를 분별하지 못함의 비유.
장님의 단청 구경. 보이지 않는 눈으로 단청을 구경해 봤자 아무런 소득이나 분별이 있을 수 없듯이, 사물을 보아도 전혀 사리를 분별하지 못함의 비유.
麥秀之嘆 (맥수지탄, màixiùzhītàn)
麥秀之嘆(맥수지탄)
麦秀之叹(màixiùzhītàn)
麥 보리 맥 | 秀 빼어날 수 | 之 갈 지 | 嘆 탄식할 탄,또 우 |
맥수지탄(麥秀之歎). 무성(茂盛)히 자라는 보리를 보고 하는 탄식(歎息)이라는 뜻으로, 고국의 멸망(滅亡)에 대(對)한 탄식(歎息)을 이르는 말
고대 중국 상(商)의 마지막 임금인 주왕(紂王)은 여러 사람의 충고를 듣지 않고 주색에 빠졌다가 백성과 제후(諸侯)들의 마음을 잃었다. 결국 주(周)의 무왕(武王)이 서쪽의 제후들을 규합해 쳐들어오자 목야(牧野)에서 맞서싸웠지만 패배하여 자살하였고, 상(商)은 멸망하였다.
뒷날 주왕의 숙부(叔父)인 기자(箕子)가 상(商)의 옛 도성을 지나게 되었는데, 화려하던 시가지는 폐허가 되었고, 궁궐 터엔 보리와 기장만이 무성하였다. 이에 그는 맥수지시(麥秀之詩,麥秀歌)를 지어 읊으며 그 사실을 슬퍼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 “麥秀漸漸兮 禾黍油油兮 彼狡童兮 不與我好兮(옛 궁궐터에는 보리만이 무성하고 벼와 기장도 기름졌구나. 도성이 이 꼴로 변한 것은 그 녀석이 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지)”로 기록되어 전한다.
[유래]
史記(사기) : 宋微子世家(송미자세가) |
관련 한자어
유의어
麥秀之歎(맥수지탄) | 麥秀黍油(맥수서유) | 亡國之恨(망국지한) | 亡國之歎(망국지탄) |
史記(사기) : 宋微子世家(송미자세가) |
麦秀之叹(màixiùzhītàn)
麥 보리 맥 | 秀 빼어날 수 | 之 갈 지 | 嘆 탄식할 탄,또 우 |
맥수지탄(麥秀之歎). 무성(茂盛)히 자라는 보리를 보고 하는 탄식(歎息)이라는 뜻으로, 고국의 멸망(滅亡)에 대(對)한 탄식(歎息)을 이르는 말
고대 중국 상(商)의 마지막 임금인 주왕(紂王)은 여러 사람의 충고를 듣지 않고 주색에 빠졌다가 백성과 제후(諸侯)들의 마음을 잃었다. 결국 주(周)의 무왕(武王)이 서쪽의 제후들을 규합해 쳐들어오자 목야(牧野)에서 맞서싸웠지만 패배하여 자살하였고, 상(商)은 멸망하였다.
뒷날 주왕의 숙부(叔父)인 기자(箕子)가 상(商)의 옛 도성을 지나게 되었는데, 화려하던 시가지는 폐허가 되었고, 궁궐 터엔 보리와 기장만이 무성하였다. 이에 그는 맥수지시(麥秀之詩,麥秀歌)를 지어 읊으며 그 사실을 슬퍼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 “麥秀漸漸兮 禾黍油油兮 彼狡童兮 不與我好兮(옛 궁궐터에는 보리만이 무성하고 벼와 기장도 기름졌구나. 도성이 이 꼴로 변한 것은 그 녀석이 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지)”로 기록되어 전한다.
[유래]
史記(사기) : 宋微子世家(송미자세가) |
관련 한자어
유의어
麥秀之歎(맥수지탄) | 麥秀黍油(맥수서유) | 亡國之恨(망국지한) | 亡國之歎(망국지탄) |
史記(사기) : 宋微子世家(송미자세가) |
孟母三遷之敎 (맹모삼천지교)
孟母三遷之敎(맹모삼천지교)
孟 : 맏 맹| 母 : 어미 모| 三 : 석 삼| 遷 : 옮길 천| 之 : 어조사 지| 敎 : 가르칠 교
맹자(孟子)의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뜻으로, 인간의 성장에 있어서 그 환경이 중요함을 가리키는 말.
孟 : 맏 맹| 母 : 어미 모| 三 : 석 삼| 遷 : 옮길 천| 之 : 어조사 지| 敎 : 가르칠 교
맹자(孟子)의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뜻으로, 인간의 성장에 있어서 그 환경이 중요함을 가리키는 말.
孟母三遷 (맹모삼천)
孟母三遷(맹모삼천)
☞ 孟母三遷之敎(맹모삼천지교)
「孟母三遷之敎(맹모삼천지교)」의 준말. 환경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여, 맹자어머니가 세 번이나 이사를 하면서 맹자의 교육에 힘썼다는 고사.
☞ 孟母三遷之敎(맹모삼천지교)
☞ 孟母三遷之敎(맹모삼천지교)
「孟母三遷之敎(맹모삼천지교)」의 준말. 환경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여, 맹자어머니가 세 번이나 이사를 하면서 맹자의 교육에 힘썼다는 고사.
☞ 孟母三遷之敎(맹모삼천지교)
孟母斷機 (맹모단기)
맹모단기(孟母斷機)
맹자 어머니가 베의 날실을 끊다. 시작했으면 끝을 보아야 한다.
타향에서 공부하던 어린 맹자가 느닷없이 집에 돌아왔을 때 맹자의 어머니는 베틀에 앉은 채 맹자에게 물었다.
"그래, 글은 얼마나 배웠느냐?"
"별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어머님."
맹자가 대답하자 어머니는 짜고 있던 베의 날실을 끊어버리며 말했다.
"네가 공부를 중도에 그만두고 돌아온 것은 지금 내가 짜고 있던 이 베의 날실을 끊어 버린 것과 다를 게 없다."
시작했으면 끝을 보아야 하는 이치는 단지 학문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일이든 마음먹었으면 끝까지 도전해보십시오.
맹자 어머니가 베의 날실을 끊다. 시작했으면 끝을 보아야 한다.
타향에서 공부하던 어린 맹자가 느닷없이 집에 돌아왔을 때 맹자의 어머니는 베틀에 앉은 채 맹자에게 물었다.
"그래, 글은 얼마나 배웠느냐?"
"별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어머님."
맹자가 대답하자 어머니는 짜고 있던 베의 날실을 끊어버리며 말했다.
"네가 공부를 중도에 그만두고 돌아온 것은 지금 내가 짜고 있던 이 베의 날실을 끊어 버린 것과 다를 게 없다."
시작했으면 끝을 보아야 하는 이치는 단지 학문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일이든 마음먹었으면 끝까지 도전해보십시오.
買櫝還珠 (매독환주)
買櫝還珠(매독환주)
買 살 매 | 櫝 함 독 | 還 돌아올 환 | 珠 구슬 주 |
옥을 포장하기 위해 만든 나무상자를 사고 그 속의 옥은 돌려 준다는 뜻으로, 꾸밈에 현혹되어 정말 중요한 것을 잃는다는 말
한비자(韓非子) 외저설(外儲說)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춘추시기, 초(楚)나라 왕이 묵자(墨子)의 제자인 전구(田鳩)에게 물었다.
"묵자는 학식이 넓다고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네. 그런데 품행은 단정하지만 언설을 보면 장황하기만 할 뿐 능변이 아닌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전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옛날 진(秦)나라 왕이 그 딸을 진(晉)나라 공자에게 시집보낼 때 온갖 장식을 다하고 아름답게 수놓은 옷을 입은 시녀 70명을 딸려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자는 오히려 그 시녀들을 사랑하고 딸을 학대하였습니다. 따라서 진 나라 왕은 딸을 좋은 곳에 시집보낸 것이 아니라 시녀들을 좋은 곳에 시집보낸 꼴이 되었지요. 또 어느 초나라 사람은 자기가 가진 구슬을 팔러 정나라로 갔습니다. 그는 목란(木蘭), 계초(桂椒)와 같은 향기로운 나무로 짜고 물참새의 털로 장식한 상자를 만들어 그 안에 옥을 넣어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정나라 사람은 그 상자만 샀을 뿐 옥은 되돌려 주었다고 합니다[買櫝還珠]. 오늘날 세간의 학자들도 이와 같아서 모두 능란한 변설로 꾸미기를 잘하며, 군주는 또 그 화려함에 현혹되어 실질을 판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묵자의 언설은 성왕의 도를 전하고, 성인의 말씀을 논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만약 언설을 꾸미게 되면 사람들은 단지 그 꾸민 말과 표현에만 주의하여 실질은 잊게 될 것이니 그것은 언설을 꾸미면 실질의 중요성이 묻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묵자는 그 말만 장황할 뿐 능변은 아닌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매독환주란 표현의 화려함에 현혹되어 내용의 중요성은 잊는다는 비유로, 본래는 교언영색(巧言玲色)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오늘날에는 호화롭게 꾸민 겉포장에 현혹되어 정말 중요한 실체를 잃는다는 의미로 두루 사용되고 있다.
출전
한비자(韓非子) 외저설좌상(外儲說左上)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교언영색(巧言玲色) |
반의어·상대어
|
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買 살 매 | 櫝 함 독 | 還 돌아올 환 | 珠 구슬 주 |
옥을 포장하기 위해 만든 나무상자를 사고 그 속의 옥은 돌려 준다는 뜻으로, 꾸밈에 현혹되어 정말 중요한 것을 잃는다는 말
한비자(韓非子) 외저설(外儲說)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춘추시기, 초(楚)나라 왕이 묵자(墨子)의 제자인 전구(田鳩)에게 물었다.
"묵자는 학식이 넓다고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네. 그런데 품행은 단정하지만 언설을 보면 장황하기만 할 뿐 능변이 아닌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전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옛날 진(秦)나라 왕이 그 딸을 진(晉)나라 공자에게 시집보낼 때 온갖 장식을 다하고 아름답게 수놓은 옷을 입은 시녀 70명을 딸려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자는 오히려 그 시녀들을 사랑하고 딸을 학대하였습니다. 따라서 진 나라 왕은 딸을 좋은 곳에 시집보낸 것이 아니라 시녀들을 좋은 곳에 시집보낸 꼴이 되었지요. 또 어느 초나라 사람은 자기가 가진 구슬을 팔러 정나라로 갔습니다. 그는 목란(木蘭), 계초(桂椒)와 같은 향기로운 나무로 짜고 물참새의 털로 장식한 상자를 만들어 그 안에 옥을 넣어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정나라 사람은 그 상자만 샀을 뿐 옥은 되돌려 주었다고 합니다[買櫝還珠]. 오늘날 세간의 학자들도 이와 같아서 모두 능란한 변설로 꾸미기를 잘하며, 군주는 또 그 화려함에 현혹되어 실질을 판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묵자의 언설은 성왕의 도를 전하고, 성인의 말씀을 논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만약 언설을 꾸미게 되면 사람들은 단지 그 꾸민 말과 표현에만 주의하여 실질은 잊게 될 것이니 그것은 언설을 꾸미면 실질의 중요성이 묻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묵자는 그 말만 장황할 뿐 능변은 아닌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매독환주란 표현의 화려함에 현혹되어 내용의 중요성은 잊는다는 비유로, 본래는 교언영색(巧言玲色)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오늘날에는 호화롭게 꾸민 겉포장에 현혹되어 정말 중요한 실체를 잃는다는 의미로 두루 사용되고 있다.
출전
한비자(韓非子) 외저설좌상(外儲說左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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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어·유의어
교언영색(巧言玲色) |
반의어·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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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활용도
중요도 ★
瞞天過海 (만천과해, mántiānguòhǎi)
瞞天過海(만천과해)
瞒天过海(mán tiān guò hǎi)
三十六計(삼십육계) 勝戰計(승전계) 제1계. 하늘을 속여 바다를 건너다.
☞ Deceive the heavens to cross the ocean
“만천과해”계책은 원래 “진룡천자(眞龍天子)”라 일컬었던 당 태종을 속여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대해를 건너게 한 고사에서 나왔다. 명나라 때 쓰여진 백과사전인 <영락대전(永樂大典)>이 그 출전이다.
당나라 태종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동쪽의 고구려를 침공하려고 할 때의 일이었다. 바닷가에 이르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 했는데, 워낙 내륙에서 자란 당태종인지라 처음 보는 바다의 모습에 위축되어 배로서 바다를 건너는 것은 무리라 하여 군사를 돌리려 했었다. 그런데 마침 군사를 돌리려는 당태종 앞에 일대의 토호를 자처한 노인이 나타나 30만 군대를 위한 양식을 마련했다며 당태종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었다. 당태종으로서도 아무래도 지방의 권력과도 친해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그 초대에 응해 먹고 마시며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당태종이 일어나 보니 어느새 망망대해에 와 있는 것이었다. 바로 전날 노인의 집이라 초대된 연회장이 배 위였던 것이고, 노인은 막 당태종의 휘하로 들어와 있던 설인귀가 분장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당태종이 바다에 겁을 먹어 군대를 되돌릴 것 같자 노인으로 분장하여 당태종이 자신도 모른 새 배에 오르도록 하고는 당태종이 잠든 사이 배를 출발시켜버린 것이다. 말 그대로 천자, 즉 황제를 속여 바다를 건너는 것. 그래서 만천과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춘추시대 진문공의 일화가 있다. 진문공은 공자시절 중이라 불리웠었는데, 아버지인 진헌공의 정실로서 해제를 낳아 그를 왕으로 올리고자 하는 여희의 음모로 이오와 더불어 65살 다시 진나라로 돌아와 즉위하기까지 열국을 떠돌며 망명생활을 해야 했었다. 그 가운데 특히 제나라에서의 7년이 유독 사무쳤었는데, 아마도 그 시절이 오랜 망명기간 가운데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던 때문이었다.
당시 제나라의 군주는 춘추오패의 첫머리로 꼽는 제환공이었다. - 중이의 동생인 이오를 진의 목공과 함께 진의 왕으로 올린 것도 바로 이 환공이었다. - 제환공은 중이의 인품을 높이 사서 그에게 자신의 딸 제강과 수레 20승, 말 18필을 주어 후대했는데, 이미 형인 신생이 죽고, 다시 여희와 해제가 죽자 이오가 진혜공이 되어서는 적나라에 망명해 있던 그를 죽이려 하는 등, 참으로 바람잘 날 없던 삶이라, 더구나 당시 중이의 나이는 50을 넘어 있었다. 지금이야 50이면 한창 나이이지만 당시로서는 이미 죽을 날을 잡아 놓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중이로서도 이래도 편안히 남은 생을 보내자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 중이는 혼자몸이 아니었다. 그를 쫓아 그에게 일신을 의탁한 아홉 명의 신하가 있었다. 그들로서는 중이가 한시라도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 일을 도모하여 뜻을 이루어야 할 터인데 저렇게 당장의 편안함에 길들여져 큰 뜻을 잊은 채 허송세월만 하고 있으니 이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더구나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중이의 동생인 이오 - 즉 진혜공의 학정과 무능으로 말미암아 크게 어지러운 상황이었던데다, 제환공이 죽고 제나라의 내정 또한 혼란하여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으니 더욱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이는 그런 신하들의 마음을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을 찾아가도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쫓겨날 뿐, 결국 몇 번을 그렇게 중이를 만나지도 뫃가고 쫓겨나게 되자 신하들은 아예 사냥을 빌미로 중이를 밖으로 불러내서 그를 납치하려는 계획까지 세우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뜻하지 않게 제환공의 딸이기도 한 중이의 부인 제강이 끼어들었다.
시녀들을 통해 호언 등의 계획을 들은 제강은 은밀히 호언을 찾아가 진의 내정이 어렵고 혼란스러워 모든 대부와 백성들이 중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처럼 안락함에 빠져 움직이려 하지 않으니 그것은 장부의 도리가 아니라며 자신이 나서서 돕겠노라 말했다. 자신이 공자 중이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만들 터이니, 그때 몰래 중이를 업어 마차에 실어 목적한 곳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제환공의 딸다운 배포라 할 터인데, 이전부터도 제강은 몇 번이고 중이로 하여금 진나라의 공자로서 자신을 자각하여 진으로 돌아가 큰 뜻을 펼칠 것을 권하고 했었다. 그럴 경우 제강 자신이 버려질 수 있음을 알면서도 한 여자로서보다는 진나라 공자 중이의 처로서, 제환공의 딸이자 제나라의 공주로서 처신을 선택한 것이었다. 참으로 독심장부라고나 할까?
아무튼 호언 등과 그렇게 약속하고 돌아온 제강은 중이를 만나자 먼저 그 신하들이 중이를 모시고 다른 나라로 가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음을 알고 있다며 중이더러 자신을 버릴 것이냐고 다그쳤다. 당연히 금시초문인 중이는 펄쩍 뛰었다. 그는 그때까지도 사랑스런 제강과 제나라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겨우 마음이 놓이는 표정을 지어 보인 제강은 마치 다짐이라도 하려는 듯 중이에게 함께 술을 마시며 밤을 지새자고 제안했다. 그야말로 중이가 떠날 것을 걱정하다가 겨우 마음을 놓이게 된 처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중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호언 등이 몰고 있는 마차 안이었다. 제나라의 국경도 예전에 넘어 있었고 다시 돌아가려 해도 이미 제나라를 떠나온 신하들은 다시 제나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고, 아마 돌아간다고 해도 예전과 같은 생활은 누리지 못할 것이었다. 잠시 술에 취해 잠든 사이 일은 이렇게 완전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제강의 손으로 하늘을 가려 바다를 건너는 계책에 당한 것이니, 중이도 마침내 제나라에서의 생활에 대한 미련을 모두 접고 신하들이 이끄는 대로 자신의 운명이 가리키는 대로 따르게 되었다.
그렇게 중이는 제나라를 떠나 조나라로 갔다가 다시 송나라로, 송나라에서 또 초나라로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 마침내 진혜공에 이은 진회공의 신의없음과 포악함에 질려버린 진목공의 후원을 받아 그로부터 군사를 빌려 진나라로 돌아가 동생의 아들이기도 한 회공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바로 춘추오패에서 빠지지 않는 세 자리 가운데 하나인 진문공이다. 주왕실의 반란을 진압하고 천토의 회맹으로써 춘추시대의 두번째 패자가 되니, 불과 십 여 년의 짧은 치세지만 이때 진나라는 명실상부한 중원의 패자로서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가히 대단한 능력이라 하겠는데, 거기에는 여자로서의 자신을 희생한 제강의 현숙하면서도 치밀한 노력이 있었다. 진문공 또한 패자였으니 태종과 같이 이것도 만천과해라 하겠다.
그로부터 파생된 뜻은, 위장수단을 사용하여 공개적으로 가짜의 상을 만들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경계심을 풀게 하고, 없는 듯 하면서 있고, 가짜인 듯 하면서 진짜인 듯 만들어 문제되는 것들을 피하고 난관을 극복함으로써 상대방이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승리해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뜻한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 평상시 습관처럼 보이면 의심을 품지 않는 법이다. 은밀한 계략과 공개적인 형식은 서로 상반되지 않고, 반대로 음모는 밖으로 드러난 공개적인 행위 속에 감추어져 있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역]에서 태음이 바로 태양인 이치와 같다.
36계의 제1계인 만천과해는 승전계(勝戰計)에 속한다. 아군의 형세가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을 때 말을 타고 적을 압도하는 작전인 것이다.
흔히 '兵法'이라 하면, 소수의 아군으로 다수의 적군을 이기는 '신비한' 술책 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병법의 기본은 어디까지나 '다수의 아군으로 소수의 적군을 압박하여' 이기는 것이다. 손자병법에서도, 謨攻(모공)편에 이르길, "...그러므로 전쟁의 원칙은 병력이 적군의 10배일 때에는 적을 포위하고, 5배일 때에는 적을 공격하며, 2배일 때에는 계략을 써서 적을 분산시키며, 병력이 적과 비슷할 때에는 전력을 다하여 싸워야 하며, 병력이 적군보다 적을 때에는 적과 부딪치지 말고 싸움터에서 벗어나야 하며,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전투를 피하여야 한다..." 라고 하고 있다.
삼십육계의 구조도 위에 얘기한 손자병법 모공편의 문구에 따라 이루어져 있다. 적보다 우세할 때의 '승전계', 적과 세력이 비슷할 때의 '적전계', 적을 공격하기 위한 '공전계', 공방이 혼란할 때의 '혼전계', 다른 아군과 합세하여 싸울 때의 '병전계', 그리고 아군이 불리할 때의 '패전계' 와 같다.
삼십육계 원문에는 '만천과해'에 대한 짤막한 해설이 붙어 있다.
"아군의 수비가 안전하다고 생각되면 자칫 경계심이 흩어지기 쉽다. 또한 사람은 흔히 보아온 것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지 않게 된다. 그러한 약점에 계략을 찔러넣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헛점을 찌르는 계략은 대수롭지 않게 눈에 뜨이는 곳에 깃들게 하는 것이다. 꼭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備周則意怠,常見則不疑.陰在陽之內,不在陽之對.太陽,太陰.]"
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적을 방심하게 하고, 그것에 적이 익숙해졌을 때, 그 틈을 찌르는 계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만천과해와 관련하여 많이 드는 예는 삼국지의 태사자 예이다.
북해 태수 공융(孔融)이 황건적에게 포위되었을 때였다. 공융에게 평소 은혜를 입은 태사자의 모친은 공융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태사자에게 도우러 가라고 한다. 이에 태사자는 밤을 틈타 황건적의 포위망을 지나 공융에게로 간다. 공융은 유비에게 원군을 부탁하고자 하고, 이 임무를 태사자에게 부탁한다. 태사자(太史慈)는 포위망을 돌파하여 원병을 청하러 가야하나, 적의 포위망이 워낙 튼튼하여 쉽게 돌파하지 못한다.
그는 활과 과녁을 두 기사에게 들리고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성안에 있는 군사나 성밖에 있는 적병들이 이를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 그러나 태사자는 태연히 말을 끌고 성 가까이에 있는 언덕에 과녁을 세우고 활쏘기 연습을 시작했다. 이윽고 연습이 끝나자 그는 다시 성안으로 돌아왔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이렇게 활쏘기 연습을 거듭했다. 그러자 성밖에 있는 적병들 중에는 그것을 구경하는 자도 있고, 드러누워 낮잠을 자는 자도 있었다. 그는 변함없이 이렇게 활쏘기를 계속하여, 사흘째가 되자 황건적들은 이제 그에게 아무런 관심조차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때를 틈타 태사자는 갑자기 말 위에 올라 채찍을 휘두르며 비호처럼 적의 포위망을 뚫었다. 적들이 속았구나 하고 손을 쓰려 했을 때 그는 이미 멀리 가버린 후였다. 태사자는 말을 채찍질하여 황건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 유비에게 구원을 청하게 된다. [三國志(正史) 吳志 태사자전]
분명히 뜻풀이만으로 보자면 태사자의 예는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勝戰計' 즉, 아군이 '우세할 때' 쓰는 계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적을 방심하게 하고 그 틈을 찌른다'는 점에서는 타당하지만, 그보다 이전의 '승전계'라는 전제를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또다른 예로는 삼국시대 오나라 손책의 예를 들 수 있다.
삼국 시대 오나라의 손책(孫策)이 수일을 연하여 회계성을 쳤으나 성은 좀처럼 깨어지지 않았다. 성벽은 높고 해자는 또한 넓고 깊었다. 손책이 무리를 모아 놓고 성 칠 일을 의논하니, 군중에 함께 따라와 있던 그의 숙부 손정(孫靜)이 계책을 말했다.
"성이 원체 견고하고 왕랑이 또한 죽기로써 지키는 터이라, 이대로 쳐서는 깨뜨리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이제 회계땅의 전량(錢糧)이 태반이나 사독에 있고, 그곳이 여기서 불과 수십 리니, 먼저 그곳을 점거하는 것이 어떨까? 이것이 이른바 '공기무비(攻其無備)요 출기불의(出其不意)'라, 그 방비 없음을 치고, 예상치 못한 때에 나아간다는 것이 아니겠느냐."
손책은 크게 기뻐하였다.
"숙부님의 묘계로 족히 적을 깨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즉시 각문에 영을 내려 불을 밝히며 기호(旗號)를 많이 세워 의병(擬兵)을 삼게 하고, 밤을 이용하여 에움을 푼 다음 사독으로 가기로 했다.
그때 한 장수가 말했다.
"주공께서 대군을 거두시어 떠나는 것을 알게 되면, 적이 필연코 성을 나와 뒤를 쫓을 것이니 기병(奇兵)을 쓰시는 것이 마땅할까 합니다."
"내 이미 준비를 하여 놓았네. 회계성은 오늘밤 안으로 우리 장중에 들어오게 될 걸세."
손책의 군마가 물러갔다는 첩보를 받은 회계성의 장수 왕랑은 무리들과 함께 성루로 올라갔다. 성밖을 두루 살펴보니, 성 아래에 연기와 불이 함께 일어나며 무수한 정기(旌旗)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왕랑이 마음에 의심하기를 마지않을 때, 부장 주흔이 말했다.
"손책이 겁을 집어먹고 군사를 거두어 달아나는가 봅니다. 그래서 정기를 휘날려 우리를 의심케 하는 것이니, 지금 곧 군사를 내시어 뒤를 치도록 하십시오."
이때 한 장수가 말했다.
"손책이 이번에 간 것이 혹시 사독을 치기 위함이나 아닐까요. 일군을 따로 뽑아 뒤를 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랑은 드디어 뜻을 정하였다.
"사독은 곧 우리의 둔량처(屯糧處)이니 아무래도 방비를 엄히 해야만 하겠소."
왕랑의 군사는 남으로 사독을 향해 급히 뒤를 쫓아 20여 리를 갔다. 때는 초경이 가까운데, 갑자기 밀림속에서 북소리가 크게 울리며 횃불이 일시에 일어났다. 왕랑의 군사들이 깜짝 놀라 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려 할 때, 한 장수가 창을 빗겨 잡고 말을 내달아 나오니 그는 바로 손책이었다. 이 싸움에서 왕랑은 크게 패하여 마침내 성을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는데, 이는 바로 상대를 속여 그 약점을 누르고 때를 보아 기습하여 전승을 거둔 예이다.
또다른 예로는 전국시대 초기, 魏文侯(위문후)가 중산국을 정벌하기 위해 元帥(원수)로 삼은 '악양'의 사례가 있다.
위나라는 晉(진)나라가 나뉜 삼국(위, 조, 한) 중의 하나이다. 이때 晉의 동쪽에 中山國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는 진나라에 계속 조공을 바치고 있었는데 진이 삼국으로 나뉜 후로는 어느 나라를 섬겨야 할지 몰라서 아무 곳에도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중산국의 위치는 서쪽의 조나라와 가깝고 남쪽의 위나라와는 꽤 먼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나라가 중산국을 차지하면 위나라는 북쪽으로부터 상당한 압력을 받을 것이 뻔했다.
중산국을 치기로 마음먹은 위문후는 누구를 원수로 삼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 때, 책황이 악양을 천거한다. 하지만 다른 신하들은 악양의 아들인 악서가 중산국에서 벼슬을 삼고 있다는 이유로 악양을 원수로 삼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위문후가 악양을 불러 물어보니, 악양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어찌 公事를 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한다. 이에 위문후는 악양을 원수로 삼아 중산국을 치게 한다.
악양의 병법은 탁월하여 중산국의 병사들을 계속 이겨나가, 마침내 중산국의 수도인 중산성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중산국의 임금인 희굴은 악양의 아들인 악서를 내세워서 '항복하기 위해서는 임금과 신하가 상의할 시간이 필요하니 한달간의 말미를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악양이 승낙하자 희굴은 악양이 아들인 악서의 처지를 걱정하여 공격을 미루는 것으로 생각했다. 한달이 지나도 뾰족한 계책이 서지 않자 희굴은 또 악서를 보내 다시 한달의 여유를 얻어낸다. 이렇게 악양은 악서에게 세 달의 여유를 주었다.
그러자 중산국은 물론 위나라의 병사들까지도 '악양은 아들을 걱정하여 중산국을 치지 않을 것이다'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또한 조정에서는 일조에 원수가 된 악양을 시기하는 대신들이 위문후에게 악양을 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문후는 악양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때때로 사자를 보내 악양을 위로하고, 악양이 돌아오면 하사하기 위하여 도성 안에 좋은 집까지 마련해 두었다.
한 편, 악양은 약속한 3개월이 지나도 중산국이 항복을 하지 않자 병사들에게 총공격을 준비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병사들은 또다시 한달의 여유를 줄 것이 뻔한데 뭐하러 준비를 하느냐며 불만을 터뜨린다. 그러자 악양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중산국을 치러 온 것은 그 임금이 무도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중산국을 위나라에 영원히 편입시켜야 한다. 우리가 처음에 힘으로 중산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나, 그렇게 하면 백성들은 상처를 입고 우리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산국은 결코 위나라 땅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기다려 온 것은 백성들을 구하고 그들을 위나라의 백성으로 삼기 위함인 것이다."
사태가 급해진 중산국에서는 악서를 인질로 삼으려 하나 악양은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너는 참으로 불초한 자식이다. 벼슬을 살면서도 그 나라를 위해 계책을 세우지 못했고, 적과 싸워 이기지도 못했으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또 나라가 망하게 되었으면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화평을 청하도록 권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해야 하거늘, 그런 것도 못하고 부끄럽지 않느냐! 너 같은 놈을 살려두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죽여야겠다!"
악양은 이렇게 말하며 스스로 활을 들어 악서를 쏘려 했다. 그러자 악서는 황급히 숨어 들어갔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희굴은 악서를 죽여 그 시체로 국을 끓여 악양에게 보낸다. 악양이 충격을 받은 틈을 타서 공격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악양은 오히려 악서의 머리를 보고 꾸짖으며 국을 다 먹었다. 그러고는 중산국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 임금이 국을 보내주어 잘 먹었다. 중산성을 함락하는 즉시 내 너희 임금에게 직접 감사하리라. 너는 임금에게 돌아가 우리 군중에도 국을 끓이는 가마솥이 있음을 알려라!"
이후 악양은 중산국을 완전히 점령하고, 중산국 임금은 자살한다.
永樂大典(영락대전) | 三十六計(삼십육계) | 三國志(Sānguózhì) |
瞒天过海(mán tiān guò hǎi)
三十六計(삼십육계) 勝戰計(승전계) 제1계. 하늘을 속여 바다를 건너다.
☞ Deceive the heavens to cross the ocean
“만천과해”계책은 원래 “진룡천자(眞龍天子)”라 일컬었던 당 태종을 속여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대해를 건너게 한 고사에서 나왔다. 명나라 때 쓰여진 백과사전인 <영락대전(永樂大典)>이 그 출전이다.
당나라 태종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동쪽의 고구려를 침공하려고 할 때의 일이었다. 바닷가에 이르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 했는데, 워낙 내륙에서 자란 당태종인지라 처음 보는 바다의 모습에 위축되어 배로서 바다를 건너는 것은 무리라 하여 군사를 돌리려 했었다. 그런데 마침 군사를 돌리려는 당태종 앞에 일대의 토호를 자처한 노인이 나타나 30만 군대를 위한 양식을 마련했다며 당태종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었다. 당태종으로서도 아무래도 지방의 권력과도 친해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그 초대에 응해 먹고 마시며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당태종이 일어나 보니 어느새 망망대해에 와 있는 것이었다. 바로 전날 노인의 집이라 초대된 연회장이 배 위였던 것이고, 노인은 막 당태종의 휘하로 들어와 있던 설인귀가 분장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당태종이 바다에 겁을 먹어 군대를 되돌릴 것 같자 노인으로 분장하여 당태종이 자신도 모른 새 배에 오르도록 하고는 당태종이 잠든 사이 배를 출발시켜버린 것이다. 말 그대로 천자, 즉 황제를 속여 바다를 건너는 것. 그래서 만천과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춘추시대 진문공의 일화가 있다. 진문공은 공자시절 중이라 불리웠었는데, 아버지인 진헌공의 정실로서 해제를 낳아 그를 왕으로 올리고자 하는 여희의 음모로 이오와 더불어 65살 다시 진나라로 돌아와 즉위하기까지 열국을 떠돌며 망명생활을 해야 했었다. 그 가운데 특히 제나라에서의 7년이 유독 사무쳤었는데, 아마도 그 시절이 오랜 망명기간 가운데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던 때문이었다.
당시 제나라의 군주는 춘추오패의 첫머리로 꼽는 제환공이었다. - 중이의 동생인 이오를 진의 목공과 함께 진의 왕으로 올린 것도 바로 이 환공이었다. - 제환공은 중이의 인품을 높이 사서 그에게 자신의 딸 제강과 수레 20승, 말 18필을 주어 후대했는데, 이미 형인 신생이 죽고, 다시 여희와 해제가 죽자 이오가 진혜공이 되어서는 적나라에 망명해 있던 그를 죽이려 하는 등, 참으로 바람잘 날 없던 삶이라, 더구나 당시 중이의 나이는 50을 넘어 있었다. 지금이야 50이면 한창 나이이지만 당시로서는 이미 죽을 날을 잡아 놓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중이로서도 이래도 편안히 남은 생을 보내자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 중이는 혼자몸이 아니었다. 그를 쫓아 그에게 일신을 의탁한 아홉 명의 신하가 있었다. 그들로서는 중이가 한시라도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 일을 도모하여 뜻을 이루어야 할 터인데 저렇게 당장의 편안함에 길들여져 큰 뜻을 잊은 채 허송세월만 하고 있으니 이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더구나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중이의 동생인 이오 - 즉 진혜공의 학정과 무능으로 말미암아 크게 어지러운 상황이었던데다, 제환공이 죽고 제나라의 내정 또한 혼란하여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으니 더욱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이는 그런 신하들의 마음을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을 찾아가도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쫓겨날 뿐, 결국 몇 번을 그렇게 중이를 만나지도 뫃가고 쫓겨나게 되자 신하들은 아예 사냥을 빌미로 중이를 밖으로 불러내서 그를 납치하려는 계획까지 세우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뜻하지 않게 제환공의 딸이기도 한 중이의 부인 제강이 끼어들었다.
시녀들을 통해 호언 등의 계획을 들은 제강은 은밀히 호언을 찾아가 진의 내정이 어렵고 혼란스러워 모든 대부와 백성들이 중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처럼 안락함에 빠져 움직이려 하지 않으니 그것은 장부의 도리가 아니라며 자신이 나서서 돕겠노라 말했다. 자신이 공자 중이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만들 터이니, 그때 몰래 중이를 업어 마차에 실어 목적한 곳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제환공의 딸다운 배포라 할 터인데, 이전부터도 제강은 몇 번이고 중이로 하여금 진나라의 공자로서 자신을 자각하여 진으로 돌아가 큰 뜻을 펼칠 것을 권하고 했었다. 그럴 경우 제강 자신이 버려질 수 있음을 알면서도 한 여자로서보다는 진나라 공자 중이의 처로서, 제환공의 딸이자 제나라의 공주로서 처신을 선택한 것이었다. 참으로 독심장부라고나 할까?
아무튼 호언 등과 그렇게 약속하고 돌아온 제강은 중이를 만나자 먼저 그 신하들이 중이를 모시고 다른 나라로 가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음을 알고 있다며 중이더러 자신을 버릴 것이냐고 다그쳤다. 당연히 금시초문인 중이는 펄쩍 뛰었다. 그는 그때까지도 사랑스런 제강과 제나라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겨우 마음이 놓이는 표정을 지어 보인 제강은 마치 다짐이라도 하려는 듯 중이에게 함께 술을 마시며 밤을 지새자고 제안했다. 그야말로 중이가 떠날 것을 걱정하다가 겨우 마음을 놓이게 된 처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중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호언 등이 몰고 있는 마차 안이었다. 제나라의 국경도 예전에 넘어 있었고 다시 돌아가려 해도 이미 제나라를 떠나온 신하들은 다시 제나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고, 아마 돌아간다고 해도 예전과 같은 생활은 누리지 못할 것이었다. 잠시 술에 취해 잠든 사이 일은 이렇게 완전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제강의 손으로 하늘을 가려 바다를 건너는 계책에 당한 것이니, 중이도 마침내 제나라에서의 생활에 대한 미련을 모두 접고 신하들이 이끄는 대로 자신의 운명이 가리키는 대로 따르게 되었다.
그렇게 중이는 제나라를 떠나 조나라로 갔다가 다시 송나라로, 송나라에서 또 초나라로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 마침내 진혜공에 이은 진회공의 신의없음과 포악함에 질려버린 진목공의 후원을 받아 그로부터 군사를 빌려 진나라로 돌아가 동생의 아들이기도 한 회공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바로 춘추오패에서 빠지지 않는 세 자리 가운데 하나인 진문공이다. 주왕실의 반란을 진압하고 천토의 회맹으로써 춘추시대의 두번째 패자가 되니, 불과 십 여 년의 짧은 치세지만 이때 진나라는 명실상부한 중원의 패자로서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가히 대단한 능력이라 하겠는데, 거기에는 여자로서의 자신을 희생한 제강의 현숙하면서도 치밀한 노력이 있었다. 진문공 또한 패자였으니 태종과 같이 이것도 만천과해라 하겠다.
그로부터 파생된 뜻은, 위장수단을 사용하여 공개적으로 가짜의 상을 만들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경계심을 풀게 하고, 없는 듯 하면서 있고, 가짜인 듯 하면서 진짜인 듯 만들어 문제되는 것들을 피하고 난관을 극복함으로써 상대방이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승리해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뜻한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 평상시 습관처럼 보이면 의심을 품지 않는 법이다. 은밀한 계략과 공개적인 형식은 서로 상반되지 않고, 반대로 음모는 밖으로 드러난 공개적인 행위 속에 감추어져 있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역]에서 태음이 바로 태양인 이치와 같다.
36계의 제1계인 만천과해는 승전계(勝戰計)에 속한다. 아군의 형세가 충분히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을 때 말을 타고 적을 압도하는 작전인 것이다.
흔히 '兵法'이라 하면, 소수의 아군으로 다수의 적군을 이기는 '신비한' 술책 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병법의 기본은 어디까지나 '다수의 아군으로 소수의 적군을 압박하여' 이기는 것이다. 손자병법에서도, 謨攻(모공)편에 이르길, "...그러므로 전쟁의 원칙은 병력이 적군의 10배일 때에는 적을 포위하고, 5배일 때에는 적을 공격하며, 2배일 때에는 계략을 써서 적을 분산시키며, 병력이 적과 비슷할 때에는 전력을 다하여 싸워야 하며, 병력이 적군보다 적을 때에는 적과 부딪치지 말고 싸움터에서 벗어나야 하며,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전투를 피하여야 한다..." 라고 하고 있다.
삼십육계의 구조도 위에 얘기한 손자병법 모공편의 문구에 따라 이루어져 있다. 적보다 우세할 때의 '승전계', 적과 세력이 비슷할 때의 '적전계', 적을 공격하기 위한 '공전계', 공방이 혼란할 때의 '혼전계', 다른 아군과 합세하여 싸울 때의 '병전계', 그리고 아군이 불리할 때의 '패전계' 와 같다.
삼십육계 원문에는 '만천과해'에 대한 짤막한 해설이 붙어 있다.
"아군의 수비가 안전하다고 생각되면 자칫 경계심이 흩어지기 쉽다. 또한 사람은 흔히 보아온 것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지 않게 된다. 그러한 약점에 계략을 찔러넣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헛점을 찌르는 계략은 대수롭지 않게 눈에 뜨이는 곳에 깃들게 하는 것이다. 꼭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備周則意怠,常見則不疑.陰在陽之內,不在陽之對.太陽,太陰.]"
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적을 방심하게 하고, 그것에 적이 익숙해졌을 때, 그 틈을 찌르는 계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만천과해와 관련하여 많이 드는 예는 삼국지의 태사자 예이다.
북해 태수 공융(孔融)이 황건적에게 포위되었을 때였다. 공융에게 평소 은혜를 입은 태사자의 모친은 공융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태사자에게 도우러 가라고 한다. 이에 태사자는 밤을 틈타 황건적의 포위망을 지나 공융에게로 간다. 공융은 유비에게 원군을 부탁하고자 하고, 이 임무를 태사자에게 부탁한다. 태사자(太史慈)는 포위망을 돌파하여 원병을 청하러 가야하나, 적의 포위망이 워낙 튼튼하여 쉽게 돌파하지 못한다.
그는 활과 과녁을 두 기사에게 들리고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성안에 있는 군사나 성밖에 있는 적병들이 이를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 그러나 태사자는 태연히 말을 끌고 성 가까이에 있는 언덕에 과녁을 세우고 활쏘기 연습을 시작했다. 이윽고 연습이 끝나자 그는 다시 성안으로 돌아왔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이렇게 활쏘기 연습을 거듭했다. 그러자 성밖에 있는 적병들 중에는 그것을 구경하는 자도 있고, 드러누워 낮잠을 자는 자도 있었다. 그는 변함없이 이렇게 활쏘기를 계속하여, 사흘째가 되자 황건적들은 이제 그에게 아무런 관심조차도 갖지 않게 되었다.
그때를 틈타 태사자는 갑자기 말 위에 올라 채찍을 휘두르며 비호처럼 적의 포위망을 뚫었다. 적들이 속았구나 하고 손을 쓰려 했을 때 그는 이미 멀리 가버린 후였다. 태사자는 말을 채찍질하여 황건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 유비에게 구원을 청하게 된다. [三國志(正史) 吳志 태사자전]
분명히 뜻풀이만으로 보자면 태사자의 예는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勝戰計' 즉, 아군이 '우세할 때' 쓰는 계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적을 방심하게 하고 그 틈을 찌른다'는 점에서는 타당하지만, 그보다 이전의 '승전계'라는 전제를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또다른 예로는 삼국시대 오나라 손책의 예를 들 수 있다.
삼국 시대 오나라의 손책(孫策)이 수일을 연하여 회계성을 쳤으나 성은 좀처럼 깨어지지 않았다. 성벽은 높고 해자는 또한 넓고 깊었다. 손책이 무리를 모아 놓고 성 칠 일을 의논하니, 군중에 함께 따라와 있던 그의 숙부 손정(孫靜)이 계책을 말했다.
"성이 원체 견고하고 왕랑이 또한 죽기로써 지키는 터이라, 이대로 쳐서는 깨뜨리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이제 회계땅의 전량(錢糧)이 태반이나 사독에 있고, 그곳이 여기서 불과 수십 리니, 먼저 그곳을 점거하는 것이 어떨까? 이것이 이른바 '공기무비(攻其無備)요 출기불의(出其不意)'라, 그 방비 없음을 치고, 예상치 못한 때에 나아간다는 것이 아니겠느냐."
손책은 크게 기뻐하였다.
"숙부님의 묘계로 족히 적을 깨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즉시 각문에 영을 내려 불을 밝히며 기호(旗號)를 많이 세워 의병(擬兵)을 삼게 하고, 밤을 이용하여 에움을 푼 다음 사독으로 가기로 했다.
그때 한 장수가 말했다.
"주공께서 대군을 거두시어 떠나는 것을 알게 되면, 적이 필연코 성을 나와 뒤를 쫓을 것이니 기병(奇兵)을 쓰시는 것이 마땅할까 합니다."
"내 이미 준비를 하여 놓았네. 회계성은 오늘밤 안으로 우리 장중에 들어오게 될 걸세."
손책의 군마가 물러갔다는 첩보를 받은 회계성의 장수 왕랑은 무리들과 함께 성루로 올라갔다. 성밖을 두루 살펴보니, 성 아래에 연기와 불이 함께 일어나며 무수한 정기(旌旗)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왕랑이 마음에 의심하기를 마지않을 때, 부장 주흔이 말했다.
"손책이 겁을 집어먹고 군사를 거두어 달아나는가 봅니다. 그래서 정기를 휘날려 우리를 의심케 하는 것이니, 지금 곧 군사를 내시어 뒤를 치도록 하십시오."
이때 한 장수가 말했다.
"손책이 이번에 간 것이 혹시 사독을 치기 위함이나 아닐까요. 일군을 따로 뽑아 뒤를 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랑은 드디어 뜻을 정하였다.
"사독은 곧 우리의 둔량처(屯糧處)이니 아무래도 방비를 엄히 해야만 하겠소."
왕랑의 군사는 남으로 사독을 향해 급히 뒤를 쫓아 20여 리를 갔다. 때는 초경이 가까운데, 갑자기 밀림속에서 북소리가 크게 울리며 횃불이 일시에 일어났다. 왕랑의 군사들이 깜짝 놀라 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려 할 때, 한 장수가 창을 빗겨 잡고 말을 내달아 나오니 그는 바로 손책이었다. 이 싸움에서 왕랑은 크게 패하여 마침내 성을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는데, 이는 바로 상대를 속여 그 약점을 누르고 때를 보아 기습하여 전승을 거둔 예이다.
또다른 예로는 전국시대 초기, 魏文侯(위문후)가 중산국을 정벌하기 위해 元帥(원수)로 삼은 '악양'의 사례가 있다.
위나라는 晉(진)나라가 나뉜 삼국(위, 조, 한) 중의 하나이다. 이때 晉의 동쪽에 中山國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는 진나라에 계속 조공을 바치고 있었는데 진이 삼국으로 나뉜 후로는 어느 나라를 섬겨야 할지 몰라서 아무 곳에도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중산국의 위치는 서쪽의 조나라와 가깝고 남쪽의 위나라와는 꽤 먼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나라가 중산국을 차지하면 위나라는 북쪽으로부터 상당한 압력을 받을 것이 뻔했다.
중산국을 치기로 마음먹은 위문후는 누구를 원수로 삼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 때, 책황이 악양을 천거한다. 하지만 다른 신하들은 악양의 아들인 악서가 중산국에서 벼슬을 삼고 있다는 이유로 악양을 원수로 삼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위문후가 악양을 불러 물어보니, 악양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어찌 公事를 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한다. 이에 위문후는 악양을 원수로 삼아 중산국을 치게 한다.
악양의 병법은 탁월하여 중산국의 병사들을 계속 이겨나가, 마침내 중산국의 수도인 중산성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중산국의 임금인 희굴은 악양의 아들인 악서를 내세워서 '항복하기 위해서는 임금과 신하가 상의할 시간이 필요하니 한달간의 말미를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악양이 승낙하자 희굴은 악양이 아들인 악서의 처지를 걱정하여 공격을 미루는 것으로 생각했다. 한달이 지나도 뾰족한 계책이 서지 않자 희굴은 또 악서를 보내 다시 한달의 여유를 얻어낸다. 이렇게 악양은 악서에게 세 달의 여유를 주었다.
그러자 중산국은 물론 위나라의 병사들까지도 '악양은 아들을 걱정하여 중산국을 치지 않을 것이다'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또한 조정에서는 일조에 원수가 된 악양을 시기하는 대신들이 위문후에게 악양을 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문후는 악양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때때로 사자를 보내 악양을 위로하고, 악양이 돌아오면 하사하기 위하여 도성 안에 좋은 집까지 마련해 두었다.
한 편, 악양은 약속한 3개월이 지나도 중산국이 항복을 하지 않자 병사들에게 총공격을 준비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병사들은 또다시 한달의 여유를 줄 것이 뻔한데 뭐하러 준비를 하느냐며 불만을 터뜨린다. 그러자 악양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중산국을 치러 온 것은 그 임금이 무도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중산국을 위나라에 영원히 편입시켜야 한다. 우리가 처음에 힘으로 중산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나, 그렇게 하면 백성들은 상처를 입고 우리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산국은 결코 위나라 땅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기다려 온 것은 백성들을 구하고 그들을 위나라의 백성으로 삼기 위함인 것이다."
사태가 급해진 중산국에서는 악서를 인질로 삼으려 하나 악양은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너는 참으로 불초한 자식이다. 벼슬을 살면서도 그 나라를 위해 계책을 세우지 못했고, 적과 싸워 이기지도 못했으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또 나라가 망하게 되었으면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화평을 청하도록 권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해야 하거늘, 그런 것도 못하고 부끄럽지 않느냐! 너 같은 놈을 살려두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죽여야겠다!"
악양은 이렇게 말하며 스스로 활을 들어 악서를 쏘려 했다. 그러자 악서는 황급히 숨어 들어갔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희굴은 악서를 죽여 그 시체로 국을 끓여 악양에게 보낸다. 악양이 충격을 받은 틈을 타서 공격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악양은 오히려 악서의 머리를 보고 꾸짖으며 국을 다 먹었다. 그러고는 중산국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 임금이 국을 보내주어 잘 먹었다. 중산성을 함락하는 즉시 내 너희 임금에게 직접 감사하리라. 너는 임금에게 돌아가 우리 군중에도 국을 끓이는 가마솥이 있음을 알려라!"
이후 악양은 중산국을 완전히 점령하고, 중산국 임금은 자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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瞞天過海 (Deceive the heavens to cross the ocean)
Deceive the heavens to cross the ocean (瞞天過海)
Prepare too much and you lose sight of the big picture; what you see often you do not doubt. Yin (the art of deception) is in Yang (acting in open). Too much Yang (transparency) hides Yin (true ruses).
This stratagem references an episode in 643 AD, when Tang emperor Tang Gaozong Li Simin, balked from crossing the sea to a campaign against Koguryo. His General Xue Rengui thought of a stratagem to get the Emperor across and allay his fear of seasickness: on a clear day, the Emperor was invited to meet a wise man. They entered through a dark tunnel into a hall where they feasted. After feasting several days, the Emperor heard the sound of waves and realized that he had been lured onto a ship! General Xue drew aside the curtains to reveal the ocean and confessed that they had already crossed the sea: Upon discovering this, the emperor decided to carry on and later completed the successful campaign.
This stratagem means that you can mask your real goals, by using the ruse of a fake goal that everyone takes for granted, until the real goal is achieved. Tactically, this is known as an 'open feint'; in front of everyone, you point west, when your goal is actually in the east. By the time everyone realized it, you have already achieved your goal. Harro von Senger notes in the German-Language "Die List" that to grasp the full meaning, it would be something like "to deceive the holy virgin Mary" in the West.
Usage
This stratagem makes use of the human failing to become unaware of common everyday activities, or events that appear normal. The best secrets are carried out in broad daylight. The best hoax is to repeat it so often that people are convinced that the next move is also a hoax. When this happens, it is the best moment to carry out one's previously hidden true objective.
In the Second World War, Hitler spread misinformation about a planned date for the Invasion of France, but later delayed the date. This was repeated many times, and eventually France and England grew used to the false information, and regarded all Germany planned invasions as hoaxes. Eventually, Germany invaded France with lightning speed, conquering France.
In the Second World War, the Allies' Operation Quicksilver created a phantom army in Kent complete with faked radio chatter which divided German attentions regarding the actual Allied armies and their intended objective of the Normandy landings.
Prepare too much and you lose sight of the big picture; what you see often you do not doubt. Yin (the art of deception) is in Yang (acting in open). Too much Yang (transparency) hides Yin (true ruses).
This stratagem references an episode in 643 AD, when Tang emperor Tang Gaozong Li Simin, balked from crossing the sea to a campaign against Koguryo. His General Xue Rengui thought of a stratagem to get the Emperor across and allay his fear of seasickness: on a clear day, the Emperor was invited to meet a wise man. They entered through a dark tunnel into a hall where they feasted. After feasting several days, the Emperor heard the sound of waves and realized that he had been lured onto a ship! General Xue drew aside the curtains to reveal the ocean and confessed that they had already crossed the sea: Upon discovering this, the emperor decided to carry on and later completed the successful campaign.
This stratagem means that you can mask your real goals, by using the ruse of a fake goal that everyone takes for granted, until the real goal is achieved. Tactically, this is known as an 'open feint'; in front of everyone, you point west, when your goal is actually in the east. By the time everyone realized it, you have already achieved your goal. Harro von Senger notes in the German-Language "Die List" that to grasp the full meaning, it would be something like "to deceive the holy virgin Mary" in the West.
Usage
This stratagem makes use of the human failing to become unaware of common everyday activities, or events that appear normal. The best secrets are carried out in broad daylight. The best hoax is to repeat it so often that people are convinced that the next move is also a hoax. When this happens, it is the best moment to carry out one's previously hidden true objective.
In the Second World War, Hitler spread misinformation about a planned date for the Invasion of France, but later delayed the date. This was repeated many times, and eventually France and England grew used to the false information, and regarded all Germany planned invasions as hoaxes. Eventually, Germany invaded France with lightning speed, conquering France.
In the Second World War, the Allies' Operation Quicksilver created a phantom army in Kent complete with faked radio chatter which divided German attentions regarding the actual Allied armies and their intended objective of the Normandy landings.
萬紫千紅 (만자천홍)
萬紫千紅(만자천홍)
万紫千红(wànzǐqiānhóng)
萬 일만 만 | 紫 자줏빛 자 | 千 일천 천, 밭두둑 천, 그네 천 | 紅 붉을 홍, 상복 공 |
울긋불긋한 여러 가지의 빛깔이라는 뜻으로, ①가지각색(--各色)의 꽃이 만발(滿發)한 것을 이름. ②사물이 풍부하고 다채로운 모양.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모양. 사업이 번창하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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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萬紫千紅(만자천홍) | 万紫千红(wànzǐqiānhóng) | 姹紫嫣红(차자언홍, chàzǐyānhóng) | 千紫萬紅(천자만홍) |
万紫千红(wànzǐqiānhóng)
萬 일만 만 | 紫 자줏빛 자 | 千 일천 천, 밭두둑 천, 그네 천 | 紅 붉을 홍, 상복 공 |
울긋불긋한 여러 가지의 빛깔이라는 뜻으로, ①가지각색(--各色)의 꽃이 만발(滿發)한 것을 이름. ②사물이 풍부하고 다채로운 모양.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모양. 사업이 번창하는 모양
blaze of color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萬紫千紅(만자천홍) | 万紫千红(wànzǐqiānhóng) | 姹紫嫣红(차자언홍, chàzǐyānhóng) | 千紫萬紅(천자만홍) |
妄自尊大 (망자존대)
妄自尊大(망자존대)
妄 허망할 망 | 自 스스로 자 | 尊 높을 존 | 大 큰 대 |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의 이야기. 동한(東漢) 초, 유수(劉秀)는 동한을 건국하고 광무제(光武帝)가 되었지만, 전국은 여전히 군웅들이 날뛰는 상태였다. 당시 최대의 세력 중의 하나인 공손술(公孫述)은 사천지방에서 황제가 되었다. 한편 감숙 일대를 점거하고 있던 외효( )는 정치적인 출로(出路)를 찾기 위해, 마원을 공손술에게 보냈다. 마원은 공손술과 동향이었므로, 그가 자신을 환영해 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마원은 공손술의 의례적인 접견에 매우 실망하여 자기 나라로 돌아 왔다. 그는 외효에게 말하였다.
공손술은 진지한 마음으로 인재들을 받아들여 함께 일을 하려고 하기는 커녕 스스로 잘난체 교만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식견이 얕은 사람으로서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을 뿐이며, 스스로 잘난 체 하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있었습니다[井底蛙耳, 妄自尊大]. 우리의 뜻을 동쪽의 유수에게 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妄自尊大란 교만을 부리며 잘난 체함을 뜻한다.
妄 허망할 망 | 自 스스로 자 | 尊 높을 존 | 大 큰 대 |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의 이야기. 동한(東漢) 초, 유수(劉秀)는 동한을 건국하고 광무제(光武帝)가 되었지만, 전국은 여전히 군웅들이 날뛰는 상태였다. 당시 최대의 세력 중의 하나인 공손술(公孫述)은 사천지방에서 황제가 되었다. 한편 감숙 일대를 점거하고 있던 외효( )는 정치적인 출로(出路)를 찾기 위해, 마원을 공손술에게 보냈다. 마원은 공손술과 동향이었므로, 그가 자신을 환영해 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마원은 공손술의 의례적인 접견에 매우 실망하여 자기 나라로 돌아 왔다. 그는 외효에게 말하였다.
공손술은 진지한 마음으로 인재들을 받아들여 함께 일을 하려고 하기는 커녕 스스로 잘난체 교만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식견이 얕은 사람으로서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을 뿐이며, 스스로 잘난 체 하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있었습니다[井底蛙耳, 妄自尊大]. 우리의 뜻을 동쪽의 유수에게 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妄自尊大란 교만을 부리며 잘난 체함을 뜻한다.
芒刺在背 (망자재배)
芒刺在背(망자재배)
芒刺在背[mángcìzàibèi]
芒 까끄라기 망, 황홀할 황 | 刺 찌를 자, 찌를 척, 수라 라(나), 비방할 체 | 在 있을 재 | 背 등 배, 배반할 배 |
가시를 등에 지고 있다는 뜻으로,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편하지 않다.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다. 안절부절못하다. 좌불안석(坐不安席).
한서(漢書) 곽광(藿光)전의 이야기다.
전한(前漢)의 무제(武帝) 때 곽광(藿光)이란 인물이 있었다. 무제는 사리가 분명하고 과단성이 있는 그를 대단히 신임하여 자기 사후의 조정 일을 미리 위임했다.
기원전 87년, 한무제가 세상을 떠나자, 여덟살 된 아들이 소제(昭帝)로서 제위를 계승하였다. 각광은 대사마 대장군이란 막강한 직위를 차지하고는 어린 나이로 등극한 소제(昭帝)의 후견인이 되어 국정을 좌지우지했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황제의 폐립 문제까지 독단할 정도로 권력을 휘둘렀다.
한소제가 21세로 죽자, 곽광은 한무제의 손자인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제위에 앉혔다. 그런데 그는 음란하고 놀기만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국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 일생일대의 실수로다!’
곽광은 후회막급하여 즉시 폐위 절차에 들어갔다. 우선 대사농(大司農) 전연년(田延年)을 은밀히 불러 의논했다.
“생각건대 아무래도 옥좌의 주인을 갈아야 할 것 같소.”
“이 사람 역시 같은 생각이지만, 황실의 어른이신 태후마마께서 과연 허락하실지 모르겠구려.”
“나라의 장래를 위하는 일인데 설마 마다하시겠소? 무황제께서 이 사람한테 내리신 유조(遺詔)도 있고 하니 설득해 봅시다.”
태후 앞에 나아간 곽광은 유하의 잘못을 역설하여 태후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런 다음 즉각 퇴위 절차를 밟아 유하를 내쫓고 무제의 증손자 유순(劉詢)을 데려다 보위에 앉히기로 했다. 유순은 무제의 태자 유거(劉據)의 손자인데, 냉혹하기로 이름난 무제는 말년에 무고 사건에 걸린 유거를 친아들인데도 용서하지 않고 일가족까지 다 죽여 버렸다. 다만, 이때 유순은 갓난아이였기 때문에 요행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유순으로 대통을 잇게 한다는 방침은 섰으나, 그의 현재 신분이 걸림돌이 되어 일단 양무후(陽武侯)로 봉했다가 나중에야 황제로 옹립했다. 그가 곧 선제(宣帝)다. 보위에 오른 선제는 고조의 묘에 참배하기 위해 대궐을 나섰는데, 이때 곽광이 대장군으로서 호위역을 맡았다.
한선제는 기골이 장대하고 날카로운 눈에 엄한 표정을 한 곽광을 보며, 수레 안에서 마치 등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若有芒刺在背] 참기 어려운 모습으로 떨고 있었다. 기원전 68년, 곽광이 병들어 죽자, 비로소 한선제는 친정(親政)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느낌을 갖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芒刺在背(A thorn in the flesh) 란 몹시 불안한 상태를 비유한 말이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坐不安席(좌불안석) | 如坐针毡[rúzuòzhēnzhān] |
芒刺在背[mángcìzàibèi]
芒 까끄라기 망, 황홀할 황 | 刺 찌를 자, 찌를 척, 수라 라(나), 비방할 체 | 在 있을 재 | 背 등 배, 배반할 배 |
가시를 등에 지고 있다는 뜻으로,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편하지 않다.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다. 안절부절못하다. 좌불안석(坐不安席).
한서(漢書) 곽광(藿光)전의 이야기다.
전한(前漢)의 무제(武帝) 때 곽광(藿光)이란 인물이 있었다. 무제는 사리가 분명하고 과단성이 있는 그를 대단히 신임하여 자기 사후의 조정 일을 미리 위임했다.
기원전 87년, 한무제가 세상을 떠나자, 여덟살 된 아들이 소제(昭帝)로서 제위를 계승하였다. 각광은 대사마 대장군이란 막강한 직위를 차지하고는 어린 나이로 등극한 소제(昭帝)의 후견인이 되어 국정을 좌지우지했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황제의 폐립 문제까지 독단할 정도로 권력을 휘둘렀다.
한소제가 21세로 죽자, 곽광은 한무제의 손자인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제위에 앉혔다. 그런데 그는 음란하고 놀기만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국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 일생일대의 실수로다!’
곽광은 후회막급하여 즉시 폐위 절차에 들어갔다. 우선 대사농(大司農) 전연년(田延年)을 은밀히 불러 의논했다.
“생각건대 아무래도 옥좌의 주인을 갈아야 할 것 같소.”
“이 사람 역시 같은 생각이지만, 황실의 어른이신 태후마마께서 과연 허락하실지 모르겠구려.”
“나라의 장래를 위하는 일인데 설마 마다하시겠소? 무황제께서 이 사람한테 내리신 유조(遺詔)도 있고 하니 설득해 봅시다.”
태후 앞에 나아간 곽광은 유하의 잘못을 역설하여 태후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런 다음 즉각 퇴위 절차를 밟아 유하를 내쫓고 무제의 증손자 유순(劉詢)을 데려다 보위에 앉히기로 했다. 유순은 무제의 태자 유거(劉據)의 손자인데, 냉혹하기로 이름난 무제는 말년에 무고 사건에 걸린 유거를 친아들인데도 용서하지 않고 일가족까지 다 죽여 버렸다. 다만, 이때 유순은 갓난아이였기 때문에 요행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유순으로 대통을 잇게 한다는 방침은 섰으나, 그의 현재 신분이 걸림돌이 되어 일단 양무후(陽武侯)로 봉했다가 나중에야 황제로 옹립했다. 그가 곧 선제(宣帝)다. 보위에 오른 선제는 고조의 묘에 참배하기 위해 대궐을 나섰는데, 이때 곽광이 대장군으로서 호위역을 맡았다.
한선제는 기골이 장대하고 날카로운 눈에 엄한 표정을 한 곽광을 보며, 수레 안에서 마치 등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若有芒刺在背] 참기 어려운 모습으로 떨고 있었다. 기원전 68년, 곽광이 병들어 죽자, 비로소 한선제는 친정(親政)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느낌을 갖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芒刺在背(A thorn in the flesh) 란 몹시 불안한 상태를 비유한 말이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坐不安席(좌불안석) | 如坐针毡[rúzuòzhēnzhān] |
望雲之情 (망운지정)
望雲之情(망운지정)
자녀가 부모를 그리는 정. 당(唐)나라 적인걸(狄仁傑)이 타향에서 산에 올라가 고향쪽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고 부모를 생각했다는 고사에서 유래.
자녀가 부모를 그리는 정. 당(唐)나라 적인걸(狄仁傑)이 타향에서 산에 올라가 고향쪽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고 부모를 생각했다는 고사에서 유래.
馬耳東風 (마이동풍)
馬耳東風 (마이동풍)
말의 귀를 동풍이 스친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흘려 버리는 태도를 비유하는 말. 한국 속담 ‘소 귀에 경 읽기”와 상통하는 말.
馬耳東風이란 말은 唐(당)나라의 대시인 李白(이백)의 「추운 밤에 홀로 잔을 드는 왕십이의 심경에 답하노라(答王十二寒夜獨酌有懷․답왕십이한야독작유회)」라는 장편시 가운데 나오는 말이다. 이 시는 왕십이란 사람이 이백에게「차가운 밤에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느낀 바 있어서(寒夜獨酌有懷․한야독작유회)」란 시를 보내온 데 대해 회답한 시라고 한다.
왕십이란 사람은 자신의 불우한 신세와 쓸쓸한 심경을 시로써 이백에게 호소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백은 썰렁한 밤에 외로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왕십이의 모습을 그리면서 答詩(답시)를 지은 것이다.
이백은 이 시에서 「인생은 허무한 것, 오래 산다 해도 백년을 살지 못한다. 이 허무함을 술로써 씻어버리지 않겠는가」고 권하고 「당신과 같은 고결하고 훌륭한 인물은 지금 세상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고 위로하고 있다.
「지금은 鬪鷄(투계․닭싸움인데 당나라때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서 성행한 놀이)의 기술이 뛰어난 자가 天子(천자)의 귀염을 받아 큰 길을 으스대고 다니고, 오랑캐의 침입을 막는데 하찮은 공을 세운 자들이 대단한 충신인 양 날뛰는 세상이다. 당신이나 내가 어찌 그들의 흉내를 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차라리 햇볕이 들지 않는 북쪽 창에 기대어 시나 읊으세. 그러나 우리의 작품이 아무리 걸작이라 해도 지금 세상에서는 찬 물 한그릇값에도 못미치네」.
시는 이렇게 이어지다가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이런 말을 듣고도 고개를 내저으니 동풍이 말의 귓가를 스치는 것과 다를 바 없네(有如東風射馬耳․유여동풍사마이)」라고 한탄하기도 한다.
말의 귀를 동풍이 스친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흘려 버리는 태도를 비유하는 말. 한국 속담 ‘소 귀에 경 읽기”와 상통하는 말.
馬耳東風이란 말은 唐(당)나라의 대시인 李白(이백)의 「추운 밤에 홀로 잔을 드는 왕십이의 심경에 답하노라(答王十二寒夜獨酌有懷․답왕십이한야독작유회)」라는 장편시 가운데 나오는 말이다. 이 시는 왕십이란 사람이 이백에게「차가운 밤에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느낀 바 있어서(寒夜獨酌有懷․한야독작유회)」란 시를 보내온 데 대해 회답한 시라고 한다.
왕십이란 사람은 자신의 불우한 신세와 쓸쓸한 심경을 시로써 이백에게 호소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백은 썰렁한 밤에 외로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왕십이의 모습을 그리면서 答詩(답시)를 지은 것이다.
이백은 이 시에서 「인생은 허무한 것, 오래 산다 해도 백년을 살지 못한다. 이 허무함을 술로써 씻어버리지 않겠는가」고 권하고 「당신과 같은 고결하고 훌륭한 인물은 지금 세상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고 위로하고 있다.
「지금은 鬪鷄(투계․닭싸움인데 당나라때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서 성행한 놀이)의 기술이 뛰어난 자가 天子(천자)의 귀염을 받아 큰 길을 으스대고 다니고, 오랑캐의 침입을 막는데 하찮은 공을 세운 자들이 대단한 충신인 양 날뛰는 세상이다. 당신이나 내가 어찌 그들의 흉내를 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차라리 햇볕이 들지 않는 북쪽 창에 기대어 시나 읊으세. 그러나 우리의 작품이 아무리 걸작이라 해도 지금 세상에서는 찬 물 한그릇값에도 못미치네」.
시는 이렇게 이어지다가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이런 말을 듣고도 고개를 내저으니 동풍이 말의 귓가를 스치는 것과 다를 바 없네(有如東風射馬耳․유여동풍사마이)」라고 한탄하기도 한다.
望洋之歎 (망양지탄, wàngyángzhītàn)
望洋之歎(망양지탄)
望洋之叹(wàngyángzhītàn)
望 바랄 망,보름 망 | 洋 큰 바다 양 | 之 갈 지 | 歎 탄식할 탄 |
넓은 바다를 보고 탄식(歎息)한다는 뜻으로, ①남의 원대(遠大)함에 감탄(感歎)하고, 나의 미흡(未洽)함을 부끄러워함의 비유(比喩) ②제 힘이 미치지 못할 때 하는 탄식(歎息)
《장자(莊子)》 외편 추수(秋水)에 나오는 말이다.
옛날 황허(黃河)중류의 맹진(孟津:하남성 내)에 하백(河伯)이라는 하신(河神)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금빛 찬란히 빛나는 강물을 보고 감탄하여 말했다. "이런 큰 강은 달리 또 없을 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늙은 자라였다. "그럼, 황하보다 더 큰 물이 있단 말인고?" "그렇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해 뜨는 쪽에 북해(北海)가 있는데, 이 세상의 모든 강이 사시 사철 그곳으로 흘러들기 때문에 그 넓이는 실로 황하의 몇 갑절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 큰 강이 있을까? 어쨌든 내 눈으로 보기 전엔 못 믿겠네." 황하 중류의 맹진을 떠나 본 적이 없는 하백은 늙은 자라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어느 가을 홍수로 인해 모든 개울물이 황허로 흘러들자, 강의 넓이는 몇 갑절이나 넓어져 하백으로도 믿기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하백은 문득 지난날 늙은 자라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는 이 기회에 강 하류로 내려가 북해를 한번 보기로 했다. 그래서 동쪽으로 따라 내려갔다.
한참을 흘러 내려간 후 마침내 북해(北海)에 이르자 그 곳의 해신(海神)인 약(若)이 반가이 맞아 주었다. "잘 왔소. 진심으로 환영하오."
북해의 해신이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자 파도는 가라앉고 눈앞에 거울 같은 바다가 펼쳐졌다. '세상에는 황하 말고도 이처럼 큰 강이 있었단 말인가‥….'
하백이 약의 안내로 주위를 돌아보니, 천하가 모두 물로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백은 그 너른 바다를 보고 감탄하며(望洋而歎) 이렇게 말하였다. "속담에 이르기를 백 가지 도를 듣고서는 자기만한 자가 없는 줄 안다고 했는데, 이는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아, 만일 내가 이 곳을 보지 못하였다면 위태로울 뻔했습니다. 오래도록 내가 도를 아는 척 행세하여 웃음거리가 되었을테니까 말입니다."
북해의 신 약은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물 안 개구리(井中之蛙)에게 바다에 대해 말해도 소용없음은 그가 사는 곳에 얽매어 있기 때문이고, 여름벌레에게 얼음에 대해 말해도 소용없음은 그가 시절에 묶여 있기 때문이오. 지금 그대는 벼랑 가에서 나와 큰 바다를 보고, 비로소 그대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으니, 이제야말로 큰 이치를 말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겠소?"
여기서 망양지탄은 가없는 진리의 길을 보고 스스로 자기가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오늘날에는 뜻을 넓게 해석하여 자기의 힘이 미치지 못함을 탄식한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유래: 장자(莊子)의 추수편(秋水篇)
관련 한자어
동의어
望洋之嘆(망양지탄) | 亡羊之歎(망양지탄) | 亡羊歎(망양탄) | 亡羊之嘆(망양지탄) | 望洋兴叹(망양흥탄,wàngyángxīngtàn) |
유의어
多岐亡羊(다기망양) 달아난 양을 찾다가 여러 갈래 길에 이르러 길을 잃었다는 뜻으로, ①학문(學問)의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어 진리(眞理)를 찾기 어려움 ②방침(方針)이 많아 할 바를 모르게 됨
참조어
井中之蛙(정중지와) | 用管窺天(용관규천) |
莊子(장자) | 秋水篇(추수편) | 河伯(하백) | 若(약) |
望洋之叹(wàngyángzhītàn)
望 바랄 망,보름 망 | 洋 큰 바다 양 | 之 갈 지 | 歎 탄식할 탄 |
넓은 바다를 보고 탄식(歎息)한다는 뜻으로, ①남의 원대(遠大)함에 감탄(感歎)하고, 나의 미흡(未洽)함을 부끄러워함의 비유(比喩) ②제 힘이 미치지 못할 때 하는 탄식(歎息)
《장자(莊子)》 외편 추수(秋水)에 나오는 말이다.
옛날 황허(黃河)중류의 맹진(孟津:하남성 내)에 하백(河伯)이라는 하신(河神)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금빛 찬란히 빛나는 강물을 보고 감탄하여 말했다. "이런 큰 강은 달리 또 없을 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늙은 자라였다. "그럼, 황하보다 더 큰 물이 있단 말인고?" "그렇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해 뜨는 쪽에 북해(北海)가 있는데, 이 세상의 모든 강이 사시 사철 그곳으로 흘러들기 때문에 그 넓이는 실로 황하의 몇 갑절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 큰 강이 있을까? 어쨌든 내 눈으로 보기 전엔 못 믿겠네." 황하 중류의 맹진을 떠나 본 적이 없는 하백은 늙은 자라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어느 가을 홍수로 인해 모든 개울물이 황허로 흘러들자, 강의 넓이는 몇 갑절이나 넓어져 하백으로도 믿기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하백은 문득 지난날 늙은 자라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는 이 기회에 강 하류로 내려가 북해를 한번 보기로 했다. 그래서 동쪽으로 따라 내려갔다.
한참을 흘러 내려간 후 마침내 북해(北海)에 이르자 그 곳의 해신(海神)인 약(若)이 반가이 맞아 주었다. "잘 왔소. 진심으로 환영하오."
북해의 해신이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자 파도는 가라앉고 눈앞에 거울 같은 바다가 펼쳐졌다. '세상에는 황하 말고도 이처럼 큰 강이 있었단 말인가‥….'
하백이 약의 안내로 주위를 돌아보니, 천하가 모두 물로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백은 그 너른 바다를 보고 감탄하며(望洋而歎) 이렇게 말하였다. "속담에 이르기를 백 가지 도를 듣고서는 자기만한 자가 없는 줄 안다고 했는데, 이는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아, 만일 내가 이 곳을 보지 못하였다면 위태로울 뻔했습니다. 오래도록 내가 도를 아는 척 행세하여 웃음거리가 되었을테니까 말입니다."
북해의 신 약은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물 안 개구리(井中之蛙)에게 바다에 대해 말해도 소용없음은 그가 사는 곳에 얽매어 있기 때문이고, 여름벌레에게 얼음에 대해 말해도 소용없음은 그가 시절에 묶여 있기 때문이오. 지금 그대는 벼랑 가에서 나와 큰 바다를 보고, 비로소 그대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으니, 이제야말로 큰 이치를 말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겠소?"
여기서 망양지탄은 가없는 진리의 길을 보고 스스로 자기가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오늘날에는 뜻을 넓게 해석하여 자기의 힘이 미치지 못함을 탄식한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유래: 장자(莊子)의 추수편(秋水篇)
관련 한자어
동의어
望洋之嘆(망양지탄) | 亡羊之歎(망양지탄) | 亡羊歎(망양탄) | 亡羊之嘆(망양지탄) | 望洋兴叹(망양흥탄,wàngyángxīngtàn) |
유의어
多岐亡羊(다기망양) 달아난 양을 찾다가 여러 갈래 길에 이르러 길을 잃었다는 뜻으로, ①학문(學問)의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어 진리(眞理)를 찾기 어려움 ②방침(方針)이 많아 할 바를 모르게 됨
참조어
井中之蛙(정중지와) | 用管窺天(용관규천) |
莊子(장자) | 秋水篇(추수편) | 河伯(하백) | 若(약) |
亡羊之歎 (망양지탄)
亡羊之歎(망양지탄)
☞ 望洋之歎 (망양지탄, wàngyángzhītàn)
넓은 바다를 바라보고 감탄하다. 남의 훌륭함에 감탄하고 자신의 미흡함을 부끄러워함의 비유. 아득히 먼 옛날 이야기다.
黃河(황하)의 神(신) 河伯(하백)은 늘 황하의 장대한 모습을 보면서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황하 중류의 孟津(맹진)이란 곳에살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멀리 떠나본 적이 없었다.
어느날 아침 태양이 불끈 솟아오르면서 강의 수면이 황금빛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하백은 새삼스레 감탄의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큰 물은 여기 말고 달리 있을 턱이 없지.” 그런데 등 뒤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그건 모르고 하는 말씀입니다.”
뒤돌아보니 늙은 자라였다. “그렇다면 황하보다도 더 큰 물이 있다는 말이냐.” “해가 뜨는 쪽에 北海(북해)라는 곳이 있는데 그 크기가 황하의 몇갑절이나 된답니다.” 하백은 어느날 황하의 물줄기를 따라 해뜨는 동쪽으로 내려가보다가 마침내 북해에 이르렀다.
과연 바라보니 망망한 바다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부끄러워진 하백은 바다를 바라보고 북해신 若(약)을 향해 감탄하면서 말했다(望洋向若而歎曰․망양향약이탄왈).“북해가 엄청 넓다는 말을 들었지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와서 실제로 보지 않았더라면 저의 얕은 소견을 깨닫지 못했을뻔 했습니다.”
그러자 북해신 약은 이렇게 말했다. “우물안 개구리가 바다를 모르는 건 그가 좁은 장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며 여름벌레가 얼음을 모르는 건 그가 여름밖에 알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것은 그들이 상식의 가르침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오. 이제 당신은 좁은 개울에서 나와 큰 바다를 보았으니 이제 더불어 큰 진리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었소.”
☞ 望洋之歎 (망양지탄, wàngyángzhītàn)
관련 한자어
동의어
望洋之嘆(망양지탄) | 亡羊之歎(망양지탄) | 亡羊歎(망양탄) | 亡羊之嘆(망양지탄) | 望洋兴叹(망양흥탄,wàngyángxīngtàn) |
☞ 望洋之歎 (망양지탄, wàngyángzhītàn)
넓은 바다를 바라보고 감탄하다. 남의 훌륭함에 감탄하고 자신의 미흡함을 부끄러워함의 비유. 아득히 먼 옛날 이야기다.
黃河(황하)의 神(신) 河伯(하백)은 늘 황하의 장대한 모습을 보면서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황하 중류의 孟津(맹진)이란 곳에살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멀리 떠나본 적이 없었다.
어느날 아침 태양이 불끈 솟아오르면서 강의 수면이 황금빛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하백은 새삼스레 감탄의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큰 물은 여기 말고 달리 있을 턱이 없지.” 그런데 등 뒤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그건 모르고 하는 말씀입니다.”
뒤돌아보니 늙은 자라였다. “그렇다면 황하보다도 더 큰 물이 있다는 말이냐.” “해가 뜨는 쪽에 北海(북해)라는 곳이 있는데 그 크기가 황하의 몇갑절이나 된답니다.” 하백은 어느날 황하의 물줄기를 따라 해뜨는 동쪽으로 내려가보다가 마침내 북해에 이르렀다.
과연 바라보니 망망한 바다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부끄러워진 하백은 바다를 바라보고 북해신 若(약)을 향해 감탄하면서 말했다(望洋向若而歎曰․망양향약이탄왈).“북해가 엄청 넓다는 말을 들었지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와서 실제로 보지 않았더라면 저의 얕은 소견을 깨닫지 못했을뻔 했습니다.”
그러자 북해신 약은 이렇게 말했다. “우물안 개구리가 바다를 모르는 건 그가 좁은 장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며 여름벌레가 얼음을 모르는 건 그가 여름밖에 알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것은 그들이 상식의 가르침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오. 이제 당신은 좁은 개울에서 나와 큰 바다를 보았으니 이제 더불어 큰 진리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었소.”
☞ 望洋之歎 (망양지탄, wàngyángzhītàn)
관련 한자어
동의어
望洋之嘆(망양지탄) | 亡羊之歎(망양지탄) | 亡羊歎(망양탄) | 亡羊之嘆(망양지탄) | 望洋兴叹(망양흥탄,wàngyángxīngtàn) |
亡羊補牢 (망양보뢰)
亡羊補牢(망양보뢰)
亡 망할 망, 없을 무 | 羊 양 양 | 補 기울 보, 도울 보 | 牢 우리 뢰(뇌) |
양을 잃고서 그 우리를 고친다는 뜻으로, ①실패(失敗)한 후(後)에 일을 대비(對備)함 ②이미 어떤 일을 실패한 뒤에 뉘우쳐도 소용이 없음
It is never too late to mend
중국 전한(前漢) 때의 학자 유향(劉向)이 편찬한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에서 유래되었다.
전국시대, 초나라 경양왕(頃襄王)은 간신들을 중용하고 주색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楚(초)나라 중신인 莊辛(장신)은 어느날 襄王(양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요즘 전하께서 궁 안에서는 왼쪽에 주후를, 오른쪽에 하후를 데리고 계시고 궁 밖에 계실 때에는 언릉군과 수근군이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는데 이 네 사람은 하나같이 음탕하고 방종하여 나랏돈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다가는 나라 재정이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양왕은 화를 벌컥 내며 장신을 꾸짖듯 말했다.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오. 그런 터무니없는 말로 민심을 부추길 작정이오. 혹시 망령이라도 든 게 아니오."
그러나 장신은 조금도 거리낌없이 진언했다.
"분명한 사실인데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습니다. 황공하오나 전하께서는 하루속히 이 일을 시정하시기 바라옵니다. 만약 그대로 가게 된다면 초나라의 앞날은 너무나도 뻔합니다."
迷妄(미망)에 빠져있는 양왕의 귀에 이런 충언이 들어올 턱이 없었다.
장신은 결국 조(趙)나라로 갔는데, 5개월 뒤 진나라가 초나라를 침공하여 양왕은 성양으로 망명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양왕은 그제서야 비로소 장신의 말이 옳았음을 깨닫고 조나라에 사람을 보내 그를 불러들였다. 양왕이 이제 어찌해야 하는지를 묻자 장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토끼를 발견하고서 사냥개를 준비해도 아직 늦지 않고 양이 없어진 다음에 양우리를 고치더라도 늦지 않다[見兎而顧犬 未爲晩也 亡羊而補牢 未爲遲也(망양이보뢰 미위지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탕왕과 무왕은 백 리 땅에서 나라를 일으켰고, 걸왕과 주왕은 천하가 너무 넓어 끝내 멸망했습니다. 이제 초나라가 비록 작지만 긴 것을 잘라 짧은 것을 기우면 수천 리나 되니, 탕왕과 무왕의 백 리 땅과 견줄 바가 아닙니다."
여기서 망양보뢰는 이미 양을 잃은 뒤에 우리를 고쳐도 늦지 않다는 뜻으로 쓰였다. 다시 말해 실패 또는 실수를 해도 빨리 뉘우치고 수습하면 늦지 않다는 말이다. 따라서 부정적인 뜻보다는 긍정적인 뜻이 강하다.
하지만 뒤로 가면서 원래의 뜻과 달리, 일을 그르친 뒤에는 뉘우쳐도 이미 소용이 없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바뀌었다. 한국에서도 전자보다는 후자의 뜻으로 쓰인다. 망우보뢰(亡牛補牢: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와 같은 뜻이며,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사후청심환(死後淸心丸)·실마치구(失馬治廐)·실우치구(失牛治廐)·만시지탄(晩時之歎)과도 뜻이 통한다.
출전
전국책(戰國策)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十日之菊(십일지국) | 失牛治廐(실우치구) | 失馬治廐(실마치구) | 死後淸心丸(사후청심환) | 死後藥方文(사후약방문) | 亡牛補牢(망우보뢰) | 晩時之歎(만시지탄) | 渴而穿井(갈이천정) |
반의어·상대어
有備無患(유비무환) | 安居危思(안거위사) | 曲突徙薪(곡돌사신) | 居安思危(거안사위) |
亡 망할 망, 없을 무 | 羊 양 양 | 補 기울 보, 도울 보 | 牢 우리 뢰(뇌) |
양을 잃고서 그 우리를 고친다는 뜻으로, ①실패(失敗)한 후(後)에 일을 대비(對備)함 ②이미 어떤 일을 실패한 뒤에 뉘우쳐도 소용이 없음
It is never too late to mend
중국 전한(前漢) 때의 학자 유향(劉向)이 편찬한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에서 유래되었다.
전국시대, 초나라 경양왕(頃襄王)은 간신들을 중용하고 주색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楚(초)나라 중신인 莊辛(장신)은 어느날 襄王(양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요즘 전하께서 궁 안에서는 왼쪽에 주후를, 오른쪽에 하후를 데리고 계시고 궁 밖에 계실 때에는 언릉군과 수근군이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는데 이 네 사람은 하나같이 음탕하고 방종하여 나랏돈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다가는 나라 재정이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양왕은 화를 벌컥 내며 장신을 꾸짖듯 말했다.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오. 그런 터무니없는 말로 민심을 부추길 작정이오. 혹시 망령이라도 든 게 아니오."
그러나 장신은 조금도 거리낌없이 진언했다.
"분명한 사실인데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습니다. 황공하오나 전하께서는 하루속히 이 일을 시정하시기 바라옵니다. 만약 그대로 가게 된다면 초나라의 앞날은 너무나도 뻔합니다."
迷妄(미망)에 빠져있는 양왕의 귀에 이런 충언이 들어올 턱이 없었다.
장신은 결국 조(趙)나라로 갔는데, 5개월 뒤 진나라가 초나라를 침공하여 양왕은 성양으로 망명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양왕은 그제서야 비로소 장신의 말이 옳았음을 깨닫고 조나라에 사람을 보내 그를 불러들였다. 양왕이 이제 어찌해야 하는지를 묻자 장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토끼를 발견하고서 사냥개를 준비해도 아직 늦지 않고 양이 없어진 다음에 양우리를 고치더라도 늦지 않다[見兎而顧犬 未爲晩也 亡羊而補牢 未爲遲也(망양이보뢰 미위지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탕왕과 무왕은 백 리 땅에서 나라를 일으켰고, 걸왕과 주왕은 천하가 너무 넓어 끝내 멸망했습니다. 이제 초나라가 비록 작지만 긴 것을 잘라 짧은 것을 기우면 수천 리나 되니, 탕왕과 무왕의 백 리 땅과 견줄 바가 아닙니다."
여기서 망양보뢰는 이미 양을 잃은 뒤에 우리를 고쳐도 늦지 않다는 뜻으로 쓰였다. 다시 말해 실패 또는 실수를 해도 빨리 뉘우치고 수습하면 늦지 않다는 말이다. 따라서 부정적인 뜻보다는 긍정적인 뜻이 강하다.
하지만 뒤로 가면서 원래의 뜻과 달리, 일을 그르친 뒤에는 뉘우쳐도 이미 소용이 없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바뀌었다. 한국에서도 전자보다는 후자의 뜻으로 쓰인다. 망우보뢰(亡牛補牢: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와 같은 뜻이며,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사후청심환(死後淸心丸)·실마치구(失馬治廐)·실우치구(失牛治廐)·만시지탄(晩時之歎)과도 뜻이 통한다.
출전
전국책(戰國策)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十日之菊(십일지국) | 失牛治廐(실우치구) | 失馬治廐(실마치구) | 死後淸心丸(사후청심환) | 死後藥方文(사후약방문) | 亡牛補牢(망우보뢰) | 晩時之歎(만시지탄) | 渴而穿井(갈이천정) |
반의어·상대어
有備無患(유비무환) | 安居危思(안거위사) | 曲突徙薪(곡돌사신) | 居安思危(거안사위) |
莫须有 (막수유, mòxūyǒu)
莫须有(막수유)
莫须有(mòxūyǒu)
莫 없을 막 | 須 마땅히 수,수염 수 | 有 있을 유 |
(죄명을) 날조하다. 뒤집어씌우다.
어쩌면 있을 것이다. 아마 있을 것이다. 《송사·악비전(宋史·岳飛傳)》에서 간신 진회(秦檜)가 악비(岳飛)를 반역죄로 무고했는데, 한세충(韓世忠)이 그 증거가 있는지를 묻자 진회(秦檜)가 ‘莫须有’라고 대답한 고사에서 유래함.
宋史(송사) : 岳飛傳(악비전) |
莫须有(mòxūyǒu)
莫 없을 막 | 須 마땅히 수,수염 수 | 有 있을 유 |
(죄명을) 날조하다. 뒤집어씌우다.
어쩌면 있을 것이다. 아마 있을 것이다. 《송사·악비전(宋史·岳飛傳)》에서 간신 진회(秦檜)가 악비(岳飛)를 반역죄로 무고했는데, 한세충(韓世忠)이 그 증거가 있는지를 묻자 진회(秦檜)가 ‘莫须有’라고 대답한 고사에서 유래함.
宋史(송사) : 岳飛傳(악비전) |
馬生角 (마생각, mǎshēngjué)
馬生角(마생각)
马生角(mǎshēngjué)
馬 말 마 | 生 날 생 | 角 뿔 각,사람 이름 록(녹),꿩 우는 소리 곡 |
말 머리에 뿔이 난다는 뜻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을 비유(比喩)해 이르는 말이다.
'史記(사기) 刺客列傳(자객열전)'에 나오는 이야기로 '하늘에서 조[粟]가 비처럼 내리고, 말에 뿔이 난다[天雨粟馬生角]'고 표현하고 있다.
사기의 주석서인 史記索隱(사기색은)에는 烏頭白馬生角(오두백마생각)이라고 나온다.
전국시대 연(燕)나라에 태자 단(丹)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일찍이 조(趙)나라에 인질로 가 있었는데, 그때 그곳에서 출생한 진왕(秦王) 정(政:후의 진시황)과 가깝게 지냈다. 그 후 단은 인질이 풀려 조나라로 돌아왔다가, 정이 진왕으로 즉위하면서 이번에는 진에 인질로 가게 되었다. 당시는 강력한 진을 필두로 전국 7웅이 합종(合從), 연횡(連橫)을 번갈아 하면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태자가 인질로 가는 경우가 흔했다. 단은 진으로 가면서, 조나라에서 같이 불우한 시절을 보낸 진왕 정을 믿었는데, 진왕은 단을 좋게 대우해 주지 않았다.
진왕의 무례에 화가 난 단은 분개하여 본국으로 돌려 보내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자 진왕이 말했다.
"그러지. 까마귀의 머리가 희어지고, 말에 뿔이 나거든[烏頭白 馬生角] 돌려 보내 주지."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으므로 태자 단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한다. 혹은 이때 정말로 까마귀의 머리가 희어지고 말머리에도 뿔이 났다고 하기도 한다.
후일 단은 진을 탈출하여 연나라로 돌아와 이때의 원수를 갚으려 하였다. 태자 단은 자객 형가(荊軻)를 보내 진왕을 죽이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이 일로 격노한 진왕의 침입을 자초하게 되었다. 결국 연나라는 수도 계성을 함락당하고, 산둥[山東]으로 밀렸다가 진의 계속된 추격으로 결국 멸망하게 되었다. 진왕 정이 중국을 통일하고 진시황이 된 것은 연이 멸망한 이듬해이다.
오늘날에도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비유할 때 까마귀의 머리가 하얗게 되고 말에 뿔이 난다고 한다.
史記(사기)와 史記索隱(사기색은)
太史公曰:世言荊軻,其稱太子丹之命,「天雨粟,馬生角」也,〔一〕太過。又言荊軻傷秦王,皆非也。始公孫季功、董生與夏無且游,具知其事,為余道之如是。自曹沫至荊軻五人,此其義或成或不成,然其立意較然,〔二〕不欺其志,名垂後世,豈妄也哉!
〔一〕索隱燕丹子曰:「丹求歸,秦王曰『烏頭白,馬生角,乃許耳』。丹乃仰天歎,烏頭即白,馬亦生角。」風俗通及論衡皆有此說,仍云「廄門木烏生肉足」。
〔二〕索隱較,明也。
참조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天雨粟馬生角(천우속마생각,tiānyǔsù-) | 烏頭白馬生角(乌头白马生角,오두백마생각,wūtóubái-) |
史記(사기) : 刺客列傳(자객열전) | 史記索隱(사기색은) |
马生角(mǎshēngjué)
馬 말 마 | 生 날 생 | 角 뿔 각,사람 이름 록(녹),꿩 우는 소리 곡 |
말 머리에 뿔이 난다는 뜻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을 비유(比喩)해 이르는 말이다.
'史記(사기) 刺客列傳(자객열전)'에 나오는 이야기로 '하늘에서 조[粟]가 비처럼 내리고, 말에 뿔이 난다[天雨粟馬生角]'고 표현하고 있다.
사기의 주석서인 史記索隱(사기색은)에는 烏頭白馬生角(오두백마생각)이라고 나온다.
전국시대 연(燕)나라에 태자 단(丹)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일찍이 조(趙)나라에 인질로 가 있었는데, 그때 그곳에서 출생한 진왕(秦王) 정(政:후의 진시황)과 가깝게 지냈다. 그 후 단은 인질이 풀려 조나라로 돌아왔다가, 정이 진왕으로 즉위하면서 이번에는 진에 인질로 가게 되었다. 당시는 강력한 진을 필두로 전국 7웅이 합종(合從), 연횡(連橫)을 번갈아 하면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태자가 인질로 가는 경우가 흔했다. 단은 진으로 가면서, 조나라에서 같이 불우한 시절을 보낸 진왕 정을 믿었는데, 진왕은 단을 좋게 대우해 주지 않았다.
진왕의 무례에 화가 난 단은 분개하여 본국으로 돌려 보내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자 진왕이 말했다.
"그러지. 까마귀의 머리가 희어지고, 말에 뿔이 나거든[烏頭白 馬生角] 돌려 보내 주지."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으므로 태자 단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한다. 혹은 이때 정말로 까마귀의 머리가 희어지고 말머리에도 뿔이 났다고 하기도 한다.
후일 단은 진을 탈출하여 연나라로 돌아와 이때의 원수를 갚으려 하였다. 태자 단은 자객 형가(荊軻)를 보내 진왕을 죽이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이 일로 격노한 진왕의 침입을 자초하게 되었다. 결국 연나라는 수도 계성을 함락당하고, 산둥[山東]으로 밀렸다가 진의 계속된 추격으로 결국 멸망하게 되었다. 진왕 정이 중국을 통일하고 진시황이 된 것은 연이 멸망한 이듬해이다.
오늘날에도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비유할 때 까마귀의 머리가 하얗게 되고 말에 뿔이 난다고 한다.
史記(사기)와 史記索隱(사기색은)
太史公曰:世言荊軻,其稱太子丹之命,「天雨粟,馬生角」也,〔一〕太過。又言荊軻傷秦王,皆非也。始公孫季功、董生與夏無且游,具知其事,為余道之如是。自曹沫至荊軻五人,此其義或成或不成,然其立意較然,〔二〕不欺其志,名垂後世,豈妄也哉!
〔一〕索隱燕丹子曰:「丹求歸,秦王曰『烏頭白,馬生角,乃許耳』。丹乃仰天歎,烏頭即白,馬亦生角。」風俗通及論衡皆有此說,仍云「廄門木烏生肉足」。
〔二〕索隱較,明也。
참조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天雨粟馬生角(천우속마생각,tiānyǔsù-) | 烏頭白馬生角(乌头白马生角,오두백마생각,wūtóubái-) |
史記(사기) : 刺客列傳(자객열전) | 史記索隱(사기색은) |
萬事休矣 (만사휴의)
萬事休矣(만사휴의)
모든 일이 끝장났다. 곧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해 봐도 대책이 서지 않을 때, 뜻하지 않은 실패로 돌이킬 길이 없는 경우에 사용하는 말이다.
黃巢(황소)의 난이 일어나 천하가 극도로 어지러워지면서 唐(당)나라의 명맥도 점차 황혼을 맞게 된다. 마침내 당나라가 망하고 宋(송)나라가 들어설 때까지 53년 동안 왕조가 갈리기 다섯번, 그 사이 지방에 割據(할거)했던 나라가 10개나 되어 무력에 의한 항쟁과 찬탈이 끊일 새가 없었다.
이 시기를 五代十國(오대십국)이라 일컫는다. 이때의 君主(군주)란 초대에는 무력을 배경으로 군림하지만 2, 3대로 내려가면서 무기력해지기 일쑤였다. 荊南(형남)도 그런 例(예)에 빠질 수 없는 조그마한 나라에 불과했다. 이 나라를 開國(개국)한 사람은 형남절도사였던 고계흥이었고 그의 아들 종회, 종회의 장남 보융, 열번째 아들 保勖(보욱)으로 왕의 世系(세계)가 이어졌다.
고보욱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총애를 받고 자랐다. 그 때문에 세상사람 모두가 자기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줄 아는지 누가 화난 얼굴을 해보여도 으레 싱글벙글 웃어댔다. 그 모습이 얼마나 바보스러웠으랴. 더구나 나중에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형남백성들은 『이제 모든 게 끝났다(萬事休矣)』고 탄식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政事(정사)를 이어받고 맨먼저 한 일은 굉장한 누각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리고 밤낮을 모르는 향락과 荒淫(황음)이 시작되었다. 이런 행각이 끝도 시작도 없이 이어졌으니 나라가 배겨낼 수가 있나. 그가 죽은 후 얼마 못가서 나라는 망하고 만다.
모든 일이 끝장났다. 곧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해 봐도 대책이 서지 않을 때, 뜻하지 않은 실패로 돌이킬 길이 없는 경우에 사용하는 말이다.
黃巢(황소)의 난이 일어나 천하가 극도로 어지러워지면서 唐(당)나라의 명맥도 점차 황혼을 맞게 된다. 마침내 당나라가 망하고 宋(송)나라가 들어설 때까지 53년 동안 왕조가 갈리기 다섯번, 그 사이 지방에 割據(할거)했던 나라가 10개나 되어 무력에 의한 항쟁과 찬탈이 끊일 새가 없었다.
이 시기를 五代十國(오대십국)이라 일컫는다. 이때의 君主(군주)란 초대에는 무력을 배경으로 군림하지만 2, 3대로 내려가면서 무기력해지기 일쑤였다. 荊南(형남)도 그런 例(예)에 빠질 수 없는 조그마한 나라에 불과했다. 이 나라를 開國(개국)한 사람은 형남절도사였던 고계흥이었고 그의 아들 종회, 종회의 장남 보융, 열번째 아들 保勖(보욱)으로 왕의 世系(세계)가 이어졌다.
고보욱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총애를 받고 자랐다. 그 때문에 세상사람 모두가 자기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줄 아는지 누가 화난 얼굴을 해보여도 으레 싱글벙글 웃어댔다. 그 모습이 얼마나 바보스러웠으랴. 더구나 나중에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형남백성들은 『이제 모든 게 끝났다(萬事休矣)』고 탄식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政事(정사)를 이어받고 맨먼저 한 일은 굉장한 누각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리고 밤낮을 모르는 향락과 荒淫(황음)이 시작되었다. 이런 행각이 끝도 시작도 없이 이어졌으니 나라가 배겨낼 수가 있나. 그가 죽은 후 얼마 못가서 나라는 망하고 만다.
磨斧作針 (마부작침, mófǔzuòzhēn)
磨斧作針(마부작침)
磨斧作针(mófǔzuòzhēn)
磨 갈 마 | 斧 도끼 부 | 作 지을 작,저주 저,만들 주 | 針 바늘 침 |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끈기 있게 노력(努力)하면 이룰 수 있음을 비유(比喩)하는 말
남송(南宋) 때 축목(祝穆)이 지은 지리서 《방여승람(方與勝覽)》과 《당서(唐書)》 문예전(文藝傳)에 보이는 말이다. 당(唐)나라 때 시선(詩仙)으로 불린 이백(李白)은 서역의 무역상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을 촉(蜀)에서 보냈다. 젊은 시절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이백은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려 쓰촨성[泗川省] 각지의 산을 떠돌기도 하였다.
이때 학문을 위해 상의산(象宜山)에 들어갔던 이백이 공부에 싫증이 나 산에서 내려와 돌아오는 길에 한 노파가 냇가에서 바위에 도끼를 갈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이백이 물었다. "할머니,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바늘을 만들려고 한단다. " 노파의 대답을 들은 이백이 기가 막혀서 "도끼로 바늘을 만든단 말씀입니까?" 하고 큰 소리로 웃자, 노파는 가만히 이백을 쳐다보며 꾸짖듯 말하였다.
"얘야, 비웃을 일이 아니다. 중도에 그만두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이 도끼로 바늘을 만들 수가 있단다." 이 말을 들은 이백은 크게 깨달은 바 있어 그 후로는 한눈 팔지 않고 글공부를 열심히 하였다고 한다. 그가 고금을 통하여 대시인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이러한 경험이 계기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철저이성침(磨鐵杵而成針), 마철저(磨鐵杵), 철저성침(鐵杵成針), 우공이산(愚公移山)이나 수적석천(水滴石穿)과 같은 의미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끈기를 가지고 계속 노력하면 마침내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유래]
방여승람(方與勝覽) | 당서(唐書) : 문예전(文藝傳)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磨杵成针(마저성침,móchǔchéngzhēn) 쇠공이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다. 끈기 있게 노력하면 무슨 일이든지 다 이룬다. |
點滴穿石(점적천석) 치마의 빗방울이 돌을 뚫는다는 뜻으로, 작은 힘이라도 그것이 거듭되면 예상(豫想)하지 못했던 큰 일을 해냄을 이르는 말. [유래]두목(杜牧)의 야우(夜雨) |
積土成山(적토성산) | 積塵成山(적진성산) | 積水成淵(적수성연) | 積小成大(적소성대) | 愚公移山(우공이산) | 十伐之木(십벌지목) | 水積成川(수적성천) | 山溜穿石(산류천석) | 磨斧作鍼(마부작침) | 磨斧爲針(마부위침) |
참조어 - 도끼와 관련된 고사성어
揭斧入淵(게부입연) 도끼를 들고 못에 들어간다는 뜻으로, 물건(物件)을 사용(使用)하는 데 있어서 전연 쓸데없고 상관(相關)없는 것을 가지고 옴을 이르는 말 |
鬼斧(귀부) 귀신(鬼神)의 도끼라는 뜻으로, 신기(神奇)한 연장, 또는 훌륭한 세공(細工)을 이르는 말 |
得斧失斧(득부실부) 얻은 도끼나 잃은 도끼나 매일반이라는 뜻으로, 얻고 잃음이 없음을 이르는 말 |
磨斧爲針(마부위침)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 아무리 이루기 힘든 일도 끊임없는 노력(努力)과 끈기 있는 인내(忍耐)로 성공(成功)하고야 만다는 뜻 |
磨斧作針(마부작침)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끈기 있게 노력(努力)하면 이룰 수 있음을 비유(比喩)하는 말 |
伐柯(벌가) 도끼 자루감을 도끼로 벤다는 뜻으로, ①진리(眞理)는 눈앞에 있는 것이니, 먼 데서 구(求)할 것이 아니라는 비유(比喩) ②어진 사람을 맞아들이는 데는 어진 사람이 가야한다는 비유(比喩) |
伐性之斧(벌성지부) 천부(天賦)의 양심(良心)을 끊는 도끼라는 뜻으로, 사람의 마음을 탐하게 하여 성명(性命)을 잃게 하는 것, 즉 여색(女色)과 요행(僥倖)을 이르는 말 |
舌疽有斧(설저유부) 혀 아래(밑에) 도끼 들었다는 뜻 |
失斧得斧同(실부득부동) 잃은 도끼나 얻은 도끼나 한가지라는 뜻으로, 주고 받은 것이 같아 손해(損害)도 이익(利益)도 없음을 비유(比喩)해 이르는 말 |
自斧刖足(자부월족)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힘 |
竊鈇之疑(절부지의) 도끼를 훔쳐 갔다고 의심(疑心) 받은 사람이 그 행동(行動)이나 말이 모두 훔쳐간 것처럼 보이나 다른 데서 발견(發見)되어 누명을 벗은 후(後)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는 옛일에서, 공연한 혐의(嫌疑) |
持斧伏闕(지부복궐) 상소(上疏)할 때에 도끼를 가지고 대궐문(大闕-) 밖에 나아가 엎드리던 일. 중난(重難)한 일에 대(對)하여 간할 때에 그 뜻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이 도끼로 죽여 달라는 결의(決意)를 나타냄 |
知斧斫足(지부작족)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뜻으로, 믿는 사람에게서 배신당함을 비유(比喩)해 이르는 말 |
毫毛斧柯(호모부가) 수목(樹木)을 어릴 때 베지 않으면 마침내 도끼를 사용(使用)하는 노력(努力)이 필요(必要)하게 된다는 뜻으로, 화(禍)는 미세(微細)할 때에 예방(豫防)해야 함을 비유(比喩)하는 말로 쓰임 |
磨斧作针(mófǔzuòzhēn)
磨 갈 마 | 斧 도끼 부 | 作 지을 작,저주 저,만들 주 | 針 바늘 침 |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끈기 있게 노력(努力)하면 이룰 수 있음을 비유(比喩)하는 말
남송(南宋) 때 축목(祝穆)이 지은 지리서 《방여승람(方與勝覽)》과 《당서(唐書)》 문예전(文藝傳)에 보이는 말이다. 당(唐)나라 때 시선(詩仙)으로 불린 이백(李白)은 서역의 무역상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을 촉(蜀)에서 보냈다. 젊은 시절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이백은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려 쓰촨성[泗川省] 각지의 산을 떠돌기도 하였다.
이때 학문을 위해 상의산(象宜山)에 들어갔던 이백이 공부에 싫증이 나 산에서 내려와 돌아오는 길에 한 노파가 냇가에서 바위에 도끼를 갈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이백이 물었다. "할머니,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바늘을 만들려고 한단다. " 노파의 대답을 들은 이백이 기가 막혀서 "도끼로 바늘을 만든단 말씀입니까?" 하고 큰 소리로 웃자, 노파는 가만히 이백을 쳐다보며 꾸짖듯 말하였다.
"얘야, 비웃을 일이 아니다. 중도에 그만두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이 도끼로 바늘을 만들 수가 있단다." 이 말을 들은 이백은 크게 깨달은 바 있어 그 후로는 한눈 팔지 않고 글공부를 열심히 하였다고 한다. 그가 고금을 통하여 대시인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이러한 경험이 계기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철저이성침(磨鐵杵而成針), 마철저(磨鐵杵), 철저성침(鐵杵成針), 우공이산(愚公移山)이나 수적석천(水滴石穿)과 같은 의미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끈기를 가지고 계속 노력하면 마침내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유래]
방여승람(方與勝覽) | 당서(唐書) : 문예전(文藝傳) |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磨杵成针(마저성침,móchǔchéngzhēn) 쇠공이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다. 끈기 있게 노력하면 무슨 일이든지 다 이룬다. |
點滴穿石(점적천석) 치마의 빗방울이 돌을 뚫는다는 뜻으로, 작은 힘이라도 그것이 거듭되면 예상(豫想)하지 못했던 큰 일을 해냄을 이르는 말. [유래]두목(杜牧)의 야우(夜雨) |
積土成山(적토성산) | 積塵成山(적진성산) | 積水成淵(적수성연) | 積小成大(적소성대) | 愚公移山(우공이산) | 十伐之木(십벌지목) | 水積成川(수적성천) | 山溜穿石(산류천석) | 磨斧作鍼(마부작침) | 磨斧爲針(마부위침) |
참조어 - 도끼와 관련된 고사성어
揭斧入淵(게부입연) 도끼를 들고 못에 들어간다는 뜻으로, 물건(物件)을 사용(使用)하는 데 있어서 전연 쓸데없고 상관(相關)없는 것을 가지고 옴을 이르는 말 |
鬼斧(귀부) 귀신(鬼神)의 도끼라는 뜻으로, 신기(神奇)한 연장, 또는 훌륭한 세공(細工)을 이르는 말 |
得斧失斧(득부실부) 얻은 도끼나 잃은 도끼나 매일반이라는 뜻으로, 얻고 잃음이 없음을 이르는 말 |
磨斧爲針(마부위침)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 아무리 이루기 힘든 일도 끊임없는 노력(努力)과 끈기 있는 인내(忍耐)로 성공(成功)하고야 만다는 뜻 |
磨斧作針(마부작침)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끈기 있게 노력(努力)하면 이룰 수 있음을 비유(比喩)하는 말 |
伐柯(벌가) 도끼 자루감을 도끼로 벤다는 뜻으로, ①진리(眞理)는 눈앞에 있는 것이니, 먼 데서 구(求)할 것이 아니라는 비유(比喩) ②어진 사람을 맞아들이는 데는 어진 사람이 가야한다는 비유(比喩) |
伐性之斧(벌성지부) 천부(天賦)의 양심(良心)을 끊는 도끼라는 뜻으로, 사람의 마음을 탐하게 하여 성명(性命)을 잃게 하는 것, 즉 여색(女色)과 요행(僥倖)을 이르는 말 |
舌疽有斧(설저유부) 혀 아래(밑에) 도끼 들었다는 뜻 |
失斧得斧同(실부득부동) 잃은 도끼나 얻은 도끼나 한가지라는 뜻으로, 주고 받은 것이 같아 손해(損害)도 이익(利益)도 없음을 비유(比喩)해 이르는 말 |
自斧刖足(자부월족)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힘 |
竊鈇之疑(절부지의) 도끼를 훔쳐 갔다고 의심(疑心) 받은 사람이 그 행동(行動)이나 말이 모두 훔쳐간 것처럼 보이나 다른 데서 발견(發見)되어 누명을 벗은 후(後)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는 옛일에서, 공연한 혐의(嫌疑) |
持斧伏闕(지부복궐) 상소(上疏)할 때에 도끼를 가지고 대궐문(大闕-) 밖에 나아가 엎드리던 일. 중난(重難)한 일에 대(對)하여 간할 때에 그 뜻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이 도끼로 죽여 달라는 결의(決意)를 나타냄 |
知斧斫足(지부작족)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뜻으로, 믿는 사람에게서 배신당함을 비유(比喩)해 이르는 말 |
毫毛斧柯(호모부가) 수목(樹木)을 어릴 때 베지 않으면 마침내 도끼를 사용(使用)하는 노력(努力)이 필요(必要)하게 된다는 뜻으로, 화(禍)는 미세(微細)할 때에 예방(豫防)해야 함을 비유(比喩)하는 말로 쓰임 |
磨斧爲針 (마부위침)
磨斧爲針(마부위침)
磨 갈 마 | 斧 도끼 부 | 爲 하 위, 할 위 | 針 바늘 침 |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 아무리 이루기 힘든 일도 끊임없는 노력(努力)과 끈기 있는 인내(忍耐)로 성공(成功)하고야 만다는 뜻
李白(이백)이 학문(學問)을 도중에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바늘을 만들기 위해 도끼를 갈고 있는 한 노파를 만났다. 그 노파의 꾸준한 노력에 크게 감명을 받은 이백이 다시 산 속으로 들어가 학문(學問)에 힘쓴 결과 학문(學問)을 완성했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磨斧爲鍼(마부위침) | 磨斧爲針(마부위침) | 磨斧作針(마부작침) | 磨斧作鍼(마부작침) | 磨鐵杵而成針(마철저이성침) | 山溜穿石(산류천석) | 水積成川(수적성천) | 十伐之木(십벌지목) | 愚公移山(우공이산) | 積小成大(적소성대) | 積水成淵(적수성연) | 積塵成山(적진성산) | 積土成山(적토성산) | 點滴穿石(점적천석) | 鐵杵成針(철저성침) |
磨 갈 마 | 斧 도끼 부 | 爲 하 위, 할 위 | 針 바늘 침 |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 아무리 이루기 힘든 일도 끊임없는 노력(努力)과 끈기 있는 인내(忍耐)로 성공(成功)하고야 만다는 뜻
李白(이백)이 학문(學問)을 도중에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바늘을 만들기 위해 도끼를 갈고 있는 한 노파를 만났다. 그 노파의 꾸준한 노력에 크게 감명을 받은 이백이 다시 산 속으로 들어가 학문(學問)에 힘쓴 결과 학문(學問)을 완성했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磨斧爲鍼(마부위침) | 磨斧爲針(마부위침) | 磨斧作針(마부작침) | 磨斧作鍼(마부작침) | 磨鐵杵而成針(마철저이성침) | 山溜穿石(산류천석) | 水積成川(수적성천) | 十伐之木(십벌지목) | 愚公移山(우공이산) | 積小成大(적소성대) | 積水成淵(적수성연) | 積塵成山(적진성산) | 積土成山(적토성산) | 點滴穿石(점적천석) | 鐵杵成針(철저성침) |
望梅解渴 (망매해갈)
望梅解渴(망매해갈)
望 바랄 망 | 梅 매화나무 매 | 解 풀 해 | 渴 목마를 갈 |
세설신어(世說新語) 가휼(假譎)편에는 조조(曹操)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위(魏)나라 문제(文帝)의 일화가 실려 있다.
동한(東漢) 말엽에, 조조는 군대를 통솔하여 장수(張繡)를 정벌하러 나섰다. 행군 도중 날씨가 너무 더워 병사들은 지치고 심한 갈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마실 물을 찾지 못해 진군을 멈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조조는 한참 생각하다가 묘책이 떠올랐는지 병사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외쳤다. 조금나 더 가면 앞에 큰 매화나무 숲이 있다[前有大梅林]. 열매도 많이 달려 있는데, 그 맛은 달고도 새콤하다. 이제 갈증을 풀 수 있을 것이다[可以解渴].
병사들은 매화가 있다는 말에 입안에 곧 침이 돌았다. 모두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전진하였는데, 얼마가지 않아 물이 있는 곳에 이르게 되었다.
望梅解渴(매실을 생각하며 갈증을 풀다)은 望梅止渴(망매지갈), 梅林解渴(매림해갈)이라고도 한다. 이는 공상으로 잠시 동안의 평안과 위안을 얻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望梅解渴(망매해갈) | 望梅止渴(망매지갈) | 梅林解渴(매림해갈) |
望 바랄 망 | 梅 매화나무 매 | 解 풀 해 | 渴 목마를 갈 |
세설신어(世說新語) 가휼(假譎)편에는 조조(曹操)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위(魏)나라 문제(文帝)의 일화가 실려 있다.
동한(東漢) 말엽에, 조조는 군대를 통솔하여 장수(張繡)를 정벌하러 나섰다. 행군 도중 날씨가 너무 더워 병사들은 지치고 심한 갈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마실 물을 찾지 못해 진군을 멈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조조는 한참 생각하다가 묘책이 떠올랐는지 병사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외쳤다. 조금나 더 가면 앞에 큰 매화나무 숲이 있다[前有大梅林]. 열매도 많이 달려 있는데, 그 맛은 달고도 새콤하다. 이제 갈증을 풀 수 있을 것이다[可以解渴].
병사들은 매화가 있다는 말에 입안에 곧 침이 돌았다. 모두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전진하였는데, 얼마가지 않아 물이 있는 곳에 이르게 되었다.
望梅解渴(매실을 생각하며 갈증을 풀다)은 望梅止渴(망매지갈), 梅林解渴(매림해갈)이라고도 한다. 이는 공상으로 잠시 동안의 평안과 위안을 얻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望梅解渴(망매해갈) | 望梅止渴(망매지갈) | 梅林解渴(매림해갈) |
罔談彼短 (망담피단)
罔談彼短(망담피단)
罔 없을 망, 그물 망 | 談 말씀 담 | 彼 저 피 | 短 짧을 단 |
자기(自己)의 단점(短點)을 말하지 않는 동시(同時)에 남의 잘못을 욕하지 말아야 함
[출전]
千字文(천자문)
罔 없을 망, 그물 망 | 談 말씀 담 | 彼 저 피 | 短 짧을 단 |
자기(自己)의 단점(短點)을 말하지 않는 동시(同時)에 남의 잘못을 욕하지 말아야 함
[출전]
千字文(천자문)
亡國之音 (망국지음)
亡國之音(망국지음)
亡 망할 망, 없을 무 | 國 나라 국 | 之 갈 지 | 音 소리 음, 그늘 음 |
나라를 망치는 음악(音樂)이란 뜻으로, '저속(低俗)하고 난잡(亂雜)한 음악(音樂)'을 일컫는 말
《예기(禮記)》 악기(樂記)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세상을 다스리는 음악은 편하고 즐거우니 그 정치가 조화를 이루게 되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음악은 원망하고 성내게 하니 그 정치를 어긋나게 한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음악은 슬프고 생각하게 하니 그 백성이 곤궁하니라[治世之音 安以樂 其政和, 亂世之音 怨以怒 其政乖, 亡國之音 哀以思 其民困].
한비자(韓非子) 십과편(十過篇)에는 위(衛)나라 영공(靈公)이 진(晉)나라로 가는 도중에 들었다는 멋있는 음악에 관한 고사가 기록되어 있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위(衛)나라의 영공(靈公)이 진(晉)나라로 가는 도중 복수(濮水) 근방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현묘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음률이 너무나 절묘하여 마치 천상의 소리인 듯했다. 한참을 넋을 잃고 듣던 영공은 수행하던 악사(樂師)에게 그 가사를 베끼고 악보까지도 채록하라 명했다.
진(秦)나라에 도착하자 영공은 그 신묘한 음악을 진(秦)나라의 평공(平公)에게 손수 연주하여 들려주었다.
평공은 다시 진(秦)나라에서 유명한 음악가였던 사광(師曠)을 불러들여 함께 듣도록 했는데, 영공의 음악을 듣고 있던 사광은 깜짝 놀라 영공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것은 망국의 음악입니다[亡國之音]."
놀란 영공과 평공에게 사광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옛날 주나라의 악사인 사연(師延)이라는 유명한 음악가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신성백리(新聲百里)'라는 음탕한 음악을 지어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에게 바쳤습니다. 주왕은 이 음악을 즐기며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무왕(武王)에게 망했고, 사연은 복수까지 도망와서는 거문고를 안고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지금도 복수를 지날 때는 누구나 이 음악을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음악을 망국의 음악이라 하며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亡國之音은 亡國之聲(망국지성)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음란하고 사치스러워 나라를 망칠 음악을 말한다.
사광의 이야기가 끝나자, 평공은 픽 웃었다.
“그럴듯한 이야기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음악에 불과하다. 한낱 음율에 무슨 그런 조화가 따르랴.”
그리고는 사광의 간곡한 반대를 무릅쓰고 사연으로 하여금 ‘신성백리’를 끝까지 탄주하도록 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사광더러 이보다 더 슬픈 노래를 들려 달라고 명했다. 밥보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평공이었다. 왕명에 어쩔 수 없이 거문고를 잡은 사광은 ‘청치(淸徵)’란 곡을 탄주했는데, 갑자기 검은 학들이 남쪽으로부터 날아와 대궐 지붕 용마루에 앉았다. 그것을 본 평왕이 다시 한번 탄주를 명함에 따라 사광이 거문고 줄을 퉁기자 학들은 나란히 열을 지어 섰고, 세 번째 탄주에서는 목을 뽑아 우짖으면서 너울너울 춤을 추기 시작했다.
“좋다! 그보다 더 슬픈 곡을 뜯도록 하라.”
신바람이 난 평공은 그렇게 명했고, 사광은 체념한 듯 ‘청각(淸角)’이란 곡을 들고 나왔다. 그러자 첫 번째 탄주에서 서북쪽으로부터 검은 구름이 몰려왔고, 두 번째 탄주에서는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기왓장과 그릇들이 날아서 깨지고 휘장이 찢어지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 지경에 이르자 아무리 음악을 좋아하는 평공도 혼비백산하여 숨지 않을 수 없었고,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진나라는 삼 년이나 가뭄이 들어 백성들은 무수히 굶어죽었고, 평공도 불치병에 걸려 무진 고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한다.
출전
예기(禮記) 악기편(樂記篇), 한비자(韓非子) 십과편(十過篇)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亡國之聲(망국지성) [출전] 한비자(韓非子) |
靡靡之樂(미미지악) | 亡國(망국)의 음악. 중국 殷(은)나라의 최후 임금인 紂王(주왕)이 師延(사연)에게 시켜서 만든 음악. 망한 나라의 음악. [출전] 淮南子(회남자). |
濮上之音(복상지음) 음란한 노래. 중국 衛(위)나라 靈公(영공)이 晋(진)나라에 가는 중 濮水(복수) 근처에서 이 곡을 들었는데 이것을 平公(평공) 앞에서 연주하게 했더니 師曠(사광)이 亡國(망국) 殷(은)나라의 음악이라 하여 中止(중지)시켰다는 옛일. [출전] 禮記(예기) |
北里之舞(북리지무) 북리는 북비. 음란한 음악. 北鄙之音(북비지음) |
桑間濮上(상간복상) 淫亂(음란)한 음악. 濮水(복수) 가에 있는 뽕나무 숲 사이에서 유행하였으므로 음란한 음악의 대명사가 됨. |
鄭衛桑間(정위상간) | 난세의 음악. 본래는 춘추시대 두 나라의 이름인데 그 나라 노래 소리가 음란하였으므로 인심을 현혹케 하는 음란한 음악을 정위의 소리라고 함. 鄭衛之音(정위지음). |
鄭音(정음) |
亡 망할 망, 없을 무 | 國 나라 국 | 之 갈 지 | 音 소리 음, 그늘 음 |
나라를 망치는 음악(音樂)이란 뜻으로, '저속(低俗)하고 난잡(亂雜)한 음악(音樂)'을 일컫는 말
《예기(禮記)》 악기(樂記)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세상을 다스리는 음악은 편하고 즐거우니 그 정치가 조화를 이루게 되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음악은 원망하고 성내게 하니 그 정치를 어긋나게 한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음악은 슬프고 생각하게 하니 그 백성이 곤궁하니라[治世之音 安以樂 其政和, 亂世之音 怨以怒 其政乖, 亡國之音 哀以思 其民困].
한비자(韓非子) 십과편(十過篇)에는 위(衛)나라 영공(靈公)이 진(晉)나라로 가는 도중에 들었다는 멋있는 음악에 관한 고사가 기록되어 있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위(衛)나라의 영공(靈公)이 진(晉)나라로 가는 도중 복수(濮水) 근방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현묘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음률이 너무나 절묘하여 마치 천상의 소리인 듯했다. 한참을 넋을 잃고 듣던 영공은 수행하던 악사(樂師)에게 그 가사를 베끼고 악보까지도 채록하라 명했다.
진(秦)나라에 도착하자 영공은 그 신묘한 음악을 진(秦)나라의 평공(平公)에게 손수 연주하여 들려주었다.
평공은 다시 진(秦)나라에서 유명한 음악가였던 사광(師曠)을 불러들여 함께 듣도록 했는데, 영공의 음악을 듣고 있던 사광은 깜짝 놀라 영공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것은 망국의 음악입니다[亡國之音]."
놀란 영공과 평공에게 사광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옛날 주나라의 악사인 사연(師延)이라는 유명한 음악가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신성백리(新聲百里)'라는 음탕한 음악을 지어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에게 바쳤습니다. 주왕은 이 음악을 즐기며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무왕(武王)에게 망했고, 사연은 복수까지 도망와서는 거문고를 안고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지금도 복수를 지날 때는 누구나 이 음악을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음악을 망국의 음악이라 하며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亡國之音은 亡國之聲(망국지성)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음란하고 사치스러워 나라를 망칠 음악을 말한다.
사광의 이야기가 끝나자, 평공은 픽 웃었다.
“그럴듯한 이야기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음악에 불과하다. 한낱 음율에 무슨 그런 조화가 따르랴.”
그리고는 사광의 간곡한 반대를 무릅쓰고 사연으로 하여금 ‘신성백리’를 끝까지 탄주하도록 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사광더러 이보다 더 슬픈 노래를 들려 달라고 명했다. 밥보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평공이었다. 왕명에 어쩔 수 없이 거문고를 잡은 사광은 ‘청치(淸徵)’란 곡을 탄주했는데, 갑자기 검은 학들이 남쪽으로부터 날아와 대궐 지붕 용마루에 앉았다. 그것을 본 평왕이 다시 한번 탄주를 명함에 따라 사광이 거문고 줄을 퉁기자 학들은 나란히 열을 지어 섰고, 세 번째 탄주에서는 목을 뽑아 우짖으면서 너울너울 춤을 추기 시작했다.
“좋다! 그보다 더 슬픈 곡을 뜯도록 하라.”
신바람이 난 평공은 그렇게 명했고, 사광은 체념한 듯 ‘청각(淸角)’이란 곡을 들고 나왔다. 그러자 첫 번째 탄주에서 서북쪽으로부터 검은 구름이 몰려왔고, 두 번째 탄주에서는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기왓장과 그릇들이 날아서 깨지고 휘장이 찢어지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 지경에 이르자 아무리 음악을 좋아하는 평공도 혼비백산하여 숨지 않을 수 없었고,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진나라는 삼 년이나 가뭄이 들어 백성들은 무수히 굶어죽었고, 평공도 불치병에 걸려 무진 고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한다.
출전
예기(禮記) 악기편(樂記篇), 한비자(韓非子) 십과편(十過篇)
관련 한자어
동의어·유의어
亡國之聲(망국지성) [출전] 한비자(韓非子) |
靡靡之樂(미미지악) | 亡國(망국)의 음악. 중국 殷(은)나라의 최후 임금인 紂王(주왕)이 師延(사연)에게 시켜서 만든 음악. 망한 나라의 음악. [출전] 淮南子(회남자). |
濮上之音(복상지음) 음란한 노래. 중국 衛(위)나라 靈公(영공)이 晋(진)나라에 가는 중 濮水(복수) 근처에서 이 곡을 들었는데 이것을 平公(평공) 앞에서 연주하게 했더니 師曠(사광)이 亡國(망국) 殷(은)나라의 음악이라 하여 中止(중지)시켰다는 옛일. [출전] 禮記(예기) |
北里之舞(북리지무) 북리는 북비. 음란한 음악. 北鄙之音(북비지음) |
桑間濮上(상간복상) 淫亂(음란)한 음악. 濮水(복수) 가에 있는 뽕나무 숲 사이에서 유행하였으므로 음란한 음악의 대명사가 됨. |
鄭衛桑間(정위상간) | 난세의 음악. 본래는 춘추시대 두 나라의 이름인데 그 나라 노래 소리가 음란하였으므로 인심을 현혹케 하는 음란한 음악을 정위의 소리라고 함. 鄭衛之音(정위지음). |
鄭音(정음) |
麻姑搔痒 (마고소양)
마고소양(麻姑搔痒)
麻 삼 마 / 姑 시어머니 고 / 搔 긁을 소 / 痒 가려울 양
'마고'라는 손톱 긴 선녀가 가려운 데를 긁어 준다는 말로, 일이 뜻대로 됨을 비유한다. 이 말은 '마고파양(麻姑爬痒)'과도 같은 의미이다.
한(韓)나라 환제(桓帝) 때 마고라는 선녀가 있었는데, 하루는 채경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마고의 손톱은 사람의 손톱과는 달리 그 모양이 마치 새 발톱처럼 생겼다. 채경은 마고의 손톱을 보는 순간 마음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만일 등이 가려우면 이 손톱으로 긁으면 좋겠다."
또 다른 선녀 방평(方坪)은 채경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내용을 알고, 사람들을 시켜 그를 끌어다 채찍질을 하도록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마고는 선녀이다. 너는 어찌하여 마고의 손톱으로 등을 긁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느냐?"
[출전]신선전(神仙傳) 마고(麻姑)
[동의어]마고파양(麻姑爬痒)
麻 삼 마 / 姑 시어머니 고 / 搔 긁을 소 / 痒 가려울 양
'마고'라는 손톱 긴 선녀가 가려운 데를 긁어 준다는 말로, 일이 뜻대로 됨을 비유한다. 이 말은 '마고파양(麻姑爬痒)'과도 같은 의미이다.
한(韓)나라 환제(桓帝) 때 마고라는 선녀가 있었는데, 하루는 채경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마고의 손톱은 사람의 손톱과는 달리 그 모양이 마치 새 발톱처럼 생겼다. 채경은 마고의 손톱을 보는 순간 마음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만일 등이 가려우면 이 손톱으로 긁으면 좋겠다."
또 다른 선녀 방평(方坪)은 채경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내용을 알고, 사람들을 시켜 그를 끌어다 채찍질을 하도록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마고는 선녀이다. 너는 어찌하여 마고의 손톱으로 등을 긁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느냐?"
[출전]신선전(神仙傳) 마고(麻姑)
[동의어]마고파양(麻姑爬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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